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36)
낙향문사전-336화(336/494)
336화. 고수들의 산행
산이 높은 만큼 계곡도 깊었다. 일행은 대설산 산맥 깊은 곳, 험한 바위 계곡 가운데 난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을 따라갔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중턱에 있는, 이게 길인가 싶을 정도로 좁은 곳을 가는 일도 흔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조금만 발이 미끄러져도 떨어질 것만 같은 좁고도 험한 길을 작은 말들은 짐을 싣고 잘도 움직여 갔다.
딸랑, 딸랑, 딸랑.
얼어붙은 하얀 계곡 사이로 선두마의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설산 산맥의 높고 가파른 봉우리들은 마치 병풍처럼, 혹은 거대한 벽처럼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열두 필에 달하던 일행의 말은 여섯 필로 줄었다. 사실 열 두 필이나 준비한 건 일행을 태우기 위한 목적이 컸다. 아가씨에 노인, 소년까지 있으니 황 방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건 필요 없는 배려였다. 상황을 파악한 황 방주는 대부분의 짐과 말을 과감히 줄였다. 마을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당문에서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가녀린 혈봉 금사련과 문사 차림의 청년, 손빈뿐이다. 손빈은 걷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행렬 중에 가장 느리다는 것을 깨닫고는 군말 없이 다시 말에 올라탔다.
딸랑, 딸랑.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는 놀랍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대설산 산맥 깊은 곳에 펼쳐진 눈 덮인 계곡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의 세상을 벗어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걷다 보면 경이로운 경치도 어느새 익숙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일반적인 상행에서는 그저 묵묵히 방울 소리에 맞춰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험한 길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큰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빈 일행의 반응은 일반적인 상행과는 달랐다.
“형!”
서린이 상기된 얼굴로 손빈 옆에 내려섰다. 길을 살펴본다며 앞서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그래, 어땠어?”
손빈의 말에 서린이 즐거운 듯 말했다.
“앞쪽은 괜찮아요. 눈으로 막힌 곳도 없고 길이 끊어진 곳도 없어요. 얼음이 좀 두텁게 쌓인 곳이 있었는데, 말들이 지나가기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치워 뒀어요.”
“그래, 고맙다.”
손빈은 서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예전 같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요즘은 서린도 제법 큰 것 같아서 나름 배려를 한 것이다.
서린은 손빈의 칭찬이 기쁜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황 방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활발한 소년, 서린은 놀랍게도 전혀 지치질 않았다.
서린뿐만이 아니다. 가녀린 혈봉 금사련과 문사 청년 손빈 외에는 아무도 힘든 기색조차 없다. 매년 상행을 가는 마방 사람들조차 지치게 마련인 이 길을 가면서 말이다.
“소형제. 내가 말한 곳은 확인해 보았소?”
황 방주가 서린에게 묻는다.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해 주신 대로 있었어요. 신기하던데요? 땅이 따뜻했어요!”
“다행이군. 예전과 변하지 않은 모양이오.”
한겨울에 따뜻한 곳이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 방주는 손빈의 의아한 표정을 알아차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지열인지, 혹은 온천이나 지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곳이 있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겨울 상행을 시도한 것은 아니거든.”
마과두로서는 사실 당연한 일이다. 수십 필의 상행을 이끄는 마과두는 어디서 쉴지, 어디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눈 덮인 겨울이라면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쉴 수 있다니 반갑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행이 아무리 ‘고수’들이라지만 겨울 대설산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꼬박꼬박 쉬어야 했다. 특히 혈봉 금사련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자, 갑시다.”
딸랑, 딸랑.
황 방주가 선두마의 고삐를 잡고 길을 재촉하자 말들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깊은 계곡 사이로 위태롭게 난 길은 대단히 위험했다.
한번은 말이 길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적도 있었는데, 가파른 계곡을 향해 속수무책 추락하는 말을, 놀랍게도 노군이 단번에 뛰어내려 구해 왔다.
아무리 작은 말이라지만 그 엄청난 무게를, 게다가 말에게 무리도 주지 않고 구해 온 것이다.
그 이후로 황 방주는, 적어도 말에 대해서는 노군을 신뢰했다. 지금도 노군은 행렬 중간 즈음에서 말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저벅.
황 방주는 발밑에서 작은 얼음들이 부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힐끔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큰 얼음 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아까 서린이 ‘얼음을 치웠다’더니 이걸 이야기한 것인가 보다. 도구도 없이 혼자 이렇게 하다니, 황 방주는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딸랑, 딸랑.
말들은 별 어려움 없이 걸음을 옮겼다. 문득 ‘이렇게 쉽게 갈 줄 알았으면 거래할 물품이라도 좀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황 방주의 머리를 스쳤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일행은 쉴 만한 곳에 도착했다. 약간 우묵한 바위 그늘 같은 곳이었는데, 바람도 들지 않는 데다 파릇파릇한 풀까지 돋아나 있는 신기한 곳이었다.
“정말 따뜻하네요.”
사수연이 신기한 듯 말했다. 지열인지, 혹은 대자연의 신비인지 몰라도 이곳은 겨울이 비켜 간 듯했다.
황 방주는 익숙한 솜씨로 차를 끓이고 산양 젖으로 만든 덩어리를 넉넉히 퍼 넣어 걸쭉한 수유차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많은 차는 맛이 독특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졌다. 소금에 절인 고기와 곡물 가루를 개어 만든 떡 같은 것을 먹으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음식이든 경건하게 대하는 당월아는 물론이고 서린은 독특한 맛이라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양이 적은지라 마음껏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저 사람들은……. 허억!”
힐끔 사자혁을 쳐다보던 황 방주가 화들짝 놀란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검희가 사수연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 깜짝이야. 살살 좀 나타나지.”
정말로 놀랐는지 황 방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첫날 저녁, 검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황 방주는 그야말로 사색이 될 정도로 놀랐었다.
자기 말로는 영락없이 대설산의 처녀 귀신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하긴 하얀 옷에 머리를 풀어 헤친 검희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손빈도 처음엔 화들짝 놀랐으니까.
“볼 때마다 놀라네. 완전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검희 소저는 좋은 분입니다.”
젊은 아가씨에게 귀신이란 건 심한 말이다. 손빈은 검희의 좋은 점에 대해 말해 주고 싶었다.
“물론 성격이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항상 검을 진지하게 대하는 분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잘 보면 제법 예쁘기도 하지.”
옆에서 수유차를 홀짝이던 노군이 툭 던지듯 말한다.
“하지만 분위기가 저래서야…….”
말하던 노군이 고개를 젓는다. 황 방주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빈도 무어라 할 말이 없다. 노군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분위기는 저쪽도 만만치 않소.”
황 방주가 말하는 ‘저쪽’은 바로 사수연이었다. 그녀는 당월아, 검희와 함께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수연 소저가요?”
손빈은 전혀 의외의 말에 놀랐다. 사수연의 분위기가 무섭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일단, 너무 예쁘오.”
황 방주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건 사실이다. 이곳 대설산 산맥에서도 그녀의 미모는 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감히 쳐다보는 것도 황송할 정도요. 그러니 누가 나서겠소?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미친놈들 아니고서야…….”
그의 말은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알고 보면 ‘강호제일검화’나 ‘파검신녀’라는 명호를 얻은 것도 그런 문제가 하도 많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물론 사수연이 전부 제압해 버리긴 했지만.
“게다가 ‘나 건드리지 마’라는 기운이 팍팍 느껴지지 않소? 과하게 예쁘지, 심하게 고수지, 게다가 싸늘하기까지 하니……. 어지간한 남자라면 근처에도 못 갈 거요.”
‘그런가?’
손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대단히 예쁘다는 건 인정한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손빈도 처음엔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같다는 인상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제법 허술하고 귀여운 구석도 많다. 얼굴도 붉힐 줄 알고, 때로는 눈물 흘리며, 더듬거리거나 당황하기도 한다.
“뭐, 나도 한때는 잘생겼다는 말도 제법 들어 보곤 했소만…….”
황 방주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손빈이 보기에는 아직도 잘생기긴 했다.
“사람은 자기 짝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이오. 사람들의 인기며 칭송이란 건, 지나고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거든.”
염주를 만지는 황 방주의 말은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요. 옳은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손빈은 황 방주의 염주를 보며 물었다.
“그건 서장의 것입니까?”
황 방주는 자신이 쥐고 있던 낡은 염주를 내려다보았다. 염주에 새겨진 문양이나 색이 독특해서 확실히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은 아니다.
“맞소. 불가의 제자는 아니지만 내게는 좀 의미가 있는 것이라서…….”
황 방주는 말을 흐렸다. 손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타인의 원치 않는 과거를 들추는 건 결코 예의 바른 일이 아니니까.
노군과 손빈, 그리고 황 방주는 나란히 앉아 따뜻한 찻잔을 홀짝였다. 어색했던 수유차의 냄새도 이제는 꽤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 * *
대설산 산맥의 기후는 변화무쌍했다. 갑작스레 어두워지며 눈이 쏟아지는 일도, 모든 걸 날려 버릴 것 같은 강풍이 부는 일도 흔했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사방을 온통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휘몰아치다가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새파란 하늘이 나타나기도 했다.
황 방주는 그런 변화를 귀신같이 미리 알아차렸다. 때로는 아늑한 바위틈에서 쉬기도 하고, 때로는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절벽에 바싹 붙어서 피하기도 했다.
그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말 그대로 고수 할아비라도 감당하지 못했을 터였다. 천하의 사자혁과 전대 옥룡도 묵묵히 그의 말을 따랐을 정도니까.
타닥, 타닥.
황 방주가 인도한 장소에서 일행은 털가죽 외투를 덮어쓰고 밤을 보내고 있었다. 피워 놓은 모닥불이 전해 주는 은은한 열기를 느끼며 사람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뜨거운 수유차를 손에 들고 온기를 음미하던 손빈은 문득 노군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응? 뭐가?”
마찬가지로 수유차를 들고 있던 노군이 되묻는다.
“외사 말입니다.”
노군은 피식 웃었다.
“왜? 이제 와서 걱정이 되냐?”
“그건 아닙니다만, 혹시 서원에 무슨 영향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당장 별일은 없을 거다.”
노군이 수유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노군은 은근히 수유차를 좋아했다.
“무제와 전대 옥룡이 다시 나타났으니 오히려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너나 내가 없어도 이상한 생각을 품는 놈은 없을 거다.”
손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생각요? 지금 외사 중에 그럴 분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던 공손세가의 전대 가주는 손빈에 의해 무공을 잃었다. 천수검 능천화는 오직 무제만 상관할 뿐, 외사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외사의 남은 사람들은, 적어도 손빈이 보기에는 특별히 위험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 믿어도 조직은 믿어선 안 된다.”
노군은 나지막이 말했다.
“조직화된 집단은 결국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되고, 개인은 그에서 자유롭지 못해. 특히 외사의 놈들은 소속 집단에 대한 책임이 그 누구보다 큰 놈들이다. 상황이 바뀌면 문파나 가문을 위해 자신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리는 일은 아주 흔하지. 설령 외사의 고수라 해도 말이야.”
손빈은 노군의 말을 이해했다.
외사의 고수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그들 역시 문파나 가문의 존망을 짊어진 자들이다.
보기에는 외사가 무림 위에 군림하는 것 같아도, 상황에 따라 반대로 외사가 흔들리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뭐가 있을까요?”
손빈의 물음에 노군이 어깨를 으쓱했다. 외사를 뒤흔들 정도의 큰일이라는 게 흔할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합니까?”
“뭐, 서찰 한 장 보내 두면 되겠지.”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으며 노군이 말했다.
“서장에 도착하면 잘 왔다고 서찰이나 보내면 된다. 우리가 멀쩡하다는 걸 알면 절대 경거망동은 못 할 테니까.”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제 사자혁과 전대 옥룡이 건재하다는 것은 전대 뇌검이나 전대 패검 역시 확인한 바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면 노군 말대로 외사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혹 그런 상황이 된다 해도 충분한 억제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데 무제는 어디 갔어? 밤마다 안 보이는데, 설마 어디 가서 혼자 뭐 먹는 건 아니겠지?”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군 스스로 ‘황학과 무제만은 진심으로 존경했다’더니, 하는 행동을 보면 존경은커녕 구박만 하는 듯하다.
“달이 밝으니 어디 가서 수련이라도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런 곳에선 영 무리라서…….”
사자혁이라면 어디서든 파월을 휘두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손빈은 다르다. 대설산 산맥은 대단히 높은 지역이라서, 사자혁이나 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고산병으로 크게 고생할 뻔했다.
“그래? 심심한데 나도 부근이나 한 바퀴 돌아보고 올까?”
노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휘적휘적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보면 이곳이 대설산 산맥 한가운데라는 것마저 잊을 정도다.
그렇게 노군이 떠나자 묵묵히 앉아 있던 황 방주가 손빈에게 묻는다.
“서원을 가지고 있소?”
“아, 네. 작은 서원입니다만 제법 좋은 곳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착하거든요.”
황 방주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으면 어떻소? 자기 사업장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오. 서원이라면 전망도 좋고.”
사업장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색했지만 손빈은 그러려니 했다.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황 방주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예전에는 그렇게 성공하고 싶었고, 남들이 못하는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저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오.”
혼잣말 같은 황 방주의 말에 손빈은 공감했다.
예전의 손빈 같으면 동네 서원 같은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하니 말이다.
중얼거리던 황 방주가 문득 물었다.
“헌데 서원 선생이 어쩌다 저런 고수들과 알게 됐소? 난 무림은 잘 모르지만 정말 엄청난 고수들이던데.”
“우연이었습니다.”
손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우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무를 기록할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러니까 개인 서기 같은 거로군.”
황 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슷합니다. 아니, 그냥 그거네요.”
그때는 사자혁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가 자신을 ‘길벗’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는 그래서 기쁘기도 했다.
지금은 다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고, 마음 깊이 그를 존경하고 있으며, 결코 작지 않은 정도 쌓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를 ‘대인’이라고 부르거나 존칭을 사용하는 건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꺼려진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무제’라고 하긴 하지만.
“나도 한때는 사천 상계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소.”
가슴에 건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황 방주가 말했다.
“기대도 컸고 야심도 있었소. 그래서 남들이 못하는 것을 성공시켜 보고 싶었지. 하지만…….”
황 방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결국 모든 건 대설산이 결정하더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것을 바라보며 황 방주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손빈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고통을 어찌 타인이 알 수 있으랴?
지금은 그저 묵묵히 들어 주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의 위로이리라.
말없이 앉아 있는 손빈과 황 방주의 머리 위로, 어둠 속에 잠긴 대설산의 봉우리들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 * *
일행이 겨울 대설산 산맥에 들어온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그동안 일행은 높다란 봉우리들과 깊은 계곡을 지났다.
오늘은 눈 덮인 산 중턱을 따라 조금은 완만한 경사를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마치 거대한 거인 같은 대설산 산맥의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요 며칠 지형이 계속 완만해지는 것 같군요.”
대설산은 여전하다. 그러나 깊은 계곡은 거의 없고 때로는 평탄한 곳도 있었다. 지금 일행이 걷는 길도 조금 가파른 언덕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옆에 거대한 산맥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서장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렇소. 산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땅이 높아진 것이지.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되오. 저 눈 아래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덮여 있으니 오히려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길을 벗어나면 생각도 못 한 위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설산이 언제…….”
쿠르르릉.
불길한 울림이 들렸다. 그건 마치 멀리서 울리는 천둥 같았지만 황 방주의 얼굴이 단번에 사색이 되었다.
“맙소사.”
새파래진 얼굴로 황 방주가 말했다.
“결국 이렇게…….”
“네?”
손빈이 반문했다. 갑자기 황 방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 방주는 고개를 들어 참담한 표정으로 대설산을 올려다보았다.
손빈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의 한 부분이, 거짓말처럼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되는군.”
옆에서 황 방주의 참담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손빈은 돌아보지 못했다.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눈 더미가 곧 엄청난 눈사태를 일으키며 저 멀리서 손빈 일행을 향해 덮쳐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콰과과과과.
“우리는 이제 끝났소.”
허탈한 황 방주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 눈사태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일행을 향해 도도히 쏟아져 내려오는 그 백색의 격류 앞에서, 황 방주의 시선은 절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노군과 손빈과 황 방주가 보고 있을 때 아가씨들이 한 말)
당월아: 저 파란 잎, 먹어도 될까요?
검희: 그거, 써.
사수연: 맞아. 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