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42)
낙향문사전-342화(342/494)
342화. 포탈라궁을 향하여
손빈 일행은 포탈라의 공주와 함께 리탕을 떠났다. 포탈라궁이 있는 수도, 라싸를 향해서였다.
사원의 고위 승려들이 도시 바깥까지 공주를 배웅했는데, 공주는 휘장으로 가린 마차 안에서 몇 마디 감사의 표현을 한 것이 다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사원의 고위 승려들은 감격해 했다.
따각, 따각.
마차를 이용한 여정은 말을 타거나 걷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노군은 늘 그렇듯 마차의 고삐를 잡고 양보하지 않았다.
“하아아.”
뒤에 앉은 손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노군이 힐끗 돌아보더니 피식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손빈으로선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자혁이 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이제 꼼짝없이 손빈 자신의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군은 물론이고 일행 중 누구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손빈만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노군과 함께 마부석에 앉아 있는 황 방주 역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면, 전대 궁주의 딸인가?”
붉은 휘장으로 가린 마차를 힐끗 쳐다보며 노군이 묻는다. 지난밤 공주는 특별한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아마 그녀로서도 사자혁이 한 말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황 방주가 눈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보리심의 주인은 활불이시라니까요? 딸이고 아들이고 없어요. 새로운 보리심의 주인을 세우는 것도 자식이나 후계자가 아니라 환생하신 분을 고위 승려들이 찾아내는 겁니다.”
“그럼 피 한 방울 안 섞였다는 뜻이군. 공주건, 새로운 궁주건.”
노군의 말에 황 방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들 입장에선 상관 안 할 만도 하지요. 본인이 환생해서 돌아오는데 왜 혈연에 얽매이겠습니까?”
듣고 있던 손빈은 정통성이 대단히 중요한 계승 과정에서 정작 혈연이 의미가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환생이란 다시 말하자면 궁주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혈연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물론 전제인 환생을 믿느냐는 별개의 일이지만.
“그럼 공주도 환생을 찾아내는 거냐?”
“그렇습니다. 전대 보리심의 주인께서 문성 공주의 환생을 찾아내신 겁니다.”
“문성 공주?”
갑작스레 튀어나온 명칭에 노군은 물론이고 듣던 손빈도 놀랐다. 문성 공주라는 호칭은 분명 이곳 이름이 아니다.
“오랜 옛날, 당나라의 공주로서 이곳의 왕비가 되신 분이지요. 수많은 서적과 기술자 들은 물론이고 온갖 식물의 종자까지 가져와 이 땅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라싸에 가면 공주류(公主柳)라는 버드나무도 있으니까요.”
단지 정략적인 혼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 비록 당 나라의 공주였지만 그녀는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이었으리라.
손빈은 왜 지금까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그때의 왕국은 멸망했지만 문성 공주는 지금도 포탈라궁의 공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과 자비의 마음으로 인해 바다의 연꽃, 혹은 고통받는 중생의 반려라고도 불리는 분이시지요.”
“이름 한번 거창하군.”
노군이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손빈은 나름 납득할 수 있었다. 지난밤, 포탈라의 공주 가 보여 준 행동엔 분명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아.’
지난밤 일을 생각하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이어지는 황 방주의 말에 손빈은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사실 이곳에서 여성은 승려 되기가 매우 힘듭니다. 다른 건 우리보다 자유로운데, 유독 불가의 승려로서는 인정을 받지 못해요. 아예 여성들의 승단 자체가 없습니다.”
황 방주는 살짝 한숨을 섞으며 말을 이었다. 예컨대 이곳엔 강호의 아미파와 같은 사찰이 없다는 뜻이다.
사실상 종교 국가인 이곳에서 여성이 승려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건, 비록 다른 분야는 자유롭다고 해도 매우 치명적인 제약이다.
“하지만 포탈라의 공주님만은 예외입니다. 공주님은 포탈라의 주인과 동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아예 포탈라궁 자체가 그분을 위해 지어졌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진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를 위해 포탈라궁을 지었다면 그야말로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고위 승려들이 그녀에게 지극한 공경을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손빈은 왜 황 방주가 처음에 ‘공주’라고 통역했는지 이해했다. 그건 나름의 번역이 아니라 본래 호칭이 그랬던 것이다.
“그럼 우리말이나 예법에 익숙한 이유도 문성 공주의 환생이라서 그런 거냐?”
“교육을 받겠지요. 보통 아주 어릴 때 선택되거든요.”
“뭐야, 그게.”
노군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마 전생의 기억을 정말 갖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저, 천룡팔부의 화신이라는 거 말인데요.”
손빈이 물었다. 노군은 고삐를 쥔 채 흘깃 손빈을 보았다.
“그래, 왜?”
“지금 듣다 보니 그저 명호나 호칭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중요한 일 같은데…….”
이곳의 사람들은 환생이나 화신을 실제로, 아주 진지하게 믿고 있다. 그저 관직의 이름이라거나 형식상 붙이는 호칭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사뭇 진지한 손빈의 표정을 보며 노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손빈으로선 심각한 일일 수밖에 없으리라.
“확실히 다르긴 하지. 그냥 직위라든가 호칭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니까.”
화신(化身)이란 신적 존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곧 그의 내면적 본질을 말하는 것이니, 일반적으로 ‘누구의 재래’라며 말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게다가 이들은 실제로 환생을 믿는 이들이 아닌가? 천룡팔부의 화신으로 선언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생각보다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애매하기도 해. 화신은 진신과는 다르거든. 사람이 아니라 짐승, 예컨대 흰 소 같은 걸로 나타나기도 하고 당대에 여럿이 나오기도 하지.”
“네? 여럿이라고요?”
“그러니까 화신이란 진신의 그림자 같은 거라서, 빛에 따라 그림자가 여럿 생기듯이 같은 신의 화신이 다수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지. 심지어는 화신들끼리 싸우기도 한다더군. 뭐, 이건 불가가 아니고 천축교 얘기다만.”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운 이야기다. 노군의 대답에 손빈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옆에 앉은 황 방주가 말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적입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황 방주는 말을 이었다.
“천룡팔부의 화신으로 선언된다는 건, 말하자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종신 위임령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말이 곧 제석천의 뜻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요. 게다가 포탈라 승군의 지휘권을 갖는다는 건…….”
황 방주는 살짝 몸을 떨더니 공주가 탄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를 반쯤 넘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실제로 그럴 리는 없다. 일단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대학승이니, 섭정승이니, 보리심의 주인이니 하는 이들이 버티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보리심의 주인으로부터 인정받은 천룡팔부의 화신이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손빈도 그 심각성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건 군의 통수권은 최후의 보루이니까.
“그게 공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노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세상에 거저 주는 게 어디 있더냐? 결국 자기들을 구해 달라는 말이잖아. 일이 끝나면 토사구팽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토사구팽은 아니라고 손빈은 생각했다. 포탈라궁의 사람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자혁이 버티고 있는데 누가 감히 손빈 일행을 토사구팽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마물들의 변이에 대해서는 포탈라궁에 가면 더 자세히 알려 주겠다고 했지?”
노군의 말에 황 방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공주님께서 포탈라궁을 떠나기 전에 조사를 지시하셨다니, 돌아가면 곧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자기네 일이 급하니 그건 순순히 알려 주겠군.”
노군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마물의 변이라…….’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손빈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포탈라궁이니, 천룡팔부의 화신이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바로 마물의 변이다.
‘천마가 열었다는 나락의 문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땅 어딘가에 나락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일까?’
마차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설원, 그리고 멀리서 둘러싸듯 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설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극히 평화로운 광경이지만 마물들의 위협은 그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천룡팔부면 어쩐지 우리랑 비슷……. 크흠.”
노군이 중얼거리다 만다. 손빈은 문득 노군이 지난번에 한 말이 떠올랐다. 첫째가 제석천이요, 둘째가 용이라 천룡팔부(天龍八部)라고도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네.’
사자혁은 현천의 무제다. 그리고 전대 옥룡은 가히 용이라는 별호가 어울리는 자다. 천룡팔부의 첫째와 둘째가 들어맞은 셈이다.
“가만 우리가…….”
손빈은 중얼거리며 일행 중 무공이 뛰어난 이들을 꼽아보았다. 사자혁과 전대 옥룡, 그리고 노군과 서린, 사수연, 당월아, 검희, 그리고 귀견수라가 있다.
‘여덟이네?’
어쩐지 딱 여덟 명이다. 물론 손빈 자신을 넣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여덟이나 되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다니.’
손빈은 새삼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외사의 고수가 여덟이다. 그런데 왜 손빈 자신에게 이런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단 말인가?
물론 이유는 안다. 자신이 ‘돕겠다’라고 말한 탓이다. 말하자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손빈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사자혁은 자신의 말을 거두지 않을 것이고 손빈 역시 그렇게까지 말해 놓고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다.
‘방법은 하나뿐인가?’
결론을 내린 손빈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땅이라도 꺼질 것 같은 긴 한숨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조금 전 생각하던 것이 새삼 궁금해졌다. 천룡팔부와 손빈 일행의 고수 숫자가 같다는 우연 말이다.
“그런데 천룡팔부의 나머지 여섯은 누구지요?”
손빈의 물음에도 노군은 모른 체했다. 대신 황 방주가 손빈에게 대답해 주었다.
“어, 야차와 간다르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인데……. 대부분 반인반마거나, 용을 잡아먹는 사나운 큰 새거나, 뭐든지 먹어치우는 거대한 뱀이거나 그렇소.”
황 방주의 대답을 듣는 순간 손빈은 아차 싶었다. 왜 노군이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손빈이 미처 화제를 돌리기도 전에 순진무구한 서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나는 누구예요? 우리도 귀견수라 형 빼면 천룡팔부처럼 여덟 명이잖아요. 그거 생각한 거죠, 손빈 형?”
서린은 손빈의 생각을 정확히, 물론 구성원은 조금 달랐지만, 알아맞혔다. 하지만 어린 서린은 그 뒷일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도 궁금하네요.”
뒤에 앉아있던 사수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쩐지 그 음성이 싸늘하다.
“저는 누구라고 생각한 걸까요? 손 공자님.”
손빈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사수연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당월아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 저기 무슨 소리인지 잘……. 앗! 저건 뭡니까? 황 방주님.”
더듬거리던 손빈은 문득 설원에 보이는 그림자를 보며 소리쳤다. 무언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이.
하지만 황 방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서장 여우요. 이곳에선 그냥 흔한 짐승인데?”
“그, 그런가요? 아주 표정이 독특한 여우군요.”
“표정?”
황 방주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손빈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두 여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여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특히나 이제부턴 사수연이나 당월아의 심기를 절대 건드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무심히 손빈을 바라보는 여우의 표정이 어찌 보면 득도한 것도 같고, 어찌 보면 한심해하는 것도 같아 보였다. 물론 손빈의 생각이겠지만.
그런 손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수연의 입가에 어느새 따뜻한 미소가 어리고 있는 것을 당월아는 놓치지 않았다. 면사 아래 숨은 당월아의 입술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각, 따각.
그렇게 일행의 마차는 드넓은 서장 고원을 지나 포탈라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 * *
사자혁과 손빈 일행이 서원을 떠난 직후, 전대 뇌검과 전대 패검은 곧 자신들의 세가로 떠나갔다. 섬옥수 오르한과 북해십이비도 얼마 후 북해로 출발했다.
그러나 장강어옹이나 화사는 여전히 서원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장강어옹은 대부분 북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어, 이 잔은 뭐야?”
혁련세화와 함께 설거지를 하던 화사가 못 보던 잔 하나를 들고 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잔이었다.
“이런 게 있었어? 예쁘다. 혹시 어디 깨진 건가?”
서원에선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잔이라 화사는 혹시나 싶어 물을 담아 보았다. 하지만 새는 곳도, 이가 나간 곳도 없다.
“이거 선생님 거야?”
“아니요. 하지만 정말 예쁘네요. 어디서 났어요?”
혁련세화가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잔은 우아한 멋이 풍겨나는 것이 제법 예뻐 보였다.
“찻잔들 구석에 숨어 있었어. 이거 오빠가 쓰던 것도 아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누구 거지? 주인 없으면 나 쓸까?”
화사는 잔이 마음에 든 듯 쓰다듬었다. 그만큼 그 작은 잔은 우아한 멋과 자태가 있었다. 일단 예쁘기도 했고.
“다들 끝났어? 나와서 차라도 함께 할까?”
그때 밖에 있던 노부인 당운영이 부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혁련세화와 화사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차와 과자를 준비해 놓은 것이다.
“어머, 예쁜 잔이네.”
“그렇죠?”
화사가 잔을 두 손으로 잡고 짐짓 요염한 자세로 입술에 가져간다. 속에 든 건 물이지만 마치 향기로운 차나 미주라도 마시는 듯한 모습이다.
“음. 어쩐지 물도 더 맛있는 것 같아.”
그럴 리는 없다. 혁련세화는 헛웃음을 흘렸지만 화사의 심정은 이해했다. 확실히 저 잔은 분위기가 다르니까.
“아.”
문득 노부인 당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았다. 그거…….”
눈을 반짝이는 화사를 보며 노부인 당운영은 말했다.
“전대 뇌검께서 가져오신 거로군.”
“에엑!”
전대 뇌검이면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남궁천이다. 화사는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바로 물을 뱉는 시늉을 했지만 이미 목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이게 남궁 할배가 쓰던 거라고요?”
화사는 전대 뇌검 남궁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원에 오기 전엔 노군과 탈혼도 정도가 그나마 말을 나누던 상대였다.
“아니, 쓰던 건 아니라네.”
노부인 당운영은 당장이라도 잔을 내버리려는 화사에게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
“본래 새로 샀다고 자랑하려고 가져오신 것 같던데, 서원의 찻잔 하나를 만지작거리시더니 그걸 가지고 가셨다더군. 그게 더 마음에 드셨나 봐.”
“누가 그래요?”
“순랑이.”
순랑이라면 바로 노군이다. 화사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다행이라는 듯 화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럼 이제부터 이거 내가 써도 될까요?”
화사는 혁련세화와 노부인 당운영의 눈치를 보았다. 혁련세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요. 나는 그냥 쓰던 찻잔이 더 좋아요.”
주인이 바꿔 간 셈이니 누가 쓰건 상관은 없으리라.
“나도 쓰던 게 좋아. 순랑과 같이 마시던 거라서.”
노부인 당운영도 전혀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말에 화사가 기쁜 듯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넌 내 거닷. 그래도 일단은 팔팔 끓여야지. 랄랄라.”
화사는 노래까지 부르며 그렇게 말했다. 이미 한참 전에 두고 간 찻잔이라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련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저, 다른 소식은 아직 없지요?”
문득 혁련세화가 당운영에게 묻는다. 막연한 질문이었어도 노부인 당운영은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 혁련세화의 얼굴에 떠오른 지울 수 없는 그 쓸쓸함을, 노부인 당운영 역시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작가의 말)
‘사랑하다’의 옛말은 ‘고이다’. 그 본뜻은 ‘생각하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