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5)
낙향문사전-35화(35/494)
제35화. 군림삼왕(君臨三王) 12013.12.31.
우우우웅.
자욱한 안개가 소리마저 덮은 듯 고요한데, 오직 낮은 울음소리만이 퍼져 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철혈권왕이라 한 거구의 사내는 사자혁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체격만큼이나 주먹도 커서 붉은 철갑을 씌운 주먹이 마치 거대한 쇳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시니.”
철혈권왕이 웃었다. 그와 함께 그의 주먹을 감싼 붉은 철갑이 더더욱 붉게 물들었다.
“내가 먼저 예를 올리지.”
후우웅.
“하아!”
그의 철권이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거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가 철권을 내질렀다.
파앙!
붉은 철권은 허공을 가르고 강렬한 파열음을 만들어냈다. 그의 철권은 그저 허공을 가른 것처럼 보였지만, 그 간단한 동작이 일으킨 강렬한 기세는 거침없이 사자혁을 향해 뻗어 나갔다.
콰과과과!
철권의 기세 뒤로 안개가 소용돌이친다. 그 순간, 사수연이 손빈의 허리를 살짝 감는 것과 동시에 뒤로 훌쩍 물러난다.
탓.
“엇.”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수연이 자신을 감싸 안는 바람에 손빈은 조금 당황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시야가 흔들린다.
하지만 사자혁이 한 발을 내디디며 파월을 휘두르는 것을 손빈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 파월에 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것도 손빈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콰앙!
파월이 허공을 가르자 폭음이 터져 나왔다. 철혈권왕의 권격은 파월의 일도에 흩어져 버렸지만 철혈권왕은 오히려 미소를 머금으며 그대로 땅을 박찼다.
거대한 체격의 철혈권왕이 순간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사자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순간적이었다.
그러나 사자혁은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철혈권왕을 향해 파월을 그어 올렸다. 붉은 기세를 뿌리는 철혈권왕의 권이 그에 맞서는 사자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콰아앙!
두 사람의 격돌이 일으킨 진동이 주위에 퍼져 나간다. 사수연은 감탄하듯 나지막이 말했다.
“대단하네요.”
쿵! 쿵!
두 사람의 격돌이 주위를 진동시킨다. 커다란 파월과 붉은 철권이 얽힐 때마다 때로는 폭음이, 때로는 섬뜩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연, 대단하군.’
사수연의 뒤에 서 있던 손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저 사자혁을 상대로 철혈권왕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손빈으로서는 그의 경지를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사자혁의 상대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저런 변화는 매우 독특하네요. 아, 저런 방법이…….”
사수연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대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철혈권왕과 사자혁이 한번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그녀는 나지막이 감탄을 흘린다.
‘역시, 사 소저에게는 보이는 것이 많은가 보군.’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목의 차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똑같은 장면을 똑같이 보면서도 보이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수연은 손빈이 보지도 못하는 것들을, 그리고 그 의미를 분명히 보고 있었다.
사자혁과 동행하며 손빈 스스로도 이젠 제법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수연을 보면 자신이 얼마나 무공이나 무림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독특한 변화라……. 확실히 많이 다르긴 하네.’
확실히 다르다. 상대가 철권을 사용한다는 점도 그랬고, 근접박투에 가까운 방식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전보다 더욱 격렬한 움직임이 허공을 수놓고 있다.
사실 이 비무가 끝난 다음에 전부 기억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적고 싶지만, 지금 붓을 들었다간 정말 봐야 할 것을 놓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말이 도망가지 않도록 고삐를 꽉 쥐고 있는 상황이라 붓을 들 수도 없다.
‘하지만…….’
사수연처럼 변화의 독특함이나 초식의 대단함 같은 건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 대결의 중심에 여전히 사자혁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아무리 현란하고 격렬하다 해도 사자혁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대도, 파월이 만들어내는 궤적도, 그리고 그 근간에 흐르고 있는 현천결 역시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보이는 현상이 더 격렬하고 날카로울 뿐이다.
콰앙!
다시 한 번 폭음이 주위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손빈은 어쩐지 느긋한 마음이 되어 사자혁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받아라.”
철혈권왕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것과 동시에, 그의 철권이 붉은 기세를 뿜어내며 사자혁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의 철권이 사자혁의 코앞에 도달한 순간, 사자혁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콰앙!
철권은 아무도 없는 대지를 내리쳤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땅이 울리고 바닥의 작은 돌들이 세차게 튀어 오른다. 그 철혈권왕의 머리 위에서 흑색 대도 파월이 떨어져 내렸다.
쉬익-. 카앙!
철혈권왕은 두 팔을 교차시켜 파월을 막았다.
쿵!
철혈권왕의 딛고 선 땅이 움푹 들어갔다. 사자혁의 파월과 철혈권왕의 철갑이 서로 이를 마주한 채 나지막이 울고 있었다. 강렬한 사자혁의 시선과 날카로운 철혈권왕의 시선이 허공중에서 첨예하게 얽힌다.
“좋아, 아주 좋아.”
사자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철혈권왕이 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기다림이 헛되지는 않았군. 이 적혈철갑의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런가?”
사자혁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파월이 기세를 더했다.
후우웅!
파월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힘으로 철혈권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버틴다면 마치 그대로 내리눌러 버릴 것처럼
“웃.”
탓.
철혈권왕은 두 팔을 크게 떨쳐 내며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사자혁의 파월이 대지를 직격했다.
쿠웅.
폭음은 없었다. 그러나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철혈권왕이 딛고 선 대지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은은히 진동했다. 사방에서 작은 돌들이 구르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후둑, 투두둑.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사자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파월이 천천히 들리더니 철혈권왕을 똑바로 향했다.
“그러니, 지나가겠다.”
우우웅.
파월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철혈권왕의 표정이 웃음으로 물든다.
“이런 건 정말 오랜만인데?”
철혈권왕이 웃었다.
“뭐랄까, 잘못하면 반하겠는걸.”
잘그락.
철혈권왕은 사자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볍게 손짓했다.
“그럼 어디, 지나가 봐라.”
쉭.
사자혁은 대답 대신 파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동시에 철혈권왕의 기세도 변했다. 그는 두 주먹을 앞으로 모으며 자세를 취했다. 맞닿은 그의 두 주먹이 붉게 물들며 나지막한 울음을 흘려 낸다.
우우웅.
그 울음소리에 답하듯, 사자혁의 파월이 안개를 가르며 커다란 원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사자혁의 파월이 원을 완성하는 순간, 철혈권왕의 강렬한 기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하아!”
콰앙!
폭음 소리와 함께 철혈권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런 그에게 사자혁의 파월일식, 섬전일도가 쏟아져 내렸다.
∴
후우웅.
밀려났던 안개가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사수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방금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수연은 중얼거렸다. 그녀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아직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스락.
그녀의 뒤에 있던 손빈은 품에서 책자와 붓을 꺼냈다. 천에 말아 둔 가는 붓을 꺼내고 묵호로 쓰는 작은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이제 손빈은 자신의 일을 할 때였다.
휘릭, 휙.
손빈의 붓이 책자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손빈은 붓을 쉬지 않으면서 힐끔 철혈권왕을 보았다.
몰려드는 안개 속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대지를 짚고 있었다. 그의 팔을 뒤덮었던 붉은 철권은, 형편없이 부서진 상태로 그 일부만이 팔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그 도는 대체…….”
“파월일식입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사수연의 말에 손빈이 대답했다.
“파월일식?”
사수연이 손빈을 돌아본다. 하지만 손빈은 사수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손빈은 먹이 마르도록 책자 위를 한번 훅, 분 후에 책장을 넘겼다.
“네. 파월일식, 섬전일도라고 합니다.”
사락, 사락.
손빈이 다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수연은 다시 한 번 나지막이 되뇌었다.
“파월일식 섬전일도…….”
되뇌던 사수연의 눈썹이 문득 경련한다.
“파월일식이라면……!”
“네.”
손빈은 당연한 듯한 어조로 답했다.
“파월삼식 중 첫 번째죠. 파월이식은 월광만천이라고 하더군요.”
사락.
붓을 움직이던 손빈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수연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본 적이 있나요?”
“네?”
손빈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파월이식이라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어떤 초식이었죠? 아니, 어떤 도법이었나요? 움직임을 봤어요?”
사수연이 몸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기세에 손빈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할 정도였다.
“아니, 그게 한 번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두 번째는 뭔가 본 것 같긴 한데 잘…….”
봤지만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사실 첫 번째는 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더듬거리며 대답하던 손빈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천도법을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건…….”
사수연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사자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천도법이 아니에요. 저런 초식은 본 적이 없어요.”
손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파월삼식이 현천도법의 일부인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늘 현천도법을 수련할 때도 파월삼식은 없었지.’
사수연을 따라 손빈도 사자혁을 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의 그가 몰려드는 안개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 파월이 안개 속에서도 검은 색으로 번들거린다.
“후후후.”
철혈권왕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한 손으로 대지를 짚은 그는 일어설 생각조차 없는 듯 보였다.
“우습군. 천하에 내 철권으로 부수지 못할 것이 없다 장담했는데.”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붉은 파편에 닿아 있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붉은 철갑은 이제 없었다. 손목 어림부터 팔꿈치까지는 여전했지만, 파월의 섬전일도에 맞섰던 철권 부분은 형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끝이 날 줄은 몰랐군.”
저벅, 저벅.
뒤에서 사자혁이 그에게 다가왔다. 철혈권왕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죽여라.”
그 말에 손빈은 붓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진정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한다면.”
스릉.
사자혁이 파월을 거두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직도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철혈권왕의 긴 눈썹이 움찔하고 경련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자혁을 돌아보았다.
“내가 보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다.”
사자혁이 말했다.
“뜻을 세운 무인은 설령 하늘이라 해도 굴복시키지 못한다. 비록 그 앞에서 산산이 부서질 뿐이라 해도…….”
사자혁의 눈빛은 담담했다. 그의 목소리는 철혈권왕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너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저벅.
사자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사수연과 손빈에게 걸어왔다.
“가자.”
손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와 붓을 정리했다. 사수연의 복잡한 시선이 사자혁을 응시했지만, 사자혁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때였다.
“네가 옳다.”
그건 철혈권왕의 목소리였다. 그가 무릎을 펴고 일어서자 팔에서 철갑의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후드득.
“허나 그분께서 명하신 이상 나는 결코 그분의 뜻을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이 이 땅의 유일한 법이자 절대의 원칙이니까.”
사자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철혈권왕이 말했다.
“너는 이 산에서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사자혁이 말했다.
“죽는 것은, 옥룡이다.”
“네가 그럴 수 있을까? 그분의 능력을 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그가 말하지 않던가?”
싸늘한 시선으로 사자혁이 말했다.
“그를 힘으로 누를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다고.”
“그런가?”
철혈권왕은 웃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우웅.
부서진 그의 철갑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바로 그 순간, 철혈권왕은 중얼거렸다.
“그분을 위해 죽을 수 있겠군.”
콰앙!
폭음과 함께 철혈권왕이 사자혁을 향해 쇄도했다.
‘헉.’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마치 환상처럼 사자혁의 파월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인다 싶었는데, 다음 순간 사수연이 손빈을 막아서며 시야를 가린다.
서걱.
무언가 섬뜩한 소리가 들린 다음, 손빈이 본 것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철혈권왕의 모습이었다.
쿵!
스릉.
사자혁 파월을 거뒀다. 그의 앞에는 거구의 철혈권왕이 쓰러져 있었다. 흐르는 붉은 피가 대지를 물들이듯 천천히 번져 나간다.
“이것이, 너의 대답인가.”
사자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사자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안개 사이로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사수연이 손빈에게 말했다.
“가요.”
손빈은 급히 책자와 붓을 정리하고 말 위에 올라탔다. 사수연이 말을 몇 번 쓰다듬더니 고삐를 쥐고 걷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손빈이 뒤돌아보니, 쓰러진 철혈권왕의 모습은 어느새 안개에 가려 희미해져 있었다.
대지를 적시는 붉은 피도 그저 검은 얼룩처럼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내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앞서 걷는 사자혁의 어깨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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