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57)
낙향문사전-357화(357/494)
357화. 애염명왕의 제안
갑작스러운 사수연의 등장에 애염명왕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사수연의 한기가 애염명왕을 당장이라도 얼려 버릴 듯했기 때문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애염명왕 밑에 깔려 있던 손빈은 놓치지 않았다.
휙.
손빈은 잽싸게 몸을 틀어 후다닥 애염명왕의 품을 빠져나갔다.
“앗!”
놀란 애염명왕이 고개를 돌렸지만 손빈은 이미 그녀의 품을 벗어난 후였다.
애염명왕 아래서 빠져나온 손빈은 급히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애염명왕이 어느새 이것저것 풀어낸 탓에 옷차림도 상당히 흐트러진 상태였다.
“하아.”
애염명왕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손빈은 이미 침상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다급하게 옷자락을 여미고 있었다.
아쉽지만 이미 상황은 틀어졌다. 그것을 깨달은 애염명왕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락.
그녀는 가볍게 몸을 돌려 방금 전까지 손빈을 누르고 있던 침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살짝 다리를 꼬았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애염명왕은 무릎 위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은 침상을 가볍게 짚은 채 사뭇 도도한 눈빛으로 사수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부끄러움이나 미안한 감정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던가?”
그건 서장의 말이었지만 애염명왕은 사수연이 알아들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조금 전 사수연은 분명 서장의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사수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애염명왕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넘실거리는 그녀의 한기 역시 여전하다. 하지만 애염명왕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보면 몰라?”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애염명왕이 답했다.
“막 하려던 참이었잖아.”
그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수연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도 그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면 같이하고 싶어서 그래?”
애염명왕이 문득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도 난, 싫어하지 않는데.”
붉은 입술을 살짝 핥으며 애염명왕이 말했다. 노골적인 도발이었지만 사수연의 눈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나요?”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사수연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에 도리어 애염명왕의 미소가 짙어진다.
“부끄러워? 왜?”
애염명왕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모두가 하는 일인걸? 그리고 이런 거,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고.”
사수연의 아름다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애염명왕은 당당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애염이야. 애욕과 번뇌로써 큰 길로 인도하는 애염. 그러니 이건 내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야. 나 스스로에게든, 혹은 너희에게든 부끄러울 이유는 전혀 없어.”
그녀가 ‘너희’라고 칭한 건 사수연 옆에 당월아가 서 있기 때문이었다.
거침없이 말하던 애염명왕은 문득 사수연과 당월아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너희도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냐? 이 매력적인 남자가 주는 천상의 기쁨을. 안 그래?”
그 말에 사수연과 당월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애염명왕이 기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애염명왕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설마…….”
자신도 모르게 애염명왕이 물었다.
“아직이야?”
자신이 말하고도 애염명왕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들을, 그것도 간다르바의 화신이 그냥 놔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느껴지는 그녀들의 그를 향한 마음은 그야말로 흘러넘칠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새빨개진 사수연의 얼굴과, 보이진 않아도 그리 다를 바 없는 당월아의 반응은 애염명왕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애염명왕은 손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서장의 언어로 말한 그녀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손빈은 눈만 껌뻑이며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다.
‘……정말이라고?’
천하의 애염명왕조차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간다르바의 화신이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검법이나 연주를 통해 손빈이 보여 준 모습은 그야말로 간다르바의 모습 그 자체였다.
혹은 일순간의 육체적 쾌감보다 정신적 교감을 더 중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간다르바다. 결국은 성적인 것으로 귀결하기 마련이라서 어디까지나 전희에 가까운 개념일 뿐이다.
‘어쩌면…….’
애염명왕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무리 간다르바의 화신이라 해도 결국 화신에 불과하다. 손빈 자신이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간다르바의 특성을 억누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혹시 많아?”
문득 애염명왕이 사수연에게 물었다.
“너희처럼 이 남자를 향한 마음이 가득한데도, 정작 이 남자는 손도 대지 않는 여자 말이야.”
여자들은 민감하다. 특히 자신의 남자를 향해 호감을 표시하거나 예쁘게 보이려 하는, 소위 꼬리를 치는 다른 여자들의 행태는 몰라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수연과 당월아의 머릿속에 많은 여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나는 것도.
“……정말이구나.”
자신도 모르게 애염명왕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난처한 기색이 가득한 손빈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조금 전 손빈이 보인 반응을 이제야 애염명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저 전희라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진심 어린 반응이었다.
‘설마 간다르바의 화신이 이럴 줄은…….’
분명 손빈은 간다르바의 화신이다. 대일여래의 빛이 그것을 증명했으니 의심의 여지라곤 없다.
하지만 손빈은 간다르바의 화신이 가진 자연스러운 성향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그가 가진 예의나 규범 같은 것들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애염명왕의 눈동자에 두 여인, 사수연과 당월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측은한 마음이 애염명왕의 가슴에 차올랐다.
“아아, 딱하기도 해라.”
무릇 간다르바의 화신은 널리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게다가 그를 향한 마음으로 가득한 이 여인들은 누구보다 그의 사랑을 받기에 마땅하다.
그 마땅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수연과 당월아에게 애염명왕의 마음이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애염명왕이니까.
“그래, 그랬구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애염명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늘 하룻밤만 그를 내게 맡겨 주지 않겠어? 내가 그를 진짜 남자로 만들어 줄 테니까.”
화악.
사수연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한기 역시 터져 나올 듯 기세를 더했다. 애염명왕의 말이 또 다른 도발, 혹은 조롱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염명왕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애염이야. 잘못된 집착을 끊어 주는 것 또한 내가 할 일이지.”
자신을 방해한 사수연에 대한 애염명왕의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 그녀를 이기거나 깔보려는 마음도 이제는 없다.
애염명왕은 자신의 가슴에 한 손을 얹으며 빛나는 눈동자로 말했다.
“너희가 오늘 밤 그를 내게 맡겨 준다면, 이 남자의 마음을 얽매고 있는 집착을 끊어 줄게. 예의니, 규범이니 하는 쓸데없는 집착들을 전부 말이야.”
사수연은 그녀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면 이 남자는 너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내일 당장이라도 너희를 품어 줄지 모르지.”
당월아가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 단어의 뜻을 사수연에게 말했다. 그리고 사수연은 그제야 애염명왕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상 못 한 애염명왕의 제의에 사수연은 분노의 감정조차 잊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런…….”
“그럴듯한 말이네요.”
당월아가 서장의 언어로 사수연에게 말했다. 사수연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당월아는 특유의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울 뿐이다’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래, 맞아.”
애염명왕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남자들의 욕망을 끌어내는 데는 아주 탁월하지. 상대가 간다르바의 화신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어.”
붉은 입술을 반짝이며 애염명왕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너희는 내게 감사하게 될걸? 이 남자가 너희들에게 천상의 쾌락을 맛보게 해 줄 테니까. 달콤하고도, 격렬하게.”
사수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어린 시절 홀로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웠기에 일반적인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손빈이 자신을 안아 준다는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하, 하지만…….”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당월아가 애염명왕에게 말했다. 사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당월아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월아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일리가 있다는 뜻이다. 사수연은 더욱 혼란스러워져서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거절하겠어.”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당월아가 말했다. 애염명왕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째서? 너희도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거야?”
“집착 같은 건 몰라.”
당월아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손 공자님이 좋아. 누군가 멋대로 바꿔 버리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그 말은 사수연의 마음에 피어오르던 연분홍빛 미혹의 구름을 단번에 흩어 버렸다.
후욱.
사수연의 온몸에서 한기가 일어났다. 그것은 이전처럼 분노로 일렁이는 것도, 당혹함으로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호하고도 지극히 절제된, 단단한 빙벽과도 같은 분명한 결의였다.
“들었죠?”
사수연이 말했다.
“당신의 제안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 이제, 돌아가세요.”
그 말에 애염명왕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사수연과 당월아를 돕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것이 너희의 선택이라면.”
사락.
애염명왕은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드러운 걸음으로 사수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사수연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지켜보던 손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보면 당장이라도 사수연이 손을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수연은 여전히 단호한 눈빛으로 애염명왕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애염명왕 역시 더없이 온화한 시선으로 사수연을 바라보았다.
“너희의 마음은 잘못되지 않았어. 그러니 너희가 선택한 이 길이 부디 행복하기를 기원할게. 그리고…….”
말하던 애염명왕은 시선을 돌려 당월아를 보았다.
“언젠가 너희에게도 사랑스러운 아가들이 태어나기를.”
그 말에 사수연과 당월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애염명왕은 손을 거두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렴. 그리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럴 일은…….”
“정말?”
거절하려는 사수연의 말을 당월아의 목소리가 막았다. 애염명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당월아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수연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순식간에 뺨이 빨갛게 물든다.
“후후, 좋아. 그런 것이라면 기꺼이.”
애염명왕은 흔쾌히 당월아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곤 사수연을 돌아보며 묻는다.
“너는 어때?”
“아, 저, 그…….”
당황하던 사수연은 손빈을 한번 힐끗 보고 나더니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어쩌면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들인지.”
탄식하듯 말하던 애염명왕이 갑자기 사수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사수연이 빠져나오려 했지만 애염명왕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너희가 저 남자를 내게 맡겨 주지 않은 것이 정말로 안타까워.”
애염명왕은 사수연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너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그건 안 돼요!”
사수연이 강하게 말하며 애염명왕의 팔에서 벗어났다. 당월아는 진작에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손 공자님에게 절대 손대지 마세요. 만일 조금이라도…….”
“알았어. 걱정하지 마.”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애염명왕이 말했다. 사수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흐뭇하기 그지없고, 사수연의 목소리에도 이전 같은 날카로움은 이미 없다.
덕분에 영문을 모르게 된 것은 손빈이다. 조금 전까지 한기를 풀풀 풍겨 내며 당장이라도 싸울 듯하던 여자들이 이렇게 친근한 모습을 보이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자들만의 공감대라든가……. 뭐, 그런 건가?’
통역을 해 주던 황 방주가 없는 것이 이토록 아쉬울 수가 없다. 정작 황 방주에게는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이지만.
어쨌든 애염명왕과 사수연, 당월아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저건 오히려 훈훈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모습이 아닌가?
슥.
그때 애염명왕이 문득 고개를 돌려 손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움찔하는 손빈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당신은 어쩔 수 없는 간다르바의 화신이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이렇게나 애타게 하다니…….”
짐짓 얼굴을 굳히며 애염명왕이 말했다.
“그래도 여자를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돼. 알았지?”
손빈은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쩐지 자신을 꾸중하는 듯한 느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사수연이나 당월아가 어딘지 모르게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라는 것도.
결국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것 외에 손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던 애염명왕은 사수연과 당월아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손빈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문득 애염명왕이 부드러운 어조로 사수연과 당월아에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봐.”
가볍게 손을 흔든 애염명왕은 사뿐사뿐 걸어서 멀어져 갔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그제야 손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수연과 당월아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손빈은 다시금 긴장이 온몸을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자신이 해명을 해야 할 차례인 것이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애염명왕과 침상 위에 있었던 이유를, 말해도 과연 믿어줄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그 상황을 말이다.
자박, 자박.
사수연이 손빈을 향해 걸어왔다. 손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수연 소저. 이건…….”
사수연은 손빈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그건 너무나 의외의 말이었다. 놀라는 손빈을 향해 사수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손빈은 눈을 껌뻑껌뻑했다. 지금 사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예전처럼 서린과 함께 주무세요. 그러면 오늘 같은 불상사는 없을 테니까요.”
그제야 손빈은 알아차렸다. 지금 사수연은 손빈의 방에 변고가 생긴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고 사과하는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아, 저기 소저가 사과할 필요는…….”
더듬거리던 손빈은 말을 멈췄다. 문득 사수연이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손빈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쥔 탓이다.
“소, 소저…….”
손빈은 놀란 눈으로 사수연을 바라보았다. 사수연 역시 부끄러운 듯 뺨이 붉게 물들고, 손빈을 마주 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상태였지만, 그래도 손빈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 말 없던 그녀가 가만히 손빈의 손을 놓았다.
갑자기 몰려드는 허전함에 손빈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사수연은 부끄러움을 참고 미소를 지으며 손빈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어요. 손 공자님.”
그 한마디에 손빈은 가슴 가득 따뜻한 기운이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함도, 두려움도, 초조함도 더 이상 없었다.
그저 말 한마디에 이렇게도 가슴이 벅찬 것은 그녀가 바로 사수연이기 때문이리라.
사락.
사수연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조금 전 속삭이듯 말해 준 애염명왕의 조언을 따른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지켜보던 당월아도 작게 고개를 숙여 손빈에게 예를 표한다. 손빈이 엉겁결에 마주 예를 표하자, 사수연과 당월아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얼떨떨해하는 손빈을 뒤에 남기고.
자박, 자박
사수연과 당월아는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사수연이 당월아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사수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저런 손 공자님이 좋아. 변하든 변하지 않든, 그건 손 공자님이 결정할 일이야. 우리가 아니라.”
선택은 손빈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사수연과 당월아는 언제든 그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당월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가만히 말했다.
“이유는 또 있어요.”
“또?”
사수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당월아를 쳐다본다. 당월아는 작은 목소리로 사수연에게 말했다.
“전부 받아 주면, 너무 많아요.”
“아!”
사수연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만일 애염명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예의와 규범에서 벗어난 손빈이 기꺼이 품어 줄 여인은 사수연과 당월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손빈에게 은근히, 혹은 대놓고 연심을 표현한 여인들만 해도 그 수가 적지 않은데, 앞으로의 일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너무 많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다.
“그렇네. 너무 많아.”
조금은 씁쓸한 미소로 사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손빈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정말 간다르바의 화신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다.
“으악! 형,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문득 복도 저편에서 서린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숙소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뭐야, 문짝이 왜 이래? 네 옷차림은 왜 그러냐? 괜찮아?”
당황한 노군의 목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지금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은 아마도 설명을 해야 할 손빈이리라.
“뭐? 그게 뭔 소리야? 취한 사람이 무슨 중요한 용건을 가지고 와?”
복도에 울려 퍼지는 노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수연과 당월아는 자신들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사수연도, 당월아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애염명왕이 가르쳐 줄, 조금은 부끄러운 지식에 대한 기대는 사수연의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애염명왕 선생님의 특별 수업은 여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자가 더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