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62)
낙향문사전-362화(362/494)
362화. 회전(會戰)
서장의 밤하늘은 별이 가득했다.
쏟아질 듯 아름다운 그 별들 아래, 손빈의 군막(軍幕)은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북군은 사흘 후에 도착합니다.”
황 방주가 전령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온몸에 상처와 핏자국이 가득한 전령은 손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북군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지금 북군은 어떻습니까?”
손빈이 물었다.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전령의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손빈도 감히 그의 말을 막지 못할 정도로.
“좋지 않습니다.”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전령은 말을 이었다.
“사방이 마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이 땅의 모든 마물들이 북군을 향해 덤벼드는 것 같았습니다.”
서군보다 북군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고작 사흘 거리를 뒤쳐졌을 뿐인데, 몇 배나 많은 마물들이 북군을 습격했던 것이다.
“마물들을 짓밟으며 진군하고 있으나 북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북군은 반드시 사흘 안에 도착하겠다고, 북방명왕께서 대신장께 그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전령은 피해 규모를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북방명왕이 아예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친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명왕은 처음 예정대로 사흘 안에 도착하겠다고 전했다. 깡마른 북방명왕의 단호한 모습이 손빈의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라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제가 떠나기 전까지는 특별히 전해 온 소식이 없었습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는 서군과 북군을 목표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이 두 군이 무너지고 나면 나머지는 손쉬울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전령은 고개를 저었다.
“상처는 대단치 않습니다. 그보다 전언을 주시면 제가 즉시 북군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황 방주의 통역을 들은 손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들이 대단치 않다니. 아무리 고행에 익숙한 승군이라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당신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습니다.”
손빈은 짐짓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황 방주의 통역을 들은 전령이 즉시 고개를 숙인다.
“지금 당장 치료를 받고 곧 있을 전투를 대비하십시오. 이것은 명령입니다.”
전령은 대신장의 명을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전령이 군막 밖으로 나가고, 손빈은 애염명왕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하지만 계곡 안쪽으로 보낸 정찰대는 소식이 끊겼어.”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애염명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찰대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에 탄 도시의 잔해에서 이걸 발견했어.”
애염명왕이 꺼내 든 것은 작은 금속 통이었다. 서장밀교 특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금속 통이 불빛 아래 빛난다.
“이곳으로 보냈던 탐색대가 남긴 거야. 미리 약속된 석탑 속에 숨겨져 있었지. 물론 그 탑은 무너져 버렸지만.”
그 탐색대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도시의 거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탐욕스러운 마물들이 남긴 것은 피로 물든 옷가지와 소지품 들 정도였다.
서군의 승병들은 죽은 주민들과 탐색대를 위해 향을 피우고 진언을 읊었다. 그것밖에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통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돌돌 말린 종이였다. 이곳 특유의 글자들과 대략적인 계곡의 지형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마교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곳이야.”
애염명왕이 계곡의 한 지점을 짚었다. 작은 서장 문자로 표기된 그곳은 계곡의 가장 깊은 곳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겐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이곳은…….”
아득.
거북한 소리가 애염명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잊혀진 옛 왕국의 겨울 궁이 있던 곳이기도 해.”
말하자면 역사적인 유적에 마교가 근거지를 만든 셈이다.
손빈은 애염명왕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 대한 모욕에 다름없으리라.
듣고 있던 노군도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손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애염명왕을 보며 물었다.
“북군을 기다리겠습니까?”
애염명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잖아.”
“그렇습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명백하게 시간을 벌고 있습니다. 북군이 도착할 때를 기다린다면 달의 성 계곡은 온통 마물들로 뒤덮인 다음이겠지요.”
계곡의 지형을 그린 종이 위에 손빈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바로 잊혀진 옛 왕궁의 겨울 궁전이 있는 곳이자, 마교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장소였다.
“사실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적이 있는지, 그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도 몰라요.”
손가락으로 종이 위를 톡톡 두드리던 손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분명한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포탈라 승군의 이만 군세와 결전을 각오할 정도로 중요한, 어떤 것이 말입니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마물들의 움직임은 단 하나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저들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처럼 꼬리를 자르고 도망하는 대신 이 달의 성 계곡에서 포탈라 승군과 일전을 치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벌고자 한다면 차라리 근거지를 옮기고 숨어드는 것이 더 낫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물들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저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달의 성 계곡 안쪽에, 저들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야.”
애염명왕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열기는 그 미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장의 명은?”
“내일 아침.”
손빈은 애염명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서군은 달의 성 계곡 남쪽 입구로 진군합니다. 방패를 든 중장 보병과 철갑 기마대를 선두로 하여,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고 적을 압박하십시오.”
사락.
애염명왕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했다. 일반적으로 합장을 하는 이곳의 예와는 완연히 다르다.
“존명.”
살짝 달뜬 목소리로 애염명왕은 그렇게 말했다. 황 방주의 통역도 필요 없었던 그 단어는 바로 중원의 언어였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평소보다 요염하게 보인 것은, 군막의 등불 탓일 거라고 손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달의 성 계곡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산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는 넓은 지역이었다.
오랜 시간 풍화된 산들은 누군가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지층의 흔적들이 선명했고, 무너져 내린 흙과 돌이 만들어 낸 완만한 구릉들이 산들 사이로 물결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령 일만의 군세라 해도 흔적조차 없이 삼켜 버릴 것 같은 황량하고 메마른 계곡.
달의 성 계곡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진군!”
뿌우우우.
애염명왕의 명령과 함께 뿔피리가 사방에서 울었다. 그와 함께 포탈라 승군의 일만 군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갑 기병과 중장 보병의 갑옷이 사방에서 소리를 내고, 말과 사람의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완전 무장한 애염명왕 역시 선두에 서서 서군을 이끌었다. 일만의 군세가 진군을 시작하는 그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소도시의 잔해를 뒤로하고 서군은 곧 달의 성 계곡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마물이 계곡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크르르르.
거대한 체구와 초록빛으로 번뜩이는 피부, 붉게 충혈된 눈과 기이하게 찢어진 아가리. 늑대도, 곰도 아닌 형태의 그 마물들은 이미 이 세상의 그 어떤 짐승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마치 산해경에 나오는 전설상의 괴수들과도 같은 그 마물들은 일만 포탈라 승군의 진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서기는커녕 마물들의 붉은 눈동자는 노골적인 적의와 탐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동자였다.
“저주받은 마물들 같으니…….”
애염명왕은 기괴한 형상의 마물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녀 역시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철갑 기마대와 중장 보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탈라 승군은 전의를 불태우며 마물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긴 장창이 햇살아래 날카롭게 번뜩였다.
쿵, 쿠쿵.
일만 서군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초록빛 마물들은 이곳저곳에서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서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르르르릉.
숫자조차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마물들이 밀물처럼 서군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통일된 형태도, 질서도 없이 무작정 덤벼드는 초록빛 마물들의 물결은 그 모습만으로도 끔찍한 공포였다.
“준비!”
애염명왕은 장창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철갑 기병과 중장 보병 들 뒤에 있던 기마대가 즉시 활을 들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마물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순간, 애염명왕이 명했다.
“쏴라!”
투투퉁.
무수한 화살이 하늘을 날았다. 아침 햇살마저 가릴 것 같은 수천의 화살들은 곧 죽음의 비가 되어 마물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콰과곽.
무수한 화살은 단숨에 마물들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흙바닥에 나뒹군 마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물들은 화살이 온몸에 박힌 채로 서군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발사!”
애염명왕이 소리쳤다. 즉시 두 번째 화살의 비가 마물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콰콰곽.
조금 전보다 많은 수의 마물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물들은 여전히 서군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철갑 기마대!”
애염명왕이 창을 쥐며 외쳤다. 마물들이 선두와 접촉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더 화살을 날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기마대가 힘을 발휘하기 위한 거리를 잃게 된다.
“나를 따르라!”
커다란 전마는 즉시 그녀의 명을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일천의 철갑 기마대가 뒤따른다.
두두두두.
달의 성 계곡은 기마대가 본래의 파괴력을 발휘하기에 힘든 지형이었다. 그러나 포탈라 승군의 훈련된 철갑 기마대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마물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크아아아앙
마물들은 땅을 박차며 기마대를 향해 뛰어올랐다. 말 위에 탄 승군의 머리를 단숨에 삼켜 버릴 것 같은 놀라운 도약력이었다.
그러나 포탈라 승군의 날카로운 장창은 쩍 벌어진 마물들의 아가리를 단번에 꿰어 버렸다.
콰과곽.
피와 괴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장창에 찢겨 땅에 나뒹구는 마물들을 뒤따르는 철갑 전마가 짓밟았고, 낙마한 승군이나 쓰러진 전마는 순식간에 마물들의 아가리에 찢겨 나갔다.
“하아!”
애염명왕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장창을 휘둘렀다. 그녀의 창에 어린 날카로운 기세는 기괴한 마물들을 단번에 둘로 해체해 버렸다.
마물들의 피로 그녀의 갑옷과 말이 온통 더럽혀졌지만 그녀는 상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마물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앞으로만 돌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는 결국 마물들 사이에 고립될 뿐이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애염명왕과 그녀가 이끄는 철갑 기마대는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본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덕분에 기마대의 파괴력은 제대로 내지 못했지만, 휘두르는 장창에 죽어 나가는 마물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준비!”
철갑 기마대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부장이 소리쳤다.
“발사!”
애염명왕과 기마대가 안전한 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수천의 화살이 다시 하늘을 날았다.
쏟아져 내리는 죽음의 화살 비 속에서 마물들은 고통스럽게 울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철갑 기마대의 돌격이었다.
콰과과곽.
두 번째 철갑 기마대가 마물들을 휘젓는 사이, 돌아온 애염명왕은 마물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중장 보병들을 독려했다.
“물러서지 마라! 더 세게 밀어 붙여!”
마물들은 짓쳐 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철갑 기마대가 마물들을 휘젓는 것과 별개로, 선두의 중장 보병들은 덮쳐드는 마물 떼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아!”
애염명왕이 기세를 담아 창을 흩뿌렸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그녀의 창은 막 쓰러진 중장 보병을 덮치려던 마물의 머리를 박살냈다.
퍽.
그러나 그 즉시 또 다른 마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든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승군의 창이 마물의 옆구리를 가르고, 검붉은 피가 사방에 쏟아졌다. 그사이 넘어졌던 중장 보병은 일어나 방패를 단단히 쥐었다.
목숨을 구한 셈이지만 안도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또 다른 마물들이 그들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러서지 마라!”
“마물들을 밀어붙여라!”
부장들이 곳곳에서 소리치며 승군을 독려했다. 이제 막 달의 성 계곡 입구로 진입했을 뿐인데도 마물들의 공세는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서군의 일만 군세 역시 물러서지는 않았다. 서군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마물들을 유린하며 달의 성 계곡 안으로 진군해 들어가고 있었다.
“후후.”
애염명왕은 웃음을 흘렸다. 끝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러나 절망이나 공포 대신 희열로 가득했다.
“잘 부탁해, 대신장님.”
대신장 손빈과 그의 귀여운 일행을 떠올리며 애염명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패라도 했다간, 일천 번 정도는 환생해서 따라다니며 빚을 받아 낼 테니까 말이야.”
농담이 아니라는 듯 애염명왕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말을 들어 줄 상대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장 손빈은 그의 일행들과 함께 어젯밤 이곳을 떠나 달의 성 계곡 동북쪽 입구로 향했기 때문이다.
“하아아!”
어느새 짓쳐 드는 또 다른 마물을 향해 애염명왕은 창을 흩뿌렸다. 기세를 담은 창은 초록빛 마물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렸다.
쿵.
마물은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쓰러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역시나 애염명왕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자, 그럼 오랜만에.”
차랑.
애염명왕은 전마에 걸려 있던 두 개의 륜(輪)을 꺼내 들었다. 두 팔로 감싸 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은빛 바퀴가 햇살 아래 예리하게 반짝였다.
“피의 춤을 춰 볼까?”
우우웅.
그 말에 답하듯 은륜이 은은하게 소리를 냈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애염명왕의 붉은 입술이 투구 아래서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 * *
초록빛 마물들은 포탈라 승군이 진입할 수 있는 계곡 아래쪽 길과 구릉에 몰려 있었다.
때문에 황량한 토산 위쪽을 날아가듯 달려가는 그림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탓, 타악.
다섯 명의 그림자는 산 그림자와 어두운 지형 사이로 몸을 숨기며 내달리고 있었다. 사람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도 단번에 가로질렀고, 소리나 기척조차 거의 내지 않았다.
탁.
한 토산 정상에 노군이 내려앉았다. 안쪽이 움푹 들어가서 계곡 아래쪽에 있는 마물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노군이 손을 들어 신호하자 당월아가 사뿐히 내려서고, 손빈을 품에 안은 사수연이 소리도 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서린이 내려앉는다.
‘쉿.’
손가락으로 입을 가려 보인 노군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계곡 아래쪽을 살폈다.
‘득시글하구만.’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계곡 아래쪽은 초록빛 마물들로 가득했다.
‘저것들은 이제껏 보던 놈들과 많이 다른데?’
이 계곡에 있는 마물들은 확실히 이전 마물들과 달랐다. 크기나 형태는 곰과 늑대가 합쳐진 것 같기도 하지만, 가죽이나 네 발은 마치 거대한 도마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사수연의 품 안에서 벗어난 손빈이 노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안겨 온 것이 창피한지, 아니면 사수연의 체향 탓인지 아직도 벌건 얼굴을 하고 있는 손빈은 계곡 아래의 마물을 힐끗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들어 유난히 높은 황토산의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노군 역시 고개를 들어 손빈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후우웅.
버려진 고대 도시의 폐허가 황량한 언덕에 앙상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 고귀하고 부유한 자들이 거주했을 그곳엔 지금은 온통 마물들로만 가득했다.
그러나 손빈과 노군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폐허도, 마물도 아니었다.
폐허를 굽어보듯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 본래 잊혀진 왕궁의 폐허가 보여야 할 그 봉우리 정상엔 오직 검은 안개만이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손빈: (두근두근, 정신 혼미)
사수연: (부끄부끄. 아이 참, 어제 저녁 밥을 너무 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