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68)
낙향문사전-368화(368/494)
368화. 회전(會戰)의 끝
달의 성 계곡은 마물과 승군의 피로 뒤덮여 있었다.
포탈라 승군 일만 군세는 강대한 무력이었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의 숫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공포였다.
콰앙, 크아악, 펑.
마물들의 검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승군들의 목숨이 하나둘씩 스러져 갔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마물들의 적의와 살기 앞에서는 제아무리 일만 포탈라 승군이라 해도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의미 없는 희생은 아니었다.
어느새 포탈라 승군은 달의 성 계곡 깊숙한 곳까지 진군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격!”
두두두두두.
애염명왕의 목소리에 철갑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연이은 전투로 기마대의 피해 역시 쌓여 가고 있었지만, 서장의 강인한 전마(戰馬)들이 일제히 치닫는 돌격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쏴라!”
파바바바박.
화살의 비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마물들이 고통의 단말마를 내지르며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다음! 빨리!”
궁수대를 지휘하는 부장은 화살을 재촉했다. 이제는 화살도 부족해서 이전에 쏘았던 것들을 회수해야 할 정도였지만, 그조차 부러지고 휘어져서 쓸 만한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쏴!”
마물들의 피로 얼룩진 화살이 다시금 허공을 갈랐다.
―크아아앙.
유독 커다한 마물 하나가 중장 보병의 대열을 휘저었다. 육중한 중장 보병들이 이리저리 날아가고 마물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찢는다.
“하아!”
쉬잉.
말 위에서 애염명왕이 던진 은륜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커다란 마물의 목이 거짓말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쿵.
마물의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중장 보병들이 그 피를 그대로 덮어썼다. 그러나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진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탁.
허공을 날아 돌아온 은륜을 잡아채며 애염명왕이 소리쳤다.
“방패를 들어! 창을 겨눠라!”
차차착.
중장 보병은 커다란 방패와 창을 들어 진을 이뤘다. 창과 방패로 이루어진 벽이 마물들의 앞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카아악.
그러나 마물들은 그 벽을 향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서슴없이 몸을 던졌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그저 죽음뿐일지라도 마물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지독한 놈들…….”
애염명왕은 투구 아래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포탈라 승군이 달의 성 계곡에 진입한 이래 토벌한 마물들의 숫자는 이미 수만을 훌쩍 넘었다. 그만큼 승군들의 피해와 누적된 피로도 만만치 않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달의 성 계곡 깊은 곳까지 진군할 수 있었지만, 마물들의 숫자는 아직도 줄어들 줄을 모른다.
“옛 궁의 폐허가 보입니다!”
부장의 목소리에 애염명왕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저건…….”
황토산 봉우리 정상, 옛 왕국의 폐허가 음산한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폐허를 휘감고 도는 그 섬뜩한 안개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창을.”
말 위에 탄 애염명왕이 말하자 뒤를 따르던 부장이 즉시 창을 건넸다.
애염명왕은 창을 들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애염명왕의 손이 창을 흩뿌렸다.
“하아!”
퍼어엉.
창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덤벼들던 마물들을 순식간에 부숴 버렸다.
“모든 승군은 들으라!”
애염명왕의 목소리는 달의 성 계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저곳이 바로 마교의 본거지다! 그리고 바로 저곳에서 우리의 대신장께서 기다리신다!”
슥.
은빛으로 반짝이는 애염명왕의 은륜이 황토산 봉우리의 검은 안개를 향했다. 팔을 곧게 뻗은 그녀의 모습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 전투의 여신과 같았다.
“전군!”
애염명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외쳤다.
“돌격하라! 마물을 짓밟아라!”
와아아아.
포탈라 승군의 외침이 계곡을 진동시켰다. 애염명왕은 철갑 기마대를 이끌고 선두에 나섰다.
두두두두두.
하늘을 찌를 듯한 승군의 사기에 마물들도 주춤한 듯했다. 철갑 기마대와 중장 보병들은 거침없이 황토산을 향해 진군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진군은 계속되지 못했다.
―끄어어어어엉.
섬뜩한 귀곡성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이 세상의 아닌 것 같은 그 소리는 순식간에 포탈라 승군을 뒤덮었다.
히이이이잉
훈련받은 전마들조차 혼란에 빠졌다. 애염명왕은 즉시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자리를 지켜라! 진을 흩트리지 마!”
“명왕 님! 저것을!”
부장의 외침에 애염명왕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검은 안개가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아니 넘쳐흐르는 것을 보았다.
뭉클, 뭉클.
검은 안개는 순식간에 황토산 주위를 뒤덮으며 번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괴기한 부르짖음이 흘러나왔다.
―크르르르르.
그 괴성이 포탈라 승군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검은 안개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의 모습은, 멀리 있는 승군들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이런.’
애염명왕이 이를 악물었다. 승군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진언이 흘러나온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악몽 같은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콰앙.
철갑 기마대의 선두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기마 승군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철갑을 두른 말이 피를 뿌리며 허공에 흩날린다.
―크크크크.
기괴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애염명왕은 고개를 돌렸다. 계곡 양편에 솟은 메마른 산 중턱, 활을 쏘면 능히 닿을 정도의 거리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슥.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검은 그림자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애염명왕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피해라!”
콰아앙.
그러나 애염명왕의 외침은 이미 늦었다. 철갑 기마대의 한복판에서 폭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또다시 승군들의 피가 흩뿌려지는 것을 보며 애염명왕은 이를 갈았다.
“쏴라!”
파바바박.
산 중턱의 검은 그림자에게 날아든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애염명왕의 은륜 역시 섬뜩한 소리를 내며 검은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쉭.
화살 비 사이로 날아간 은륜은 은빛 궤적을 그리며 검은 그림자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와아아아아.
포탈라 승군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환호는 이어지지 못했다.
스륵, 스륵.
목이 잘렸지만 검은 그림자는 쓰러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목에서 뭉클뭉클 솟아오르더니, 어느새 본래의 모습을 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섬뜩하고도 충격적인 광경에 승군들조차 말을 잊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포탈라 승군 위로 쇳소리처럼 거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오늘 너희는.
괴인의 음산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계곡에 울려 퍼졌다. 게다가 그 음성은 이미 하나가 아니었다.
“명왕 님! 저곳에도!”
부장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애염명왕은 이미 보고 있었다. 또 다른 검은 괴인들이 계곡 양편에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이곳에서 죽는다.
포탈라 승군 앞에 모습을 드러낸 네 괴인들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 땅은.
그 섬뜩한 음성에 완연한 조소가 섞여 있음을 애염명왕은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것이 되리라.
―카아아아앙.
귀를 찢는 마물들의 소리가 화답하듯 울려 퍼졌다.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마물들의 울부짖음이 마치 차가운 폭우처럼 승군들을 뒤덮었다.
으득.
애염명왕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검은 안개로 뒤덮인 옛 궁전의 모습은 손빈 일행에게 무언가 문제가 닥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저 검은 그림자들은 노골적으로 마교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먼 옛날, 마교의 권능이었다던 불사의 힘을.
‘역시 그들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명왕 님!”
부장의 외침에 애염명왕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투구를 벗어 버렸다.
사락.
땀으로 얼룩진 아름다운 갈색 피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탐스럽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오랜 전투로 얼굴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있다.
휙.
애염명왕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그래, 어쩌면 여기서 전부 죽을지도 모르겠어.”
이제까지와 달리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지극히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하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죽음 따위, 그저 지극한 도에 이르는 여정에 불과할 뿐이니까. 우리 중에 혹시 죽음이 두려운 자가 있나?”
혼란에 빠졌던 승군들은 그녀의 말에 나지막이 진언을 외웠다. 잠시간의 소란은 사라지고 굳건한 전의가 다시금 포탈라 승군에게서 피어오른다.
“봤지? 그러니까 웃기지도 않는 재주 따위 그만두고…….”
애염명왕이 검은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짐짓 희롱하듯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기세는 어느새 강렬하게 주위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후우우욱.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옷깃이 펄럭인다. 투구를 벗은 애염명왕의 갈색 피부가 점차 짙어지고 있는 것을 철갑 기마대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애염명왕의 분노신이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리 와서, 덤벼 봐!”
그녀의 목소리는 계곡을 뒤흔들 것처럼 울려 퍼졌다. 그 엄청난 기세와 박력은 승군의 전의를 다잡기에 충분했다.
환호도, 외침도 없었다.
포탈라 승군은 굳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건 결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왕과 함께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괴인들에게 있어서 변하는 것은 없었다.
슥.
괴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엄청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앙
그 울부짖음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그 원초적인 공포에 승군들의 창을 쥔 손이 떨릴 정도였다.
다만 애염명왕만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뜻대로 해 주지.
음산한 괴인들의 목소리와 함께 마물들의 파도가 승군을 향해 몰아쳐 왔다.
두두두두두두.
계곡을 울리는 마물들의 괴성은 단숨에 포탈라 승군을 뒤덮어 버릴 듯 몰려왔다. 이제 포탈라 승군들의 피가 계곡을 적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이던 바로 그 순간.
쩡.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렸다. 괴인들은 물론이고 애염명왕마저 순간 충격을 감출 수 없는 소리가.
“무슨…….”
마교의 또 다른 수작인가 싶은 애염명왕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우르르르.
황토산 봉우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끓는 가마처럼 검은 안개를 울컥울컥 쏟아 내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그 광경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오는 그 모습은, 어쩌면 포탈라 승군에게는 더욱 절망적인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물들과 괴인들 역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분명 괴인들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쿠르르르르.
나지막한 진동이 달의 성 계곡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검은 안개를 미친 듯 쏟아 내던 황토산 봉우리가 움찔 흔들렸다.
―크, 크아아아.
갑작스러운 괴인들의 절규조차 애염명왕의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검은 안개를 뚫고 한 줄기 금빛 섬광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번쩍.
그것은 마치 하늘로 솟아오른 빛의 기둥 같았다. 그 빛은 찰나의 순간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지만 승군 중에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쿵, 쿠르릉.
빛의 기둥은 사라졌다. 그리고 승군의 눈앞에서 황토산 봉우리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안 돼!”
애염명왕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조금 전 검은 안개 속에 솟아오른 금빛 섬광은, 분명 이전에 나타났던 손빈의 것과 똑같았다.
그들이, 대신장 손빈과 그 일행이 지금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옛 궁전의 폐허에 있는 것이다.
―크아아앙.
―캐애앵.
―끄아아아아.
애염명왕의 외침을 덮어 버린 것은 마물과 괴인 들의 절규였다.
검은 괴인들은 온몸을 뒤틀며 고통 속에 울부짖더니 마치 구겨지는 것처럼 부서져 나갔다. 잘린 목조차 재생하던 검은 안개가 지금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마물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뒤덮던 살기와 적의가 지금은 온통 절규와 비명으로 뒤덮였다.
“명왕 님…….”
부장은 경악 속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애염명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쿠르르르.
황토산은 지금도 붕괴를 계속하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막대한 양의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흙더미에 깔리는 위험 따윈 상관없이 그들을 찾고 싶었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으득.
하지만 애염명왕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죽어서도 그를 볼 면목이 없으리라.
“포탈라 승군은 명을 받들라!”
애염명왕이 소리쳤다. 기세가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마물과 괴인들의 절규 속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대신장의 명이다!”
승군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륜을 높이 쳐 든 애염명왕은 크게 외쳤다.
“마물들을 짓밟아라! 전군, 진격!”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장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군, 진격하라!”
“전군! 진격!”
두두두두두.
전마의 말발굽이 땅을 울리며 포탈라 승군이 일제히 진격을 시작했다.
예비대도, 순서를 정한 돌격 같은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남아 있는 모든 전력을 다한 진격. 그 충격에 맞설 마물은 이미 없었다.
―카앙, 캐앵.
고통에 몸부림치던 마물들은 철갑 기마대의 말발굽과 날카로운 창날에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기 시작했다.
황토산 봉우리를 뒤덮었던 검은 안개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마물들의 절규가 달의 성 계곡을 가득 채웠다.
그날, 달의 성 계곡에 있던 수만의 마물들은 서군의 말발굽 아래 전멸당했다. 마교의 근거지는 무너져 내렸고 마물들을 쏟아 내던 검은 안개는 흔적조차 없이 흩어졌다.
그러나 포탈라 승군은 승리의 환호를 지르지 못했다.
금빛 섬광으로 마물들의 근원을 소멸시킨 대신장 손빈과 그 일행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그저 위안에 불과했다.
모두의 눈앞에서 거대한 토사와 함께 무너져 내린 황토산의 붕괴에서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으리란 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달의 성 계곡.
달이 뜨는 밤이면 이상향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전설이 있는 이 계곡에, 지금은 슬픔의 진언들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달의 성 계곡에서 금빛 섬광이 빛나던 순간 서장 전역의 사람들은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끝없는 적개심을 보이던 마물들이 순간 괴성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은 마물들의 습격에 고군분투하던 포탈라 북군은 마물들의 변화에 당황했지만, 곧 북방명왕의 지휘 아래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달의 성 계곡에서 서군과 합류한 후에야 이 일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다른 지역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물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 죽어 나갔다. 드넓은 고원 이곳저곳에서 검붉은 마물들의 시체를 찾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그 무시무시하던 마물들이, 마치 버려진 짐승의 사체처럼 널려 있었던 것이다.
가끔 비틀거리며 황량한 곳으로 도망하는 마물들의 모습이 순례자들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음은 명백했다.
마물의 위험이 사실상 끝을 고한 것이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 모든 일이 대신장과 그가 이끄는 포탈라 승군이 가져온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소식은 곧 온 서장을 슬픔에 빠뜨렸다.
그것은 바로 대신장 손빈의 죽음이었다.
따각, 따각.
온통 붉은색으로 칠한 커다란 마차가 천천히 속력을 늦췄다. 그와 함께 마차 앞뒤를 호위하던 일천 기마대 역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일천 기마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비록 지금은 안전하다지만, 이곳은 바로 얼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달의 성 계곡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슥.
마차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작은 체구의 그는 바로 어린 보리심의 주인, 곧 포탈라궁의 궁주였다.
대신장 손빈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급보를 듣자마자 어린 궁주는 즉시 달의 성 계곡으로 직접 찾아갈 것을 천명했다.
위험하다는 고위 승려들의 만류도 듣지 않았다. 보리심의 주인에 걸맞은 행차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덕분에 사대 종파의 고승들은 사흘 뒤에나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저곳인가?”
어린 궁주의 시선은 멀리 보이는 옛 왕국의 폐허를 향하고 있었다.
본래 있던 폐허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는 작은 봉우리만 남아 있는 황토산의 모습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답하며 조용히 일어섰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는 바로 포탈라의 공주였다.
대신장 손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깨어난 후에도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궁주가 달의 성 계곡으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주저 없이 동행을 고집했다.
충격과 슬픔으로 허약해진 그녀를 염려하며 시녀들이 만류했지만 포탈라 공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곳이 바로 잊혀진 옛 왕국의 궁전이 있던 장소이자, 마교의 근거지가 있던 곳입니다.”
포탈라 공주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옛 궁전의 남은 폐허를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중에도 포탈라 공주는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그대로라면 달의 성 계곡에 도착하기도 전에 탈진하여 쓰러질 판이었다.
만일 애염명왕이 극비리에 전한 두 번째 서찰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그러했으리라.
바스락.
어린 궁주는 손에 쥐고 있던, 이곳까지 오는 내내 놓지 않았던 서찰을 들어 올렸다.
친애의 정이 가득한 부드러운 인사말로 시작하는 한 장의 서찰.
날아갈 듯 유려한 필체로 적어나간 그 서찰은, 바로 손빈의 것이었다.
(작가의 말)
“이 서찰은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