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72)
낙향문사전-372화(372/494)
372화. 두 여인의 거래
당문 총괄군사 당화련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정문에 채 이르기도 전에, 말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사박.
모퉁이를 돌아 정문에 이르자 서장에서 온 마방 일행과 접객 부총관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저기 총괄군사님께서 오시는군요.”
당화련을 발견한 접객 부총관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당화련은 사뭇 도도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총괄군사님.”
접객 부총관이 두 손을 모으고 깊숙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옆에 서 있던 서장 마방의 방주도 당화련을 향해 예를 표했다.
“당문의 총괄군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음은 조금 이상했지만 그 모습에선 사뭇 절도가 느껴졌다. 당화련은 그가 단련된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화련은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예에 가볍게 답했다.
상대는 당연히 해야 할, 이름을 밝히는 것조차 하지 않았지만 당화련은 그의 무례를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평범한 마방 방주가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먼저 이것이…….”
서장의 마방 방주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당화련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당문의 정문이 온통 말들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는, 서장의 상마(上馬)들이었다.
“대신장님께 드리는 저희의 작은 예물입니다.”
히히힝.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낯선 상황에 말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말과 예물 들이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말하는 방주의 눈동자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당화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잘못 찾아오신 것은 아닐까요? 저희는 대신장이라는 분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건 일부러 한 말이었다.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서장에서 온 방주는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품 안에서 제법 두툼한 서찰을 꺼내 정중하게 당화련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보시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당화련은 그 서찰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슥.
마방 방주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대단히 가벼운 움직임으로 그는 당화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당화련의 수하가 대번에 경계심을 내비쳤지만 당화련은 눈짓으로 수하를 제지했다.
당화련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방 방주를 바라보았다. 방주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아주 작은, 당화련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당문과 포탈라궁이 무언가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가능한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속삭이듯 그렇게 말한 마방 방주는 당화련이 서찰을 받자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손을 모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소임을 완수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한 마방 방주는 즉시 뒤로 돌아 정문을 향했다. 당화련의 수하가 ‘제지할까요?’라고 묻는 듯 쳐다보았지만 당화련은 고개를 저었다.
서장에서 왔다는 마방 방주는 그렇게 서찰과 말들을 남기고 유유히 당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당화련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방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말들이, 문자 그대로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는 서장의 상마(上馬)들이 말이다.
* * *
“후우우.”
집무실에 앉은 당문의 젊은 총괄군사 당화련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안도의 한숨도, 낙담의 한숨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젠 하다 하다 못해 이런 걸로 날 괴롭히다니.”
분노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당화련이 말했다. 들을 사람은 없었지만 솟구치는 짜증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보내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아주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터졌을 것이라는 그녀의 직감은 옳았다. 다만 알지 못한 것은 그것이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골치 아픈 문제라는 것이다.
“정작 자기도, 월아도 서찰 한 장 안 보내면서……”
서장의 마방 방주가 전한 서찰은 손빈이 쓴 것도, 여동생 당월아가 보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 서찰을 보낸 사람이 서장 밀교의 정점, 포탈라궁의 궁주라는 건 그녀조차 전혀 예상 못 한 충격적인 일이었다.
바스락.
당화련은 눈앞의 서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그 서찰에서 ‘대신장께 보내는 예물’의 내역을 필사한 것이다.
원본인 포탈라궁의 궁주가 보낸 서찰은 그 존재조차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다. 서장밀교에서 극진한 예가 담긴 서찰과 예물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설령 그것이 당문이 아니라 손빈의 것이라 해도, 강호 무림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
뿐이랴? 예전 같으면 관부와 조정에서 나서서 무슨 이상한 죄명을 씌울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많기는 또 좀 많아?”
아득.
이 모든 일들의 원흉, 손빈을 떠올리며 당화련은 이를 갈았다.
서장에서 보낸 것은 어마어마한 말들만이 아니었다. 온갖 진기한 물품들과 밀교의 경전, 탱화 같은 것도 허다했다.
그것들이 전부 ‘대신장’ 손빈을 위한 서장의 예물이었던 것이다. 다만 보물 종류들은 전부 예원으로 보내라 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말이다. 당화련은 서찰에 쓰인 숫자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삼만 필이 넘는다니,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숫자가 나오는 거야?’
서장에서 ‘대신장’께 예물로 보낸 말은 그 수가 삼만 필이 넘었다. 서장에서 조공으로 바치는 말의 규모가 일만 필 정도이니, 삼만 필이라는 건 그야말로 국가 간의 무역에서나 튀어나올 숫자인 것이다.
지금도 백 마리씩 이루어진 말의 행렬이 차마고도를 따라 줄줄이 당문으로 오고 있었다. ‘끝도 없다’는 내정 부총관의 표현은 정말로 정확했던 것이다.
‘이걸 한꺼번에 풀면 아예 시장이 붕괴할 텐데.’
서장의 말은 누구나 탐내는 상마(上馬)다. 차마고도를 오갈 때 쓰는 말과는 달리 전마(戰馬)로서 그 가치는 어디서든 최고를 보장한다.
문제는 그 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벌써 올해 상행을 포기하는 사천 마방들이 속출하고, 시장에 나온 기존의 말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문에 밀려들고 있는 말들이 사천 마방의 경제를 벌써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지비도 문제고…….’
삼만 필에 이르는 말들은 그저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 당문이 아닌 다른 마방이었다면 삼만 필의 말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당문조차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득은커녕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되리라.
물론 천하오대상단에 넘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엄청난 헐값에 넘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거래는 당화련 자신부터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남자, 진짜…….’
이래 놓고도 정작 자신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을 손빈의 표정을 떠올리며 당화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월아의 소식을 듣게 된 건 다행이지만.’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간접적으로나마 여동생 당월아의 안부를 알게 된 것 정도다.
아마도 손빈 일행 역시 서찰을 보냈을 터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개인적인 서신은 언제 올지 기약조차 없다. 왜냐하면 포탈라궁에서 보내는 ‘예물’이, 서장 마방들에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차마고도가 시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붐비고 있다고 하니, 포탈라궁의 예물 덕분에 손빈과 그 일행이 무사함을 알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인 것이다.
“후우우.”
당화련은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요즘은 시간만 나면 늘 여동생 월아와 손빈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총괄군사님.”
집무실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사락.
문이 열리고 수하가 들어와 예를 표했다. 그는 즉시 용건을 말했다.
“두 번째 손님께서 총괄군사님을 뵙기 원하십니다.”
“그녀가?”
당화련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두 번째 손님’이란 바로 경희 공주를 일컫는 말이다.
“왜?”
“용건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당화련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그녀가 아는 한 경희 공주는 별것 아닌 일로 자신을 만나려 할 사람이 결코 아니니까.
“이리로 모실까요?”
“아니, 내가 가겠어.”
어차피 잠깐 산책이라도 하려던 참이었다. 당화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경희 공주와 그녀의 일행은 당문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저 커다란 정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 당문의 진과 기관이 숨어 있는 은밀한 저택이었다.
“공주마마께서는 워낙 존귀한 분이셔서,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는 법 같은 건 모르시나 보군요.”
차 한 잔 받지 못한 당화련이 사뭇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경희 공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은 자네야. 손님인 내게 할 말은 아닐 텐데?”
경희 공주와 당화련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혔다. 당화련의 기세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경희 공주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물러선 사람은 당화련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핍박하는 건, 그 상대가 아무리 짜증 나는 경희 공주라 하더라도, 당화련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저를 청하셨지요?”
당화련은 경희 공주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존경의 뜻 같은 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말이 문제라지?”
경희 공주의 말에도 당화련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일행인 청랑검 위가진이나 시녀 항아는 무능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경희 공주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건 절대 당화련에게 굴복해서가 아니다.
“그래서요?”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어떻게?”
짤막한 당화련의 말은 그녀의 불편한 심경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경희 공주 역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간단해. 팔아넘기는 거지.”
당화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구에게? 말 삼만 필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나요?”
“몰라.”
경희 공주의 답은 의외였다. 당화련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는데, 경희 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말 삼만 필을 사 줄 곳은 알고 있지. 천하의 그 누구보다 큰돈을 가지고 있고, 전마(戰馬)를 끝없이 필요로 하는 곳 말이야.”
당화련의 눈빛에 실망이 깃들었다. 경희 공주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어리석군요. 나라고 그 생각을 못 해 봤을 것 같아요?”
끝없이 전마를 필요로 하고 천하의 그 누구보다 큰돈을 가지고 있는 곳은 바로 조정, 곧 황실이다.
하지만 그곳은 당화련이 일찌감치 제쳐 놓은 곳이기도 했다.
“황실은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곳이에요. 팔기는커녕 전부 빼앗기고 말걸요? 아니, 잘못하면 역모죄를 뒤집어씌울지도 모르지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무슨 짓도 서슴지 않는 집단이 바로 황실이니까요.”
당화련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조정과 황실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얼마 전 황산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황실의 공주 앞에서 감히 할 말은 아니었지만 경희 공주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맞아.”
경희 공주는 당화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면 그렇게 되지. 하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경희 공주는 말했다.
“나는 알아. 조정의 누구에게 접근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 말이야.”
그건 막연한 자신감 정도가 아니었다. 경희 공주의 입가에 떠오른 그 미소는 분명한 확신이었다.
“내게 맡겨. 그 누구보다, 아니 네 상상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일을 성사시켜 줄 테니까.”
단호한 경희 공주의 말에 당화련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당신은 공공연히 신분을 밝힐 처지가 못 될 텐데요?”
공식적으로 경희 공주는 북방에 보내졌다. 조정의 고위 관리에게 신분을 밝히기는커녕 얼굴도 보이면 안 된다.
“내가 황상께 총애받은 것이, 그저 군주라는 내 신분 때문인 것 같아?”
경희 공주는 조소했다.
“난 유능해.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일이 성사되는지 알고 있지. 물론 내가 아름답고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화자찬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하나도 없이 경희 공주는 말했다.
“어떻게 하겠어?”
경희 공주의 눈동자를 마주한 당화련은 나지막이 말했다.
“뭘 원하지요?”
삼만 필에 달하는 전마를 처분하는 것에 대한 대가. 경희 공주는 반드시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괜히 당화련의 문제를 해결해 줄 리는 없을 테니까.
“두 가지야. 첫째, 나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줘.”
당화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을 구속한 기억은 없는데요? 지금도 원하면 언제든 이곳을 나갈 수 있잖아요. 내가 허락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청랑검 위가진이나 시녀 항아가 있으니 경희 공주는 언제든 이곳을 나갈 수 있다.
“그래. 하지만 나는 네 허락을 원해. 왜냐하면…….”
경희 공주가 당화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내 신변을 네게 맡겼으니까.”
당화련은 의외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바로 손빈이다. 즉 경희 공주는 이것이 손빈의 뜻을 거스르고자 함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를 인정하는군요. 의외로.”
“그래.”
가시 돋친 당화련의 말을 경희 공주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내가 인정하는 단 두 사람 중 한 명이야. 그리고 일단은, 내 부마도위기도 하고.”
슬쩍 덧붙이는 듯한 뒷말에 당화련은 살짝 짜증이 솟았지만 지금은 그걸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무얼 할 작정이지요?”
“무엇이든.”
경희 공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어. 다만 그게 무엇이건, 너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스스로를 시험하겠다’는 말은 당화련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그녀 스스로도 같은 갈망을 품고 있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희 공주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 이상할 정도다.
문제는 이것을 허락해도 되는가다.
분명 손빈은 당화련에게 경희 공주를 부탁했다. 그것은 구속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보호의 뜻이겠지만, 적어도 경희 공주의 신변에 대한 감시를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청혜 사태는요?”
청혜 사태는 아미의 젊은 외사 고수다. 그래도 한때나마 사매였던 경희 공주에 대해, 정확히는 그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청혜 사태는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청혜 사태는 아미의 봉문과 무관하게 뜻대로 움직이라는 허락을 이미 법허 신니로부터 받은 상태였다. 물론 아미의 이름과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겠지만 외사의 고수인 그녀에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함께야.”
당화련의 물음에 경희 공주는 미소를 지었다.
“말하자면 내 감시역쯤 되겠지만, 그녀는 내게도 유용한 사람이니까.”
사실 청혜 사태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영리한 경희 공주라면 그녀를 속여 넘기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 줄 것임은 분명했다. 당화련은 다시 물었다.
“두 번째는 무엇이지요?”
그 질문은 경희 공주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경희 공주는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어정쩡한 존댓말을 집어치워. 기분 나쁘니까. 이게 두 번째 조건이야.”
“훗.”
이번엔 당화련이 웃었다. 그녀는 경희 공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두 여인의 시선이 날카롭게 얽혔다. 방금 거래를 마친 사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살벌했지만, 지금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두 사람의 진실 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런 가식도, 예의도, 동정조차도 없는 본연 그대로의 모습.
“총괄군사님.”
침묵을 깬 것은 밖에서 들려온 수하의 목소리였다. 당화련은 고개를 돌렸다.
“뭐지?”
“……급보입니다.”
수하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리고 있는 것을 당화련은 알아차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당화련은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 경희 공주에게 말했다.
“필요한 걸 요청해. 가능한 모두 준비해 주겠어.”
경희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화련 역시 가볍게 예를 표한 후 밖으로 나왔다.
탁.
문을 닫은 당화련은 자신 앞에 허리를 숙인 수하를 바라보았다.
“뭐지?”
바스락.
수하는 여러통의 서찰을 품에서 꺼냈다.
“서장에서 온 서찰들입니다.”
“그래?”
당화련은 반색을 했다. 서찰들에 적힌 글씨가 익숙한 것들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 당월아와, 손빈의 필체였다.
하지만 수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서장에서 온 마방들이…….”
수하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말을 이었다.
“……대신장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뭐?”
막 서찰을 받아들려던 당화련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수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수하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끔찍한 불안과 혼란이 당화련을 엄습했다.
(작가의 말)
어쩐지 귀와 뒤통수가 자꾸만 간질간질한 손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