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76)
낙향문사전-376화(376/494)
376화. 천축으로
손빈 일행이 달의 성 계곡을 떠난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고원이 끝나고, 일행은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방대한 산맥을 지나야 했다.
그야말로 산들의 숲 한가운데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지만, 황 방주는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며 혀를 내둘렀다.
“서장 남쪽의 대산맥은 아예 가까이 갈 엄두도 못 내지. 하늘이 벽을 딱 세워 놓고, ‘절대 넘어서지 마라’고 명령하는 듯한 느낌이라니까?”
대설산 산맥을 떠올린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였던가 생각하니 새삼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물론 산속이 제법 쌀쌀한 탓도 있었지만.
따각, 따각.
산맥 초입에서 구한 키 작은 말들은 일행을 태운 채로 산길을 잘도 걸어갔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어서, 일행이 있었던 서장 고원이 얼마나 높은 곳이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점차 높아지는 나무들과 울창한 수풀을 보는 것도 제법 흥미로웠다.
“그런데 저 여협 말인데…….”
모닥불 앞에서 황 방주가 힐끔 검희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손빈은 뜨거운 찻잔을 쥐고 귀를 가까이 했다.
“말 같은 것도 안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우릴 따라오는 건가? 그리고 늘 저녁때만 모습을 보이던데, 아침밥이나 점심은 안 먹어도 되나?”
“글쎄요?”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손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경공이라든가 뭐 그런 것 아닐까요?”
그 대답에 황 방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경공이란 건 나도 들어 봤네만 그걸 하루 종일 한다고?”
누구라도 믿지 못할 이야기긴 했다. 사실 손빈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그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지요. 무리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밥은……, 으음.”
검희가 따로 행동하는 건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혹은 수련이거나 그저 취향인지도 모르지만.
손빈은 힐끔 검희와 사수연, 당월아가 앉아 있는 모닥불을 쳐다보았다.
경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식사 같은 건 괜찮은지 나중에 꼭 한번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하늘이 참 좋네요.”
문득 손빈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산속의 하늘은 좁았지만 그 가운데 빛나는 별들은 그 어떤 보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청명한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군.”
황 방주도 고개를 들어 그렇게 말했다. 찻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느끼며, 손빈은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만끽했다.
산속에는 숲과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험준한 산맥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작은 마을들은 늘 손빈 일행을 환영했고, 올바른 길을 알려 주었다.
황 방주는 언제 챙겼는지 서장의 특산물들을 내어 주며 필요한 것들과 바꾸기도 했는데, 가끔은 매우 희귀한 약재를 받았다며 싱글벙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거냐?”
말 위에서 흔들리던 노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사실 손빈도 그것이 걱정이었던 터라 황 방주를 돌아보았다.
귀견수라가 남긴 표식에도, 옥룡의 짧은 서찰에서도 다음 목적지 같은 건 없었다. 하긴 그들도 낯선 길이라는 건 마찬가지이니 지명이나 도시 이름을 남길 수는 없었으리라.
“일단 이 산맥을 벗어나야 합니다.”
황 방주는 힐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사방에는 높은 산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면 대강 소문 정도는 들리지 않을까요? 그 뭐랄까, 워낙 특별한 사람들이니까요.”
특별한 사람들이긴 하다. 게다가 ‘마물’이나 ‘마교’의 소문 역시 있을 터이니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황 방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만 가면 드디어 천축입니다.”
그 말에 손빈은 새삼 자신이 멀리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닌 천축이라니, 서생 시절엔 어디 상상이나 했었으랴?
그러나 길은 낯설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그건 손빈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손빈은 새삼 일행을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노군이 ‘왜?’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서린이 활짝 웃는다.
사수연도 손빈을 향해 미소를 짓고, 당월아는 면사 너머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보이진 않지만 검희 역시 어딘가에서 일행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피곤한가? 쉬어 갈까?”
황 방주가 걱정스레 묻는다.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그냥, 고마워서요.”
그 말에 황 방주가 피식 웃었다.
“뭘,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그래도요.”
비록 대가를 지불했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상대가 동의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당장 황 방주의 도움만 해도 그에게 준 대가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녔다. 하물며 노군이나 서린, 사수연과 당월아, 그리고 검희가 손빈에게 주는 의미야 오죽하랴.
“고맙습니다. 황 방주님.”
진심을 담아 손빈은 말했다. 황 방주는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오히려 내가 고맙지. 뭐, 어쨌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그 말에 손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황 방주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도 천축은 처음이거든.”
“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반문에 황 방주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언제 천축에 가 봤겠나? 다 들은 거지, 직접 가는 건 나도 처음일세. 아, 하지만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하니 걱정 말게. 그리고 사람은 닥치면 다 하게 마련이거든.”
황 방주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손빈은 어쩐지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 같아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어느새 산길에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고, 한결 낮아진 산들만큼이나 천축이 성큼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 * *
말 위에서 반쯤 졸고 있던 서린이 고개를 번쩍 든 건, 산길도 이제 제법 완만해졌다 싶을 때였다.
“아이들 소리가 들려요!”
탓.
서린은 말 위에서 훌쩍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아이들?”
손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노군을 돌아보았다. 노군은 코를 킁킁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음식 냄새 같은 것도 나는데? 마을이 가까이 있나 보다.”
노군이 가리킨 방향은 서린이 사라진 쪽이었다.
“가 보자.”
마을이 있다니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숲길을 따라 말을 재촉한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흐르는 얕은 개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개울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서린의 모습도.
“형!”
서린이 손빈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꼬마들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움찔했지만, 서린이 알은체를 하자 그래도 도망가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불안해 보이는 표정만은 역력하다.
손빈은 웃으며 서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혹시 아이들을 자극할까 싶어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잠깐 기다려 볼까요?”
서린을 지켜보던 손빈의 말에 황 방주도, 노군도 고개를 끄덕인다.
일행은 말에서 내려 개울물로 가볍게 손이나 얼굴을 씻었다.
그사이 서린은 아이들과 웃으며 놀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할 텐데 참 빨리도 친해진다 싶었다.
아이들은 모두 열댓 정도였는데, 웃통을 벗은 사내아이들도 있었고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노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천축 특유의 옷차림인지 남자 아이들은 대충 허리에 두른 천 같은 것이 전부였고, 여자 아이들도 색이 바랜 낡은 천을 둘둘 감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원 아이들 또래네요.”
사수연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하나같이 마른 것을 빼면 영락없이 서원의 꼬마들 또래였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요?”
아이들을 보고 서원 꼬마들이 생각나는 사람은 손빈만이 아닌 듯했다. 사수연의 말에 손빈은 가벼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젠 완전히 경계심이 풀린 아이들과 놀던 서린이 손빈을 향해 말했다.
“형! 얘들이 자기네 마을로 가재!”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가 일제히 손빈을 바라본다. 그 모습에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가자!”
서린이 외치자 아이들도 손을 들고 기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서린을 둘러싸고 개울 건너편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분명 말이 다를 텐데, 저런 모습을 보면 뭔가 아이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과연.”
황 방주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걸 준 것도 아니고 돈을 쓴 것도 아닌데 저렇게 금방 아이들의 호의를 얻어 내다니.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해.”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서린의 외모만이 아니라고 생각한 데다, 그런 말을 하는 황 방주도 제법 잘생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자.”
옆에서 킁 하고 콧바람을 내뿜던 노군이 말했다.
“여긴 또 뭔 문제가 있는지 봐야지. 마물인지, 마교인지.”
그 말에 손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은 나락의 문에 보다 가까운 지역이다. 그렇다면 서장보다 상황이 심각할 것은 분명하다.
“네, 가지요.”
손빈은 말에 올랐다. 어느새 멀어진 서린과 아이들을 따라 일행은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멀리서 보기에도 허름했다. 집들은 목재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높은 건물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오래된 듯 군데군데 무너진 집도 있었다.
“뭐야, 마을이 왜 이래?”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확실히 마을의 형편은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유독 말랐던 건 이곳이 매우 가난한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색이 바랜 허름한 천축 옷을 입은 어른들이 새파래진 얼굴로 달려오더니 아이들을 감싸 안고 뒤로 물러섰다.
명백한 경계의 행동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저희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려던 손빈은 말을 멈췄다. 그건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으리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를 감싼 여인이 손빈을 쳐다보지도 못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손빈을 경계하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곳은 저들의 마을이다. 이렇듯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에서 몰려나왔다.
타다닥.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들은 머리가 허연 노인들이었다. 중년인도 몇 명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흰 수염에 주름이 가득한 가무잡잡한 얼굴의 노인들이다.
적어도 불청객을 잡으려고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아서 손빈은 일단 말에서 내렸다. 황 방주도 손빈 옆에 서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황 방주가 두 손을 모아 천축 말로 인사를 전하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을 때였다.
털썩.
달려온 노인과 중년인 들이 그대로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곤 무엇인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더듬거리며 이어 나간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를 감싸 안고 있던 중년 여인도 그대로 땅에 바싹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사방에 있는 모든 어른들이 이마를 땅에 대고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 이게 대체 무슨…….”
황 방주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손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노인들이 땅에 이마를 조아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대는 손빈도, 황 방주도, 심지어 노군도 아니었다.
그들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당월아였다.
“너, 뭐 했냐?”
노군이 툭 던지듯 묻는다. 사수연이나 서린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당월아를 바라본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당월아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면사 밖으로도 그녀의 편치 않은 심기가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손빈은 흰 수염의 노인이 고개를 조아린 채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들었다.
“이분이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황 방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분 말씀은…….”
노인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이마를 땅에 댄 채인 데다가 무언가 더듬거리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 방주는 몸을 굽히고 노인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곤 곧 눈살을 찌푸렸다.
“……살려 달라는데요?”
일행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당월아에게 향한다. 하지만 곧 모두들 시선을 돌려야 했다.
살벌한 그녀의 시선을, 비록 면사 너머라 할지라도 감히 마주할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황 방주는 노인에게 귀를 기울인 채 통역을 이어 갔다.
“돈도 없답니다. 간신히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쌓아 둔 재물도 없고, 신분이 낮아 돈을 벌 수도 없어서 도저히 바칠 것이 없다고…….”
당월아의 불편한 심기는 점차 그 살벌함을 더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 그것도 노인과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나쁜 사람 취급을 당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황 방주의 통역은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내들을 끌고 가시면 마을 사람들은 굶어 죽는답니다. 그리고 여자들을 끌고 가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냐며 제발 봐 달라고…….”
“크흠.”
황 방주의 통역을 손빈이 헛기침으로 끊었다. 노인에게 귀를 기울이며 통역에 열중하던 황 방주는 그제야 당월아를 돌아보고는 뜨끔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돌린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보군요.”
손빈이 부드럽게 말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도 사람들이지만 우선 당월아의 심기를 얼른 다독여야 했다.
“월아 소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린 이곳에 처음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십시오.”
황 방주는 천축 말로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 마을 사람들 전부가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아이들마저 겁에 질린 눈으로 손빈 일행을 쳐다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그 까만 눈동자들을 보며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의 말)
어린 나이에 처음 겪는 배신과 반전. 이것은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보다 더 큰 충격.
*쥐꼬리가 다시 자라났습니다! 여전히 쥐꼬리지만(ㅠㅠ), 그래도 6월 한 달간 다시 달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