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77)
낙향문사전-377화(377/494)
377화. 불가촉천민
마을 사람들의 오해를 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손빈과 황 방주의 끈질긴 설득에 사람들은 드디어 손빈 일행이 단순한 여행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월아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해서, 당월아는 사수연과 함께 따로 마을 바깥에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조정에서 나온 관인인 줄 알았던 거군요.”
손빈은 그렇게 말하며 마을의 촌장이라는 노인을 보았다. 머리며 수염이 허연, 가무잡잡한 얼굴의 깡마른 노인은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손빈의 눈치를 살핀다.
가능한 부드러운 미소로 그 시선에 답하는데, 황 방주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조정의 관인과는 조금 다르네. 말하자면 종교 검열관 같은 거라서,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 세금을 거둔다거나 자기네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처벌하거나 하지.”
그 말에 손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종교 검열관이라니, 서장같이 종교 색 강한 지역에서도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다른 종교라고요? 천축은 모두 불가를 믿지 않나요?”
“에이, 이 사람. 언제 적 이야기를…….”
황 방주는 혀를 끌끌 찼다.
“천축에 불가를 믿는 이들은 이제 없네. 아니, 찾아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아주 적어. 대부분은 이 마을처럼 힌두교, 그러니까 천축교를 믿는 사람들이지.”
천축은 불가의 발상지이니 다들 불교도가 아닐까 생각하던 손빈은 놀란 눈을 했다.
“불가를 믿는 이들이 거의 없다고요?”
“그것만이 아닐세.”
황 방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천축을 다스리는 사람들의 종교는 또 달라. 그들은 파사에서 온 회교도들이거든.”
파사는 천축에서도 더 서쪽에 있는 대제국이다.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는 손빈에겐 천축교든 회교든 생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파사는 마니교나 배화교 아니었나?”
문득 노군이 끼어들었다. 황 방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파사가 회교가 된 건, 천축에서 불가가 사라지기도 전입니다. 파사는 지금 전부 회교예요.”
“그러니까 지금 천축을 다스리는 지배층의 종교인 회교가 검열관을 두고 있는 겁니까?”
황 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이 사람들은 천축교도들이라 검열관이 와서 세금을 걷고 사람들을 끌고 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고.”
“그런데 왜 월아 소저에게 그런 것이지요?”
“회교 사람들이 면사를 쓰거든.”
황 방주가 입 주변을 슥 가리며 면사 흉내를 낸다.
“내가 알기론 회교도들도 형식상 가리는 정도인데, 당 여협은 검은 색 면사로 완전히 가렸으니…….”
손빈은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당월아를 두려워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녀를 독실한 회교 신자로 여겼다는 뜻이다.
“사실, 문제는 또 있네.”
황 방주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문제요?”
손빈의 말에 황 방주는 고개를 돌려 우물을 바라보았다. 마을 한복판, 작은 공터에 있는 우물 주위는 짐승의 뼈로 둘러쳐져 있었다.
분명 마을 공동 우물일 텐데 주변을 뼈로 두르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표식일세.”
황 방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마을이 천축교 내에서도 천대받는 사람들이라는 걸 나타내지. 천축교는 그런 차별이 유독 강한데, 우물 주위를 뼈로 두른 건 이들이 불가촉천민이라는 의미일세.”
‘불가촉천민’이라면 건드리지도 말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폭력적인 단어에 손빈의 눈살도 저절로 일그러진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천한 사람들. 실수로 다른 계급 사람들과 손만 닿아도 죽임을 당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 말일세.”
순간 손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절대로 사람에게 써서는 안 되는, 결코 그래선 안 되는 단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었다.
“아하하.”
문득 들려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쪼그려 앉은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아 있는 서린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서로 거리를 두고 있는 건 아마 아이들 부모가 절대 서린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서, 떨어져 앉아서도 서로 보며 웃고 있는 것이다.
휙휙.
손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린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아이들도 그 까만 눈동자로 손빈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손짓을 한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는 것 같은 그 미소와 눈동자들을 마주하며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으니까.
* * *
황 방주의 장사꾼 기질은 이 마을에서도 빛을 발했다.
언제 챙겼는지 모를 여러 가지 것들을 늘어놓고 황 방주는 마을 우물 옆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자, 대산맥을 넘어온 신기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황 방주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말 그대로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여들었다. 이런 마을에서 구경거리란 대단히 드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거래는 거의 없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거나, 혹은 서로 감탄하며 수다를 떠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이것도 한번 보시고요. 어이쿠, 만지시면 안 되고요. 아, 그건 만져 봐도 됩니다. 안 닳아요. 허허허.”
시종일관 황 방주는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실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가지 소식들을 듣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황 방주의 온갖 질문에 대답해 주었고, 황 방주는 가끔씩 소소한 먹을거리들을 나눠 주며 우호를 다져 가고 있었다.
바쁜 것은 서린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이야! 아참, 천축 말로 뭐였지?”
서린의 말에 아이들이 웃으며 천축 말로 무어라 했다. 분명 알아듣지 못할 텐데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니 신기한 일이다.
황 방주는 ‘외국인은 천축교의 율법에서 예외라던데요?’라며 마을 촌장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촌장에게 건네준 작은 선물이 지대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서린은 다시 아이들과 웃으며 열심히 뛰어노는 중이었다.
서린은 남자아이, 여자아이 가리지 않고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어느새 간단한 천축 말로 아이들과 의사소통 중이다.
사수연은 당월아와 함께 마을 밖에서 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당월아를 여전히 어려워했기 때문이다. 당월아는 생각보다 많이 충격을 받은 듯했는데, 사수연이 그녀를 위로하며 오랜만에 호젓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만 아이들은 당월아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진 듯 가까이 다가가서 쳐다보기도 했다. 사실 아이들은 애초부터 당월아에 대한 경계심이 없긴 했다.
“나는 잠깐 주변을 돌아보고 오마.”
노군은 툭 던지듯 그렇게 말하곤 사라졌다. 다른 마을이 있는지, 혹은 위험한 것들이 없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손빈은, 우물 옆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말없이 홀로 앉아 있었다. 서린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나, 혹은 황 방주에게 모여든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서린도, 사수연이나 당월아도, 그리고 황 방주도 손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되돌아볼 수 있도록.
저녁 즈음이 되자 노군이 돌아왔다. 그리고 황 방주가 그날 최대의 성과를 전했다.
“마을 촌장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데 동의했네.”
황 방주는 싱글싱글 웃으며 손빈 일행에게 말했다. 손빈과 서린은 물론이고 사수연과 당월아, 그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던 노군도 돌아와 있는 자리였다.
“이 사람들은 무슨 아기 고양이도 아니고, 정말 심하게 낯을 가리더군. 아마 우리가 ‘네 이놈들!’ 하며 자기들 목을 칠까 봐 두려운가 봐. 하하하.”
그건 농담이었지만 반쯤은 진실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손빈 일행을 단순히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해도 괜찮을까요?”
사수연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들이 얼마나 경계심이 많은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사 여협. 사실 따져 보면 우리들은 이 사람들보다 더 낮은 신분이니까요. 외국인이 개종하면 바로 이들처럼 불가촉천민 계급이 되거든요.”
조심스러운 황 방주의 대답에 사수연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천축교로 개종하면 최하 계층이라고요?”
사수연의 반문은 당연했다. 기껏 개종을 했는데 최하급 계층이 된다면 누가 천축교를 믿으려 할까?
하지만 황 방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분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거지요?”
“원칙은 그렇습니다만, 실제로 외국인들은 귀족에 준하는 취급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들보다 피부색이 밝으니까요.”
갑자기 왜 피부색 이야기가 나오는지 사수연은 얼떨떨했다. 그녀의 의문을 짐작한다는 듯 황 방주는 바로 말을 이었다.
“천축교에선 이런 계급 제도를 ‘바르나’라고 하는데, 색이라는 의미입니다. 상위 계층을 이루는 가문들은 대부분 피부색이 밝고, 하위 계층의 가문들은 어둡습니다. 사 여협 같은 경우엔 이 사람들이 아예 여신처럼 생각하고 있더군요.”
북해 출신인 사수연은 일행 중에 제일 피부색이 희다. ‘여신’이라는 건 대단한 칭찬이었지만 그 전에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사수연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배 계층의 가문과 하위 계급의 가문들이 서로 다른 민족인 모양이군요.”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옳았다. 피부색으로 계급을 나눈다면 그 원인은 하나뿐이다. 계층 간의 민족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렇습니다. 당 여협.”
황 방주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비록 나이가 어려도 사수연이나 당월아에게 황 방주는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들의 무위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문 총괄군사 당화련의 탓도 크리라.
“지금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지만 본래는 그렇습니다. 고위 계급인 승려와 귀족의 가문들은 대부분 피부가 하얗고 눈동자가 푸른 경우가 많습니다. 왜, 색목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눈에 색이 있는.”
자기 눈을 가리키며 말하는 황 방주의 말에 당월아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건 여러 종류의 사람이라는 뜻에서 ‘제색목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눈에 색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어요.”
본래 천축교에 계급이 나뉘어 있었던 데다가 새로운 지배 계층인 회교가 들어왔다.
기존의 민족적 차별에 종교적 차별까지 더해진 셈이니, 이 마을 같은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주변은 어떻던가요?”
당월아가 고개를 돌려 노군에게 물었다.
“별거 없었다.”
짧은 노군의 대답에 황 방주가 말을 보탰다.
“남쪽으로 사흘 길쯤 가면 큰 마을이 있다더군요. 그리고 요즘 흉흉한 소문이 많이 나돈답니다. 주로 서북쪽인데, 큰 난리가 났다는 말도 있고 마물들이 날뛴다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역시나 하루 동안 소문을 들은 황 방주가 가장 할 말이 많았다. 황 방주의 말에 노군이 눈살을 찌푸린다.
“마물이라면 서장에서 본 그것들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소문이라……. 그런데 무슨 마신들 이야기를 하던데요?”
“마신?”
“네. 마신요.”
허연 노군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진다. 마신(魔神)이라는 단어는 확실히 마물이나 마교보다 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천마 얘긴가?”
“아닐걸요? 여섯인가 여덟인가 있다던데요?”
“한두 놈이 아니라고?”
아예 인상을 구기고 있는 노군의 말에 황 방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문이니까 진위는 모르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물이나 마신 같은 것들보다는 난리를 더 걱정하더군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천축 북쪽 지역인데,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답니다. 심지어 저 남쪽에서도 전쟁이 났다고도 하고…….”
말하던 황 방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회교도이면서도 선정을 베풀던 위대한 샤……. 아, ‘샤’는 황제라는 뜻입니다. 하여간 좋은 황제들이 있었는데, 선대 황제 때부터 갑자기 세금을 과하게 거두고 종교 검열관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더군요. 그러다 선대 황제가 죽고 얼마 전에 새 황제가 즉위했는데, 워낙 고령이라 언제 죽을지 모른답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오늘내일한다니? 그게 뭔 소리야?”
눈살을 찌푸린 노군의 말에 당월아가 답했다.
“선대 황제가 오래도록 집권한 경우 그렇게 돼요. 황족은 비교적 일찍 후사를 보는데, 부황이 오래 집권하면 다음 대 황제는 필연적으로 노년이 되어서야 황위에 오르게 되지요.”
서원 최고의 수재다운 당월아의 대답에 노군이 혀를 찼다.
“평생 황태자로 지내다가 죽을 때 다 되어서 황제라니,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군.”
황태자로 평생을 사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한창때라 할 수 있는 시기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보내야 하니까.
“선대의 오랜 집권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좋은 상황이라곤 할 수 없어요.”
오랜 정치적 안정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태평성대를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부패와 쇠락이 가속화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 천축의 상황은 아무래도 후자에 속한다. 현 황제의 건강마저 불확실한 경우라면 사회적 혼란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천축은 아주 어수선해요.”
황 방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긴 지금 마물이나 마교가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일행 모두가 공감했다. 당장 이 마을 사람들만 봐도 마물이나 마교 이전에 당장 먹고사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그래서, 어찌할 거냐? 빈아.”
문득 노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이제껏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던 손빈을 향해서였다.
손빈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하루 종일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마을이,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하지도 말아야 할 ‘불가촉천민’이라는 말을 듣고 그가 얼마나 깊이 슬퍼하고 있는지도 말이다.
“저는.”
천천히 손빈은 입을 열었다.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제게 불합리해 보인다 해도, 이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손빈의 말은 일견 오만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일행은, 특히 노군은 손빈이 진심으로 그렇게 결심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손빈의 성정이라면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손빈은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성인(聖人)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손빈은 이곳에서 외인이다. 인간적으로 가슴 아파하고 분노할 수는 있겠지만,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다.
“그래, 맞다. 그리고 어디 여기만 그런다더냐? 알고 보면 우리도 노비가 있고, 유독 천대받는 자들도 있지 아니하냐?”
노군이 말했다. 그건 손빈을 위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그저 지금은 이곳이 더 험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 뿐이야. 게다가 우린 할 일이 있지 않느냐?”
확실히 노군의 말대로였다. 이곳의 종교나 사회 체계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중원 역시 그보다 더할 때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곳의 상황 자체가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맞습니다. 우린 할 일이 있지요.”
게다가 무엇보다 손빈 일행은 무제의 뒤를 따라, 나락의 문을 열었다는 천마를 막아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있다. 그것을 방치했을 때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는 이미 서장에서 경험한 바다.
노군은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손빈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도움을 받는 건 상관없겠지요.”
손빈의 말에 노군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도움을 받는다고? 도와주는 게 아니라?”
“네.”
손빈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의 상황을 모릅니다. 귀견수라가 남긴 표식도 발견하지 못했지요. 그러니 잠시 상황을 파악하면서 며칠 머무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결국 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노군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표식이야 내가 좀 돌아다니면서 알아보면 되고…….”
‘조금’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주변의 큰 마을과 도시를 다니려면 노군이 꽤나 바빠질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표식을 찾는 동안 기다려야 한다면, 이 마을에 머무른다 해서 나쁠 것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라.”
피식 웃으며 노군은 그렇게 말했다. 그 서툴지만 따뜻한 정에, 손빈은 깊이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작가의 말)
‘가혹한 세금이 호랑이보다 무섭다’라는 고사의 천축판. 사실이라는 게 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