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8)
낙향문사전-38화(38/494)
제38화. 호아(虎牙)와 백로(白露)2014.01.11.
후우웅.
봉우리를 넘어온 바람이 설원 위로 불었다.
고요하게 펼쳐져 있던 설원은 마치 지진이라도 만난 듯 곳곳에 깊은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고, 위태하게 걸린 눈 더미들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소리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후후후.”
그 고요한 설원 위에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은빛 실로 자수를 한 용의 문양이 은은하게 반짝인다.
사락.
옥룡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조용히, 마치 산책하듯 옥룡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
“기억하고 있나?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사박, 사박.
“그건 정말 충격이었지. 내 능력으로도 다만 한 순간, 그저 너를 움찔하게 할 뿐이었으니까.”
옥룡은 발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사자혁이 불꽃 같은 눈빛으로 옥룡을 보고 서 있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옥룡을 태워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시선이었지만, 다만 그뿐. 사자혁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거든. 내가 속박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건. 그건 정말이지, 내게 있어서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이었지. 하지만 더 웃겼던 건…….”
그 웃음은 너무나 화사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날 패배시킨 네가, 내게 한 말이었어. 혹시 기억하고 있나?”
옥룡은 고개를 치켜들고 사자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힘이로군.’”
사자혁을 흉내 내려는 듯했지만 흘러나온 옥룡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미성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에 집착한다면, 결코 무도의 극의에 이르지 못한다.’ 풉, 푸하하하하.”
갑자기 옥룡이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그런 것 따위라니. 이 땅에서는 신의 힘이라 숭배받고, 누군가는 저주받은 피의 능력이라 꺼려하는 이 힘이 너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그런 것 따위에 불과했단 말이지. 아하하하하.”
옥룡은 가슴을 젖히며 웃었다. 그렇게 웃어 대던 옥룡이 가볍게 부채를 저었다.
팔락.
“후후. 너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지. 너를 움찔하게 한 것조차도 다만 처음뿐, 너에게 내 힘이 통한 적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사자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옥룡이 말했다.
“너의 그 오만한 말이, 나는 너무나 기뻤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만큼. 바로 그날, 나는 나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주 어릴 적 홀로 이 산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슥.
옥룡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자혁 주위로 천천히, 산책을 하듯 그가 걷는다.
“돌아온 나는, 내게 거짓을 말해 온 모든 장로들을 전부 처형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믿지 못하더군. 내 힘을 거절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박, 사박.
옥룡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간 설원 위에는 아주 희미한 발자국만이 남았지만, 결코 그곳이 단단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와 함께 천하를 주유하는 것은 제법 즐거웠다. 재물도, 권세도, 선도, 악도 개의치 않았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거대 가문도, 심지어 황궁에 속한 자들이라 해도 상관하지 않았지. 보는 것은 단 하나. 오직 그가 강자인가 하는 것뿐.”
상념에 잠긴 듯, 옥룡이 멈춰 섰다.
“그때는 천하가 우리의 발아래 있었다. 천하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그녀를 만났지.”
옥룡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를 만나고 너는 파월삼식을 얻었다. 그와 함께 난폭하고 무자비하며, 고고하고 아름답던 현천의 무제는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입에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득.
“그녀는 널 파멸시킬 거라고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 파월삼식 따위, 하찮은 재주에 불과하다 말하지 않았던가? 너의 진정한 강함은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내가 이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는 듣지 않았다.”
사자혁을 바라보는 옥룡의 눈길은 싸늘했다.
“그래서 네게 보여준 것이다! 그녀는 그저 네 손쉬운 약점에 불과하고, 네가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던 파월삼식은, 네가 사랑하는 그녀조차 구하지 못하는 헛된 재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옥룡은 외치듯 말했다.
“자, 보아라.”
화락.
눈처럼 하얀 그의 옷깃이 바람에 날렸다. 옥룡은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결국 너는, 그녀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
묵직한 음성이 사자혁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옥룡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탁.
옥룡은 부릅뜬 눈으로 사자혁을 쳐다보았다.
절대 불가능하다는 확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서 있는 그가 다름 아닌 사자혁이라는 사실이 주는 불안감이 그의 눈빛에서 복잡하게 얽혀 들고 있었다.
“설마…….”
“그녀는 내게 보여주었다. 이 세상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사자혁의 눈빛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너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옥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사자혁이 자신의 제어 아래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실제로 사자혁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월을 쥔 손은 물론이고,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한다.
“하하.”
헛웃음을 내뱉으며 옥룡이 말했다.
“내기로 발성을 대신한 건가? 내 힘에 묶이고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괴물이로군. 너에 비한다면 나 같은 건 이제 괴물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겠어.”
옥룡의 눈동자에서 떨림이 사라졌다.
사박.
“그 아이, 수연이라고 했나? 그 아이는 정말 그 여자를 닮았더군. 아니, 확실히 제 어미와는 다르지. 하지만 그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여자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어. 그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이 핏줄이라는 건가?”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옥룡이 사자혁을 보았다.
“자네도 그랬겠지? 그래서 그녀처럼 무림과는 상관없는, 가녀리고 연약하며 무력한 그런 여인으로 키우고 싶어 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옥룡을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부모 마음대로 되는 아이는 없으니까 말이야. 봐라, 그 아이도…….”
사자혁을 쳐다보는 옥룡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제 멋대로 죽어 버렸지 않나? 바로 제 어미처럼. 이제 눈에 파묻혀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마저도 제 어미와 비슷하군.”
옥룡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자혁을 내려다보았다. 조롱하듯, 혹은 음미하듯. 그러나 사자혁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사자혁의 머리가 흩날리고 옥룡의 옷깃이 펄럭인다. 사자혁을 내려다보던 옥룡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사박.
옥룡이 걸음을 옮겼다. 느긋하게 부채를 저으며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죽이는 건 어떨까? 현천의 무제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겠지만, 뭐랄까, 너무 품위가 없지. 사천의 맹호나 생각할 법한 일이야. 그러니 이건 불가.”
쿠르릉.
먼 곳에서 눈 더미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옥룡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대로 널 풀어 주는 건 어떨까? 내가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참회하는 거야. 그러면 넌, 차마 나를 죽이지 못하고 파월을 설원에 박은 채 돌아서는 거지. 이 설산 위에서 석양을 등지고 선 네 뒷모습은 정말 아름다울 것 같지 않나? 아, 하지만 이건 황학이나 할 법한 일이로군. 게다가 벌써 내 입으로 말해 버렸잖아? 안 되겠어. 이것도 불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옥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박.
옥룡은 걸음을 멈췄다.
“이 설산에 이대로 세워 두는 건 어때? 하늘 아래 홀로 높고 고독한 이 장소에서, 그 누구도 모른 채 홀로 서서히 죽어 가는 거다. 네 피에 흐르는 천향루가…….”
사자혁의 바로 눈앞에서, 옥룡은 말했다.
“네 마지막 생명을 갉아먹을 때까지.”
아주 잠깐, 사자혁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옥룡은 보았다.
피식.
옥룡은 웃었다.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천만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천하에 나보다 더 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너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
사락.
하얀 옥룡의 손가락이 사자혁의 가슴에 가 닿았다.
“그래, 맞아. 천향루 따위가 널 어쩌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독기를 억누르며 평생을 사는 대신,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선택했다. 천향루의 그 맹렬한 독기 덕분에 너의 내기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지만, 네 핏속을 흐르는 천향루는 하루하루 네 생명을 갉아먹고 있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열흘? 아니면 사흘? 그것도 아니면, 내일이려나?”
옥룡은 고개를 들어 사자혁을 직시했다.
“내가 말했지? 이 설산에 오면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갖게 해 주겠다고. 나는…….”
말하는 옥룡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너의 핏속에 흐르는 천향루를 없앨 수 있다.”
붉은 옥룡의 입술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는 널 놔주지 않겠어. 고통도 없고 번뇌도 없다. 쓸데없는 기억들도,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완벽한 자유, 완벽한 구속을…….”
사락.
옥룡의 손가락이 사자혁에게서 떨어졌다.
“너에게 주겠다. 아마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아니, 어쩌면 벌써 기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굴종이란, 더없이 달콤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건 아닙니다.”
탁.
거의 본능적으로 옥룡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목소리는 사자혁에게서 울려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옥룡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파삭.
눈 무더기 하나가 갈라지며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이라면 저도 좀 압니다만.”
푸스스.
머리와 어깨에서 눈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린다. 완전히 눈에 파묻혔던 그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눈을 툭툭 털어 냈다.
그와 함께 젊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옥룡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총기가 반짝인다.
“그 사람이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이걸 겁니다.”
짜증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문사 차림의 사내가 말했다.
“‘시끄럽다. 닥쳐.’”
옥룡을 향해 다분히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내뱉은 그는, 바로 손빈이었다.
후우웅.
바람이 불고 눈가루가 날렸다.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옥룡이었다.
“어떻게…….”
그는 경계의 눈빛으로 손빈을 보았다.
“네가 그곳에 있지?”
“글쎄요.”
손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모르겠더군요. 어떻게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제가 여기에 있는 걸 알지 못했을까요? 그 속박의 힘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가 보죠? 하긴, 저 사람이 상대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죠.”
이해한다는 듯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야.”
날카로운 눈빛으로 옥룡이 물었다.
“어째서 네가, 살아 움직이느냔 말이다.”
“아, 그거 말입니까? 사실 저도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저를 노린 건 사수연 소저를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고, 사수연 소저가 당하면 결국 저는 죽게 될 테니까요. 그게 당신이 말했던 것이죠? 내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 그건 바로 미끼, 아니 그보다는 뭐랄까…… 그렇지, 작은 불씨 같은 것이군요. 더 큰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옥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손빈의 말이 옳다고 긍정하고 있었다.
“당신이 손으로 쏘아 낸 그건, 아, 죄송합니다만 이름은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그 기운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저로선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죠. 사실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더군요.”
손빈은 품에 손을 넣었다.
파삭.
손빈의 손이 옷자락에 닿자 옷 일부가 마치 마른 낙엽처럼 부서져 내린다. 손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짧은 막대기 같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옥룡의 눈이 반짝인다.
“네.”
손빈은 미소를 흘렸다.
“호아검의 손잡이입니다.”
화려한 보옥으로 장식된 손잡이가 손빈의 손에서 반짝인다.
“빌려 주더군요. 성질이 좀 더러…… 아니, 특이한 아가씨가요.”
옥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래서?”
옥룡이 물었다.
“뭘 했다는 거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내 빙혼지를 피할 수 없었을 텐데?”
“아, ‘빙혼지’라고 하는군요.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빙혼지가 제게로 쏘아져 오는 순간, 제 능력으로 그걸 피할 수 없다는 건 분명히 알았습니다. 사수연 소저가 막으려 하겠지만 결국 실패할 테니, 어떻게 되건 전 죽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제 품에 이 호아검의 손잡이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손빈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살짝 몸을 틀었습니다. 당신의 빙혼지가 정확히 이 호아검의 손잡이에 적중하도록.”
“그럴 리가…….”
“아니, 정말입니다.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니, 빙혼지의 기운까지 막아 낼 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그 순간에 제가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요. 그래도 여전히 이 부근은…….”
손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서늘합니다만.”
“그럴 리가 없다. 너 따위가…….”
옥룡은 손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따위가 어떻게 빙혼지의 궤적을 미리 보았다는 말이냐?”
“그야…….”
손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파월일식보다는 느렸으니까요.”
옥룡은 잠시 말을 잃었다. 처음엔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잠깐 동안은, 저자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연이나 혹은 다른 조력자가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엔 아무도 없다. 보이는 것은 저 멍청하고 웃기지도 않은 문사 차림의 청년뿐이다.
“그래서.”
옥룡이 말했다.
“그렇게 죽은 척하고 있었으면 될 텐데, 왜 지금 기어 나온 거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충격으로 잠깐 정신을 잃었습니다. 저 사람이 워낙 거창하게 이곳을 뒤집어 버려서 말이죠.”
손빈이 말했다.
“정신이 든 것도 아마 이 손잡이 덕분이겠죠. 눈을 떠 보니 눈 속이라는 걸 알았는데, 생각보다 은근히 편하더군요. 그래서 좀 생각을 가다듬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눈치채지 못한 덕분이죠.”
희미한 미소가 옥룡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을 가다듬은 결과, 일어나기로 했다?”
“네.”
손빈이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사람이 저렇게 있어선 아무것도 되지 않겠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사수연 소저의 대역을 하기로 했습니다.”
“대역?”
옥룡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등 뒤로 숨었던 손빈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게 뻗은 검 한 자루가 그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검(仙劍) 백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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