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86)
낙향문사전-386화(386/494)
386화. 예기치 못한 적
달빛 아래 손빈이 서 있었다.
한 손을 허리 뒤로 하고 다른 한 손으로 검을 뻗은 채 비스듬히 서 있는 손빈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고요한 그림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마주하고 서 있는 셰흐의 표정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조금 전, 저 검 끝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은 전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엄청난 공세를 그저 허초로 써 가면서까지.
“왜 그러십니까?”
손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서린 분노를 셰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 죄를 묻겠다 하지 않았던가요?”
셰흐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그가 당한 치욕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자신은 눈앞의 이 청년 문사를, 손빈을 철저히 잘못 판단한 것이다.
“후우우.”
셰흐는 대답 대신 반쯤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그가 눈을 들었을 때, 일그러졌던 표정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너의 힘이냐?”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셰흐가 물었다. 손빈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셰흐의 기세가 한순간에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렇습니다.”
손빈은 천천히 답했다. 깊고 강렬한 눈동자로 손빈을 쳐다보던 셰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손빈이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린 것을 그도 깨달은 것이다.
“그렇군. 그렇다면 나도 보여 주마.”
사락.
바람이 불었다. 아니, 바람이 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바람이 아니었다.
사락. 사라락.
손빈은 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기운이 천천히 셰흐를 향해 흘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셰흐에게서 마찬가지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숨을 쉬듯, 혹은 바람이 스치듯.
“이것이…….”
셰흐의 그 목소리는 대단히 이상했다.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 같았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셰흐의 모습이, 아니 그의 존재 자체가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지켜보던 노군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지금 셰흐가 하고 있는 것은 노군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었다.
희미해진 셰흐가 웃었다.
“은밀 교단의 힘이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셰흐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았다. 마치 흩어져 버린 그의 목소리처럼 그의 모습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저것이…….’
지켜보던 바하두르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은밀 교단’의 진정한 힘이로군.’
인체에 존재하는 차크라들은 생명의 근원이자 우주와 소통하는 길이다. 은밀 교단은 그 차크라를 개방함으로써 경이로운 힘을 각성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것이 바로 은밀 교단의 비전 전승이자, ‘세계와 하나 되어 인지로부터 사라지는 힘’의 비밀이었다.
비록 이교도의 것이라 하여 일부 교단으로부터는 이단 취급을 받기까지 하지만 어차피 바하두르 장군에겐 상관없었다. 권력 투쟁이라는 무자비한 전쟁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락.
셰흐가 밟고 있던 풀들이 천천히 일어서며 모습을 회복했다. 그러나 누가 움직이는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보이냐?”
노군이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서린에게 물었다. 서린은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손빈 주위를 살피며 답했다.
“아뇨. 아무 냄새도 안 나요.”
냄새는 물론이고 소리도, 발자국도, 심지어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셰흐는 말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노군은 이를 악물었다. 서린이 감을 못 잡을 정도라면 사태는 대단히 심각하다. 심지어 노군 자신조차 완전히 셰흐를 놓쳤다.
셰흐가 사라진 것은, 중원의 살수들이 쓰는 은신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의미다.
‘너무……, 얕잡아 봤나?’
제아무리 완벽한 은신이라 해도 무엇이든 남기 마련이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상대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노군과 서린조차 완벽하게 놓쳐 버렸다. 이런 능력은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노군은 입술을 깨물며 손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빈아.’
셰흐가 사라진 것은 도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분명 그가 노리는 대상은 손빈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손빈을 보호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노군이 막 내력을 끌어 올리려는 바로 그때였다. 손빈이 두 손으로 백로를 쥐고 반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노군은 보았다.
그리고 손빈이 눈을 뜬 다음 순간, 백로의 아름다운 칼날이 허공에 싸늘한 궤적을 그어 내렸다.
* * *
셰흐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손빈은 분명히 보았다. 사실 손빈보다 더 분명하게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셰흐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부터, 손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눈살을 찌푸리는 손빈을 향해 희미해진 셰흐가 웃었다.
“은밀 교단의 힘이다.”
쏴아아아.
불어온 바람 소리와 함께 셰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뒤이어 노군과 서린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외사의 고수인 그들조차 셰흐의 존재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셰흐가 모습을 감춘 것은, 비밀스러운 무공이나 기이한 사술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
손빈은 굳은 표정으로 조금 전의 느낌을 떠올렸다. 처음 이상을 감지한 것은 백로의 칼끝에 갇혀 있던 셰흐가 차크라를 개방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래서 손빈은 그를 놓아주었다. 셰흐가 가진 힘이, 차크라라는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것일 줄은.’
셰흐가 희미해지기 시작했을 때 손빈은 단번에 이것이 초월적인 어떤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밀 교단의 힘은 손빈에겐 대단히 이질적이면서도 이미 익숙한, 전대 옥룡의 능력과 같은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까.
스륵.
손빈은 두 손으로 백로를 쥐었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손빈은 반개한 눈으로 가만히 숨을 골랐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포기한 듯 보이는 광경이었다. 지켜보던 바하두르 장군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조소를 지었다.
하지만 손빈은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손빈은 셰흐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상황인지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셰흐 자신보다 더.
후우우웅.
손빈을 감싸고 흐르는 무수한 흐름들. 별들조차 감싸 안고 흐르는 거대한 흐름과 그 안에 존재하며 나타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흐름들.
그 흐름들 가운데 셰흐가 있었다. 그리고 손빈은 그가 동화한 흐름의 존재를 그 어떤 흐름들보다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손빈이 흐름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손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슥.
그리하여 손빈이 눈을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는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손빈은 한 발을 내디디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백로를 그어 내렸다.
쉭.
푸른 달빛 아래 그려지는 도도한 백로의 매혹적인 궤적. 그것은 그저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것이 전부인 너무나도 아름다운 검로였다.
그러나 그 단순한 검로가 가져온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칭.
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셰흐가 모두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들린, 막 손빈을 찔러 가던 그의 곡도는 놀랍게도 반으로 잘려 있었다.
카랑.
“컥.”
잘린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셰흐의 몸이 휘청 흔들리더니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크윽.”
셰흐는 허리를 굽히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건 그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인지를 벗어나는 은밀 교단의 힘은 그를 둘러싼 ‘세계와 하나’가 되는 힘이다. 그 힘이 깨어진 것은 곧 그를 세계와 분리시켜 끌어냈다는 뜻이다.
즉, 셰흐가 개방한 차크라를 강제로 멈춰 버린 것이니, 무림인으로 치자면 단전이 박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셰흐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존재 그 자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을, 셰흐의 몸이 견뎌 내지 못한 것이다.
카랑.
셰흐가 쥐고 있던 곡도와 단검 역시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커헉.”
다시 한 번 셰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손빈을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빈을 바라보는 셰흐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손빈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내 힘을…….”
“글쎄요.”
손빈은 나지막이 말했다.
셰흐는 분명 흐름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무수하고 끝없는 흐름들 가운데서 손빈이 셰흐를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의(惡意)였다.
서장의 대마정에서 보았던, 실낱같이 가늘고 오래된 흔적처럼 흐릿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놓칠 수가 없는 그 아득한 심연의 악의가, 셰흐의 흐름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슥.
손빈은 눈을 들어 셰흐를 보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셰흐의 눈빛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손빈은 말해 주지 않았다.
설령 알려 준다 해도 셰흐는 결코 납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니까.
“말도, 안 된다.”
셰흐는 비틀거리며 신음처럼 내뱉었다.
“이럴 리가 없어. 나는 은밀 교단의 셰흐다. 위대한 신의 뜻을 받아…….”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황 방주의 통역을 듣던 손빈이 문득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신의 뜻이.”
여전히 서늘한 시선으로 손빈은 말했다.
“아마도 당신과 함께 있지 아니했던 모양이지요.”
으득.
셰흐는 이를 갈았다.
“감히 이교도 따위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셰흐가 말했다.
“어찌 위대한 신의 뜻을 입에 담느냐? 모든 것을 지으신 위대한 신께서는 결코…….”
“왜 안 됩니까?”
손빈은 가볍게 웃었다. 어딘지 공허한 그 웃음 끝에, 손빈이 말했다.
“그 ‘위대한 신’이 모든 것을 지었다면, 내 안의 이 의분(義憤) 또한 그가 준 것일 텐데요.”
셰흐의 눈썹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던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크헉.”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셰흐는 허리를 접으며 고통스러운 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하지만 손빈은 더 이상 셰흐를 보지 않았다. 손빈은 고개를 돌려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는 제국의 장군, 바하두르를 향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바하두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빈이 말했다.
“민간의 학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심각한 중죄입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국민이라면.”
손빈의 시선은 셰흐를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크크크.”
바하두르는 웃었다. 그리고 몸을 세워 손빈을 내려다보았다.
짝, 짝, 짝.
“놀랍군.”
두 손을 마주치며 바하두르는 감탄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란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바하두르의 입가에 어린 웃음은 바로 조소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한 자를 존중하지. 그러니 지금은 네 마음대로 지껄여도 좋다. 그것이 승자의 특권이니까.”
바하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네가 강한지는 잘 모르겠군. 네가 셰흐를 꺾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거든. 그래서인지 별 감흥이 없어.”
손빈을 향한 바하두르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고하건데, 너무 까불지 않는 것이 좋다. 너의 그 재주 따위는, 제국의 강대한 무력 앞에서는 티끌만도 못하니까.”
아득.
바하두르는 이를 갈았다. 조소 같은 건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눈앞의 손빈 탓에 바하두르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으니까.
셰흐만 성공했다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다. 그가 손빈을 죽이는 순간 노군이 달려들었을 것이고, 숨어 있던 세 수하가 노군의 텅 빈 등을 유린했을 테니까.
그러면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끝났을 것이다. 이곳 영주의 목줄을 틀어쥘 최고의 소재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셰흐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 짜증 나는 상황을 뒤엎을 방법은 없다. 그러니 바하두르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흘, 아까도 말했지만.”
분노한 바하두르에게 대답한 사람은 손빈이 아니라 노군이었다.
“넌 대체 뭘 믿고 이 상황에서도 큰 소리를 치는 거냐? 제정신이 아니냐? 처돌았어?”
노군은 화를 내며 말했다. 황 방주는 슬그머니 ‘아까도 말했다’는 건 빼고 통역했다. 그때 미처 통역을 못 했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모욕에 굳어지는 바하두르 장군을 보며 노군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숨어 있는 놈들 믿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바하두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에이, 설마요.”
서린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노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또 있겠지요. 세 사람이 숨어서 우리를 노리는 건 아까부터 저도 알고 있었는데, 그런 뻔히 보이는 술수를 믿고 저러겠어요?”
그 말은 노군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황 방주는 굳이 통역했다. 점차 일그러지는 바하두르의 표정이 그로서도 새삼 통쾌했다.
노군은 바하두르의 반응에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쯧, 진짜 그건가 보다.”
그 노골적인 조롱에도 불구하고 바하두르는 구겨진 표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기껏 주의를 끌었더니…….’
이 쓸데없는 대화를 계속한 것은 오직 저들의 주의를 끌어 수하들의 습격을 보다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군이 이미 수하들의 은신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틀렸군.’
이젠 강공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비록 은신이 탄로 났다지만 수하들의 실력이라면 자신이 몸을 빼낼 틈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슥.
바하두르가 손을 들어 수하들에게 막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웃!”
짧은 신음과 함께 단번에 손빈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노군을 향해 외쳤다.
“어르신! 서린아!”
“오냐!”
아마 부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노군의 표정 역시 벌써 굳어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두운 숲 속 이곳저곳을 빠르게 살폈다.
“나도 느꼈어요!”
서린 역시 그렇게 외치고는 노군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바하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슥.
품 안으로 바하두르가 막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콰직.
섬뜩한 소리가 숲의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신음이 그 뒤를 이었다.
“끄어어어억.”
숲 속에서 들려온 그 신음은 곧 사라졌다. 그러나 바하두르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신음 소리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우직, 쿵.
“아악!”
이번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서린아!”
탓.
노군은 낮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손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린 역시 지체 없이 황 방주를 안고 훌쩍 날아 손빈 옆에 내려섰다.
스릉.
차가운 소령의 칼날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손빈 옆에 선 노군이 검을 뽑은 것이다.
“……으아아악.”
멀리서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바하두르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 신음 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두운 숲 속에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은 것이다. 밤새의 울음소리는커녕,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휙.
그때, 무엇인가 공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바하두르는 깜짝 놀라며 그것을 쳐다보았다.
퍽.
그것은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공터에 떨어졌다. 달빛에 드러난 그 질척한 것의 정체를 깨달은 바하두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바하두르의 수하였던 자의 잔해였기 때문이다.
“조심해!”
손빈의 경고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날아든 잔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바하두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겐 너무나 다행히도, 손빈의 경고는 바하두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훅.
“허억!”
바하두르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그의 눈앞에서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셰흐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바하두르는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모습에 경악했다.
“끄어어.”
고통스러운 신음이 셰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거대한 짐승의 송곳니는 셰흐의 목과 어깨, 그리고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신이시여…….”
자신도 모르게 바하두르는 중얼거렸다.
거대한 짐승이 눈앞에서 셰흐를 물어뜯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커다란 몸집과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거대한 앞발, 그리고 하얗게 번득이는 치명적인 송곳니.
온몸의 검은 털이 달빛아래 윤기를 흘리는 그 짐승은 단번에 셰흐를 삼킬 정도로 커다란, 검은 대호(大虎)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노군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서린 역시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한다.
황 방주는 아예 질린 얼굴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 방주 역시 알고 있었다.
크르르르.
거대한 몸집과 비정상적으로 크게 찢어진 아가리, 그리고 어둠 속에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
비록 모습은 서장의 마물들과 달랐지만 눈앞의 이 짐승은 분명 마물(魔物)이었다.
(작가의 말)
마물: 나 불렀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