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0)
낙향문사전-40화(40/494)
제40화. 세 번째 생사결(生死決)2014.01.18.
옥룡은 몸을 돌렸다. 뒤에 손빈이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사자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설원 위에 선 사자혁의 뒤로 펼쳐진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 건 바로 나인데…….”
쓰디쓴 미소를 피어 올리며 옥룡이 말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파락.
옥룡은 부채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마치 정말로 부끄러워 숨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사자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꽃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옥룡에게서 천천히 움직여 손빈을 향했다.
“어떻게.”
손빈에게 사자혁이 물었다.
“그 검을 네가 펼쳐 냈느냐?”
한쪽 무릎을 꿇고 아직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던 손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원을 짚고 있는 손이 차갑다.
“내가 펼쳐 낸 것이 아니오.”
손빈의 대답에 사자혁의 한쪽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옥룡도 시선을 돌려 손빈을 향한다.
“나는 그저, 흐름 위에 검을 실었을 뿐이니까.”
사자혁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옥룡의 눈살 역시 일그러진다. 손빈의 대답이 가지는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손빈의 옥룡역린참은 우연도, 흉내도 아니었다. 비록 자세는 다르다 해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옥룡역린참이었다.
“현천결을 익혔더냐?”
사자혁이 묻는다.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손빈은 사자혁을 보았다.
“내가 아는 건 그저 대강일 뿐이니까. 현천대강결 말이오. 당신도 알다시피.”
“현천대강결.”
사자혁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손빈의 말을 한 자 한 자 되뇌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강(大綱)이라 하였으니 곧 커다란 흐름이라는 뜻인가……. 그랬군.”
사자혁은 한탄하듯 나지막이 말했다.
“무도는 깊고도 현묘하여 그 길을 걸음에 있어 한 치라도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제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여겼더니, 너에게는 커다란 흐름을 좇으면 작은 것들은 저절로 따르기 마련이었던 것인가.”
손빈은 사자혁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문자적인 뜻이야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사자혁 본인만이 알 것이다.
“네가 펼쳤던 옥룡역린참은.”
사자혁이 다시 물었다.
“일초 반식으로 끝났다. 흐름을 보았다면 어째서, 마지막 초식을 완성하지 않았더냐?”
손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흐름은 그곳에서 끝나 있었소.”
“흐름이 끝나 있었다?”
반문하는 사자혁에게, 손빈은 대답했다.
“뭐랄까, 끝이라기보다는 어떤 매듭 같은 것이었소.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문사로서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눈살을 찌푸리던 손빈이 말을 이었다.
“옥룡역린참은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이미 완성된 것이었소. 그래서 멈췄소. 흐름은 이미 하나의 매듭을 지으며 끝나 있었으니까.”
“그런가?”
사자혁이 말했다. 묵직한 그의 음성에 허탈함 같은 공허함이 묻어났다.
“그랬던 것이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사자혁이 다시 손빈을 향했다. 그리고 말했다.
“잘했다.”
그건 그저 짤막한 단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손빈에게는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안심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이제 사자혁이 나선 것이다.
“세 번의 검로를 내게 보여 주었으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자혁은 손빈에게 말했다.
“네게 세 개의 초식을 보여 주마. 마지막 초식은 여전히 미완성이지만…….”
사자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옥룡을 향한다.
“어쩐지 지금은 펼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잠깐만.”
손빈의 목소리에 사자혁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한다.
“사 소저는, 살아 있을 거요.”
옥룡의 눈썹이 꿈틀 경련한다. 그러나 사자혁의 눈은 지긋이 손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공격했을 때, 나는 그 공격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소.”
고개를 돌린 옥룡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손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손빈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 소저가 결국 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소. 비록 막지는 못했지만…….”
입술을 깨무는 손빈의 표정이 자책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고, 손빈은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손을 뻗어 그녀에게 건넬 수 있었소.”
“무엇을?”
사자혁이 물었다.
“환단이오.”
손빈이 답했다.
“당신이 내게 주었던, 내 목숨을 한 번은 살려 줄 거라는 그 환단 말이오.”
산을 오르며 사자혁이 호아의 손잡이를 품에 넣으라 했을 때 손빈은 그가 자신에게 주었던 환단을 떠올렸다.
사천의 맹호와 생사결을 벌이기 직전에 받았던, 품에만 품고 있어도 되고 정말 최후의 순간에 삼킨다면 한 번은 목숨을 구해 줄 것이라는, 그 환단을 손빈은 호아검의 손잡이와 함께 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하, 환단?”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옥룡이 말했다.
“검희의 빙검에 가슴을 꿰뚫리고도 환단 정도에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미 혈맥이 터져 피를 쏟으며 죽었을 것이다.”
“당신도 멀쩡하지 않소?”
옥룡을 똑바로 쳐다보며 손빈이 답했다. 백로가 남겼던 옥룡의 상처는, 붉은 혈흔만이 보일 뿐 피는 멈춘 지 오래였다.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사 소저도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저 사람이 인정한 유일한 천재니까.”
손빈의 눈빛은 사자혁을 똑바로 향했다.
“그렇지 않소?”
“맞다.”
사자혁이 답했다.
“이제 더 이상 유일하지는 않지만.”
사자혁이 나지막이 읊조린 그 말이 손빈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일은 끝난 것이다.
‘아니, 끝난 게 아니라 이제야 제대로 돌아온 것인가?’
손빈은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지켜보는 것뿐이다.
휘이잉.
설원 위에 바람이 불었다. 하얀 눈가루가 날아오르며 환상처럼 사방이 반짝거린다. 그러나 마주선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마주서고 말았네.”
옥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인의 혼을 빼 놓을 것 같은 부드러운 미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옥룡역린참 이후, 다시는 너와 무공을 겨루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나 역시.”
사자혁이 말했다.
“파월삼식을 완성하기 전에는 너와 비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아니, 비무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너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천하에 오직 너만이, 파월삼식의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으니까.”
“흥, 파월삼식의 의미?”
조소 섞인 목소리로 옥룡이 답했다.
“그야 당연히 알지. 그런 유치한 검법의 의미 따위. 무정검이 아닌 다정검, 패도검이 아닌 군자검, 그것도 아니면 불살검 정도 되려나? 아, 불살은 아니겠군. 이미 황학과 맹호를 죽여 버렸으니까.”
팔락.
옥룡의 부채가 가볍게 펄럭였다.
“너는 황학과 맹호를 인정하고 있었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그들이 감히 너와 나에게 견주지 못함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자혁을 노려보며 옥룡은 말했다.
“황학은 평생 도를 추구하며 고고하다 일컬어져 왔지만, 네가 지극한 도에 한발 먼저 다가선 것을 아는 순간 그 자랑하던 평정을 잃었다. 맹호는 더 쉬웠지. 너는 나름대로 그를 인정한 것이었겠지만, 그가 느낀 건 다만 끝없는 좌절과 불안과 질시뿐이었거든. 두 사람을 움직이는 건 단 몇 마디 말로도 충분했어.”
옥룡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건…… 글쎄? 내가 예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을까?”
“너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자혁이 말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옥룡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왜냐고?”
피식 옥룡이 웃음을 흘렸다.
“왜냐고 물었나?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옥룡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너와 나,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증명하기 위해서다! 네가 선택한 길과 내가 걸어온 길, 날을 없애 버린 너의 파월과 날을 세운 나의 옥선,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밝히기 위해서다! 무인에게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수 있나? 무인에게…….”
팔락.
쏘아 내듯 뱉어 내던 옥룡은 옥선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이외의 이유가 있을 수 있나?”
옥룡의 눈빛은 마치 비수를 쏘아 내는 것 같았다.
“그런가?”
사자혁은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때가 되었군.”
슥.
파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사자혁은 말했다.
“길었던 비무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흥.”
옥룡은 조소했다.
“이미 들었을 텐데? 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싸늘한 눈빛으로 옥룡은 사자혁을 보았다.
“그런데도, 나와 비무를 하겠다는 건가?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을 꿇는다면.”
오만한 눈빛으로 옥룡이 말했다.
“너를 살려 줄 수도 있어. 네 피에 흐르는 천향루를 없앨 수 있는 건, 천하에 오직 나뿐이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나?”
사자혁이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 따위, 이미 이 세상엔 없다고.”
“그래, 그랬지.”
옥룡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쁘네.”
사자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옥룡은 말했다.
“네가 여전히 그대로여서. 유치한 환상에 빠진, 어리석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나 역시 기쁘다.”
사자혁이 말했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것을, 네게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할 수 있으면.”
옥룡이 말했다.
“해 봐.”
후우웅.
그가 들고 있는 옥선에서 강렬한 기세가 뻗어 올랐다. 마치 수없이 많은 칼날이 그가 들고 있는 푸른 부채에서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자혁은 그 기세를 담담히 마주하고 있었다.
“그거 알고 있어?”
기세만큼이나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옥룡이 말했다.
“이곳 사람들이 너를, 혈마의 재래라고 부른다는 것.”
“혈마?”
“그래.”
옥룡은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말했다.
“네가 지나온 길이, 예외 없이 온통 피로 물들었으니까.”
쉬이익.
옥룡이 부채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닿을 리 없는 거리였지만, 옥선에서 뻗어 나간 기세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찢으며 사자혁에게 짓쳐 들었다.
카앙!
옥선의 기세가 사자혁의 파월에 가로막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옥룡의 손에서 쏘아진 무수한 빙혼지가 사자혁의 틈을 노린다.
“전부 죽었거든.”
후우욱.
사자혁의 파월이 기세를 뿜어내며 사선으로 허공을 그었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폭음이 설원을 울렸다.
콰과과광!
“네가 만난 사람들, 네가 머물렀던 곳들, 전부 말이야.”
옥룡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울려 나왔다. 어느새 몸을 솟구친 그가, 사자혁을 향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쉬이익.
섬뜩한 기세와 함께 옥룡의 부채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에 맞서듯, 사자혁의 흑색 대도 파월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딛고 선 설원이 다시 한 번 요동한다.
‘윽.’
흔들리는 발밑을 느끼며 손빈에게 불안이 엄습했다.
‘설마, 또…….’
이미 한번 붕괴되었던 설원이다. 구조적으로 취약해져 있을 것이 당연하다.
이대로 계속 충격을 받는다면 또다시 붕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니, 반드시 붕괴할 것이다.
“네가 죽였나?”
“글쎄? 적어도 내가 한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하지.”
피피핑.
옥룡의 빙혼지가 허공을 갈랐다. 사자혁의 파월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른다.
콰앙!
“아, 하지만 전부는 아니군. 아직 죽지 않은 자들도 있으니까. 영리하기도 하지. 자신이 선 곳이 피의 길이라는 걸 알고 재빨리 몸을 뺐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가진 건 아니거든.”
쉬익.
옥선이 허공을 날았다. 마치 허공을 베고 지나가는 푸른 검날처럼, 옥선이 기세를 흩뿌리며 사방을 가른다.
그리고 그 푸른 궤적을, 흑색 대도 파월이 위에서 아래로 잘라 낸다.
콰앙!
또 다른 폭음이 설원을 울렸다.
“그래도 어떤 마을은 헛된 저항을 선택하기도 했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네가 도시에 들르지 않은 건 안타까운 일이야. 어쩌면 천하를 진동시킬 피의 전설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하긴, 누가 얼마나 죽건 너도 별로 상관은 하지 않았지?”
휙.
사자혁의 얼굴을 향해 옥선이 똑바로 날아들었다. 사자혁은 가볍게 고개를 움직여 그 궤적에서 벗어났다.
그야말로 머리카락 같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사자혁은 허공을 가르는 옥선의 기세를 비껴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뺨에는 기어이 가느다란 혈흔이 그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여전하네.”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옥룡이 말했다.
“피를 보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는 것. 정말 매력적이라니까?”
쉬익.
파월의 기세가 허공을 격하고 옥룡이 선 공간을 갈라 나갔다.
옥룡은 살짝 한 발 움직여 그 기세를 피해 냈지만, 그의 하얀 뺨에 혈흔이 그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처럼 말이야.”
혈흔을 따라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옥룡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살짝 찍어 냈다.
“그래, 결정했어.”
옥룡의 혀가 그 피를 핥았다.
“다시 너를 속박하고 제압하게 되면, 네 별호를 혈천마제라 부르도록 하지. 가는 곳마다 비처럼 피를 내리는 피의 무제. 혈천마제 말이야.”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사자혁은 흑색 대도 파월을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우우웅.
파월이 나지막한 울음을 운다. 지켜보는 손빈이 오싹할 정도의 강맹한 기세가, 마치 온 설원을 메울 것처럼 파월로부터 줄기줄기 뻗어 나가고 있었다.
“파월삼식이, 네 목숨을 가져갈 테니까.”
“그거 정말 짜릿한 말인데?”
키이이잉.
옥룡의 손에 들린 푸른 부채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칼날보다 예리한 기세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다. 지켜보는 손빈이 피부를 베일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파직, 파직.
두 기세가 충돌하며 허공중에 빛을 반짝인다. 그저 기세만으로, 사방에 가득한 작은 눈가루들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내가 이미 말했지?”
붉은 옥룡의 입술이 마치 유혹하듯 속삭였다.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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