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11)
낙향문사전-411화(411/494)
411화. 검은 마신
광활한 회랑에 일행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여긴 어딜까요?”
황 방주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손빈 일행이 들어선 곳은 돌로 된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첫인상처럼 오래된 신전 같기도 하고, 혹은 커다란 궁전의 내부 같기도 했다. 머리 위는 높아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공간 또한 대단히 넓었다. 회랑을 따라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대한 돌기둥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실내라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지하로 내려왔으니 실내건 실외건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뭐, 적어도 자연적으로 생긴 건 아니구만.”
노군의 말에 황 방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매끈한 돌바닥과 커다란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이 넓은 회랑이 저절로 생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저건 무슨 빛일까요?”
황 방주가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고색창연한 커다란 창들을 통해 흐릿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르지. 무슨 빛인지.”
노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햇빛도, 달빛도, 등불도 아닌 그것은 마치 저녁 어스름처럼 흐릿하고 스산했다. 어쩌면 바깥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저 창이 스스로 빛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보다 자꾸 물어보지 마라. 너나 나나 어차피 여긴 처음인데 왜 자꾸만 물어봐?”
눈살을 찌푸리며 노군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긴장하고 있는 판국이니 신경이 곤두설 만도 했다.
“아니, 그래도 저보다 식견이 높으시니 뭔가 좀 아시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한평생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 했는데 식견은 무슨.”
노군이 짜증을 섞어 말했다.
“오래 살면 느는 건 세상에 못 볼 꼴, 더러운 꼴 참 많다는 생각뿐이다. 식견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혹시 뭐 튀어나오는 거 없나 주변이나 잘 살펴.”
“네.”
조금 풀이 죽은 황 방주는 짐짓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광활하기까지 한 회랑과 그 너머의 어둠뿐이다. 게다가 노군 같은 고수가 자신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은 뻔하지 않는가?
저벅, 저벅.
침묵 속에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 메아리치는 발소리가 오히려 더 스산하게 느껴지는데, 문득 황 방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튀어나온다고 하시니 말인데…….”
황 방주가 무심결에 말했다.
“함정 같은 건 없을까요?”
탁.
노군의 발이 멈췄다. 바로 뒤를 따르던 황 방주가 노군의 등에 부딪힐 뻔했다. 발길을 멈춘 건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과 검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척이라면 얼마든지 감지할 수 있지만 기계적인 함정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작동된 후에나 알아차릴 수 있다.
“아닙니다.”
손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앞에서 걷고 있던 그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은 함정이나 덫이 필요한 미궁도, 지하 감옥도 아닙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손빈은 커다란 돌기둥을 올려다보았다. 장엄하게 솟아오른 돌기둥은 까마득히 높은 천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스스로의 무게조차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끝없이 늘어선 돌기둥이나 고색창연한 창들까지 하나도 무너지거나 부서진 것이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 까마득한 옛날에 버려졌을 뿐이다.
“아마도 이곳은 신전이나 혹은 황궁으로 쓰이던 곳 같습니다.”
“신전이나 황궁?”
노군의 반문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노골적으로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고, 심지어 신성함마저 느껴지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런 목적을 가진 구조물이라면 종교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경우밖에 없겠지요.”
노군도, 황 방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런 곳에 함정 같은 것이 있진 않을 것입니다.”
손빈의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노군은 문득 다른 경우가 떠올랐다.
“만약 여기가, 무덤이라면?”
그 말에 일행 모두가 움찔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이 거대한 무덤 같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도굴꾼을 막느라 온갖 함정이며 덫을 만들기도 하잖냐? 건드리면 바닥이 열리거나, 천장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커다란 돌이 굴러오거나…….”
“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손빈은 잠시 당황했다. 자신의 말처럼 종교적인 건축물에는 분명 황제나 왕의 무덤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런 묘실엔 도굴을 막기 위한 수많은 함정과 덫이 있기 마련이다. 일행은 일제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손빈을 쳐다보았다.
“크흠.”
손빈은 짐짓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묘실로 직접 들어서지 않는 이상은 괜찮을 겁니다. 물론 신전이나 황궁에도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한 대비가 되어 있겠지만 그건 덫이나 함정이 아니라…….”
―끼아아아아.
섬뜩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고, 말하던 손빈도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제국의 수호 위사나 황궁의 금의위 같은 수호자들이지요. 바로 저것처럼 말입니다.”
“가자!”
노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행은 몸을 날렸다. 노군이 손빈을 한 팔로 안고 앞으로 질주했고, 서린이 황 방주를 뒤에서 두 팔로 붙잡았다. 사수연과 당월아, 그리고 검을 품은 검희도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휙, 휘릭.
새파랗게 질린 황 방주와 함께 얼마나 질주했을까? 손빈 일행은 넓은 광장 같은 곳에 도착했다. 방금 지나온 회랑과 달리 푸른 광원이 여기저기서 빛을 발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그 멋진 광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윽.”
노군이 신음을 내뱉었다. 광장 맞은편 커다란 문 앞에 검은 안개, 아니 시커먼 망령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검은 안개에 삼켜진 사람의 형체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경계조차 희미해서 무엇이 사람이고 어디가 안개인지조차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끄어어어.
‘그것’이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 마신이로구나.”
비록 손빈처럼 푸른 기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건 너무나 분명했다. 일렁이는 검은 안개와 붉게 빛나는 눈은 이미 노군도 한 번 보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노군은 손빈을 돌아보았다.
슥.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군의 시선이 곧 당월아를 향했다.
“월아야. 한번 건드려 봐라.”
노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월아의 철전이 허공을 갈랐다.
피피피핑.
건드린다기엔 지나치게 파괴적인 힘을 실은 철전은 날카로운 기세로 검은 마신에게 짓쳐 들었다. 그러나 그 철전들은 허망하게 마신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마치 진짜 안개를 통과하듯이.
카가가강.
철전이 마신의 뒤편에 있는 거대한 문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당월아는 검은 마신을 주시하며 가만히 손을 폈다.
후우웅.
푸른 기운을 머금은 철전 다섯이 당월아의 손바닥 위에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핑.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를 품은 철전은 완만한 원을 그리며 검은 마신을 둘러쌌다.
웅, 웅, 웅.
철전이 마신 주위를 회전하며 소리를 냈다. 그러나 검은 안개 같은 마신은 그저 붉은 눈동자를 일렁일 뿐이었다. 면사 아래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당월아의 붉은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하!”
피피핑.
당월아가 손을 쥐는 것과 동시에 철전이 즉시 검은 마신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냥 지나칠 경우도 이미 예상한 듯, 철전은 작은 원을 그리며 끊임없이 검은 마신의 이곳저곳을 두들겼다. 하지만 검은 안개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독기공을 머금은 철전은, 그 지독한 기세가 허망하게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내가 해 볼게.”
탓.
사수연이 짧게 말하며 검은 마신을 향해 짓쳐 들었다. 당월아는 즉시 철전을 뒤로 물렸다.
우우웅.
번뜩이는 사수연의 미명이 푸른 기운을 머금고 검신 주위로 미세하고 날카로운 얼음 칼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타하아!”
콰과과곽.
푸른 기운을 머금은 미명의 칼날이 검은 마신을 베어 갔다. 그러나 그녀의 검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카아앙.
그녀의 검이 남긴 여파가 뒤쪽의 문과 충돌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나 검은 안개의 마신에게는 아무런 영향조차 주지 못했다.
―끄어어억.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예전 서장에서 내력으로 검은 안개를 밀어낼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탓.
오싹한 한기가 등을 달리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사수연은 즉시 몸을 뒤로 빼냈다. 본래의 자리에 가볍게 내려앉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나 당월아의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만 확인한 셈이다.
“……설마, 진짜 망령인가?”
노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른 일행들도 움찔 어깨를 떨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이곳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망령이나 원혼이 나온다 해도 납득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노군 자신도 아까 이곳이 ‘무덤’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에이, 그럴 리는 없…….”
무심코 옆을 돌아보던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뭐하고 있는 거냐?”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과 황 방주는 물론이고 검희까지 뒤로 물러서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서로 거리가 가깝다.
“아. 저, 그게…….”
어색한 표정으로 사수연이 말했다. 그녀가 차마 잇지 못하던 뒷말을 서린이 해 줬다.
“귀신은 싫어요.”
서린이 몸을 부르르 떤다. 노군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서린이야 애니까 그렇다 쳐도 너희는…….”
서린은 아직 어리고 황 방주는 진작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사수연이나 당월아, 게다가 무표정한 검희까지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을 보니 노군은 기가 찼다.
“……우리 공격은 아무 효과도 없었어요.”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비켜서 있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대응이에요.”
그 똑똑하면서도 한심한 변명에 노군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한번 지나가 봐. 어쩌면 서로 영향을 못 끼치는 건지도 모르잖아.”
당월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번에도 서린이 대신 대답했다.
“우웩. 싫어요!”
서린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노군은 혀를 찼다.
“무당의 정통 도가 내공을 익힌 놈이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잡귀를 쫓아내고 정법을 세워야 할 도사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
“무서운 게 아니라 싫은 거라고요. 그리고 저 도사 아닌데요? 형처럼 서원 선생님 할 거라고요.”
“얼씨구?”
무당에서 들었다면 발칵 뒤집어질 일이다. 현 무당 장문인의 사숙이자 무림의 배분으로는 사실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서린이 폭탄선언을 한 셈이니 말이다. 노군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손빈을 돌아보았다.
“빈아.”
심각한 표정으로 노군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긴 네가 해야 할 것 같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앞으로 나갔다.
저벅, 저벅.
노군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할아버지도 하기 싫으면서’라고 중얼거리는 서린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하면서.
―끼아아아아.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군을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손빈은 가만히 그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우우웅.
검은 마신의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뒤덮은 것은 바로 공포와 탐욕이었다.
쿠륵, 쿠르륵.
당월아와 사수연의 공격에도 반응이 없던 검은 안개가 급격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혹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검은 안개는 손빈을 향해 출렁거리고 있었다.
스릉.
손빈이 백로를 꺼내 드는 순간 검은 안개가 움찔했다. 지켜보던 노군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검은 안개 같은 마신은 손빈을 노골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은 마신은 도망치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눈동자를 더욱 세차게 일렁이며, 손빈을 향한 탐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룡과 마응이 비록 짐승으로 전락했다지만 이 검은 안개 같은 마신에 비하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였다.
슥.
손빈은 백로를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백로의 쭉 뻗은 칼날이 푸른빛을 받아 번쩍였다.
―끄륵, 끄르륵, 끄아아악.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 거북한 소리가 검은 안개 속에서 피어올랐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듣기 역겨운 신음에 불과한 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원통함과 노골적인 욕망은 너무나도 분명히 전해졌다.
“……아마도 이것은.”
손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검은 안개처럼 꿈틀거리는 마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이제껏 다른 마신들을 대했던 것과 달리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당신이 선택한 결과겠지요.”
후우욱.
푸른 불길 같은 기운이 손빈의 몸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백로의 칼날이 파랗게 빛을 뿜었다. 그것은 검기도, 현천대강결도 아니었다.
“그러니 저도.”
손빈이 검은 마신을 직시하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슥.
숨을 고를 필요도, 주저할 이유도 없었다. 손빈은 그대로 한 발을 내디디며 백로를 그어 내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악.
뒤로 움찔 물러서는 듯하던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손빈을 향해 덤벼들었다. 자신을 베는 백로의 궤적을 피하는 동시에, 마치 그물처럼 손빈을 뒤덮으려 한 것이다. 탐욕으로 일렁이는 마신의 붉은 눈동자가 손빈을 향해 폭풍같이 짓쳐 든다.
“빈아!”
놀란 노군이 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 순간 백로의 칼날은, 이미 검은 안개를 정확히 둘로 가르고 있었다.
쩡.
무언가 깨지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와 함께 검은 안개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파슥, 파스슥.
숯이 타들어 가듯, 허공에 멈춰 버린 검은 안개에 붉은 빛이 번져 갔다. 그리고 이내 하얗게 변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 일검에 마신이 끝장난 것이다.
탁.
손빈은 백로를 갈무리했다. 이 안개 같은 마신은 아마도 황후 사라스바티가 말했던 ‘심연의 어둠과 동화된 마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수연이나 당월아의 공격이 먹히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그만큼 손빈의 검 앞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웅.
푸른 불길의 강이 손빈을 향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 같은 마신의 잔해에서 손빈에게로 쏟아져 들어가는 푸른 기운. 그것은 이미 다른 일행들에게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손빈에겐 아니었다.
“왜 그래?”
노군이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조금 전 손빈은 분명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입을 다물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아니, 아닙니다.”
손빈은 가만히 손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손안에서 반짝이는 푸른 빛무리들은 점차 흐릿해지더니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건…….’
조금 전 손빈은 검은 안개 같은 마신의 기억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다른 세상의 기이한 기억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손빈이 본 것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손빈이 천천히 그 기억의 의미를 곱씹고 있는데 문득 황 방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제 끝난 건가?”
황 방주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빈을 보고 있었다. 손빈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노군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끝은 무슨. 이제 진짜가 남았잖냐?”
슥.
노군의 시선을 따라 모든 사람이 눈을 들었다. 복잡한 원들이 새겨진 거대한 회색의 문이 그 육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천마와, 그가 연 나락의 문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단호한 눈빛으로 손빈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손빈의 눈동자에 무언가 혼란이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가의 말)
드디어 최종 보스 방에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