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12)
낙향문사전-412화(412/494)
412화. 천마 현현(天魔 顯現)
검은 안개 같은 마신이 사라지고, 손빈은 복잡한 원들이 새겨진 커다란 회색의 문 앞에 다가섰다. 그 문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을 손빈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사수연의 미명과 당월아의 철전이 격돌한 흔적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슥.
고개를 들어 문을 올려다보던 손빈이 조심스레 손을 댔다. 순간 그 큰 문이 소리도 없이 위로 열렸다. 그리고 일행은 부드러운 바람을 느꼈다.
“어라? 밖인가?”
황 방주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도 당연했다. 문 너머에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이제껏 지나온 길을 생각해 보면 이곳은 여전히 지하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문을 지나쳤다. 그리고 자신들이 확 트인 드넓고 환한 공간에 들어섰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와아. 멋있어요!”
서린의 감탄 소리와 함께 황 방주도 입을 딱 벌렸다. 그곳은 정말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울창하게 자란 크고 작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다채로운 색을 뽐냈다. 수로를 따라 맑은 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작은 새들이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그야말로 생명으로 충만한 장소였다.
“이런 멋진 곳이…….”
“가짜다.”
“네?”
황 방주는 놀란 표정으로 노군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노군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가짜라고. 새고, 나무고, 꽃이고, 보이는 것들 전부 다.”
“……이게 다요?”
그렇게 황 방주가 반문한 것도 당연했다.
“아니, 어떻게 이게 가짜…….”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 방주는 눈앞에 있는 화려한 꽃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황 방주의 손이 닿기 직전, 꽃이 흐릿해지더니 형체의 일부가 불분명해졌다. 마치 건드리면 안 된다는 듯이.
“헉!”
깜짝 놀란 황 방주는 화들짝 손을 뗐다. 그러자 꽃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 꽃을 황 방주는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환술의 일종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보이는 것들 중에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전부 가짜야. 그리고…….”
말하던 노군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여기도 밖이 아니라 실내고.”
“여기가요?”
황 방주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봐도 머리 위는 그냥 푸른 하늘처럼만 보일 뿐이다.
“저길 봐.”
노군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황 방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방금 지나 온 문이 어느새 닫혀 흔적조차 없는 것과, 그 벽이 완만하게 휘어지며 머리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맙소사. 그럼 여기가…….”
빛이 가득한 이곳은 반구형의 천장을 가진 엄청나게 넓은 실내 공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생동감 넘치는 정원은 모조리 가짜고 말이다. 황 방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까 지나온 황량한 계곡이나 적막한 회랑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흥.”
노군은 코웃음을 흘렸다.
“천마 놈, 취향 하고는…….”
그 말에 황 방주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들이 곧 마주해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새삼 깨달은 것이다. 뒤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격렬하게 솟아올랐지만, 지나온 문은 이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저건 뭐죠?”
문득 서린이 말했다. 뒤를 흘끔거리던 황 방주는 서린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이 공간의 중앙,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 무언가 선 같은 것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선이 사실은 기둥 형태의 구조물이라는 건, 서린의 말을 들은 후에나 알 수 있었다.
“기둥 비슷한데, 용케 안 무너지고 있네요.”
“저게 뭔진 몰라도.”
노군이 바닥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것 같다.”
황 방주는 발밑을 보았다. 이상한 문양으로 뒤덮인 길이 중앙을 향해 뻗어 있었다. 돌이 아니라 금속, 그것도 황 방주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지?”
노군의 말에 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하는 손빈의 표정이 사뭇 심각한 것을 노군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천마와, 그가 열었다는 나락의 문을 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일행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광경은 정원의 산책로를 걷는 듯한 정취를 전해 주었지만, 이것들 중에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스산하기까지 했다.
푸드득.
문득 들려온 소리에 황 방주는 고개를 들었다. 몇 마리의 작은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생각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황 방주는, 문득 새들의 색이 변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헉!’
날아가던 새들의 깃털색이 순식간에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들도 그 색이 짙어지더니 한결 울창하게 변했다. 마치 갑자기 여름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정원 전체의 모습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어, 어르신 이게…….”
황 방주가 노군에게 바싹 붙었다.
“쯧.”
노군 역시 그 변화를 알아차렸지만 그저 혀를 찼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락, 사락.
어느새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바뀌어 있었다. 녹음은 더더욱 짙어지고 꽃들이 사방에 만발했다. 바람과 빛조차 달라져서, 한여름의 생기가 온 사방에 가득하다. 그 아름다운 변화에 서린이 감탄을 흘리고, 사수연이나 당월아 역시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아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감탄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일행이 걸어가는 것과 함께 정원의 모습은 조금씩 계속 변해 갔다. 마치 누군가 계절을 빠르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팔락.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고, 색색의 단풍이 나무를 물들였다. 정원에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울창한 나무는 곧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새들의 지저귐은 사라졌다. 하얀 눈이 거짓말처럼 사방을 뒤덮고 황 방주의 입에서 하얗게 김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일행은 드디어 이 거대한 공간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허어.”
황 방주는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마치 커다란 접시를 엎어 놓은 듯한 평평한 백색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온통 하얀 색에 주변이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는 그 구조물은, 말이 접시지 어지간한 삼층 누각 정도는 훌쩍 넘는 높이였다. 덕분에 그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장에서 뻗어 내린 기둥이 바로 저 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과, 그 기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 정도였다.
“올라가야겠죠?”
말 없는 일행을 대신해 황 방주가 노군에게 물었다. 천마를 대면한다는 긴장감 탓인지 다른 사람들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노군의 대답에 황 방주는 손빈을 돌아보았다. 손빈은 굳은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머금고 있던 미소도 지금은 없다.
저벅.
손빈이 먼저, 그리고 다른 일행이 뒤따라 계단을 올랐다. 노군 뒤에 바싹 붙어서 계단을 오르던 황 방주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
눈 아래 보이는 드넓은 공간이 온통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겨울이 끝나고 다시 봄이 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라져 황폐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황 방주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얼른 노군의 옷자락을 붙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헉, 헉.”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황 방주는 드디어 백색 구조물의 정상 가까이 이르렀다. 턱.
‘어…….’
마침내 정상에 발을 올린 황 방주는 눈을 껌뻑껌뻑했다. 짐작한 대로 하얀 구조물의 정상은 매우 넓었다. 그리고 천장에서 뻗어 내린 기둥 역시 이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기둥 아랫부분이, 그렇다 해도 황 방주의 머리 위 아주 높은 곳이었지만, 마치 뜯겨 나간 듯 끊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끊어진 부분에선 무언가 불길하고 섬뜩한, 새카만 안개 같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쩌면 저 기운이 이 장엄한 기둥을 망쳐 버린 것일까? 하지만 황 방주가 말도 못 하고 눈만 껌뻑껌뻑하게 만든 광경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락.
한 줄기 바람이 화려한 문양으로 수놓은 옷자락을 흔들었다. 기둥이 뻗어 내린 그곳에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마치 옥좌처럼 계단 위에 자리한 그 의자는, 대단히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커서 오히려 앉은 사람이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그 거대한 옥좌조차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왜 그래?”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부채 뒤에서 흘러나왔다. 경악으로 물든 모두의 표정을 즐거운 듯 바라보는 눈동자는 미녀의 그것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눈동자의 주인은 남자다. 더없이 아름답고 치명적인, 천외천이라 하는 외사에서도 또 다른 하늘이라 일컬어진 존재.
“설마, 모르고 있었나?”
옥빛 부채 뒤에서 가늘게 웃음 짓는 그 눈동자의 주인은 바로 천외사성의 한 사람, 전대 옥룡이었다. 휘이잉.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거대한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옥룡은 옥선으로 입을 가린 채 일행의 반응을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어, 저기.”
말한 사람은 황 방주였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 못 한 듯,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전대 옥룡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벌써 천마를 무찌르고 우릴 기다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지.”
대답은 노군이 했다. 노군은 씹듯이 내뱉었다.
“옥룡이 천마를 무찌르고 우릴 기다려? 차라리 저놈이 천마 편에 붙었다는 것에 내 전 재산을 걸겠다.”
“헉!”
황 방주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 전대 옥룡이 있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만일 그가 천마를 무찔렀다면 문 앞에 마신이 버티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차락.
옥선이 접히고 전대 옥룡이 얼굴을 드러냈다. 남자라도 반할 것 같은 그 아름다운 얼굴이 가볍게 헛웃음을 흘린다.
“오해가 있군. 나는 천마의 편 따위는 되지 않아.”
그 말에 황 방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속으로 ‘역시’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전대 옥룡의 붉은 입술이 속삭이듯 달싹였다.
“내가, 천마다.”
쿵.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진 듯,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휩쓸었다. 전대 옥룡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조금 전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노군과 손빈을 비롯한 일행 중 그 누구도 웃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웃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빙긋 웃는 표정으로 옥룡이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더없이 즐거운 듯 보였다.
“내가 천마가 되었지. 심연의 어둠이 씌운 굴레조차 벗어나지 못한 채, 까마득한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그 어리석은 놈을 대신해서 말이야.”
노래하듯 전대 옥룡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손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알고 있었지? 조금 전, 네 손으로 직접 옛 천마를 끝장내고 그의 기억을 보았을 테니까.”
굳은 표정의 손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대 옥룡의 낭랑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신위(神位)를 잃고 자신을 지켜 주던 마신에게 삼켜지는 모습이라니, 참으로 꼴사납더군. 그래서 수하 같은 것을 두면 안 되는 거다.”
전대 옥룡의 날카로운 미소가 그의 붉은 입술에 걸렸다.
“그래서 누군가를 믿으면, 안 되는 거야.”
슥.
차가운 전대 옥룡의 시선이 다른 일행을 향했다.
“어차피 너희도 날 믿지는 않았겠지만.”
“흥. 당연하지.”
노군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세상에 옥룡을 믿는 사람은 단 둘뿐이다. 천하의 바보이거나 아니면…….”
“그는.”
노군의 말을 손빈이 끊었다.
“어디 있습니까?”
손빈의 질문을 노군의 못 다한 말이 뒤이었다.
“……혹은 현천의 무제거나.”
“훗.”
전대 옥룡이 웃었다. 노군과 손빈, 당월아와 사수연, 그리고 서린과 검희의 시선 속에서도 전대 옥룡은 느긋하게 옥선을 쓰다듬었다.
“네가 그에 대해 묻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인지 노군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대 옥룡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거든. 예를 들어…….”
슥.
접힌 옥선이 톡 서더니 위를 향했다.
“작고 연약한, 자신의 힘으로는 걷지도 못하는 가녀린 여자라든가.”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기둥 사이, 마치 뜯겨난 것처럼 끊어진 부분에서 일렁이는 새카만 기운을 올려다보았다.
후우웅.
“……이런.”
노군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제야 황 방주도 볼 수 있었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새카만 기운에 가려 있던, 두 팔을 벌린 채 매달려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고개를 떨구고 붉은 옷자락을 힘없이 늘어뜨린 그녀는 바로 사자혁과 함께 먼저 떠난 여인, 혈봉 금사련이었다.
으득.
손빈은 이를 악물었다. 혈봉 금사련은 정신을 잃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애타게 기다리더군.”
웃음 섞인 전대 옥룡의 목소리가 일행의 귓가에 울렸다.
“눈앞에 사랑하는 정인(情人)이 있는데도, 오직 너만을 말이야.”
톡.
전대 옥룡의 옥선을 따라 커다란 옥좌 너머로 시선을 옮긴 황 방주는, 뻗어 내린 기둥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초췌한 모습의 귀견수라였다. 머리카락은 죄인처럼 풀어 헤쳤고 의복 또한 여기저기 찢어졌다. 그의 검은, 두 동강이 난 채 옆에 흩어져 있었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눈앞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은.”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옥룡이 말했다.
“정말이지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게다가 그 여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면…….”
옥룡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누구라도 저렇게 되지 않곤 못 견디겠지.”
마치 생명이 떠난 시체처럼, 고개 숙인 귀견수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귀견수라가 번쩍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검은 안개가 일렁였다. 그리고 혈봉 금사련이 움찔 경련했다.
“……아.”
그 가느다란 신음 소리는 어쩌면 오직 귀견수라에게만 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혈봉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귀견수라의 악다문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혈봉 금사련은 고통에 익숙하다. 아니,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작은 신음 소리 뒤에 숨은 고통의 크기는 오직 귀견수라만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움켜쥔 귀견수라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귀견수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혈봉 금사련을 올려다보던 귀견수라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손빈 일행의 존재조차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어때?”
낭랑한 목소리에 손빈과 다른 사람들은 눈을 돌렸다. 그린 듯 아름다운 전대 옥룡이 빙긋 웃으며 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너를 맞이하기에 충분한 예우라고 생각하지 않나?”
사락.
전대 옥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푸른 기운이 그의 주변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사라라락.
마치 빛나는 푸른 안개 같은 그것은 이내 곧 거대하고 섬뜩한 날개의 형상이 되어 전대 옥룡의 좌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악의의 날개를 지닌 신적인 존재의 현현(顯現)이었다.
“세상의 끝에 온 것을 환영한다.”
옥룡이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조롱도, 날카로운 비난도 아니었다.
“이 세계의 라자여.”
전대 옥룡, 아니 이제는 새로운 천마라 불러야 마땅한 존재가 옥좌 위에서 손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작가의 말)
서린: 어, 여기가 세상의 끝이에요? 생각보다 가깝네요?
전대 옥룡: (미소) 여기가 아니라,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