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14)
낙향문사전-414화(414/494)
414화. 옥선(玉扇)과 백로(白露)
전대 옥룡은 미소를 지으며 손빈을 바라보았다. 그 미소를 향해 손빈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손빈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노군은 물론 다른 일행들도 흠칫 놀랐다. 지금 손빈은 전대 옥룡이 말한 ‘무수한 세계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세계는 대부분 심연의 어둠에 삼켜져 있습니다.”
그것은 여섯 마신들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된, 본래라면 입 밖에 낼 이유조차 없었던 잔인한 세계들의 진실이었다.
“마신들은 물론 심지어 옛 천마조차…….”
“알아.”
불쾌한 표정으로 전대 옥룡이 말했다.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나? 천마의 신위를 차지했다고 이미 말했잖아. 천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소위 ‘오래된 옛것들’이 삼켜 버린 무수한 세계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할 것 같아?”
그들 외엔 아무도 이해 못 할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누구도 두 사람의 대화를 끊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있잖아.”
문득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전대 옥룡이 말했다.
“천마가 넘어온,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손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불길하게 일렁이는 나락의 문과, 그 문을 막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혈봉 금사련을 바라보았다. 전대 옥룡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심연의 어둠이 쏟아 내는 마기가 일렁이고 있지만, 천마가 연 저 나락의 문은 분명 천마의 세계, 그리고 마신들의 세계와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손빈. 이 세계를 지키고 싶다면.”
전대 옥룡이 웃었다. 천천히 자신의 옥선을 들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나를 이겨라.”
후우우우웅.
전대 옥룡의 옷자락이 흔들리며 머리카락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주변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등 뒤에서 일렁이는 섬뜩한 푸른 날개가 그 빛을 더한다.
“알겠습니다.”
손빈은 답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전대 옥룡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빈이 말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에게…….”
이를 악물고 손빈이 말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글쎄?”
노골적인 조롱을 담아 전대 옥룡이 말했다. 손빈에게 대답해 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지. 만일 네가 날 이기지 못한다면.”
전대 옥룡의 붉은 입술이 일그러졌다.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한다. 영원히.”
후우우욱.
단숨에 모두를 쓸어 갈 것 같은 기세가 모두를 향해 짓쳐 들었다. 손빈은 물론이고 노군과 서린, 사수연, 당월아, 그리고 검희의 안색도 변했다. 황 방주는 벌벌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슥.
손빈은 천천히 손을 뻗어 백로를 쥐었다. 따랑. 산속 깊은 곳에 울리는 풍경(風磬) 같은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백로의 온기가 손빈의 가슴으로 번져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푸른 기운이 손빈의 의지에 즉시 반응하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전대 옥룡처럼 특정한 형상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스릉.
손빈은 검을 뽑았다. 도도하게 뻗은 백로의 아름다운 칼날을 보며, 전대 옥룡은 웃음을 흘렸다.
“좋아. 적어도 내 앞에 설 자격은 갖춘 것 같군. 어쩐지 옛 상처가 아파 오는 것 같은걸?”
낭랑한 목소리로 전대 옥룡이 말했다. 그러나 손빈은 말없이 그를 향해 백로를 겨눴다.
“이런 식으로 당신과 맞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손빈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전대 옥룡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너의 바람 따위.”
으득.
전대 옥룡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
손빈을 노려보던 전대 옥룡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실례. 말했듯이 잠시 예전의 상처가 아파 와서……. 그럼, 지난번엔 내가 두 초식을 양보했던가?”
짐짓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내가 옥룡역린참을 시작하자마자, 당신은 나를 공격했습니다.”
“그랬나?”
전대 옥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땐 좀 마음이 급했었나 보군. 그렇다면 대신 이번엔 기꺼이 세 초식을 양보하도록 하지.”
웃음을 흘리며 전대 옥룡은 말을 이었다.
“네게도, 그리고 네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도.”
전대 옥룡의 시선은 손빈만이 아니라 서린과 노군, 사수연과 당월아, 그리고 검희 모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용없다고 말해 줘도, 납득하지 못하겠지?”
“물론이다.”
노군이 가볍게 자세를 낮추며 손을 뒤로 돌렸다. 웅. 그의 검 소령이 나지막한 울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소령검만이 아니었다.
우우웅.
사수연의 검 미명도, 당월아의 검 소월도, 그리고 검희의 빙검도 어느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너와 빈이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노군은 단호하게 말했다. 서린 역시 불진 홍진만리를 꺼내 들고 황 방주의 곁에 바싹 붙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착. 전대 옥룡이 옥빛 부채를 접었다. 그 매력적인 눈동자로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와라.”
손빈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사박.
한 걸음, 손빈이 발을 내디디며 검을 그어 내렸다.
파앙.
그와 동시에 노군의 발이 바닥을 박차고, 그의 검 소령이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전대 옥룡을 향해 짓쳐 들었다.
다른 일행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수연과 당월아가 노군을 뒤따르듯 몸을 날리고, 서린이 황 방주를 끌어안고 잽싸게 뒤로 물러난다. 황 방주가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검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스윽.
손빈과 전대 옥룡의 거리를 무시하고 허공에 ‘선’이 그어졌다. 거대한 마룡조차 갈라 버린 무시무시한 일검이었지만, 그러나 전대 옥룡에겐 아니었다.
“흥.”
전대 옥룡, 아니 이제 천마라 불러야 마땅한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착.
옥빛 부채를 편 천마는 슬쩍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쉭.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공간이 비스듬히 잘려 나갔다. 그저 허공만이 아니라 뒤에 있던 거대한 옥좌까지 단번에 갈라진 것이다.
쿠구궁.
지지대를 잃은 거대한 옥좌가 무너져 내리는 동안, 천마는 다른 손을 가볍게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빙혼지.”
빙혼지는 전대 옥룡이 예전 설산에서 손빈을 향해 쏘아 낸 무공이다. 그러나 이 순간 천마의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서 터져 나온 것은 바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충격파였다.
‘헉!’
그 엄청난 기세를 마주하는 순간 노군은 대경실색했다. 그가 알던 전대 옥룡의 빙혼지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다. 천마가 쏘아 낸 빙혼지의 기세는 말 그대로 노군을 집어삼킬 듯 짓쳐들어왔다. 세 초식을 양보한다는 건 어디 갔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타하아!”
노군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검, 소령을 내리쳤다. 빛을 뿜어내는 소령과 천마의 빙혼지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폭풍 같은 기세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러나 천마는 이미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피핑.
천마는 사수연과 당월아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하얀 손끝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사수연과 당월아를 향해 쏟아져 나갔다.
콰과과곽.
“폭풍설화!”
사수연은 현천한빙결을 전력으로 전개하며 천마의 빙혼지에 맞섰다. 그녀의 검 미명이 새하얀 빛을 뿜고, 그녀 주위로 날카로운 얼음 칼날의 폭풍이 순식간에 솟구쳤다.
카가가각.
사수연이 펼쳐 낸 얼음 칼날의 폭풍은 그녀의 막대한 한기를 바탕으로 한순간 빙혼지를 밀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큭.’
빙혼지의 기세는 거침없이 사수연을 향해 밀려 들어왔다.
콰앙.
폭음과 함께 사수연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허공에서 한 번 몸을 비튼 사수연은 무너지듯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악다문 입술 사이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외사의 고수인 사수연이 내상을 입은 것이다.
탁, 타닥.
사수연 뒤로 노군과 당월아가 내려섰다. 노군 역시 그 하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있었고, 당월아의 면사 역시 처참하게 찢겨 나가 있었다. 천마가 날린 세 번의 빙혼지에 세 사람의 외사 고수가 속절없이 밀려난 것이다.
“상효, 일절.”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천마가 고개를 들었다.
후우욱.
허공에서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거대한 칼날. 그 섬뜩한 모습을 눈앞에 두고서도 천마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그런 건 이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천마는 가볍게 옥선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
“통하지 않는다니까?”
파바바박. 옥선이 일으킨 엄청난 기세가 폭풍처럼 검희의 상효일절을 휩쓸어 갔다. 그 순간 검희의 안색이 변했다.
탓.
판단은 빨랐다. 검희는 지체 없이 허공에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옥선의 기세에 휩쓸린 검희의 거대한 칼날은, 마치 봄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듯 허공중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예전보다 제법 감각이 좋아졌네. 하지만…….”
멀어지는 검희를 향해 천마가 그 하얗고 섬뜩한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휙.
천마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완성되어 가는, 손빈의 백로가 그려 내는 커다란 원을 보았다.
“오호라. 파월일식이라…….”
푸른 원에서 번져 나오는 빛을 보면서도 천마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지도 알고 있겠지?”
후우웅. 백로가 원을 완성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무자비한 달빛이 천마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키이이이잉.
동시에 천마의 옥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세상을 갈랐다. 바로 예전 설산에서 사자혁의 파월일식을 상대했던, ‘용린벽’이었다. 수십 마리의 용이 몰려오듯 옥선에서 막대한 기세가 밀려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천마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운명과도 같은 달빛을 말 그대로 집어삼켜 갔다.
콰아아아앙.
우르르르.
그 여파에 거대한 공간이 나지막이 진동했다. 폭풍이 사방을 휩쓸고 부서진 돌가루가 날아다녔다. 노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격돌의 결과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과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흐음, 이건 내가 강해진 건가?”
팔락. 옥선으로 살짝 얼굴을 가리며 천마가 말했다. 천마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느긋하게 한 손으로 옥선을 들고, 다른 손을 허리 뒤로 돌린 채.
“아니면 네가 정한 운명이란 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이었을 수도.”
그 앞에 손빈이 백로를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흐트러져 있었고 옷자락은 여기저기 찢겼다. 천마의 용린벽을 손빈의 파월일식이 깨트리지 못한 것이다.
차락.
옥선이 접혔다. 천마는 느긋한 표정으로 손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파월이식까지 해 보겠어? 아니면 파월삼식은 어떨까? 그것도 아니면…….”
붉은 입술을 살짝 핥으며 천마가, 아니 전대 옥룡이 말했다.
“옥룡역린참은 어때?”
우우웅.
섬뜩한 빛의 날개가 전대 옥룡의 등 뒤에서 일렁였다. 그것은 지금 손빈과 그가 가진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너는.”
싸늘한 눈빛으로 손빈을 쳐다보며 전대 옥룡은 말했다.
“그때 내 빙혼지에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었어.”
슥.
전대 옥룡이 하얀 손을 들었다. 그 가늘고 긴 손가락이 손빈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을, 노군은 결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빈아!”
막 뛰쳐나가려던 그 순간, 노군은 손빈이 희미하게 웃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수연도, 당월아도, 그리고 검희도 그의 미소를 보았다. 결코 잘못 볼 수 없는 손빈의 미소, 그것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번쩍.
전대 옥룡의 손끝에서 빙혼지가 터져 나갔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빙혼지라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조금 전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에게 날렸던 빙혼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섬뜩하고 치명적인 기세. 아까 세 초식을 양보하겠다던 전대 옥룡의 말이 아주 거짓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콰과과곽.
손빈의 눈앞으로 짓쳐 드는 빙혼지의 기세. 그러나 손빈은 그것을 향해 오히려 한 발을 내디뎠다. 마치 백 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듯.
훅.
손빈의 모습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손빈은, 마치 흩날리는 꽃잎처럼 빙혼지를 휘감았다.
파라락.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그 빙혼지의 기세를 손빈은 가볍게 흔들리며 흘려 냈다. 아니, 흘려 내는 것에 멈추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꽃잎이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후우욱.
손빈은 순식간에 전대 옥룡의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백로의 칼날이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칭.
귀를 찢는 충격음도, 폭풍 같은 여파도 없었다. 하지만 옥선은 도도한 백로의 칼날을 오만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우우웅.
백로와 옥선 사이로 보이는 서로의 얼굴이 마치 닿을 것처럼 가깝다. 지금이라면 작은 숨결 하나조차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세계를 비틀었군, 손빈.”
전대 옥룡이 웃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당연히 그렇겠지요.”
부드러운 손빈의 목소리가 전대 옥룡에게 답했다.
“‘그’에 비한다면 그 누구라도.”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손빈의 그 눈동자에는, 파월일식이 깨어지고 자신의 일격이 막힌 무력감 같은 건 흔적조차 없었다.
“흥.”
눈살을 찌푸리며 전대 옥룡이 말했다.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는군.”
콰아앙.
검과 부채에 담긴 힘이 그제야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 여파에 몸을 싣고, 전대 옥룡은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탁.
촤락. 옥빛 부채가 펼쳐지며 전대 옥룡의 얼굴을 가렸다.
“자, 이제 뭘 할 거지?”
조소를 머금으며 전대 옥룡이 말했다.
“파월일식은 깨어졌다. 파월이식 또한 마찬가지일 테지. 그럼 이제 너는 무엇을 할 거냐? 미완의 파월삼식에 도전할 테냐? 아니면 옥룡역린참에 네 모든 것을 걸어 볼 테냐?”
전대 옥룡의 용린벽을 깨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옥룡승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의 손빈으로선, 사자혁과 같은 결과를 내는 것은 무리다.
슥.
손빈은 자세를 잡았다. 그저 두 손으로 검을 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전대 옥룡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건, 뭐지?”
호기심이 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전대 옥룡은 숨기지 못했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손빈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름을 잘 지으라고, 노군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전대 옥룡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실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어찌 보면 파월일식의 조잡한 모방 같은 것이어서 말입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손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일단 파월일식의 이치를 최대한 담아서 ‘일섬’이라는 이름까지는 붙여 봤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일섬’이라는 이름부터가 파월일식에서 가져온 것이고요.”
일그러진 전대 옥룡의 눈살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노군과 다른 일행들은 손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거대한 마룡을 베어 버린 ‘일섬’. 손빈은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제의 파월일식이 섬전일도였던가? 일섬이 그래서 나온 거였군.’
노군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름을 가져오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무공의 이치를 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그것이 단순한 모방이라 해도 그러한데 하물며 무제의 절기임에야. 그러다 문득, 노군은 손빈이 ‘현천대강결’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빈이 놈, 이제 보니…….’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전대 옥룡이 말했다.
“무제도 말했잖아? 너는 큰 걸음으로 걷는다고.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지금 펼치려는 그 검이, 대체 뭐냐고?”
“백로일결(白露一結)입니다.”
“백로, 일결?”
검의 요체를 일컬어 검결(劍訣)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 손빈이 말한 것은 검결이 아니라 이슬이나 서리가 응결할 때 쓰는 단어였다. 백로일결(白露一結), 곧 하얀 이슬이 한 번 맺혔다는 뜻이다.
“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늘 소중한 의미가 되어 준, 백로를 위한 저의 첫 번째 검.”
스륵. 백로의 칼끝이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 전대 옥룡은, 아니 천마는 보았다. 손빈의 의지에 호응하여 일어나는, 마치 거대한 용의 형상과도 같은 푸른 기운을.
“바로 검인천강(劍印千江)입니다.”
전대 옥룡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용의 형상을 향하는 그 눈동자에는, 그러나 공포가 아니라 지극한 희열이 넘쳐나고 있었다. 지금이 그때였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왔던, 자신과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바로 그 순간.
후우우욱.
천마의 날개가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마는 말 그대로 한 줄기 빛이 되어 손빈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크아아아아!”
부우우우욱.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죽음의 빛이 손빈을 향해 쇄도해 왔다. 그러나 손빈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저하지도 않았다.
사박.
손빈은 한 발을 내디디며 그대로 백로를 그었다. 그와 함께 푸른빛의 거대한 용이 천마를 향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바로 백로일결, 검인천강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손빈 패시브 스킬: 요약의 제왕.
효과: 당신의 노트는 매우 깔끔하며 대단히 얇습니다. 모든 학생이 당신의 노트를 보기 원하며, 특히 시험 전에 당신의 노트는 친구들 사이에서 ‘비급’으로 불리게 됩니다.
“어, 그게 늘 시험문제 요약노트를 만들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