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16)
낙향문사전-416화(416/494)
416화. 천마의 저주
의식이 없는 사자혁의 모습과, 그것이 자신 탓이라는 전대 옥룡의 말은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당신……, 때문이라고?”
사수연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대 옥룡은 눈을 뜨고 사수연을 보았다. 평소라면 늘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사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나 때문이다.”
사수연은 이를 악물었다. 손빈은 내심 걱정했지만 사수연은 자제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한 분노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방심했는데 어째서 아빠가 이렇게 됐지? 그건, 설마 아빠가…….”
“맞아.”
전대 옥룡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듯,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마의 마지막 일격은 나를 덮쳤다. 단 한순간이었지만,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 일격을 피하지 못했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손빈은 생각했다. 사자혁과 함께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다. 사자혁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것을, 무제가 막았다. 나 대신 그가 몸을 던졌어.”
으득.
전대 옥룡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래서, 저렇게 되었다.”
침묵이 흘렀다. 사수연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충격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 후엔?”
노군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냐?”
전대 옥룡은 눈을 들었다.
“나는 천마를 제압하고 무제를 살폈지. 하지만 무제가 당한 수법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더군.”
분노한 전대 옥룡은 일격으로 천마의 가슴을 박살 냈다. 그래도 아직 천마는 숨이 붙어 있었지만, 전대 옥룡에겐 그의 생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것은 천마의 마지막 일격이, 전대 옥룡조차 처음 보는 기이한 종류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남은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전대 옥룡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연한 느낌, 혹시 모를 가능성, 그리고 본능적인 충동을 따라 전대 옥룡은 천마의 신위를 강탈했다.
“그래서 나는 천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았다.”
그전까지는 그저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던 것들이 선명해졌다. 나락의 문에 대해서도, 마신들에 대해서도, 손빈이 ‘자격’을 얻은 것과 그 의미도, 그리고 무제 사자혁을 집어삼킨 그 끔찍한 수법이 무엇이었는지도.
스륵.
전대 옥룡이 고개를 돌려 무제, 사자혁을 향했다. 마치 잠자듯 누워 있는 그의 주위로 불길한 기운이 연기처럼 일렁인다.
“무제가 당한 것은 일종의 ‘저주’다. 천마 자신조차 돌이킬 수 없는 최후, 최악의 저주.”
그것은 천마가 마지막 한 수로 택할 만한 것이었다. 그 저주는 심지어 무제 사자혁마저도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게 했다.
“저주라고?”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공도, 의학의 영역도 아닌 저주라면 일이 매우 까다롭고 복잡해진다.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방법은 있다.”
전대 옥룡이 말했다.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 ‘라자’는 천마의 저주를 풀 수 있다.”
“뭐?”
노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러면 빈이가…….”
손빈은 ‘라자’다. 마신들도, 그리고 전대 옥룡 자신도 그렇게 인정했다. 그렇다면 손빈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또한.”
전대 옥룡의 목소리가 노군의 말을 막았다.
“강한 존재여야 한다. 천마보다, 천마의 저주보다 강한 자. 천마를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존재만이, 천마의 저주를 풀 수 있다.”
슥.
전대 옥룡은 손빈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를 기다렸다. 옛 천마의 눈을 뽑고 손발을 잘라 산 채로 마신에게 던져 주면서, 오직 너만을 기다렸어. 당장이라도 나 자신의 목을 긋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네가 이곳에 이르기만을 기다렸다.”
그 목소리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 눈동자에 아직도 일렁이는 살의는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똑똑히 말해 주고 있었다.
“왜 더 빨리 오지 않았나? 왜 처음부터 함께 오지 않았어? 왜 너냐? 왜 내가 아니고 너냔 말이다. 손빈!”
그건 불합리한 분노이며 잘못된 원망이었다. 그러나 손빈은 전대 옥룡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반론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냐? 그냥 전부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청했으면…….”
홱. 전대 옥룡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노군을 향했다.
“그래서? 무제의 저런 모습을 내보이고 너희에게 자비를 구걸하라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만일 저주를 풀 수 없다면 어쩔 건가? 서로 끌어안고 눈물이라도 흘릴까? 죽어 가는 무제를 동정하면서?”
아득. 전대 옥룡은 이를 갈았다.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아무도 무제를 내려다보지 못해. 누구도 무제를 동정할 수 없다. 무제는 군림하는 자여야만 해. 지금도 마음 같아선 너희들 눈을 전부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다.”
섬뜩한 눈동자로 전대 옥룡이 말했다. 그 눈빛은 그의 말이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임을 똑똑히 보여 주고 있었다.
“무제를 살릴 수 없다면 차라리 전부 태워 버리겠다. 이 세계도, 그리고 천마의 세계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세계를 불태우겠다는 말은 처음부터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손빈이 자신, 곧 천마를 뛰어넘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래서 빈이를 시험한 거냐? 네 목숨을 걸고서?”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대 옥룡은 노군을 노려보며 답했다.
“그래.”
그 말에 노군은 어이가 없었다. 전대 옥룡은 천마가 되어 스스로 손빈을 시험했다. 손빈이 그를 이기지 못한다면 사자혁 역시 살리지 못한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세계들을 불태우며 사자혁과 함께 죽어 갔을 것이다.
그가 손빈에게 패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그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의 패배는 곧 천마의 저주가 깨어지고 무제가 살아난다는 의미니까.
“아니, 그걸 꼭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냐? 그냥 비무를 해도 되잖아. 그리고 네가 죽으면 어떻게 알고 무제를 살리라고?”
답답하다는 듯 노군이 말했다. 그러나 전대 옥룡은 툭 던지듯 답했다.
“저들이 있지 않나?”
전대 옥룡이 말한 ‘저들’은 곧 혈봉 금사련과 귀견수라다. 그들도 모든 진상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무제가 쓰러진 것과 그를 살려야 한다는 사실은 손빈에게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 이놈이 무제를 살리고 자랑스러워하는 표정 같은 걸 볼 바에야…….”
그 말이 그저 죄책감을 덮기 위한 핑계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노군은 알 수 없었다.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전대 옥룡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당신은.”
그건 당월아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천마의 신위와 기억을 강탈할 수 있었지요?”
전대 옥룡은 고개를 돌려 당월아를 보았다. 찢어진 면사를 쓴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마신들의 ‘편린’은 손 공자님 외에는 취할 수 없었어요. 황후 사라스바티는 그걸 ‘자격’이라고 불렀지요. 우리가 이곳에 다다르는 것 역시, 손 공자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건 노군 역시 떠올렸던 의문이었다. 무제와 전대 옥룡이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노군은 그들이 어떻게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 의심했다.
“그리고 당신은 천마가 나락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손 공자님조차 ‘편린’을 취하고서야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자격’조차 없는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었지요?”
당월아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당신이 ‘죽음을 속였다’고 말한 것과 연관이 있지 않나요?”
전대 옥룡은 조소했다.
“내가 그걸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나? 설령 말해 준다 해도 너희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은 옳았다. 당월아도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맞아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어요.”
전대 옥룡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월아가 말했다.
“애초에 천마가 나락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지요?”
“뭐?”
노군이 와락 눈살을 찌푸리며 전대 옥룡을 보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 역시 전대 옥룡을 향했다.
“당신이 ‘죽음을 속였다’고 말한 혈마의 대법. 바로 그것 때문에 천마가 나락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그 대법의 결과로 당신은 죽음을 속이는 것과 동시에, 어떤 변칙적인 ‘자격’을 얻은 것이 아닌가요?”
전대 옥룡은 대답대신 날카로운 시선으로 당월아를 노려보았다.
“……너, 설마 혈마의 대법에 대해 알고 있었나?”
살기마저 일렁이는 전대 옥룡의 시선을 당월아는 담담히 맞받았다.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렀지?”
“작은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대강의 그림이 보이기 마련이니까.”
전대 옥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명확한 근거가 없는 당월아의 직감, 혹은 느낌이라는 의미다. 웃음을 흘리던 전대 옥룡은 곧 비릿한 눈빛으로 당월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그건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말대로 그렇다면 어쩔 셈이냐? 내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면 말이다.”
“아무것도.”
당월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이미 손 공자님이 다 하셨으니까.”
전대 옥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월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손 공자님 탓이라는 당신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지겠지. 이 모든 일은 다 당신 때문이니까.”
존칭조차 빼 버린 그 말은 전대 옥룡의 심기를 심하게 거슬렀다. 하지만 그 살기 어린 시선에도 당월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흥.”
전대 옥룡이 코웃음을 흘렸다.
“네가 맹호의 후인일 리는 없겠군. 맹호 따위가 너 같은 아이를 길러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난 전부 손 공자님의 것이야.”
당월아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말했다.
“맹호의 후인 따위, 된 적도 없어.”
예기치 못한 당월아의 말에 전대 옥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모습이 영락없는 당문의 여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린이나 사수연 역시 그녀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선언이야 이전에도 들었던 것이고.
“크흠.”
헛기침을 한 사람은 손빈이었다. 그는 슬쩍 붉어진 얼굴로 애써 쑥스러움을 감추고 있었다.
“저기, 월아 소저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설명은 필요 없어.”
전대 옥룡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네 복잡한 여자관계에 대해 알아야 하지?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아닐 텐데?”
“아니, 그게…….”
손빈은 매우 억울했다. 하지만 전대 옥룡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할 일을 해. 그다음엔 날 죽이든 고문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손빈은 더욱 억울했다. 그래도 그의 말은 옳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다.
“후우.”
손빈은 깊은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이해할 수 없는 문양이 가득 새겨진 침상 같은 대(臺)와, 그 위에 누워 있는 사자혁이 보였다. 그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의식이 없는 지금도 그 위압적인 존재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그 강렬한 눈동자로 손빈을 향해 말을 걸 것 같았다.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섬뜩한 기운만 아니라면 말이다.
우우웅.
그 불길한 기운을 바라보던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불길하게 일렁이는 나락의 문과, 그 문을 막고 있는 창백한 표정의 혈봉 금사련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작고 여린 그녀가 유독 애처롭게 보였다.
“우선 나락의 문을 닫기로 하지요. 더 이상은 금 소저가…….”
“닫으면.”
막 손을 들어 올리는 손빈의 행동을 전대 옥룡의 목소리가 막았다.
“후회하게 될 거야.”
전대 옥룡이 비웃듯 말했다.
“어째서요?”
손빈이 물었지만 전대 옥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혈봉을 이대로 둘 수도 없었다.
“하지만 금 소저가…….”
“빈아.”
노군이 나섰다.
“나락의 문은 네가 닫을 수 있는 거냐?”
“네. 저것을 닫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노군의 제안은 간단했다. 서린의 내력을 귀견수라가 받아서 혈봉 금사련에게 전해 주는 것이다. 정통 도가 기공을 익힌 서린의 내력은 정순하고 마기에 대한 저항력도 크다. 굳이 귀견수라를 거치는 것은, 서린이 나락의 문에 가까이 가기를 싫어하는 것과, 혈봉 금사련을 향한 귀견수라의 마음을 알고 있는 노군의 배려였다.
“저도 함께 가지요.”
서린이 내력을 전해 주는 것을 끝내자 지켜보던 손빈이 문득 말했다. 혈마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귀견수라는 다행히 서린의 내력을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형은 왜요?”
서린이 물었다. 피폐했던 귀견수라를 회복시킬 정도의 내력을 퍼붓고도 서린은 멀쩡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손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듣고 있던 귀견수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혈봉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아, 저기.”
손빈이 화급히 귀견수라를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불편한 표정의 귀견수라는 어색한 표정의 손빈을 한 팔에 안고 나락의 문을 향해 도약했다.
탓.
나락의 문은 허공에 떠 있었다. 일렁이는 섬뜩한 기운 한가운데, 혈봉 금사련이 알지 못할 힘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힘없이 매달려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파지직.
귀견수라의 손이 혈봉을 향하자 나락의 문이 거칠게 반응했다. 귀견수라에게 안겨 있던 손빈이 즉시 손을 뻗었다.
훅.
날카롭게 베어오던 반발력이 사라졌다. 귀견수라의 손은 너무나 간단하게 혈봉 금사련의 뺨에 닿았다.
사락.
하얀 뺨에 닿은 귀견수라의 손끝을 통해 정순한 내력이 흘러들어갔다. 혈봉 금사련은 눈을 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랑의 모습과, 지금껏 기다렸던 한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아랑, 그리고 손 공자님…….”
“괜찮아.”
귀견수라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
혈봉 금사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룩.
나락의 문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나락의 문이 밀어내는 반발력을 이용한, 귀견수라의 놀라운 경공이 아니었다면 이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탁.
귀견수라와 손빈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귀견수라는 다시 혈봉 금사련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팔에서 풀려난 손빈은 누워 있는 사자혁에게로 다가갔다.
“괜찮겠냐?”
노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예전에 당월아나 사수연을 살렸던 때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사자혁을 둘러싼 저 불길한 기운은, ‘저주’라는 말을 듣기 전에도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저벅.
손빈은 대답 대신 사자혁 앞에 섰다. 일렁이는 검붉은 기운을 바라보며, 아니 눈을 감은 사자혁을 바라보며 손빈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웅.
현천대강결의 힘이 별빛처럼 그의 손끝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손빈의 손가락이 사자혁의 심장을 향했다.
파직 파지직.
검붉은 기운 사이로 일어나는 새파란 뇌전들. 그것은 손빈의 손길을 거부하듯 여기저기서 번뜩였다.
“감사합니다.”
문득 손빈이 말했다. 빛나는 눈동자로 사자혁을 바라보며 손빈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사자혁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손빈은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손빈은 천천히 ‘저주’의 중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이미 손빈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훅.
손빈의 손끝이 사자혁의 가슴에 닿는 것과 동시에 ‘그것’이 눈을 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다. 천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자혁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열어 버린 그것은, 바로 나락의 심연이었다.
화아아아악.
무수한 세계와 운명을 집어삼킨 그 끔찍한 어둠이 손빈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푸른 기운이 손빈의 의지에 반응하여 일어났다. 그 거대한 푸른 용의 모습은, 가히 세계와 운명마저 희롱하는 창룡(蒼龍)이라 불러야 마땅한 형상이었다.
(작가의 말)
경공을 못하는 손빈을 안아 주는 누군가가 꼭 여자라곤 할 수 없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