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30)
낙향문사전-430화(430/494)
430화. 배후(背後)
일심무관의 관주, 무일심은 관원들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로 마련된 대(臺) 위에 선 그는 긴 외투를 입고 뒷짐을 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원들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엔 관원들을 돌보는 엄한 스승 같은 모습이지만 사실 이것은 무일심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결코 빼먹지 않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하아!”
쿵.
사십여 명의 사내들이 힘차게 내지르는 기합 소리가 무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음.”
무일심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짐짓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오래 섬겨 온 총관은 관주의 눈동자에 희열이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기합 소리가 작다!”
관주 무일심이 갑자기 소리쳤다.
“이래서야 어찌 일심무관의 관원이라 하겠는가? 사범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무엇하고 있었나!”
사범들의 표정이 굳었다. 관원들 앞에서 사범들을 책망하면 관주 자신의 위엄은 올라갈지 모른다. 하지만 사범들의 체면은 엉망이 된다. 결과적으로 조직의 기강이 세워지는 대신 관원들은 사범을 무시하고 관주의 눈치만 살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범들이 이 무관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관주 무일심은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심무관을 유지해 나가는 건 관주 본인의 능력 덕분이다. 다른 이들은 그저 자신에게 빌붙는 자들에 불과하다고,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타아!”
연무장을 뒤흔들 듯 커다란 기합이 터져 나왔다. 사범들의 불편한 마음이 섞인 것이겠지만, 이전보다 커진 기합 소리에 관주 무일심은 만족했다. 그래도 눈살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아랫것들은 조금이라도 풀어 주면 꾀를 부린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후로 커다란 기합이 연이어 터져 나오자 관주 무일심은 사뭇 만족했다. 그가 느긋한 어조로 무언가 말하려던 때였다.
콰당탕.
무언가 커다란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평소에도 과시를 위해 일부러 정문을 활짝 열어 놓는 무일심은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관원들이며 사범들까지 수련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웅.
‘헉.’
커다란 무엇인가가 관주 무일심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그 정체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무일심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콰앙.
무일심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그것은 곧 뒤쪽의 기둥과 부딪쳐 박살이 났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파편들을 볼 때까지도 무일심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박살난 ‘일심’이라는 붉은 글자의 일부가 들어온 손간, 무일심은 그것이 일심무관의 현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으득.
분노한 무일심이 이를 갈았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감히 어느 놈이…….”
쩌렁쩌렁 무관을 울리는 그의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문 쪽에서 들렸다.
“나다.”
그 음성은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그들은 정문 앞에 버티고 선 허연 머리의 노인을 발견했다. 어느새 나타난 그 노인은 새하얀 수염과 흰 눈썹을 흩날리며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키는 조금 작았지만,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사뭇 범접 못 할 기세를 풍겨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분노로 들끓고 있는 관주, 무일심에겐 아니었다.
“네 이놈! 네가 누구기에 이리도 패역무도한 짓을 저지르느냐!”
“네가 관주냐?”
무일심의 말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노인이 물었다. 관주 무일심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노인을 노려보던 무일심이 사뭇 거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내가 일심무관의 관주, 무일심이다.”
눈앞의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무일심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의 뒷배는 누구라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곳이다. 무림에 속한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무일심은 자신만만했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감히 일심무관의 현판을 부수고도 네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마치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다음 순간 그의 발밑에서 육중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쿵.
우지직. 바닥이 푹 주저앉고 깔려 있던 커다란 돌이 거짓말처럼 부서져 나갔다. 무일심을 헛바람을 내뱉었다.
“헉.”
“현판 따위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냐?”
노인이 시퍼런 눈빛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이 무관은 오늘로서 끝이다. 비겁한 암계로 어린 처자나 납치하려던 이 쓰레기 같은 놈아.”
이를 가는 노인의 말에 무일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즉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무일심은 사범과 관원 들을 향해 외쳤다.
“무엇하느냐! 어서 이 무도한 자를 제압하지 않고!”
당황해하던 사범과 관원 들이 그 호통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노인을 향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뒤이은 또 다른 충격이 그들을 멈춰 서게 했다. 쿠쿵.
우직, 우지직. 바닥이 또다시 흔들리고, 화급히 피하려던 무일심이 대 위에서 휘청거렸다. 무일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노인이 말했다.
“이 쓰레기를 위해 목숨을 바칠 놈.”
슥.
노인은 고개를 돌려 사범과 관원 들을 향했다.
“앞으로 나와라. 내 그 충절을 높이 사서 특별히 성의를 다해 밟아 주마.”
콰직.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노인이 딛고 선 바닥이 부서져 나갔다. 사범과 관원 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림에서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설령 자신들이 모두 덤빈다 해도 저 노인을 상대하진 못하리라. 게다가 관주 무일심은 조금 전 분명 몸을 피하려 했다. 그들과 함께 침입자를 제압하기는커녕, 자리를 지킬 생각조차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눈치를 보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관으로 급히 들어왔다.
타다닥.
“누, 누구냐!”
사범 중 한 명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들어온 자들은 스무 명 남짓의 건장한 무사들이었는데, 전부가 이미 칼을 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자들이 입고 있는 무복에 혁련세가의 문양이 선명한 것을, 사범과 관원 들은 곧 알아차렸다.
“혀, 혁련세가?”
사범과 관원 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이 일심무관으로 들어섰다.
사박, 사박.
혁련세가의 문양이 수놓인 외투를 펄럭이며 들어선 사람은 단아한 분위기의 젊은 여인이었다. 그 모습에 정신이 팔린 사범과 관원 들은 자신들의 관주 무일심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박.
칼을 빼 든 혁련세가의 무사들 한가운데 선 여인은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것은 무일심과 혁련세가 사이의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 단호한 눈빛과 목소리는 이 상황이 결코 호의에 의한 것도, 친선을 위한 것도 아님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즉시 이 자리를 떠나세요.”
그 단호한 선언에도 사범과 관원 들은 머뭇거렸다. 젊은 여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떠나지 않으면, 무일심과 함께 혁련세가로 압송하겠습니다.”
“오, 오해다! 난 모르는 일이야!”
무일심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이 일과 관련 있음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정문 가까이 있던 관원들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무관은 이곳 말고도 많다. 관주 무일심을 위해 목숨을 건다거나, 함께 혁련세가로 압송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가, 가세.”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순식간이었다. 사범들 역시 관주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생각은 없었기에, 무관을 채우고 있던 사십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인, 혁련세화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관주 무일심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무일심이 움찔하더니 곧 억지로 웃음을 흘렸다.
“허, 허허. 이거 혁련세가의 아가씨께서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신 모양이오.”
혁련세화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무시에 관주 무일심은 벌컥 화를 냈다.
“무, 무례하다! 아무리 혁련세가라 해도 이런 식으로 우리를 핍박할 수 있을 것 같나! 이러면 너희도 절대 무사하지…….”
“흥.”
노인, 노군이 코웃음을 내뿜었다. 그리고 발끝에 있던 돌조각을 가볍게 걷어찼다. 핑. 날아간 돌조각은 분통을 터트리던 무일심의 이마를 직격했다.
“컥.”
우당탕. 무일심은 대 위에서 나뒹굴었다. 그러나 죽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그가 피 흐르는 이마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혁련세화의 낭랑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누구지요?”
무일심이 고개를 들었다. 혁련세화가 서서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냐니…….”
“일심무관이 감히 혁련세가에 수작을 부릴 생각을 했다는 건 뒤를 봐주는 곳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이 믿는 그곳이, 어디냐는 말입니다.”
“흐.”
관주 무일심이 웃었다. 그건 분명 비웃음이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혁련세화를 비웃고 있었다.
“들으면 후회할 텐데? 감당할 능력은 되나?”
혁련세화는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말없이 검을 뽑았다.
스릉.
무일심의 표정이 굳었다. 혁련세화는 무일심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그대로 검을 내리찍었다. 쉬익.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칼날에 무일심은 화급히 소리쳤다.
“나, 남궁세가다!”
콱. 혁련세화의 검은 무일심의 귓가를 스치고 나무 바닥에 박혔다. 눈을 질끈 감았던 무일심은 부들부들 떨며 눈을 들었다.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혁련세화의 단아한 얼굴이 그에게는 마치 사신처럼 보였다.
“남궁세가의, 누구 말인가요?”
무일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름을 대세요. 남궁세가의 누가, 무어라고 그러던가요?”
“나, 남궁일. 외청 부청주인…….”
혁련세화는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했지요?”
“이, 일만 벌이면 그다음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그 말을 보장하는 서류나 신물 같은 건, 물론 없겠지요?”
남궁일은 남궁세가 외청의 여러 부청주 중 한 명이자 대표적인 주전파의 인물이다. 남궁세가의 사람답게 교활하기까지 해서,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절대 남기지 않았으리라. 예상대로 무일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세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무일심은 기력을 되찾았는지 다시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남궁세가는 이 일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혁련세가라 해도 남궁세가와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절대로 없지. 결국 너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혁련세화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남궁일을 만난 날이 언제지요? 그가 당신에게 뒷일을 책임지겠다고 한 날 말이에요.”
무일심이 조소를 지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확인한 혁련세화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지, 지난 달 보름입니다!”
혁련세화는 고개를 돌렸다. 흰머리가 살짝 보이는 초로의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관주께서 남궁세가의 사람을 만나신 건, 지난 달 보름이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지요?”
혁련세화의 물음에 사내는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저는 일심무관의 총관입니다.”
고개 숙인 총관의 말에 혁련세화의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스쳤다. 혁련세화는 고개를 돌려 무일심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군요. 아직도 당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니.”
싸늘한 표정으로 말한 혁련세화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혁련세가의 무사들에게 말했다.
“이자를 포박하여 세가로 압송하세요. 그리고 일심무관을 수색하여 이 일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압수하되, 다른 사람이나 재물은 절대 손대지 마세요.”
무일심 외의 다른 사람이나 재물에 손대지 말라는 건 분명 관대한 처사다. 초로의 총관은 혁련세화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관의 일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 수색에 협력하겠습니다.”
“초, 총관!”
무일심이 화급히 소리쳤지만 총관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를 관주님과 같이 압송해 주십시오. 제가 비록 아는 것은 별로 없으나 가능한 모든 것을 진술할 테니, 부디 관주님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총관의 말은 확실히 의외였다. 한순간 혁련세화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청은 제가 세가 어르신들께 직접 전하도록 하지요.”
말하던 혁련세화가 문득 착잡한 표정으로 총관을 보았다.
“안타깝군요. 당신이 좀 더 좋은 주인을 섬겼다면 좋았을 텐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초로의 총관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는 능력도 부족한 데다, 인생에는 때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혁련세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 역시 손빈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작은 무관의 딸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좋든, 혹은 나쁘든 간에.
사락.
혁련세화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총관에게 예를 표했다. 세가의 무사들은 즉시 관주 무일심을 포박해 끌고 갔다. 그리고 남은 무사들은 총관과 함께 일심무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혁련세화는 몸을 돌렸다.
사락.
무관의 입구에 손빈이 서 있었다. 사수연과 당월아, 그리고 혈봉 금사련과 귀견수라도. 혁련세화는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사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당월아와 혈봉 금사련도 고개를 숙여 보인다. 혁련세화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답했다.
“고마워요.”
어느새 노군도 옆으로 다가왔다. 혁련세화는 정중한 예로 노군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해요, 어르신.”
“뭘, 이 정도 가지고.”
사실 노군이 먼저 오는 바람에 혁련세화와 무사들은 급하게 뛰어야 했다. 하지만 노군 덕에 불필요한 충돌을 막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혁련세화는 말했다.
“결국 남궁세가였네요. 예상은 이미 했지만.”
일심무관의 배후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혁련세가에 이런 짓을 벌이려면 남궁세가 정도의 뒷배가 아니면 불가능할 테니까. 옆에 서 있던 노군이 문득 물었다.
“이유는? 남궁세가에서 갑자기 널 납치하라고 충동질을 한 목적이 있을 거 아니냐?”
“남궁세가와 혁련세가의 반목은 뿌리가 깊어요.”
혁련세화가 나지막이 답했다.
“두 세가에는 아직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는 분들이 많지요. 외청 부청주인 남궁일은 비록 젊지만 그런 주전파에 속한 인물이에요. 이번 일을 이용하면…….”
“흥. 두 세가의 전면전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거로군.”
그 말에 손빈은 천축의 상선에서 만난 남궁탁의 말을 떠올렸다. 남궁세가가 기세를 타고 있는 이 기회에 강남 무림의 패권을 두고 혁련세가와 결전을 치르자는 어른들도 있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젠 어쩔 게냐?”
노군이 혁련세화에게 물었다. 혁련세화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글쎄요. 관주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결국 확실한 증거도, 증인도 없어지지요. 두 세가 사이의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려면 배후가 남궁세가라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편이 나을지도…….”
“그럴 순 없습니다.”
손빈의 목소리가 혁련세화의 말을 끊었다. 손빈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세화 소저가 큰 화를 입을 뻔한 일입니다. 결코 모른 척할 수는 없습니다.”
혁련세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다행히 저도 아무 일 없었고…….”
“그렇지 않습니다.”
손빈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세화 소저는 그럴 수 있다 해도,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죄한 사람도, 책임을 진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빈은 말을 이었다.
“나는 반드시 이 일의 책임을 묻겠습니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분노한 음성이 혁련세화에게 가슴이 벅찰 정도로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손빈이 남궁세가와 적대하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먼저 예원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지 않을까?
“손 공자님. 말씀은 정말로 고맙지만…….”
슥.
손빈이 혁련세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부터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말했다.
“제게 맡기십시오. 세화 소저.”
그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에 혁련세화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몰랐지만 손빈이 이 말을 하는 건 사실 두 번째였다. 혁련세화가 도움을 요청하듯 사수연이나 당월아를 바라보았지만 사수연 역시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노군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싱글거리고 있다.
슥.
손빈은 고개를 들어 일심무관을 바라보았다. 혁련세가의 무사들이 일심무관의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손빈의 시선은 부서져 나뒹구는 일심무관의 현판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일단 켜면 왕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