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33)
낙향문사전-433화(433/494)
433화.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끌려온 남궁일은 손빈의 시선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그는 곧 이를 갈았다.
“이놈! 네가 감히 남궁세가의 사람을 무고히 핍박하고도 온전할 것 같으냐!”
“뭐?”
노군이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무고히 핍박? 네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남궁일은 이를 갈았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냐! 너희야말로 증거도 없이 나와 내청주님께 칼을 겨누는 대죄를 저지르고 있지 아니하냐!”
“허.”
노군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는 남궁일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물론 증거는 없겠지. 네가 그런 걸 남겨 뒀을 리가 없을 테니까.”
남궁일이 득의에 찬 표정을 짓는 순간, 노군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증거라? 좋다. 그럼 너는 네가 무죄라는 증거를 가져와라. 그런 것이 없다면, 넌 반드시 죽는다.”
무죄의 증거 같은 건 없다. 그건 분명 남궁일이 계획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궁일은 이를 갈았다. 여전히 악에 받친 눈빛의 남궁일을 내려다보며 노군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네가 정말로 무죄라면 도망가는 대신 당당히 나섰겠지. 안 그러냐? 비겁한 암계로 어린 처자나 납치하게 만드는 이 더러운 자식아.”
그 말에 남궁일이 발끈했다. 마치 자신에겐 악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노군을 노려보며 외쳤다.
“암계라니! 함부로 남궁세가를 모욕하지 마라!”
“흥.”
노군이 코를 울렸다.
“아까부터 자꾸 남궁세가, 남궁세가 하는데 그러면 남궁세가가 전부 나서서 널 지켜 주기라도 할 것 같냐? 뭐, 어쩌면 그것도 좋을지 모르지.”
후욱.
노군의 온몸에서 기세가 일어났다. 그 기세는 악에 받친 남궁일마저 흠칫 떨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이 기회에 이놈의 남궁세가를 싹 밀어 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세가가 모욕당했다 여긴 남궁일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네가 감히…….”
“그만해라, 남궁일.”
그건 내청주 남궁정의 목소리였다. 그는 노군 홀로 남궁세가를 어찌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았지만, 뇌검 남궁권이 한 말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손빈과 적대하지 마라.
내청주 남궁정의 입장에서는 이미 가주의 말을 넘치도록 충실히 지킨 셈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태는 파국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더 악화되는 것은 막고 싶었다. 남궁정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사수연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전혀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남궁일을 내려다보며 내청주 남궁정은 천천히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남궁일.”
그 말에 남궁일은 대단히 실망했다. 마치 내청주마저 자신을 탓하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으득.
나지막이 이를 갈고 남궁일은 대답했다.
“저는 오직 세가를 위해 맡은 바 직임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 무책임한 대답은 내청주 남궁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자중지란을 보일 수는 없어서, 남궁정은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무엇을 했냐고 물었다. 남궁일.”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엔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 하더니 이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청주 남궁정은 그 말에 분노가 들끓었다.
“내가 말해 주랴?”
옆에서 노군이 끼어들었다.
“이놈은 감주 일심무관의 관주를 부추겨 혁련세가의 여아를 납치하려 했다. 물론 자신은 아무것도 안 했지. 그저 ‘뒷일은 책임질 테니 과감하게 일을 벌이라’고 말했을 뿐이니까.”
내청주 남궁정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 부청주 남궁일이 감주에 갔던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니까.
‘이 어리석은 놈이.’
혁련세가와 충돌하는 것은 이미 전대 뇌검도, 가주도 물리친 일이다. 그런데도 남궁일은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딸을 납치당한 혁련세가는 분노할 것이고, 남궁세가는 불합리한 상대의 분노에 반격할 것이다. 그러면 두 세가의 정면충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나중에 슬그머니 납치됐던 딸을 데리고 와도, 물론 어디서 우연히 발견했다든가, 알고 보니 도적 떼가 납치한 거였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이미 사태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주전파 어르신들의 비호도 있을 테고 말이다.
“혁련세가는 우리의 대적입니다!”
남궁일이 소리쳤다. 내청주 남궁정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남궁일은 아랑곳없었다.
“가문의 원수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암계라고요? 방심하고 당한 쪽이 잘못입니다! 강호 무림이 본래 그러한 곳 아닙니까?”
짐짓 들으란 듯 남궁일은 소리를 높였다. 뒤에 남아 있는 몇몇 중직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십시오! 지금 이자는 혁련세가를 위하여 남궁세가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자 역시…….”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청주 남궁정이 버럭 외쳤다. 그는 사수연의 검에 살갗이 베어지는 것도 도외시한 채 소리쳤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느냐! 가주께서 아시면 당장 네놈의 목부터 베실 것이다!”
이제 혁련세가니 남궁세가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손빈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한 대상을, 남궁일이 해하려 들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남궁일은 내청주 남궁정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저는…….”
“닥쳐라!”
소리친 내청주 남궁정은 손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궁일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였소. 단언하건대 이 일은 세가의 뜻과 무관하오. 가주께서도 이 일을 아시면 크게 분노하실 것이오. 남궁일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벌인 일이니…….”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손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자연스레 남궁정의 말이 끊어졌다.
“누구 한 사람 사죄하지도,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들은 말은 그저 ‘이해한다, 거두어 달라, 맡겨 달라, 아무것도 몰랐다’ 이런 것들 뿐.”
남궁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빈이 말을 이었다.
“할 말이 그것밖에는 없습니까?”
내청주 남궁정은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자신은 한 번도 미안하다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그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만 신경 썼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손빈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궁일에게 향했다.
“그저 세가와 적(敵)이 있을 뿐, 자신의 행동으로 누가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군요.”
남궁일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이 적이라 말한 그 여인은 혁련세가의 사람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귀중한 딸이고, 아이들의 사랑받는 선생님이며, 제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서려 있는 서늘한 한기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몰랐습니까? 아니, 모를 리가 없겠지요. 그저 무시했을 뿐. 그러니 이제…….”
스릉.
아름다운 백로의 칼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일은 물론 남궁정도, 노군도, 그리고 사수연도 흠칫 놀랐다. 손빈이 분노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토록 서슴없이 칼을 뽑을 줄은 생각 못 한 탓이다.
“그 대가를 받을 시간입니다.”
백로의 칼날을 바라보며 남궁일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곧 그는 웃음을 흘렸다. 마치 울음 같은 힘없는 웃음을.
“흐, 흐흐. 네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날 죽이면 남궁세가가 결코 가만있지…….”
손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노군과 사수연에겐 더없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스륵.
백로가 비스듬히 위로 솟아올랐다. 서늘한 눈으로 남궁일을 내려다보며 손빈이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서 아무런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단히…….”
나지막한 읊조림과 동시에 백로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하늘의 무심한 심판처럼.
“실망입니다.”
쉭.
“빈아!”
“빈!”
노군과 사수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남궁일의 머리는 이미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헉!’
내청주 남궁정이 헛바람을 삼켰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충격으로 눈을 부릅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억!”
남궁일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다급히 목을 감싸 쥐었다. 그의 목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내청주 남궁정도 경악의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조금 전 그는 분명 남궁일의 목이 잘리는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남궁일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여전히 손빈 앞에 주저앉아 있지 않은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로.
“비, 빈아…….”
노군의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명 노군도 보았다. 백로의 칼날이 남궁일의 목을 수수깡처럼 베어 버리는 모습을. 그러나 지금 백로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올려진 채다. 그렇다면 노군이 본 것은 환상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허공으로 떠오르던 남궁일의 목이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백로의 아름다운 칼날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고, 비록 제정신은 아닌 듯하지만 남궁일조차 멀쩡하다. 순간, 노군은 손빈이 주위로 흩어지는 푸른 기운을 보았다. 아니, 본 것 같았다. 그것은 불꽃처럼 피어나지도, 푸른 용의 형상을 이루지도 않았다. 그저 한순간 보일 듯하다 그냥 사라졌을 뿐이다.
‘이, 이게 도대체…….’
유난히 아름답게 반짝이는 백로의 칼날을 보며 노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수연 역시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경악한 눈동자로 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노군은 손빈이 여전히 남궁일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의 백로가 아직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진 채라는 것도.
‘설마!’
그것은 어쩌면 앞날을 보여 준 환영이었을까? 노군이 섬뜩한 예감에 휩싸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추시게!”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입은 초로의 사내가 손빈 앞으로 날아 내렸다.
탁.
바로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권이었다. 허공을 날아온 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없이 그대로 손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헉! 가, 가주님!”
내청주 남궁정은 화들짝 놀랐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외인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하는 일이다. 제아무리 손빈이 가주의 은인이라 해도 절대 불가능한, 그런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비록 가주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손빈과 적대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이건 너무나도 과하다. 그러나 가주 남궁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부친, 전대 뇌검 남궁천은 손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빈이와 적대하게 되면 어떻게 하냐고? 애초에 왜 적대할 상황을 만드냐? 절대로 피해야지. 무림이 아무리 세력 대 세력의 싸움이라지만, 단 한 명을 거스르는 바람에 모든 게 무너지는 경우도 있거든. 지금 같은 경우엔 그게 바로 빈이야.
전대 뇌검 남궁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뭐, 세상 일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 피치 못하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만일 그렇게 되면 팔 하나라도 잘라. 그걸로 네 목숨을 구한다면 그 정도는 싼 거야. 뭐? 그럼 세가의 운명이 걸렸다면 어떻게 하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눈살을 찌푸리며 남궁천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와 네 목을 잘라서라도 세가를 구해라. 그게 가주 된 자의 의무다. 나도 그렇게 해 왔고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 뭐, 물론 나는 목 대신 다른 걸 많이 잘라야 했지만.
그때 보았던 부친 남궁천의 그 씁쓸한 미소를 가주 남궁권은 잊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금 손빈 앞에 무릎을 꿇는 것에 대해 일말의 주저조차 없었다.
“검을 거두어 주시오, 손 공자. 모든 것은 이 어리석은 자의 잘못이오.”
가주 남궁권은 손빈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직 백로가 하늘로 들려 있음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백로의 칼날 아래 고개를 들이민 셈이었다.
“……가, 가주님.”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내청주 남궁정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털썩.
가주가 죄를 자청했으니 자신이 그 옆에 서 있을 수는 없다. 내청주 남궁정은 즉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쿵.
“남궁정이 손 대인께 죄를 청하오이다.”
쿵쿵.
연이어 세 번 남궁정이 머리를 찧었다.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가주 남궁권과 내청주 남궁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고, 남궁일은 목을 감싸 안고 부들부들 떨며 거품까지 게워 내고 있었다. 그리고 손빈은,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의 흐름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슥.
백로가 천천히 내려왔다. 아름답고 도도한 칼날이 칼집 안으로 조용히 모습을 감춘다.
“비, 빈아.”
“빈…….”
노군과 사수연의 부름에도 손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무릎 꿇은 가주 남궁권과 내청주 남궁정을, 땅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는 남궁일을 그대로 버려둔 채로.
탁.
문득 손빈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군과 사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픈 미소였다. 그가 대체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노군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지요.”
“그, 그래.”
노군은 가슴이 뭉클한 것을 느끼며 얼른 손빈에게 향했다. 사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검을 갈무리하고 즉시 손빈에게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를 으스러지도록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저 눈물을 글썽이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저벅.
손빈은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노군과 사수연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
손빈 일행은 남창의 객잔으로 돌아왔다. 당월아는 이미 남궁세가 밖에서 합류했고, 객잔에서 기다리던 혁련세화와 혈봉 금사련, 귀견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련세화가 놀란 표정으로 손빈에게 다가왔다.
“손 공자님, 괜찮아요?”
그녀가 그렇게 물은 건 손빈의 표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빈이는 이만 올라가 쉬어라.”
문득 노군이 말했다. 그러면서 노군은 혁련세화와 다른 일행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설명 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손빈은 노군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행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손빈은 객실로 올라가려 했다.
“손 공자님.”
부른 사람은 혁련세화였다. 손빈이 돌아보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건 가감 없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손빈이 안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혁련세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손빈은 조용히 객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손빈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일행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르신, 왜 그러세요?”
혁련세화가 물었다. 노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냥 어쩐지 불안해서…….”
이대로 손빈이 어딘가로 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노군의 가슴속에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노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털썩.
사뭇 지친 듯한 노군의 모습에 혁련세화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면 사수연이나 당월아 역시 아무런 말이 없다. 혁련세화는 세 사람을 위해 얼른 따뜻한 차를 따랐다. 은은한 차향과 따뜻한 차의 온기에 힘입어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는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저, 가신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사뭇 조심스럽게 혁련세화가 물었다.
“일단 잘되긴 했다만…….”
혀를 차던 노군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까진 빈이가 없어지면 너희가 큰일을 내겠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너희가 없으면 빈이가 더 큰일을 낼 것 같다.”
“네?”
혁련세화의 반문은 당연했다. 하지만 사수연이나 당월아는 그 말에 어쩐지 살짝 뺨을 붉힌다.
“그러니까 너도 각별히 몸조심하고, 위험한 데 가지 마라. 이번처럼 무리한 일은 아예 하지도 말고. 서원에 너 기다리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니잖냐?”
그건 마치 철모르는 어린아이나 몸조심해야 하는 임부(妊婦)에게나 하는 말 같아서, 혁련세화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노군은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손빈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말에는 모두가 놀랐다. 사실 정말 놀랄 만한 일은 빼 버렸지만, 노군 자신도 그것이 환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당월아는 ‘피가 없었다’라는 점을 들어 환각이라고 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건 손빈의 강렬한 기세가 만들어 낸 심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현실처럼 느껴지는 심상. 노군도 그것이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일이 잘 끝났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도하며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전대 뇌검 남궁천이 노군의 방에 은밀히 찾아왔다.
(작가의 말)
역사는 밤에 이뤄지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