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4)
낙향문사전-44화(44/494)
제44화. 그리고 길은 계속된다2014.02.01.
조용하고 담담한 어조로 손빈은 사수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말해 주었다.
그녀가 검희의 빙검에 찔린 후에 사자혁이 속박당한 것.
그리고 자신이 옥룡역린참으로 옥룡의 허를 찌르고 속박에서 벗어난 사자혁이 파월삼식으로 옥룡을 패퇴시킨 후에 소룡이 나타나 설원이 붕괴되어 휩쓸린 것까지.
“부친께서는…….”
문득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손빈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사 소저를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침상 바로 옆에 앉은 사수연은 묵묵히 손빈의 말을 들었다.
소리 내어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지만 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꽉 움켜쥔 하얀 손이 그녀의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후에 제가, 공자님을 만난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그렇게 침묵에 잠겨 있었을까? 문득 사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소저!”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보였기 때문일까?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가 봐야겠어요.”
손빈은 돌아보지도 않고 사수연이 말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눈 더미를 전부 파헤쳐서라도…… 아니, 설산을 전부 뒤집어엎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야 해요. 아빠는 반드시 살아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그렇게 갈 리 없어요. 반드시 어디선가…….”
중얼거리며 사수연은 막무가내로 나가려 했다.
손빈은 그녀를 막기 위해 두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지만, 그녀를 멈출 수 없었다.
“소저! 진정……. 윽!”
쿠당탕.
사수연을 잡고 있던 손빈이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잠잠해졌던 격통이 다시 온몸을 내달리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온다.
“으으윽.”
“공자님!”
사수연이 놀란 얼굴로 돌아서더니 쓰러진 손빈을 부축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가면 안 됩니다, 소저.”
바닥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손빈이 사수연을 붙잡고 말했다.
“지금 소저의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대로 설산에 올라간다면…….”
“나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아빠가…….”
“부친께서.”
사수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손빈이 말했다.
“마지막까지 걱정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소저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분을 찾을 셈입니까?”
찾아봐도 소용없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건 손빈 자신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결론이라 해도.
“지금 목숨이 위험한 건 바로 당신입니다. 저는, 결코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손빈의 손이 사수연의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절대 놓을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사수연의 커다란 눈동자가 눈물로 가득 차올랐다.
“반드시 살리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는데……. 이번 생사결만 끝나고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겠다고.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또르륵.
눈물이 방울방울 뺨을 타고 굴러 내렸다.
“이렇게…….”
손빈은 손을 뻗어 그녀의 고개를 감싸 안았다.
“압니다.”
손빈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도 터져 나올 듯한 슬픔이 가득했다.
“알아요.”
사자혁과 옥룡의 대화에서, 손빈은 비로소 그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수연이 왜 사자혁에게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수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사자혁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는 결심했다. 생사결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사자혁을 살리겠다고.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손빈은 그녀의 고개를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
사수연은 손빈이 이끄는 대로 힘없이 고개를 가슴에 기댔다. 그리고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손빈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도 아직 믿기지 않는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으면 사자혁이 언젠가 불쑥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자.’라고 말할 것만 같다.
손빈마저 그러니 사수연이야 오죽하랴.
슬픔을 삼키며 손빈은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수연의 울음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
*
*
“먼저 가겠어요.”
마차에 오르던 사수연이 쓸쓸한 목소리로 손빈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손빈이 애써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 손빈은 굵은 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서 있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지만, 그러면 오히려 더 늦어지게 될 테죠. 부디 한시라도 빨리 그 의원에게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아시겠죠?”
사수연의 목숨을 구하려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손빈은 막막했지만 다행히 사수연이 아는 의원이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의원이었는데, 사자혁이 인정한 사람이라 하니 적어도 실력은 확실할 것 같았다.
손빈은 못내 걱정이 되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매우 위험한 상태다.
어쩌면 지금도 그녀는 무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동행하고 싶었지만 의원은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적어도 며칠간은 꼼짝도 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손빈은 이 마을에서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했고, 사수연 홀로 떠나야만 했다.
“책을 쓸 건가요?”
손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수연이 문득 묻는다.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군요. 그동안 기록했던 책자도 다 잃어버렸고…….”
짐 같은 건 챙길 여력도, 찾을 엄두도 못 낸다.
덕분에 그 동안 기록했던 책자들과, 본래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짐들까지 전부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호아검의 손잡이와 선검 백로뿐이다.
‘남의 것만 남았네.’
손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호아검 손잡이는 설검 당화련의 것이고, 선검 백로는 서린이라는 청년 도사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결국 손빈의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수연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쓸쓸한 눈빛으로 사수연은 손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손빈은 낙심했다. 역시 그녀는 자신 같은 서생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일까?
“지금은, 저도 모르겠어요.”
손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면, 나중에는…….”
“미안해요.”
사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물결이 가라앉고 고요한 새벽이 되면…….”
쓸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사수연이 말했다.
“강 아래에 조용히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때도 있겠죠.”
손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손빈은 말했다. 이미 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이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네.”
사수연은 대답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달칵, 그녀가 오르자 마부가 지체 없이 바로 마차를 몰았다.
“하아!”
따가닥, 따가닥.
커다란 말 두 마리가 끄는 작은 마차는 바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손빈은 그녀가 무사히 의원에게 도착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마차는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때까지 서서 바라보던 손빈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길옆으로 내려갔다.
그저 걷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삐걱거리는 것처럼 힘들다. 나무로 대충 만든 긴 의자를 발견하고, 손빈은 털썩 몸을 기댔다.
“후우.”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앉아 있자니 멀리서 느긋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짹짹.
손빈은 눈을 감고 조용히 햇살을 음미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난다.
조금 눈이 부시긴 했지만 따뜻한 햇살 아래 앉아 있으니 한결 기분이 밝아지는 듯했다.
‘하아.’
손빈은 천천히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지겹고 힘들었던 오랜 서원 생활, 향시에 합격하고 기뻐하던 때, 그리고 회시에서 낙방하고 느꼈던 그 절망감과 사실은 자신이 밀려난 것임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분노가, 어쩐지 아주 오래된 일 같았다.
‘생각해 보면 사실 그리 오랜 일도 아닌데…….’
손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젠 아주 오래된 옛일처럼 느껴지는군.’
옛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과는 상관없는, 머나먼 다른 누군가의 일인 것만 같다. 그렇게 분노와 설움을 품고 낙향하던 길에 손빈은 사자혁을 만났다.
그를 피해 도망하다가 황학루에서 사수연에게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사자혁과 동행하게 되었다.
‘강 아래 물안개…….’
강하수연이라는 이름은 정말 그녀에게 어울렸다.
그렇게 시작한 여정 중에 우연히 들른 객잔에서는 사자혁과 위가진의 비무를 보았고, 천하제일을 제안하던 이름 모를 미녀도 보았다.
그리고 소탈하면서도 어쩐지 허허롭던, 사자혁의 첫 번째 생사결의 상대였던 노도사와 그의 어린 제자 서린을 만났다.
‘그분께 백로를 맡았지만…….’
손빈은 백로를 들어 무릎에 놓았다. 칼집만으로는 검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수수하다.
‘이 검을 전해 주는 것도, 어쩐지 쉽지는 않을 것 같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서린이라는 청년도 범상치는 않아 보였다.
‘어쨌든 이 검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살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손빈은 고개를 저으며 손에 든 백로를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은은한 온기가 손 아래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서안에서는 가히 가인(佳人)이라 할 만한 예인(藝人), 난향의 칠현금(七絃琴)을 들었다.
두 번째 생사결의 상대였던 사천의 맹호를 만났고, 당돌하고 날카로운 그녀, 설검 당화련을 만났다. 그리고 호아검의 손잡이를 강제로 맡게 되었다.
‘그녀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치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 같던 당화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의도와는 달랐어도 어쨌든 호아검은 손빈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니 어쩌면 그녀에게도 감사해야 하리라.
‘악양루에선 모용공자를 만났고.’
군자의 기개를 가진 군자검과 언젠가 한번 찾아오라던 그의 아들 철검 모용진은, 이제껏 만난 사람들과 달리 편안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군자검의 걱정대로, 옥룡은 그 누구와도 다른 자였다.
‘옥룡.’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옥룡에 대해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집요하고 치밀한 것 같다가, 이해할 수 없는 여유와 느긋함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그 누구보다도 고독한 자였다. 마치 사자혁처럼.
‘결국, 그렇게 사라졌지만…….’
사자혁의 파월삼식에 패한 후, 옥룡은 붕괴하는 설원 사이로 사라져 갔다.
마지막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살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파월삼식, 무명이 그의 마지막을 선고했으니까.
‘도은무명…….’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자신이 본 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지금도 그 세 번째 초식을 떠올리면 전율이 인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앞에 경외하고 경악할 뿐.
“역시 당신은 대단하구려.”
손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끝 없이 푸른 하늘에 햇살이 눈부시다.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면서도 손빈은 하늘을 계속 쳐다보았다.
“하아.”
까닭 모를 한숨이 나왔다. 사자혁도 없고 사수연도 없다.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도 더 이상 없다.
손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끝났구나.”
이제는 끝난 것이다. 사자혁과 함께 했던 짧고도 길었던 여정이.
*
*
*
사흘이 지나 손빈이 거동에 불편이 없어질 무렵이 되자, 의원은 손빈에게 작은 주머니 둘을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묻는 손빈에게 의원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자네 여비일세. 그 처자가 맡겨 놓고 간 것이라네. 그리고 이것도…….”
짤랑.
주머니 안에는 금자와 은자가 몇 개 들어 있었는데, 손빈에게는 절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약초 값을 제하고 남은 돈이네. 애초에 너무 많이 줬어.”
노의원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제가 드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희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그럼 자네가 가지고 있다가 그 처자한테 주면 되겠군.”
노의원의 말에 손빈은 말이 막혔다.
“약초 값이면 충분해. 목숨은 원래 값이 없는 법이니까. 아니면, 생명의 은인이라 했으니 평생 내 종이라도 할 텐가?”
노의원의 말에 손빈은 말이 막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뭐라도 제가 도울 만한 일이 있으면…….”
“그래? 그럼 저 밖에 말이라도 내게 팔게. 요즘 늙어서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거든.”
의원이 언급한 건 손빈을 실어 온 말이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기에 손빈은 기꺼이 말을 의원에게 넘겼다.
의원이 돈을 내겠다고 했지만 그것만은 손빈이 애써 사양했다.
손빈은 짐을 챙겨 의원의 집을 나섰다. 사실 짐이랄 것도 거의 없었다.
마을에서 큰 성읍으로 나가는 짐마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작은 말을 타고 나온 의원의 배웅을 받으며, 손빈은 짐마차에 몸을 실었다.
턱.
‘오랜만이네. 이런 마차도.’
사자혁과 함께 다닐 때는 여러 사람과 같이 마차를 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쭉 뻗은 관도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제법 고급스러운 빠른 마차가 사자혁과 함께 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본래 손빈은 이런 느리고 허름한 마차를 타고 다녔다. 때로는 노자를 아끼고 한 끼 식사를 위해 멀리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덜컹, 덜컹.
손빈이 올라타자 마차는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빈은 의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손빈을 마지막까지 배웅해 주었다.
‘하아.’
마차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을 온몸으로 느끼며, 손빈은 짐마차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곧잘 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만이 가득할 뿐.
덜컹, 덜컹.
결국 손빈은 조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얀 설산의 봉우리가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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