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57)
낙향문사전-457화(457/494)
457화. 꿈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젊은 옥룡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백로의 칼날은 분명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도 냉혹한 칼날이 자신의 목을 베고, 이 저주받은 피를 성역에 뿌리게 할 것을, 그리하여 지긋지긋한 고통의 날들을 끝나게 해 줄 것을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한월의 목이 베어지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한월은 자신을 보며 이토록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자신은 그 모습에 이토록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일까? 젊은 옥룡은 단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끔찍한 악몽 같았다. 서걱. 백로의 칼날은 한월의 목을 갈랐다. 머리를 잃은 한월은 그대로 두꺼운 눈 위로 쓰러져 버렸다. 털썩. 눈가루가 휘날리고 쌓여 있던 눈이 한월과 그의 머리를 덮었다. 그 모습을 젊은 옥룡은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웅.
바람이 불고 눈이 휘날렸다. 그리고 천천히 젊은 옥룡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게, 그리고 점차 격렬하게.
“……어, 어째서…….”
희미한 목소리가 젊은 옥룡에게서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그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와 함께 이내 커다란 감정의 격랑이 되어 휘몰아쳤다. 그것은 자신도, 손빈도 아닌 한월을 향한 격랑이었다.
“어째서!”
젊은 옥룡은 쓰러진 한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진 한월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슥.
그러나 차가운 백로의 칼날이 젊은 옥룡을 막아섰다. 젊은 옥룡은 고개를 들었다. 쉬이이잉. 휘날리는 눈 사이로 손빈이 서 있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그 투명한 눈동자가 젊은 옥룡을 내려다본다.
“어째서.”
서늘한 목소리가 손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젊은 옥룡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물음을.
“그렇게 놀라는 것입니까?”
‘어째서.’
젊은 옥룡은 손빈의 물음을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한월은 아무 의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수많은 무능한 수하들 중의 한 사람이자 가치 없는 존재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혈룡문의 수많은 수하들이, 그리고 젊은 옥룡을 신이라 부르는 운남의 무지렁이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가치 없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들이 젊은 옥룡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지만 그런 말조차 젊은 옥룡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고 한월은 젊은 옥룡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백로를 멈추지 않은 손빈에게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왜 자신은 이토록이나 충격받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잃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전대 옥룡의 뒷모습을 좇느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혈룡문의 수하들을, 두려워 떨던 무력한 시녀들을, 그리고 자신을 숭상하는 무지렁이 백성들을. 본질적으로 한월과 그리 다르지 않은, 그 무수한 한월들의 의미를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토록이나 아프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째서.
슥.
백로의 칼날이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나 젊은 옥룡은 쓰러진 한월을 향해 손을 뻗지 못했다. 오히려 젊은 옥룡은 손을 거두고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세웠다. 마치 한월을 만지는 것조차 두려운 것처럼.
‘아.’
눈이 뜨거웠다. 그러나 눈물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눈 속에 파묻힌 한월을 바라보고 있을 뿐.
스릉.
백로의 칼날이 칼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건 젊은 옥룡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손빈이 천천히 몸을 숙여 한월에게 손을 뻗었을 때, 젊은 옥룡의 가슴에 자신도 몰랐던 불길 같은 분노가 일어났다. 화르륵.
“건드리지 마라아아아!”
피를 토하듯 젊은 옥룡이 외쳤다. 그것은 손빈이 그의 성역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큰 분노였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불같은 분노가 젊은 옥룡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빈은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사락.
손빈의 손은 한월을 덮고 있던 눈을 치웠다. 손빈은 한월을 건드리려던 것이 아니었다. 막 손빈에게 덤벼들려던 젊은 옥룡이 순간 굳어 버렸다.
“이 사람은.”
눈 속에 쓰러진 한월을 내려다보며 손빈이 말했다. 그 눈동자는 더 이상 차갑지도, 메마르지도 않았다.
“죽지 않았습니다.”
한월이 그곳에 있었다. 조금 전 분명 자신의 눈앞에서 목이 잘려 나갔던 한월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차가운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은 채였지만, 머리는 분명 몸에 제대로 붙어 있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꿈처럼.
“당신이 죽고 싶어 한다면.”
손빈의 목소리에, 한월을 바라보던 젊은 옥룡은 눈을 들었다. 손빈의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내 검을 더럽히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은 더없이 냉정하고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손빈의 눈빛이 더 이상 차갑지 않다는 것을, 젊은 옥룡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박.
손빈이 몸을 일으키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젊은 옥룡은 다시 고개를 숙여 눈앞에 쓰러진 한월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한월의 코끝에서 눈이 가볍게 흩날린다. 그가 여전히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젊은 옥룡은 손을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차마 한월에게 손을 뻗지는 못했다. 마치 이 꿈이 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던 손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웃음을 머금었다. 노군이 사수연과 당월아를 제지하고 있었다. 사수연은 검을 뽑으려 하고, 당월아는 손에 철전을 쥐었다. 조금 전 한월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반응한 것이다. 물론 노군이 제때에 손을 뻗어 두 사람을 막았다. 손빈과 눈이 마주친 노군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사박, 사박.
손빈은 쌓인 눈을 헤치고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에게 걸어갔다. 그사이 사수연도 검에서 손을 떼고, 당월아도 철전을 소매 속에 갈무리했다. 노군은 힐끔 젊은 옥룡과 한월을 쳐다보았다. 젊은 옥룡은 여전히 땅에 무릎을 꿇고 상체를 세운 채 쓰러진 한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겠냐?”
그건 이대로 떠나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젊은 옥룡이 보여 줬던 그 이해 못 할 적의를 생각하면 당연한 물음이었다.
“저놈에게 말해 줄 것도 있고, 들을 것도 있고, 찾아가 봐야 할 곳도 있잖아.”
말해 줄 것이란 젊은 옥룡의 어머니에 대한 것이고, 들을 것이란 비검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한 추궁이다. 그리고 전대 옥룡이 말한 설산의 비역(秘域)에도 찾아가 봐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찾아온 이유이자 본론이라 할 수 있었지만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답한 손빈은 고개를 돌려 젊은 옥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쓰러진 한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시선을 거둔 손빈은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언제나처럼 평온한 미소였다. 문득 사수연이 말했다.
“손 공자님. 머리카락이…….”
손빈은 그제야 자신의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러내린 것을 깨달았다. 늘 쓰고 다니던 작은 관이 아까의 격돌로 부서진 것이다.
“아, 이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탓에 손빈이 살짝 당황해하는데, 사수연이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사박.
부드러운 향기와 함께 사수연의 두 팔이 손빈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스스럼없는 그녀의 행동에 손빈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그녀에게 맡겼다.
사락.
“깜짝 놀랐어요. 한월을 못 본 것 같아서요.”
손빈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사수연이 말했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흐트러진 머리를 가볍게 정돈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 괜찮았네요.”
“네.”
그녀를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손빈은 눈을 감고 조용히 답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눈을 감은 건 사수연의 가슴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포근한 마음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손빈의 머릿결을 매만지는 그녀의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도.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자, 됐어요.”
사수연이 손을 내렸다. 손빈은 눈을 뜨고 손을 들어 슬쩍 머리를 만져 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손빈의 감사에 사수연은 미소를 지었다.
“가자.”
그건 노군의 목소리였다. 노군은 이미 반쯤 몸을 돌린 채였는데, 얼른 여기서 떠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젊은 옥룡과 한월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어느새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젊은 옥룡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흐트러진 젊은 옥룡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천천히 일렁이고 있을 뿐, 한월을 향해 뻗으려던 그의 손조차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빈은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젊은 옥룡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 젊은 옥룡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이제껏 모르고 있던, 혹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그 무언가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전 손빈이 그러했듯, 그 깨달음이 젊은 옥룡의 황량한 가슴에도 따뜻한 온기를 가져다주기를, 손빈은 진심으로 바랐다.
사박.
손빈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를 보았다. 노군의 표정은 뭐하고 있냐는 듯 인상을 썼지만, 손빈의 입가엔 자신도 모르게 환하고 따뜻한 미소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
차가운 느낌에 한월은 눈을 떴다. 처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젊은 옥룡의 싸늘한 표정이었다.
‘헛.’
한월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눈밭에 누워 있다는 것도,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그제야 알아차렸지만, 자신의 주군에게 예를 표하는 데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척. 일어난 한월은 즉시 눈밭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주군.”
젊은 옥룡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더니 혀를 찼다.
“쯧.”
그림 같은 눈썹을 찌푸리며 젊은 옥룡이 말했다.
“쓸데없기는.”
그건 전혀 이해 못 할 말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평소의 젊은 옥룡 그대로였다. 의아해하던 한월은 그제야 손빈과 그의 일행이 찾아왔던 것과, 손빈의 칼날 아래 자신이 몸을 던졌던 것을 떠올렸다.
‘헉.’
자신의 목을 가르던 그 섬뜩한 느낌보다 한월에겐 주군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주군 앞이라는 것도 잊고 한월은 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성역엔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손빈은 물론이고 노군이나 사수연, 당월아 역시 보이지 않았다.
“주군, 그들은…….”
말하던 한월은 젊은 옥룡의 모습에 흠칫 굳어 버렸다. 젊은 옥룡의 관이 부서져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래도 머리는 가볍게 정돈을 한 듯했지만 여기저기 찢어진 옷자락의 모습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젊은 옥룡이 늘 들고 있던 옥선 역시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한월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젊은 옥룡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휙. 젊은 옥룡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곳 성역의 중심인 대전(大殿)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탁.
문득 젊은 옥룡이 발을 멈췄다. 그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한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지 않을 건가?”
‘헉.’
한월은 그제야 자신의 무례를 알아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급히 고개를 숙인 한월은 바로 일어나 젊은 옥룡의 뒤를 따랐다. 젊은 옥룡은 불편한 표정으로 한월을 보다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몸을 돌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명부를 가져와라.”
나지막이 들려온 젊은 옥룡의 말을, 뒤따르던 한월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명부, 말씀입니까?”
“그래, 명부.”
젊은 옥룡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혈룡문의 무사들, 문도들, 그리고 일하는 자들과 시녀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와 자식들까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젊은 옥룡이 명했다.
“그들 전부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가져와.”
방대한 양이 되겠지만 새로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혈룡문은 대단히 폐쇄적이어서, 젊은 옥룡이 말한 것 이상의 자세한 자료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옥룡의 좌에 앉은, 살아 있는 신이 그 자료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나를 따르는 자들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겠지.”
한월은 잠시 의아했다. 그러나 주군의 명령에 이유를 묻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곧 가져오겠습니다.”
한월은 예를 표하며 말했다. 하지만 젊은 옥룡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면.”
저벅. 젊은 옥룡이 멈춰 섰다. 거대한 대전(大殿) 입구에서 멈춘 그는 고개를 돌려 텅 빈 눈밭을 바라보았다.
“서찰을 보내겠다. 무제의 길을 걷는 자에게 보낼 서찰을.”
그 목소리는 어쩐지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한월은 그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할 대답은 여전히 하나뿐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한월은 말했다. 젊은 옥룡은 흘깃 한월을 보더니 비웃음 같은 가느다란 미소를 피워 올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젊은 옥룡은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월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을 매만졌다. 어쩐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아주 지독하면서도 절대로 믿을 수 없는, 낯선 기적 같은 꿈을.
***
성역을 나온 손빈 일행은 걸어서 설산을 내려왔다. 길을 안내했던 한월이 ‘성스러운 곳’이라며 말도 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말과 마차를 매어 둔 곳에 도착한 손빈 일행은 곧장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귀주성 귀양으로 통하는 관도로 향했다. 따각, 따각.
“혈룡문 다음은 혈봉련이라.”
마차를 몰며 노군이 투덜거렸다.
“용봉이 아주 쌍으로 귀찮게 하는구만.”
그 말에 옆에 앉은 손빈이 웃었다. 만족스러운 그 반응에 노군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린다.
“그나저나.”
노군이 흘깃 손빈을 보더니 말했다.
“그놈은 왜 그렇게 난리를 피웠던 게냐? 나 모르게 너하고 무슨 원수진 거라도 있었어?”
그것이 젊은 옥룡에 대한 물음이라는 걸 손빈이 모를 리 없었다.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대강 짐작은 갑니다.”
손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아마도, 전대 옥룡 탓이겠지요.”
“하긴.”
노군이 혀를 찼다. 지나치게 막연한 설명이었지만 노군도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그놈과 얽혀서 제대로 남은 사람이 없어. 무제 빼고는 말이다. 아, 너도 빼고.”
사실은 무제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계기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지만, 무제가 아내를 잃고 천향루에 중독되어 생사결을 해야 했던 배후에는 바로 전대 옥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딱히 얽힌 적이 없습니다만…….”
“뭐라고?”
노군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손빈을 돌아보았다. 예전 설산에서 전대 옥룡에게 죽을 뻔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군을 바라보는 손빈의 눈빛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손빈은 전대 옥룡에게 아무런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따각, 따각. 말고삐를 쥔 채 노군이 투덜거렸다.
“어쩐지 비역의 도해니 뭐니 궁금하게 하더라 싶더니, 결국 이렇게 돼 버렸군. 그놈이 거기 있는 걸 다 준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노군은 이번 일이 전대 옥룡의 뜻대로 놀아난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젊은 옥룡이 이를 갈며 말한 대로.
“글쎄요.”
손빈은 고개를 돌려 흰 눈이 덮인 설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법 멀리 왔는데도 설산은 여전히 손빈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는 전대 옥룡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통해서, 젊은 옥룡에게 말입니다.”
설명은 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강한 확신처럼 손빈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락의 문 저편으로 떠나며, 전대 옥룡은 젊은 옥룡을 향한 배려를 잊지 않은 것이 아닐까?
“과연 그럴까?”
그러나 노군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되려면 모든 미련을 떨쳐야 하지. 어쩌면 옥룡 그놈은 빈이 널 이용해서 자신의 미련을 없애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 젊은 옥룡 놈이 죽든, 혹은 살든 간에 말이다.”
노군의 말 역시 일리가 있었다. 아니, 평소 전대 옥룡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손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실은 이제 알 수 없는 것이 되었으니까.
“어쩌면 저는.”
손빈은 하얀 설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모습으로 만났다면 말입니다.”
서원 서생의 복장을 한 젊은 옥룡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빈은 웃었다. 유독 잘나고 재수 없지만 사실 바탕은 악하지 않은, 어느 서원이나 한 명쯤은 있는 그런 친구가 말이다.
따각, 따각.
손빈은 멀어져 가는 설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노군이 부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젓는 것이나, 사수연과 당월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건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행의 마차가 운남을 벗어나 귀주성으로 들어서려는 무렵, 손빈은 관도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사내를 만났다. 그는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 흰 깃발을 세운,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혈룡문의 그 사내였다.
(작가의 말)
사실은 쌍둥이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