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60)
낙향문사전-460화(460/494)
460화. 금사련
파천문의 대전은 조용했다. 이곳에 앉아 있는 혈봉련의 각 문파 대표자들은 의아한, 혹은 불쾌한 표정으로 손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무림인들의, 그 곱지 않은 시선 앞에서도 손빈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칼은.”
낭랑한 목소리로 손빈이 말했다.
“그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지키고자 할 때 비로소 정당합니다. 무림인은 곡식을 기르지 않고 물건을 만들지도 않으며 물자를 옮겨 주는 것조차 하지 않습니다. 무도의 길을 걷는다 하나 그것조차 스스로의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손빈은 문파 대표자들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그런데 의협조차 없다면 무인들의 집단이 왜 존재해야 합니까? 백성들이 당신들을 용납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손빈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가장의 장주 조혁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파천문 문주 이홍계 역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손빈을 노려보았다. 다른 문파 대표자들 역시, 의아한 눈빛은 사라지고 다들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장주 조혁이 무어라고 막 입을 열려던 때였다.
“없습니다.”
한 줄기 낭랑한 여인의 음성이 대전에 메아리쳤다. 대답한 사람은 바로 혈봉 금사련이었다. 그녀는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의협이 없다면 문파든 세가든 백성들의 또 다른 무거운 짐일 뿐, 그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지막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 대부분은 불편한 헛기침과 혀를 차는 소리였다. 지금 막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부정당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혈봉 금사련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각 문파 대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복수는 당연한 의무입니다. 피를 흘리더라도 복수를 원한다면 당연히 그리해야겠지요. 그러나 무관한 이곳 백성들의 삶까지 파탄 낼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녀의 말은 무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했다. 물론 손빈은 복수 대신 관가에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문파를 키우고 세력을 늘리기 원한다면 먼저 백성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혈룡문이나 혈봉련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요.”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문파 대표자들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지만 혈봉 금사련은 개의치 않았다.
달칵.
혈봉 금사련이 탁자를 짚은 손에 힘을 줬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홀로 일어서지 못한다.
슥.
귀견수라가 즉시 그녀를 부축했다. 혈봉 금사련은 그의 도움으로 일어섰다.
“그리도 복수가 중요하고, 그리도 문파의 이익이 중요합니까? 동문들의 피를 흘리고 백성들의 고통을 무릅쓰면서까지 말입니까? 그렇다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가 말했다.
“우리 혈봉련이 왜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으득.
조가장 장주 조혁이 이를 갈았다.
“웃기지 마라!”
쾅. 분노한 조혁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 혈봉련은 우리의 피로 세운 단체다! 네년 같은 어린 계집이 함부로…….”
후우우욱.
조혁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귀견수라의 살기가 마치 칼날처럼 그를 향해 짓쳐 들었기 때문이다.
‘윽.’
자신도 모르게 조혁은 움찔했다. 막 혈봉 금사련을 비난하려던 그의 동조자들 역시 흠칫했다. 귀견수라의 무위를 당해 낼 사람은 없다. 비록 조혁이 세력으로는 우위라도 귀견수라의 살기를 견뎌 내진 못한다. 물론 혈봉 금사련이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정작 귀견수라의 살기를 맞닥뜨린 지금은 그 확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으음.”
조혁은 이를 악물고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귀견수라 때문에 혈봉 금사련을 노려볼 수 없게 된 조혁의 분노는 이 상황을 초래한 또 다른 원인 제공자를 찾았다. 그 대상은 바로 손빈이었다. 조혁은 손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 했다.
빠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조혁의 귀에 들렸다. 조혁의 시선이 손빈 옆에 앉은 노군을, 정확히는 그가 탁자에 놓은 찻잔을 향했다.
콰직, 콰지직.
두꺼운 자기로 만든 찻잔이 조금씩 박살 나고 있었다. 그 찻잔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은 바로 노군의 손이었다.
콰직.
조혁의 안색이 단번에 새파랗게 질렸다. 자기 찻잔은 결코 저렇게 눌러서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서지기 전에 깨지거나 혹은 나무 탁자가 먼저 박살 나게 된다.
그런데도 지금 노군은 한 손으로, 탁자 위의 찻잔을 조금씩 부숴 가고 있었다. 그의 엄청난 내력이, 그리고 상상도 못 할 운용과 제어가 그걸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스륵.
한 손으로 찻잔을 누른 채 노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가 큰 편도 아닌 데다 한 손은 뒷짐을 진 채였지만 지금 노군이 뿜어내는 기세만큼은 이 대전 전부를 뒤덮고 있었다. 마치 그의 손에서 박살 나고 있는 찻잔이 언제라도 사람의 머리통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뭘 꼬나보냐?”
눈썹을 꿈틀하며 노군이 말했다. 나지막한 그 목소리는 대전 전체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심지어 노군이 뿜어내는 무형의 기세가 희미한 후광처럼 눈에 보이는 듯하다.
“크흠.”
조혁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덕분에 조혁은 사수연이나 당월아의 날카로운 눈빛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에겐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혈봉련을 피로 세웠다 말씀하셨습니까?”
조혁의 귀에 혈봉 금사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조혁을 향해 혈봉 금사련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피를 흘린 것은 우리 금검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문파는 그녀의 금검문이다. 호남에서 남궁세가를 상대로 가장 앞서 싸운 문파가 바로 금검문과 귀견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묵직한 목소리는 파천문의 문주 이홍계의 것이었다. 혈봉 금사련은 고개를 돌려 이홍계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굵은 눈썹을 지닌 이홍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혈봉 금사련을 바라보았다.
“내 딸은 남창 거리에서 피투성이로 죽었다. 그 아이가 죽어서야 얻은, 혈봉의 이름을 이은 사람이 바로 자네지.”
혈봉 금사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딸을 잃은 그의 마음을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으랴? 금사련이 이홍계의 말에는 진지하게 답해 온 이유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비록 그가 복수라는 명분을 통해 혈봉련의 주도권을 쥐고, 문파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계산이 뒤에 깔려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 자네가, 그 아이와 수많은 동도들이 흘린 피를 헛되다 말하는 것인가?”
“저는 결코 그들의 피가 헛되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홍계를 바라보며 금사련이 말했다.
“그러나 문주님의 방법은 잘못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홍계는 그녀가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 역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혈봉 금사련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홍계가 말했다.
“복수를 포기한 자네는 더 이상 혈봉이 아니다.”
금사련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홍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네의 금검문 또한, 혈봉련에 있을 자격이 없다.”
듣고 있던 조가장 장주 조혁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문주의 말씀이 참으로 옳소이다!”
탁.
조혁은 즉각 탁자를 치며 말했다.
“저 아이는 스스로 혈봉의 의무를 저버렸으며, 또한 감히 혈봉련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단언했소!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망언인즉!”
창백한 표정의 금사련을 보란 듯 쳐다보며 조혁이 말을 이었다.
“조가장 장주로서 나는 파천문 문주의 제안에 찬성하오. 금사련은 혈봉의 지위에서 파면하고 금검문은 혈봉련에서 내쫓아야 하오!”
조혁의 목소리는 강경했다. 혈봉의 파면으로 남궁세가와 맺은 협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하지 않았다. 잠시 혼란이 올 수도 있으나 어차피 협정은 개인이 아니라 단체의 약속이니까. 조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다른 문파 대표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탁자를 쳤다.
“옳소!”
탁, 탁.
“그리해야 하오!”
“저 계집과 금검문을 내쫓으시오!”
탁, 탁, 탁.
“내쫓으시오!”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대전을 채워 나갔다. 그 잔혹한 소리들과 싸늘한 시선들 앞에서 금사련은 눈을 감았다.
‘결국…….’
가부를 물을 것도 없었다. 그녀도, 귀견수라도, 아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혈봉련은 그녀, 혈봉 금사련을 버린 것이다. 손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던 노군도 한숨을 쉬었다.
“……저리되었군.”
부서진 찻잔 대신 손빈이 슬쩍 밀어 준 잔을 감싸 쥐며 노군이 중얼거렸다. 저렇게 될 거라고 말하긴 했다. 금사련의 강경한 말과 태도가 저런 반응을 초래한 면도 분명 있다. 그러나 저것이야말로 지금 혈봉련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다. 금사련이 지금껏 간신히 끌어안고 오긴 했으나, 저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예전엔 혈봉 계파니 뭐니 하더니만.”
노군이 혀를 차며 말했다. 녹림과 수채가 섞여 있을 때, 그리고 남궁세가의 위협이 있을 때 저들은 혈봉 계파로 불리며 함께 뭉쳐 있었다.
“정작 문제가 다 해결된 다음엔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으니……. 쯧쯧.”
내부의 문제도 사라졌고 외부의 위협도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힘을 기르는 것뿐인 줄 알았는데, 정작 진짜 적은 그들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내가 집단을 싫어하는 거야.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보면서도 참아야 하거든. 안 그러면 조직이 와해되고 마니까.”
노군은 고개를 저었다.
“뭐, 나 같으면 진작에 깡그리 엎어 버리고 튀어나왔겠지만……. 멀쩡한 칼 놔두고 왜 말로 싸워?”
그렇게 했다간 어떤 단체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사실 손빈도 예전이라면 무조건 참고 끌어안고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노군의 말에 더 끌리는 건, 어느새 노군의 사고방식에 익숙하게 된 탓이리라.
“알겠습니다.”
착 가라앉은 금사련의 목소리가 손빈의 상념을 깨웠다. 혈봉 금사련은 각 문파 대표자들을 보며 말했다.
“여러분의 뜻대로, 저는 혈봉의 이름을 내려놓겠습니다. 그리고 금검문 역시, 더 이상 혈봉련과 함께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완전한 항복 선언이었다. 조가장 장주 조혁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져 갔다. 파천문 문주 이홍계의 눈빛에도 연민이나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본래 피를 함께 쏟는다 하여 맹(盟)이라 하였으니…….”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혈봉이 아니다.
“이제 혈봉련을 떠나며 제 피를 다 쏟아야 옳겠으나, 대업을 앞에 두고 있는 몸이라 그리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를 쏟는다는 말은 혈봉련을 떠나는 그녀의 비장한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귀견수라와 손빈 일행뿐이었다.
“부족한 저를 그동안 보살펴 주신 여러분들께…….”
금사련은 불편한 몸으로 허리를 숙이며 각 문파 대표자들 앞에 공손히 예를 표했다.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저 말 몇 마디로 혈봉련을 이렇게 쉽게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금사련은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대업이라고?”
조가장 장주 조혁은 금사련의 예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무슨 대업이란 말인가?”
금검문은 본래 자리 잡고 있던 호남성 장사에서 쫓겨났다. 이곳 귀양에 지부를 두고 명맥을 잇고 있으나 그것조차 파천문이 사정을 보아 준 덕분이다. 이제 금사련이 혈봉의 지위에서 파면되고 혈봉련에서 쫓겨났으니, 앞으로는 금검문의 이름을 보전하는 것조차 어려우리라. 그러니 조혁의 조롱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귀견수라는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아니, 넘길 수 없었다.
슥.
귀견수라의 손이 그의 검으로 향한다. 그러나 금사련이 그런 귀견수라의 팔을 잡았다.
“하지 마세요, 아랑.”
그건 공식적인 자리에선 한 번도 하지 않던 호칭이었다. 귀견수라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지만 곧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동맹이 아닙니다, 주군.”
순간 귀견수라의 시선이 조가장 장주 조혁을 향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조혁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이제 금사련과 귀견수라는 혈봉련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귀견수라의 분노를 제지할 명분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슬픈 눈빛으로 금사련이 말했다.
“하지 마세요.”
귀견수라는 그 눈빛을 거역하지 못했다. 이를 악물던 그는 천천히 검에서 손을 거뒀다. 그제야 조혁과 다른 문파 대표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긴장을 놓지는 못했다. 귀견수라가 적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새삼 실감한 것이다.
“저는.”
금사련이 조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분수에 넘는 직분을 맡아 제 손이 닿지 않는 일을 이루려 애썼습니다. 그 결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오늘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씁쓸한 회한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않았다. 금사련은 눈을 빛내며 나지막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호남성으로 돌아가 금검문을 재건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이 닿는 이들을 돕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헛웃음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본래 금검문이 뿌리내린 지역이 호남성 성도 장사이긴 하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남궁세가가 장악했다. 게다가 최근 남궁세가가 보인 급격한 팽창정책을 생각하면 금검문의 재건이란 꿈도 못 꿀 일이다.
“재건이라고?”
조가장 장주 조혁이 피식 웃었다.
“그보다는 지부라도 내쫓지 말아 달라고 파천문주께 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날아온 귀견수라의 눈빛이 그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조가장으로 오면 옛 정리를 생각해서 방 하나 정도는 내주겠다’는 조롱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사락.
창백한 표정의 금사련이 바퀴 의자에 앉았다. 귀견수라는 의자의 뒷면에 있는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대전 중앙으로 나섰다. 대전을 가로지르는 금사련은 꼿꼿이 상체를 세우고 있었지만 처연한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귀견수라 역시 지극히 신중해서, 마치 금지옥엽이라도 옮기는 듯 흔들림 하나 없이 바퀴 의자를 움직여 가고 있었다.
“흥.”
누군가 사람들 사이에서 조소를 흘렸다. 혈봉이었던 금사련이 혈봉련을 떠나는 것에 대한 불안이나 혼란은 전혀 없었다. 차가운 시선의 파천문 문주 이홍계도, 대놓고 비웃음을 떠올리는 조가장 장주 조혁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조혁은 생각했다. 혈봉련의 존립은 사실상 운남 혈룡문에 달려 있다. 물론 남궁세가의 위협은 남겠지만 호남성을 넘어 귀주성까지 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인 데다, 새로운 혈봉을 세우면 명분도 혈봉련에 있게 된다. 남궁세가가 말한 혈봉의 깃발이란, 시작이야 어떻든 금사련 개인이 아니라 혈봉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아 있는 혈봉련 문파 대표자들의 표정은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귀주와 광서, 두 성을 아우르는 이권을 차지하는 것뿐이다.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풍족하지도 않고 변두리에 불과해도, 이제 자신들이 이곳의 왕이 되는 것이다.
“쯧.”
쳐다보던 노군이 혀를 찼다. 비록 자신이 그리하라 말한 것이긴 하지만, 금사련의 처연한 표정을 보는 건 노군으로서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도 가자.”
노군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미 일어나 있던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고, 앉아 있던 사수연과 당월아가 막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콰당.
대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파천문의 총관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귀견수라와 금사련이 표정이 굳고, 다른 문파 대표자들의 얼굴에도 의혹과 당혹이 스친다. 파천문의 문주 이홍계는 와락 인상을 썼다.
“총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그, 그것이…….”
총관이 무엇이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저벅.
화려한 무복을 차려입은 중년인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같은 문양의 무복을 입은 건장한 무사 십여 명이 동시에 모습을 나타냈다.
“헉!”
혈봉련 문파 대표자들은 헛바람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모습을 나타낸 자들의 무복은 바로 남궁세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저 중후한 외모의 사내는, 바로 남궁세가의 내청을 총괄하는 내청 청주 남궁정 본인이었다. 파천문의 대전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보며 노군이 웃었다.
“클클.”
웃음을 흘리던 노군은 문득 고개를 돌려 손빈을 보았다. 손빈 역시 남궁정의 등장에 대단히 놀라고 있었다.
“뭘 그리 놀라냐? 서찰은 네가 보냈잖아.”
“아니,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의향을 묻는, 어쩌면 조언을 구하는 서찰이었다.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누구를 보내 달라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대뜸 이 자리에 남궁세가의 내청 청주가 나타난 것이다.
“역시.”
노군이 씨익 웃으며 남궁정을 보았다.
“제일 먼저 튀어 왔군. 뇌검 놈, 이런 건 확실히 맘에 든다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도 손빈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허연 수염을 슬그머니 쓰다듬는 노군의 입가엔 득의의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작가의 말)
노군: (씨익) 계획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