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63)
낙향문사전-463화(463/494)
463화. 만가(輓歌)
손빈 일행이 탄 마차는 어느새 청원 부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익숙한 경치가 나타나자 손빈은 마음이 편해졌지만 동시에 조바심이 났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라.”
마차를 몰고 있는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달리는 마차에서 자꾸 그렇게 일어설래? 그럴 거면 아예 뒤로 가든가.”
“아, 죄송합니다.”
손빈은 얼른 사과하며 자리에 앉았다. 노군은 투덜거리며 다시 마차를 몰았는데, 아까보다 빨라진 마차의 속력은 노군 역시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다들 잘 있겠지요?”
뒤에 앉은 사수연이 말했다. 그녀도, 옆에 앉은 당월아도 서원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네. 잘 있을 겁니다.”
손빈이 웃으며 답했지만 노군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잘 있긴 하겠지만, 서원엔 없을지도 몰라.”
마차를 몰며 노군이 말했다.
“다들 피해 있으라고 세화한테 그렇게 말해 뒀잖아.”
예전의 경험도 있고 해서 노군은 혁련세화에게 서원을 비울 것을 당부해 놨다. 아마도 예전처럼 서원 전체가 어딘가로 여행을 갔을 것이라고 노군은 생각했다. 탈혼도가 서원에 있는 화사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알려 주었다.
“아무도 없을 거라니 그건 좀 쓸쓸하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요.”
뒤에서 들려온 사수연의 말에 손빈은 동감했다. 하지만 그녀 말처럼 서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손빈은 마음을 추스르며 서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서원의 모습에 손빈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노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각, 따각.
“하하하하.”
마차가 서원 가까이 이르자 담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낭랑한 웃음소리에 손빈은 물론이고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워!”
노군이 마차를 멈추는 것과 동시에 서원의 열린 문으로 오색의 가죽 공이 굴러 나왔다. 탁.
“꺄하하하.”
공 뒤를 쫓아 활발한 소소가 웃으며 뛰어나오고, 거의 동시에 홍아와 녹아가 같이 달려 나온다. 그러다 문득, 손빈 일행의 마차를 발견한 소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선생님!”
공을 잡는 것도 잊은 채 소소가 외쳤다. 홍아와 녹아도 당월아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엄마 선생님!”
평소 당월아를 선생님이라 불러야 한다고 강조하던 홍아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만 ‘엄마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말았다.
“와아! 선생니임!”
소소는 오색 공도 버려 둔 채 환하게 웃으며 손빈에게로 달려왔다. 손빈은 얼른 마차에서 내려 몸을 낮추고 팔을 벌렸다.
팍.
소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손빈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작은 팔로 손빈의 목을 꽉 끌어안고 기쁨을 표현했다.
“선생님!”
“그래, 잘 있었니?”
손빈이 웃으며 말했다. 소소는 활짝 웃었다.
“네! 우리 진짜 재미있는 곳에 다녀왔어요! 음, 어디냐면요, 이름은 잘 모르는데요…….”
소소가 눈을 빛내며 말하는 사이, 당월아도 홍아와 녹아를 품에 안았다. 두 아이들 역시 소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혁련세화가 서원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네. 다녀왔습니다.”
손빈이 웃으며 답했다. 서원에서 나온 사람은 혁련세화만이 아니었다. 당문에 있었던 노부인 당운영도 어느새 서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순랑?”
노부인 당운영이 부드러운 미소로 노군을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린 노군은 푸근한 웃음으로 답했다.
“다녀왔소, 영매.”
“와아! 할아버지! 빈이 형!”
노군의 대답은 서원에서 뛰어나온 서린의 목소리에 그만 묻혀 버렸다. 서린 뒤로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니임!”
아이들은 한꺼번에 노군과 손빈, 사수연과 당월아에게 달려들었다. 소소는 물론이고 자우와 견자, 호두, 장아, 아오, 중오, 계구에다 청아와 황아, 회아까지 전부 모여드니 주위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쯧, 이놈들 위험하게…….”
무작정 달려드는 아이들의 모습에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익숙한 자세로 몸을 낮추고 아이들을 안아 주고 있었다.
“하하하하.”
노군의 목을 끌어안은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다. 손빈과 사수연, 당월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손빈은 어느새 자신의 팔에 달라붙은 앵앵이를 보며 웃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그 수줍은 환영에 손빈은 앵앵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다녀왔어.”
아이들에게선 햇살 같은 냄새가 났다. 손빈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화사와 탈혼도, 신의와 어옹, 그리고 사라스바티와 그녀의 호위 라흐만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또르륵. 찻잔에 차가 채워지며 은은한 향이 퍼져 나간다. 손빈은 차를 따라 준 혁련세화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혁련세화가 빙긋 웃었다. 손빈은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차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여기 있었냐? 어디 간 거 아니었어?”
노군이 찻잔을 쥐고 물었다. 대답은 화사가 했다.
“갔다 왔어. 벌써 두 번이나!”
화사가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은 여전해서, 손빈은 최대한 온화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시선을 돌리거나 얼굴을 붉히면 뒷감당이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돌아온 거야. 아이들이 너무 오래 떠나 있으면 부모님들이 걱정해서. 며칠 있다가 또 떠나려 했는데, 만나서 다행이야.”
정말로 기쁘다는 듯 화사는 활짝 웃었다. 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구만. 하마터면 텅 빈 서원만 지킬 뻔했으니.”
“빈 서원은 내가 지켰소, 노군 할배.”
묵직한 목소리로 탈혼도가 말했다. 그가 서원으로 왔을 때는 불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노군은 그게 뭐 어떠냐는 듯 심드렁하게 물었다.
“네가 있을 땐 별일 없었지?”
탈혼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빈은 그 모습이 어쩐지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식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알아서 했네.”
‘알아서’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노군은 문득 사라스바티와 라흐만을 보며 물었다.
“너희도 아이들이랑 같이 갔었냐?”
사라스바티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물론이지요. 혁련세화 소저는 참 좋은 선생님이더군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녀의 말은 완벽했다. 아마도 일정 부분은 혁련세화의 덕분일 것이다.
“해적질은 안 하고?”
사라스바티의 고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남방 해양 항로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너무하시네요. 그쪽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괜찮아요.”
살짝 노군을 흘겨본 사라스바티는 더없이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여기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할 일?”
노군의 반문에 화사가 얼른 말했다.
“오빠한테 인사하고 간대.”
“그게 아니에요.”
사라스바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화련 총괄군사가 상단 대표를 소개해 주더군요. 마침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 하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해요.”
그 말에 손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화련 소저를 아십니까?”
“혁련세화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세화는 당화련, 남궁향과 은밀히 서찰을 주고받는 사이이니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
“마침 제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상단이 있더군요. 손 공자님께서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던데요?”
사라스바티는 손빈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손빈은 어리둥절했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아.”
문득 한 사람이 손빈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사라스바티도 빙긋 웃었다.
“네. 천축인인 저희에게 무역 허가를 내줄 수 있을 정도로 조정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지요.”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란 경희 공주가 분명했다. 천하의 상단 중에 경희 공주만큼 조정을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역 허가만이 아니에요. 배의 입항과 사람의 상륙을 보장하는 증서는 물론이고, 지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하지요.”
“흘, 아주 정식으로 해양 상단을 운영하려는 모양이구나?”
노군의 물음에 사라스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법 많으니까요. 그들이 정착하고 혼인하여 아이를 기르려면, 언제까지고 떠돌이여선 곤란하거든요.”
손빈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장래를 생각하면 사라스바티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다행히, 어려울 것 같진 않아요.”
사라스바티는 찻잔을 쥔 채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화려한 천축의 황궁 정원에 있던 때보다 한결 아름답고 편안해 보인다고 손빈이 생각할 때였다.
“으음, 아무래도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손빈 옆에 딱 붙어 앉은 소소가 귀여운 눈살을 찌푸리며 종알거리듯 말했다.
“예쁜 선생님이 많은 건 좋은데, 자꾸 대책 없이 늘리며 안 되죠. 남자도 절조가 있어야 한다고요.”
그 말에 손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소, 소소야, 어디서 그런 말을…….”
동그란 눈동자로 사뭇 진지하게 손빈을 올려다보며 소소가 말을 이었다.
“젊어서 힘이 넘친다고 막 건드리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하게 된다고 언니랑 총관 할아버지가 그랬단 말이에요. 선생님도 장래를 생각하셔야죠.”
소소 옆에 있는 앵앵이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손빈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건 소소의 말대로 장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소소의 언니는 소은표국의 은초빈이다. 그녀나 총관, 나아가서는 마을 사람들이 서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난 것이다. 충격적인 사실에 손빈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소소가 한숨을 쉬며 종알거렸다.
“뭐, 세화 선생님이 알아서 정리해 줄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요.”
“내가?”
찻잔을 들어 올리던 혁련세화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손빈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청원 사람들에겐 혁련세화가 서원 선생님들 중에 가장 높아 보이는 것이다. 아니, 사실상 서원 자체를 혁련세화의 것으로 아는 사람까지 있다.
“소, 소소야. 그게 아니라…….”
혁련세화가 드물게 더듬거렸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녀를 향한 데다, 소소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손빈은 슬며시 시선을 돌리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후룩.
차는 향기로웠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워지고 있는 느낌을, 손빈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
화르르륵.
오랜 시간을 견뎌 온 커다란 목조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밤하늘을 가리고 흩날리는 불티가 꽃잎처럼 사방에 휘날린다.
타탁, 탁.
시뻘건 화염을 내뿜는 건물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한때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던 유서 깊은 건물들이 이곳저곳에서 붉은 화염 속에 연이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로,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같은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그들은, 바로 이곳 합비에서 오랫동안 터를 닦아 온 공손세가의 사람들이었다.
“……끄으으으.”
신음이 흘러나왔다.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누군가에게 목을 잡힌 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 중년인은 바로 공손세가의 외당 당주 공손창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충혈된 눈동자로 자신의 목을 쥔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어째서냐고?”
한 점의 감정조차 실리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건장한 공손창조차 훌쩍 넘는 키와 떡 벌어진 체구를 가진 그는 지극히 담담한 눈빛으로 공손창을 바라보았다. 단 하룻밤 만에 공손세가를 불태우고 눈에 보이는 이들을 전부 죽인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눈동자였다.
그러나 공손창을 절망하게 한 것은 상대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상대가 공손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비검, 공손극이라는 사실이었다.
“너희는 나의 것이다.”
공손극은 더 이상 노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거슬러 오른 듯, 그는 중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 담담한 목소리에 공손창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공손극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너희들의 필요는 이 정도뿐이니 말이다.”
“으, 으윽.”
외당주 공손창이 발버둥쳤다. 그러나 공손극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공손극의 기이한 능력도.
후우욱.
시커먼 기운이 외당주 공손창을 휘감았다. 그리고 공손창의 온몸에서 삽시간에 생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건장한 공손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노인처럼 말라비틀어졌다.
“끄어어억.”
그제야 공손창은 눈앞의 공손극에게서 느껴지는 극심한 위화감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비검 공손극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절대 공손극이 아니다. 공손창은 꺼져 가는 눈빛으로 신음처럼 말했다.
“너, 너는 대체 누구…….”
그러나 공손창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고, 공손창의 얼굴은 순식간에 주름투성이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스륵.
공손극이 손을 놓았다. 생명이 꺼진 공손창의 몸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그와 같은 운명을 겪은 다른 사람들처럼, 공손창은 또 하나의 시신이 되어 땅에 쓰러졌다.
“……내가 누구냐고?”
쓰러진 공손창을 보며 공손극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쩌면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는 공손극이다. 공손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비검이며, 지금 눈앞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이 공손세가의 실질적인 주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글쎄? 나는……, 과연 누구일까?”
자신은 천마도, 혈마도 아니다. 비검 공손극의 기억을 가졌으나 그것만으로 스스로를 공손극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지금 눈앞에서 공손세가가 불타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자신의 손으로 핏줄을 죽이고 그 생명을 삼켰지만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공손극의 모든 기억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어느 것에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가 한때 느꼈을 기쁨도, 희열도, 슬픔도, 그리고 분노조차도.
“훗.”
공손극은 웃었다. 어찌 되건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오랜만에 드러낸 감정 표현이었지만 그 웃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
“상관없지.”
상관없다. 과거의 자신이 무슨 감정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건, 현재의 자신은 냉정하게 그 유효성과 이해득실을 파악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뿐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세가를 불태우고 피로 물들이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아마도 이건 혈옥의 부작용인가?’
기억처럼 공손극의 판단력 역시 건재하다. 그는 자신의 텅 빈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손에 노년의 주름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가 마교와 손을 잡으며 얻은 혈옥(血玉)은 기나긴 마교의 역사 동안 사람들의 피를 마셔 온 신물이다. 마교의 다른 신물들이 그러하듯 혈옥 역시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지만, 마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던 시기에 공손극은 마교의 대법을 통해 혈옥의 힘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아직 부족하군.”
혈옥의 힘을 취했으나 공손극은 아직도 피를 갈망했다. 그러나 혈마가 아닌 그가 흡수할 수 있는 피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공손세가의 것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공손세가를 취한 것이다. 한 점 망설임조차 없이 말이다.
“흐음.”
공손극은 공손지를 떠올렸다. 사실 이 갈망을 채우려면 그녀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크다. 공손지가 가진 마기와 끝 모를 생명력은 더없는 만족감을 선사해 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존재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손빈.’
그가 얼마나 간단히 마공을 부숴 버렸는지 알고 있는 이상, 마기를 품은 공손지를 흡수하는 건 위험하다.
“손빈.”
공손극은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되뇌었다. 공손극의 모든 감정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의미. 그것이 바로 손빈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향해 검을 찌르던 그 별빛 같은 눈동자는 지금도 그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르륵.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이 공손극을 상념에서 일깨웠다. 공손극은 눈을 들어 불타는 공손세가를 바라보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 그곳을 멸문시키는 것도 그다지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비록 이젠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해도, 사라진 공손세가를 향한 만가(輓歌) 정도는 될 테니 말이다.
스륵.
공손극은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렸다. 그가 발을 내딛는 순간, 공손극의 몸은 밤하늘을 향해 둥실 떠올랐다. 한때 오대세가의 하나로 당당히 군림하던 공손세가가 그의 발아래서 불타고 있었지만, 공손극에겐 아무런 감흥조차 주지 못했다.
(작가의 말)
팀 킬, 프렌들리 파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