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71)
낙향문사전-471화(471/494)
471화. 제갈세가의 위기
필옹 제갈련은 제갈세가에서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무림세가의 직계지만 무공보다는 뛰어난 문장가로 먼저 알려졌으며, 전대 가주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고고한 인품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런 그가 사실은 외사의 고수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제갈세가 내에서도 많지 않았다. 문무를 겸비한, 가히 제갈세가가 만들어 낸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필옹 제갈련이었다.
“후우.”
의관을 정제하고 서탁 앞에 앉아 있던 노년의 필옹 제갈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처럼 새벽에 일어나 서탁에 좌정하고 글을 읽었으나 날이 환해진 지금까지 책장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글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비록 그것이 수십 년간 행해 온 일과라 해도 말이다.
탁.
필옹 제갈련은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끼익.
오래된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즈넉한 작은 정원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제갈련의 마음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비록 이곳까지 들리지는 않지만, 지금도 분명 제갈세가 전체를 뒤덮고 있을 신음 소리들 때문이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습관처럼 되뇌어 보았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마음을 잡아 보지만, 가문을 뒤덮은 횡액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어.”
필옹 제갈련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긴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탁탁탁.
다급한 발소리에 제갈련이 고개를 돌렸다. 정원 옆으로 난 문을 통해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필옹 님.”
제갈련을 발견한 노년의 총관이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용건을 묻기도 전에 흰머리의 총관이 말했다. 제갈련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세가가 이런 상황인데 대체 무슨 손님이란 말인가?
“손님?”
“네.”
총관은 침착한 태도로 정중하게 말했다.
“말씀하셨던 바로 그 손 공자입니다.”
필옹 제갈련의 표정이 단번에 환해졌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가세.”
제갈련은 걸음을 옮겼다. 노년의 총관이 예를 표하며 그의 뒤를 따르는 동안, 앞서 걷는 제갈련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
“여기 왜 이래?”
노군이 떨떠름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고풍스러운 방에서 향기로운 차를 대접받고 있었지만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제갈세가가 이렇게 을씨년스러웠나?”
이곳 제갈세가는 오대세가의 하나로 손꼽히는 무림 세가이자, 공손세가와 함께 강북의 패권을 다투어 온 강력한 가문이다.
다른 무가와 달리 문인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작지 않으니, 당연히 제갈세가는 드나드는 온갖 손님들과 물자로 북적여야 마땅하다. 실제로 세가들의 상황이 대부분 그랬다.
그런데 조금 전, 노군과 일행이 지나온 제갈세가의 정문엔 아무도 없었다. 지키는 무사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데다가 문을 아예 잠가 놓아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놓았다.
오죽하면 폐허가 된 합비의 공손세가와 비슷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게다가 이 신음 소리는 대체 뭐야?”
노군이 신경질적으로 귀를 후볐다. 외사의 고수인 그에겐 지금 제갈세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고 있었다.
“괴질이 돌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신의가 뜨거운 찻잔을 쥔 채 나지막이 말했다.
“고통받는 이들이 있으니 신음은 당연한 일이겠지. 일반적인 괴질은 아니겠다만…….”
제갈세가에 괴상한 질병이 돌고 있음은 이미 필옹 제갈련의 서찰로 알고 있는 터였다. 굳이 신의가 동행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다만 그 질병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괴질’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야 알고 있다만 생각보다 너무 심한데? 완전 초상집이 따로 없어.”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 제갈세가 전체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아니, 차라리 초상집은 시끌벅적하기라도 하지. 여긴……, 쯧.”
말을 잇지 못하고 노군이 혀를 찼다. 뜨거운 찻잔을 들어 올리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벌컥 문이 열렸다.
“손 공자!”
노년의 필옹 제갈련이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노군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지만 제갈련은 아랑곳없이 덥석 손빈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손빈은 손을 잡힌 채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찾아와 줘서 고맙소, 손 공자!”
제갈련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손빈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머리가 허연 노년의 제갈련이 간절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만 고개를 드시지요.”
손빈의 말에 필옹 제갈련이 고개를 들었다. 그 노년의 눈동자가 너무 가슴 아파 보여서 손빈은 마음이 좋지 못했다.
“우선 앉으십시오.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할 테니까요.”
그제야 필옹 제갈련은 손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소.”
말하는 제갈련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손빈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옹 제갈련이 자리에 앉고 손빈은 간단히 일행을 소개했다.
노군이나 신의는 제갈련도 이미 친분이 있고,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은 예전에 북해에서 만난 바도 있어 낯설지 않았다.
사라스바티와 면사로 얼굴을 가린 경희 공주, 그리고 시녀 항아에 대해서는 서원의 손님이라고만 소개했다.
“제갈세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본래 극진한 예로 맞이해야겠으나,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음을 사죄드리오.”
제갈련이 일행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는 앞에 놓인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일은 공손세가가 불에 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일어났소.”
***
화르륵.
제갈세가의 가주가 기거하는 비봉루가 불타고 있었다. 세가의 일꾼들이 급히 불을 끄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그들은 불타는 비봉루를 그냥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주인 철필 제갈관이 불타는 누각 앞에 쓰러져 있었던 데다가,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는 괴인이 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불을 끄려던 종복들이 보이지도 않는 수법에 피를 뿜으며 죽어 나가고,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급히 비봉루로 달려 나온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괴인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괴인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가주에 대한 우려는 다만 핑계일 뿐, 사실은 아무도 괴인의 기세를 감당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갈세가 고수들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날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벽한 무용지물이었다.
“무슨 일이냐!”
필옹 제갈련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괴인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너는!”
“잘 있었나?”
뒷짐을 진 괴인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익숙한, 그러나 너무나도 낯선 모습에 필옹 제갈련은 섬뜩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비검인가?”
제갈련이 비검 공손극을 몰라볼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련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비검 공손극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놀랍게도 한창때의 중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름진 노년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머리카락도 검어졌다. 체격도 이전보다 더 커진 데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는 무공을 잃기 전보다 더욱 흉악하고 난폭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필옹 제갈련이 물었다. 비검 공손극은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글쎄? 이게 무슨 짓일까?”
제갈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공공연히 드러내진 않았으나 제갈세가는 비검 공손극과 손을 잡았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나타나 제갈세가의 가주를 공격하고 그 거처를 불태운단 말인가?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겠지?”
사뭇 분노를 피워 올리며 제갈련이 말했다. 그러나 공손극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의미? 알지. 이건 바로 만가(輓歌)다.”
‘만가?’
공손세가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련에게 공손극의 말과 행동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슥.
갑자기 공손극이 허리를 굽혔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던 필옹 제갈련은, 스스로 겁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외사의 고수인 그가 눈앞의 비검 공손극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비검 공손극은 한 팔을 뻗어 바닥에 흐르는 피를 손끝에 찍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제갈세가의 가주, 철필 제갈관의 피였다.
“이것이…….”
몸을 일으킨 비검 공손극은 자신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내려다보며 눈동자를 빛냈다.
“제갈세가의 피인가?”
그 목소리는 사뭇 노래하듯 낭랑했다. 하지만 필옹 제갈련에겐 마치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스륵.
비검 공손극에게서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언가 잘못 본 것처럼 흐릿했지만, 그것은 곧 피처럼 선명한 붉은 기운이 되어 공손극 주위를 휘감았다.
후우웅.
‘저건?’
제갈련이 그 안개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비검 공손극은 피 묻은 자신의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딱,
화아아악.
비검 공손극이 손가락을 퉁기는 것과 동시에 붉은 안개가 터져 나왔다.
“모두 숨을 멈춰라!”
제갈련이 급히 외쳤다. 칼을 뽑아 들고 있던 제갈세가의 고수들 역시 이 안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즉시 호흡을 멈췄다. 그러나 그들의 경계도, 제갈련의 경고도 소용이 없었다.
“컥!”
제갈세가의 고수 하나가 목을 움켜쥐었다. 호흡을 이미 멈춘 상태였지만 붉은 안개 같은 그것이 그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고 있었던 것이다.
“큭.”
“억!”
여기저기서 신음 같은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주변을 뒤덮은 붉은 안개 속에서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목과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붉은 안개는 마치 큰물이 범람하듯 제갈세가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네 이노오옴!”
필옹 제갈련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그의 온몸에서 기세가 터져 나오고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흥.”
그러나 비검 공손극은 조소했다. 그는 들어 올렸던 손을 휙 돌리더니 손바닥을 펴 제갈련을 향했다.
후욱.
“헉!”
필옹 제갈련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비검이 손을 편 순간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 같은 압도적인 기세가 자신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크윽.”
제갈련은 자신의 모든 내력을 끌어 올리며 그 기세에 저항했다. 그러나 비검 공손극의 손에서 뿜어 나오는 가공할 기세는 조금씩 제갈련의 몸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으드득.
이를 악물었지만 필옹 제갈련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제갈련의 무릎이 꺾이고 등이 굽어져 마치 공손극에게 예를 표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 다음에야, 비검 공손극은 가느다란 미소를 흘렸다.
“손빈을 찾아라.”
비검 공손극이 말했다.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공손극의 힘에 짓눌리는 제갈련은 그걸 생각할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어쩌면 그가 너희를 구해 줄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공손극이 가늘게 웃었다.
“완전한 절망을 가져다주든가.”
훅.
제갈련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필옹 제갈련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비검 공손극이 뒷짐을 진 채 가볍게 허공을 밟으며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경악한 제갈련은 공손극을 올려다보았다. 불길을 등진 공손극의 어두운 얼굴 속에서, 오직 그의 눈동자만이 새빨간 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시 오겠다.”
허공에 뜬 비검 공손극이 제갈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고통 속에서 노래하라. 너희 자신과 공손세가를 위한 만가를.”
그 새빨간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는 것을, 제갈련은 소름 끼치도록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그렇게 그는 떠났소.”
필옹 제갈련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그때의 분노와 절망이 되살아나는 듯, 움켜쥔 그의 주름진 손이 파르르 떨린다.
“붉은 안개는 사라졌지만 쓰러졌던 사람들은 일어나지 못했소. 그리고 끔찍한 고통이 그들을 덮쳐 왔소. 오직, 제갈세가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만 말이오.”
“제갈세가의 혈육들만 쓰러졌다는 뜻이냐?”
노군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제갈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나 외부 사람들은 물론 세가의 종복들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그 고통은 오직 제갈세가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만 찾아왔다.
“그리고?”
노군의 재촉에 제갈련이 말을 이었다.
“의원들은 고개를 저었고, 온갖 귀한 영약이 효과가 없었네. 음식은 물론 물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니, 나날이 기력이 떨어져 이제는 실신한 사람도 허다하다네. 이대로라면…….”
노년의 제갈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갈세가는 끝이네.”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비록 그날 세가에 없었던 몇몇 직계와 독립한 방계들이 살아남아 있기는 하나, 제갈세가의 힘은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대로 본가가 무너지면 제갈세가는 결코 이전과 같은 위세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다 해도, 무림 세가로서의 위치는 사실상 끝장나는 것이다.
“너는?”
노군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멀쩡한 척하지 말고 말해. 넌 어떻게 된 거냐?”
제갈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노군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내력이 사라졌네.”
담담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담담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군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지고 다른 일행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외사의 고수인 필옹 제갈련의 내력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아마 덕분에 다른 식솔들처럼 쓰러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네. 차라리 나도 함께 고통을 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손에 쥔 찻잔을 내려다보며, 제갈련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필옹 제갈련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나는 공손극과 손을 잡았었소. 그 결정이 손 공자를 적대하는 것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소. 사실 손 공자가 이대로 떠난다 해도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을 것이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제갈세가가 받을 당연한 보응인지도 모르겠소.”
말하는 제갈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늙은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드리겠소. 평생을 종으로 살라 해도 그리하겠소. 제갈세가의 현판을 내리고 무림을 떠나라 한다 해도 그리하리다.”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말들이, 더군다나 필옹 제갈련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 할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 제발, 제갈가의 혈육들을 구해 주시오. 손 공자.”
손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쾅.
“헛소리 마라!”
분노한 노군이 외쳤다. 그의 주먹 아래서 커다란 탁자가 으직 하고 소리를 냈다.
“네 늙은 목숨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이냐? 평생을 종으로 살겠다고? 제갈세가의 현판을 내리겠다고? 웃기지 마라! 그냥 놔둬도 죽을 놈과 내일이면 쓰레기만도 못하게 될 제갈세가의 현판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노군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왜 비검 같은 놈과 손을 잡을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이 나이에 대체 무엇을 더 얻으려고 네놈답지 않은 짓을 해!”
노년의 필옹 제갈련이 눈을 감았다. 그는 나지막이 신음처럼 말했다.
“……한 번만이라도, 제갈세가가 천하제일가로 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네.”
그건 처연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건 노군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놈의 가문!”
쿵, 우지직.
내리친 노군의 주먹 아래 기어이 탁자가 소리를 내며 균열을 드러냈다. 노군은 이를 갈며 제갈련에게 소리쳤다.
“대체 그게 무어라고 평생을 얽매인단 말이더냐? 차라리 잘된 일이구나! 그토록 소중한 가문을 끌어안고 모두 다 같이 죽게 되었으니 말이다!”
덜컹.
노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콰당.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군 제갈련도, 그리고 굳게 입을 다문 손빈도 마찬가지였다.
끼이익.
닫혔던 문이 스스로의 기세에 천천히 열렸다. 침묵이 내려앉은 그곳에서, 필옹 제갈련이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오, 손 공자.”
손빈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제가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말했다.
“노군 어르신께서 저리도 가슴 아파하시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노군의 분노는 그의 정이다. 거친 강호 무림에서, 그나마 그가 인정하던 필옹의 초라한 모습에 그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난 것이다. 그것을 손빈이, 아니 누구라도 모를 수가 없다.
“……고맙네.”
노년의 제갈련이 말했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었다. 제갈련의 주름진 눈가에서 반짝이는 눈물이 손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작가의 말)
서린: 노군 할아버지. 제갈세가에 책임을 묻게 하겠다면서요?
노군: (인상 쓰며) 그럼 죽은 놈에게 책임을 물으랴? 패더라도 살려 놓고 패야지!
(먼 훗날, 미국은 자살을 시도한 전범을 기어이 살려 놓고 단호히 사형을 집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