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77)
낙향문사전-477화(477/494)
477화. 검은 털의 마수 대묘의 중심인 천황전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황색 기와를 올린 중층 지붕과 붉은 색의 기둥들은 마치 황제의 거처인 자금성처럼 장엄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태산의 신상을 모시는 곳이자 황제가 제의를 행하는 태황전은, 그러나 지금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여인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 스륵. 천황전을 둘러싼 짙은 안개 속에서 검은 옷의 마인이 나타났다. 그는 천황전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녀님.” 그 낮은 목소리를 드넓은 대전 안쪽에 앉아 있던 여인은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침상으로 착각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의자에 앉은 마교의 신녀 공손지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화려한 의복과 달리 사뭇 흐트러진 자세로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은쟁반에 놓인 비취색 구슬들을 가볍게 굴리고 있었다. 정교한 문양과 진언들이 조각된 예술품이자, 황제가 대묘에 하사한 귀한 보물이 지금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 아래서 장난감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손빈과 그의 일행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손빈?” 달그락. 그녀의 가는 손가락 아래서 비취 구슬이 소리를 냈다. 공손지는 고개를 돌려 대전 앞에 부복한 검은 옷의 마인을 바라보았다. 검은 옷의 마인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후후.” 공손지의 나른한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아무래도 그는 나와 만날 운명이었나 봐. 태산에 오르는 수많은 길들 중에 하필이면 이곳으로 오다니 말이야. 하지만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겠어.” 마인을 바라보는 공손지의 눈동자가 요염하게 빛났다. 공손지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비검과 결전을 치르기는커녕 태산에 오르지도 못하게 되었으니까.” 가늘게 웃음을 흘리던 공손지는 다시 비취 구슬들로 시선을 향했다. “이곳으로 데려와. 죽이지 말고 살려서.”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달칵.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공손지는 고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돌려 검은 옷의 마인을 바라보았다. 그 매혹적인 눈가에 서린 것은 분명 노기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첫 번째 중문(中門)에서 일백 마인에게 손빈을 대적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의 발걸음조차 늦추지 못할 것입니다.” 오대마인의 첫째인 검은 옷의 마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수대에게 두 번째 중문을 지키라 명했으나, 손빈이 마수대를 돌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천황전 중앙에 앉은 신녀 공손지의 노기는 거리를 넘어 입구에 부복한 마인의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골적인 분노에도 불구하고 마인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목숨을 던진다 해도 그를 어쩌지 못합니다. 대묘를 지키는 이백 마인과 태산의 칠백 마인, 그리고 마수들과 화탄을 전부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를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녀님을 대적할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쿵. 마인은 서슴없이 고개를 바닥에 찧었다. 그 소리가 텅 비어 있는 천황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즉시 이 자리를 피하실 것을, 신녀께 진언합니다.” 뜨거운 충정 같은 것은 마인에게 없었다. 공손지 역시 그의 행동에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교의 신녀인 그녀에게 감정이란 그저 유희에 불과할 뿐이니까. 하지만 마인은 공손지에게 결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피해야 한다는 판단은 마인으로선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흐음.” 공손지의 눈가에는 여전히 노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새로운 대상에 대한 강렬한 흥미로 빛나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판단했지?” “……그는 마신일지도 모릅니다.” “마신?” 의아한 표정을 짓는 공손지에게 마인이 말을 이었다. “허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공손지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마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는 그를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검은 옷의 마인이 하는 말을 공손지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대마인의 첫째인 그의 능력으로도 손빈을 막기는커녕 그 역량을 측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후후.” 공손지가 가늘게 웃었다. “네가 내게 피할 것을 진언했다는 건, 내가 질 것이라는 뜻인가?” 쿵. 마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 머리를 찧었다. “신녀님은 다가올 마천의 지배자이시자 땅 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십니다. 신녀님의 권능을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게 피하라 진언한 거지?” “판단할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옳았다. 인간적인 감정과 의도를 철저히 배제한, 지극히 명확하면서도 단순한 판단이었다. 허나 그 대답이 공손지에겐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피할 수 없지.” 공손지는 손을 모으고 요염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사락.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이 불빛아래 반짝였다. 공손지는 대전 앞에 부복한 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정말로 내 기대를 뛰어넘는 남자라면 나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게 될 거야. 만일 그가 내 기대 이하라 해도 어차피 상관은 없어.” 공손지는 살짝 혀를 내밀어 자신의 빨간 입술을 핥았다. “남의 것을 빼앗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제법 재미있는 일이니까.” 제아무리 값을 따질 수 없는 보옥이라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마치 지금 은쟁반에 뒹굴고 있는 비취 구슬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월아가 그토록 극진히 여기는 남자를 그녀의 눈앞에서 빼앗는 것은 공손지에게 짜릿한 희열의 시간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그 ‘손 공자’는 과연 어느 쪽일까?”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마교의 신녀 공손지가 웃었다. 그 미소는 더없이 요염하면서도 지극히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사라스바티가 단번에 무력화시킨 백여 명의 마인들은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손빈 일행은 천천히 그들을 지나쳐 대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제야 대전처럼 보이던 건물이 사실 커다란 중문(中門)임을 알아차렸다. 건물 자체가 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문 이곳저곳에 쓰러진 마인들을 서린은 일부러 피했고 노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사수연이나 당월아, 경희 공주도 마인들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스바티는 걸음을 멈추고 쓰러진 마인들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왜?” 노군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라스바티는 고개를 들었다. 자박.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사라스바티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마인들은 신녀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군요.” “신녀?” 그 말에 노군은 조금 전 손빈이 마인에게 ‘신녀’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노군은 손빈을 돌아보았지만 손빈이라고 알 리가 없다. 그도 그저 마인이 ‘신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니까. 결국 노군은 사라스바티에게 물었다. “신녀라니, 그게 뭔데?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거냐?” “마인을 만들 수 있어요. 이미 말한 것처럼.” “어, 그럼…….” 앞서 걷던 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런 마인들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마도.” 사라스바티는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라자님의 위협이 되진 못하겠지만,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을 거야.” “조금 곤란한 정도가 아니지.”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짙은 마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대단히 위협적이다. 우리가 지금 멀쩡한 건 순전히 빈이 덕분이야.” 지금도 대묘에 자욱한 안개는 짙은 마기를 품고 있었다. 도가나 불가의 내공이 없다면 제아무리 외사의 고수라 해도 오래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인 놈들까지 득실거린다면 대책이 없어진다. 고수들조차 숨 쉬기 힘든 마기 속에서 이런 놈들이 우글우글 덤벼든다면 대체 뭘로 막을 거냐?” “멀리서 화포로 쾅쾅 쏴 버리면요?” 서린의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손을 드는 건 서원에서 생겨난 버릇이다.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하려던 노군이 순간 눈썹을 꿈틀했다. “……나쁘지 않은데?” “그렇죠?” 환한 표정으로 서린이 말했지만 노군은 곧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화포가 흔한 것도 아니고 무제한으로 쏴 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리고 그 정도면 이미 내전 상황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서린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노군이 한숨을 쉬었다. “뭐, 걱정 마라.” 노군은 손빈이 아니라 사라스바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전직 마신께서 말 한마디로 다 쓰러뜨릴 수 있는 모양이니까.” 서린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대번에 사라스바티를 향한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사라스바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마신의 힘이 아니랍니다. 저는 더 이상 마신이 아니니까요.” 그녀에겐 더 이상 마신의 힘이 없다. 한때 그녀가 가졌던 신위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전처럼 마신의 권능을 휘두르지는 못한다. “그럼 아까 그건 뭐냐?” “옛 신언(神言)이에요.” 사라스바티는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은 잊혀진, 아주 고대에 번성했던 왕국의 유산이지요. 소리 그 자체에 신성이 담겨 있어서 특정 대상에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힘을 빌려올 수도 있고요.” “그래? 그럼 도가나 불가의 진언 같은 거로군.” 도가나 불가의 진언은 이미 익숙한 개념이다. 사라스바티가 말하는 신언은 보다 더 고대에서 기인한 것인 듯했다. 물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그녀만이 알겠지만. “말했듯이 특정 대상에게만이에요. 예컨대 초월적인 기이(奇異)나 지금의 마인 같은 것들이지요. 실제 생활에선 놀랍도록 쓸모가 없어요.” 노군이 피식 웃었다. “나도 안다. 불가든 도가든 어디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더냐?” 종교의 존재 의의를 한꺼번에 부정하는 말을 하며 노군이 피식 웃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또 다른 중문에 도착해 있었다. 사방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낮은 울음소리는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엔 마수인가 보네요.” 사라스바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개 속에서 검은 옷의 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륵. 그 마인은 언뜻 이전의 마인과 같아 보였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크륵. 커다란 늑대들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리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단순한 늑대가 아니었다. 기이할 정도로 큰 아가리와 위협적으로 튀어나온 이빨, 그리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 짐승들은 바로 마수였다. ―크르륵, 크륵. 사람의 가슴 높이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늑대 마수들은 삽시간에 손빈 일행을 둘러쌌다. 그러나 노군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이것밖에 안 되냐?” 마수들을 돌아보며 노군이 말했다. 일행을 둘러싼 마수들은 서른 마리에 육박했지만 노군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우리를 막고 싶다면, 이 정도로는 안 될걸?” 노군의 말은 진심이었다. 손빈이나 사라스바티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노군과 서린 그리고 사수연과 당월아라면 이 정도 숫자를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령 그것들이 이미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마수들이라 해도 말이다. “알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마인이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개 속에 울려 퍼지는 그의 말은 마치 쇳소리처럼 거칠고 낯설었다. “그래서.” 슥. 마인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또 다른 짐승 소리가 안개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묵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사박.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인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몸집과 거대한 앞발, 그리고 허옇게 번뜩이는 치명적인 송곳니. 온통 새카만 그 거대한 마수는 다른 마수들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노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인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웃었다. 그는 쇳소리 같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수들의 왕이, 너희를 상대할 것이다.” 그 마수는 가히 왕이라 불릴 정도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아가리 주변에서 일렁이는 붉은 화염은, 그저 거대화한 짐승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서린이 쏜살같이 마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흥!” 검은 마인은 그 행동을 조소했다. 공포 앞에 판단력을 상실하고 발작적으로 덤벼드는 것은 흔한 반응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금 서린은 무기를 들기는커녕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마수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거대한 마수의 아가리에 자신을 던지는 격이다. 마인은 서린의 몸이 ‘마수들의 왕’의 송곳니 아래 으깨져 나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야옹아!” 서린은 그렇게 외치며 그대로 거대한 마수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새카만 마수 역시 서린을 향해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슬쩍 고개를 숙여 서린이 무사히 자신에게 내려앉도록 도왔다. “야옹아! 야옹아!” 서린은 활짝 웃으며 커다란 마수를 마구 쓰다듬었다. 크르르. 검은 마수는 눈까지 감고 나지막이 울음을 흘리며 만족감을 표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월아가 면사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야옹이가 아니라 흑표야.” 윤기 흐르는 검은 털을 가진 그 거대한 마수는 바로 천축에서 만났던 수마신의 세 마수 중 한 마리였다. 손빈 일행을 도와 세상의 끝에 이르기까지 함께했던, 그리고 파사의 사막에서 헤어졌던 ‘흑표’였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사수연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머나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리한 아이니까요.” 사라스바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눈가엔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착한 아이들이기도 하고요.” “착하긴 개뿔.” 노군이 투덜거렸다. 그는 여전히 일그러진 눈살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설마 했는데 진짜 찾아오다니, 대체 저 큰 놈을 어디서 키우냐고?” 그가 인상을 찌푸린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 거대한 검은 마수가 흑표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어디서 키울지부터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희 공주는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총명한 그녀는, 물론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눈앞의 마수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마수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사람으로선 결코 견디기 쉽지 않은 공포다. 그러니 놀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멈춰라!” 마인의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산 남쪽, 서역으로 통하는 비단길에서 마교도들과 조우한 이 거대한 마수는 마천(魔天)의 재림이 머지않았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마수들의 왕’이 손빈 일행, 즉 신녀를 대적하는 저들을 적대하지 않는 것은 마인으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사뭇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흘리는 검은 마수를 향해 마인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당장 저들을…….” 콰직. 마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커먼 흑표가 주저 없이 그를 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커다란 아가리에 마인의 머리와 상체는 물론이고 몸 대부분이 단번에 삼켜져 버렸다.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야옹아!” 서린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흑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슬그머니 마인을 뱉어 버렸다. 툭.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고 불에 그슬린 마인의 몸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단 한번 물린 것뿐이지만, 이미 마인의 몸은 그 기능을 대부분 상실한 이후였다.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다른 늑대 마수들이 일제히 적의를 드러냈다. 아니, 드러내려 했다. ―크아아아앙. 거대한 흑표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대묘가 쩌렁쩌렁 울렸다.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고 경희 공주의 안색이 단번에 새파랗게 변한다. 그리고 적의를 드러내려던 늑대 마수들이 일제히 꼬리를 내렸다. ―키잉. 늑대 마수들은 고개를 숙이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비록 그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감히 흑표나 손빈 일행을 향한 적의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애초에 마인이 흑표를 ‘마수들의 왕’이라 칭한 이유 역시 그 압도적인 위압감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늑대 마수들은 슬금슬금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잘했어.” 서린은 늑대 마수들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흑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딨어? 설표와 적표는? 같이 왔지?” 흑표는 담담한 눈빛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태산을 향했다. 아마 저곳에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형, 빨리 가요!” 서린이 환한 얼굴로 손빈에게 말했다. 손빈도 웃음을 머금었다. 저벅, 저벅. 손빈은 흑표에게 걸어갔다. 거대한 흑표는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고생했구나.” 사락. 부드러운 손길로 손빈은 흑표를 쓰다듬었다. 흑표는 만족스러운 듯 작게 그르릉 소리를 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흑표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는 손빈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이곳 태산에 온 것이 그저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손빈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말) 노군: 저것들 먹이는 뭘 줘야 되냐? 서린: 어, 고기 아닐까요? 노군: (한숨) 젠장, 잘못하면 저것들 먹이느라 기둥뿌리 뽑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