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91)
낙향문사전-491화(491/494)
491화. 설산의 비역(秘域) 손빈은 젊은 옥룡과 함께 설산에 서 있었다. 가끔씩 부는 차가운 바람에 눈가루가 휘날렸지만 옥빛 부채를 쥔 젊은 옥룡은 태연했다. 옷조차 그대로여서 부는 바람에 화려한 옷자락이 휘날렸다. 반면 손빈은 따뜻한 외투에 방한을 위한 모자는 물론, 털신까지 단단히 챙겨 신었다. “설산의 비역(秘域)이라.” 젊은 옥룡이 설산의 한 곳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전대 옥룡은 손빈에게 설산에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대해 알려 주었다. 바로 그곳을 손빈과 젊은 옥룡이 찾아온 것이다. “음침한 그 전대가 할 만한 발상이군. 분명 기분 나쁜 것들만 가득하겠지만.” 젊은 옥룡은 옥빛 부채를 펴 입을 가리며 말했다. 손빈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전대 옥룡은 재미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 했지만, 그의 감각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다르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손빈은 젊은 옥룡에게 물었다. “월아 소저가 알려 준 도해(圖解)를 기억합니까?” 본래 이 비역(秘域)에 들어가기 위한 도해(圖解)는 전대 옥룡이 손빈에게 직접 보여 주었다. 하지만 손빈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공에 휘리릭 그려 버린 것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아무리 두 번이나 봤다 해도 말이다. 다행히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은 그 도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빈은 이곳 설산에 오기 전, 아이들과 함께 음식점에 있는 일행에 찾아갔었다. “그럼 죄송하지만 수연 소저께서 같이…….” 손빈의 부탁에,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사수연은 미안한 표정을 했다. “죄송해요. 난 아이들을 돌봐야 할 것 같아요.” 처음부터 아이들을 염려하던 사수연은 서원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서린은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그 밝은 모습을 보니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저기, 그럼…….” 결국 손빈이 부탁할 사람은 당월아밖에 없었다. 당월아는 말없이 젓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그녀가 맛있는 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손빈으로선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림으로 그려 주면 어떠냐?” 문득 옆에 앉아 있던 노군이 말했다. 좋은 생각 같았지만 당월아와 사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선이 아니라 입체적인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자면 오히려 복잡해져요.” 사수연의 설명에 노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걸 단번에 기억했단 말이야?” 손빈은 노군의 말에 십분 동감하며 말했다. “수연 소저나 월아 소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요. 서린이도요.”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지 아는 손빈으로선 당연한 말이었다. 천재가 있다면 바로 이들이리라. 하지만 그 말에 노군은 혀를 찼다. “네가 할 말이냐?” 손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노군을 보았다. 하지만 노군은 못 본 척 찻잔을 들어 올렸다. 결국 나중에 따로 밥을 사 주기로 약속하고, 당월아는 손빈과 함께 혈룡문으로 돌아와 젊은 옥룡에게 도해를 보여 주었다. 똑같이 허공에 휘리릭 그리는 방식으로. 물론 이번에도 손빈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손빈이 젊은 옥룡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 복잡한 도해를 아직 기억하느냐고. “당연하지.” 젊은 옥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번이나 봤는데 그걸 모르겠어?” 놀랍게도 젊은 옥룡은 단번에 그 복잡한 움직임을 기억했다. 두 번 보여 준 것도 손빈의 염려 때문이지, 젊은 옥룡이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손빈으로선 도무지 흉내도 못 낼 일이다. 그렇게 당월아가 다시 음식점으로 총총 떠나고, 손빈은 젊은 옥룡과 함께 이곳 설산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허를 찔렸군. 이런 곳에 숨겨진 장소가 있을 줄은.” 젊은 옥룡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놀랍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올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사실 손빈은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 숨겨진 곳이라니 호기심이 생기긴 하지만, 딱히 이렇게 찾아와야 할 곳인가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대가 네게 넘겨준 곳이다.” 젊은 옥룡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대체 무엇이 있는지 확인은 해야지. 그리고 이 설산에 전대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도 기분 나쁘고.” 그 말을 손빈은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따지면 젊은 옥룡 본인이 전대 옥룡의 가장 큰 흔적 아닌가? “가지.” 사박. 젊은 옥룡은 설산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뜻 보아서는 막혀 보이는 저곳에, 전대 옥룡이 남긴 비역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아, 그리고.” 문득 젊은 옥룡이 손빈에게 말했다. “내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듣기 거북하니 편히 말하도록 해.” “하지만…….” 손빈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젊은 옥룡은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패배한 주제에 네게 존칭을 듣는 내가 느낄 모욕감 따위는 상관없다는 거냐?” 사뭇 서늘한 시선으로 젊은 옥룡이 말했다. 물론 그를 모욕할 의도가 없는 손빈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 알았네.” 무심코 존칭을 쓰려던 손빈은 젊은 옥룡이 인상을 쓰자 얼른 말을 바꿨다. “크흠.” 어쩐지 어색해서 손빈이 헛기침을 했다. 젊은 옥룡은 눈살을 찌푸린 채였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사박, 사박. 젊은 옥룡이 계곡을 향해 걸었다. 손빈은 말을 근처 나무에 묶어 두고 얼른 그 뒤를 따랐다. 푸른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하얀 설산의 봉우리가 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계곡은 변화무쌍했다. 눈 덮인 수풀로 막혔던 곳처럼 보였지만, 일단 도해를 따라 들어서자 삽시간에 풍경이 변했다. 안개가 자욱해지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갈림길 앞에 서 있기도 했다. 게다가 어디선가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물론 손빈이나 젊은 옥룡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군요. 아니, 신기하군. 이게 말로만 듣던 기문진식인가?” 손빈은 변화무쌍한 계곡 안쪽의 모습에 매우 흥미로워했다. 하지만 놀란 것치고는 헤매지도 않았다. “아, 저쪽 같은데?” 문득 손빈이 손을 들어 안개가 자욱한 눈길을 가리켰다. 젊은 옥룡은 피식 웃었다. 도해에 따르면 손빈이 지금 말한 방향이 분명하다. “그쪽이 맞다. 어쩌면 너에겐 도해 따윈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가끔 맞는 것뿐이지. 혼자였다면 아마 고생깨나 했을 걸세.” 어쩐지 손빈의 말투는 어색했다. 하지만 젊은 옥룡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곧 전대가 숨겨 둔 곳이 나타날 거야. 여길 지나면…….” 사박. 그렇게 말하며 젊은 옥룡과 손빈이 눈 덮인 커다란 나무를 지나쳤을 때였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며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자욱하던 안개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곳인가?” 손빈이 젊은 옥룡 옆에 서며 말했다. 젊은 옥룡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다.” 수풀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곳에 제법 커다란 전각 한 채가 서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평범한 광경처럼 보였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설산 한복판이 분명한 이곳에 푸른 풀과 높은 나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슥. 젊은 옥룡은 고개를 들어 설산의 봉우리가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이곳은 여전히 설산이다. “놀랍군.” “좋은 곳이군.” 손빈의 감상은 젊은 옥룡과 달랐다. “좋은 곳이라고? 과연 그럴까?” 젊은 옥룡은 피식 웃었다. “전대가 남긴 곳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선 안 돼.” 손빈은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느긋하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가자.” 그렇게 말한 젊은 옥룡은 눈앞에 보이는 전각을 향해 걸었다. 검은 지붕에 붉은 나무 기둥과 벽을 두른 전각은 사뭇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문 위에 걸린 금빛 현판에는 아무런 글씨도 없었다. ‘이름이 없으니 무명각인가?’ 손빈이 그렇게 생각할 때 젊은 옥룡이 조심스레 전각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사락. 분명 오래된 곳인데도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젊은 옥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손빈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본 것처럼 그곳은 하나의 커다란 전각이었다. 그러나 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중앙의 작은 공간을 중심으로 높다란 서가가 전각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서가에는 책보다는 온갖 다양한 물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전각의 중심에 위치한 작은 공간에는 작은 서탁과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벅. 손빈과 젊은 옥룡은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장소 특유의 쾨쾨한 냄새도 없고, 높은 곳에 난 촘촘한 창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히는 것을 보아 매우 세심하게 지어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우선 가까운 서가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처음에 본 것은 줄지어 늘어선 자그마한 자기병들이었는데, 내용물에 대한 표시는 없고 각양각색의 색실이 다양하게 묶여 있었다. “흥.” 젊은 옥룡은 코웃음을 쳤다. “이런 것들까지 줄을 맞춰 놓다니, 전대답군.” 손빈은 그제야 작은 자기병들이 촘촘히 줄을 맞춰 서 있음을 깨달았다. 커다란 서가에 여러 층으로 놓인 그 많은 자기병들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리고 이 수실은, 아마도 나름의 분류에 따라 표시한 것 같군. 내용물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이 편하고 직관적이기는 하지.” 잠시 생각하던 손빈은 그제야 젊은 옥룡의 설명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 색실들은 나름대로 분류를 해 놓은 것일 뿐, 내용물 같은 건 전대 옥룡이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툭. 젊은 옥룡은 자그마한 자기병을 일부러 쳐서 줄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쳐 다음 서가로 향했다. 저벅, 저벅. 이어지는 서가들에도 놀랄 만한 것들이 가득했다. 어떤 곳은 무공 비급들이 놓여 있기도 했고, 특이한 무구가 있는 서가도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약재나, 처음 보는 물건이 놓여 있는 곳도 많았다. 그러나 한 곳에 이르러서는 손빈 역시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젊은 옥룡 역시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 이건 시신이군.” 눈앞에 있는 관에 놓인 것은 분명 사람의 시신이었다. 그것도 한두 구가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열 개가 넘는 관이 서가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어떤 관은 차가운 냉기와 함께 여전히 생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도 했고, 어떤 시신은 뼈만 남아 있거나 바짝 말라 있기도 했다. 생전에 입던 것인 듯 대부분의 시신들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채였다. 칼이나 무기, 혹은 부채 같은 물건이 함께 놓인 경우도 많았다. “왜 이런…….” 손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젊은 옥룡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물음에 답했다. “수집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겠지. 아마도 연관이 있는 자들이 본다면 눈을 뒤집고 덤벼들 정도로.” 시신이라 해도, 아니 시신이기에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많다. 당장 당문의 총괄군사 당화련만 해도 당백호의 시신을 수습하고 당문의 실세로 떠오르지 않았는가? 물론 당백호가 남긴 것들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까닭도 있지만, 시신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생각보다 아주 크다. 때로는 단 한 구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그냥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중얼거리는 젊은 옥룡의 목소리에 손빈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 나가지.” 손빈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하지만 그 전에.” 젊은 옥룡이 슬쩍 턱짓으로 전각 중앙의 서탁을 가리켰다. “저걸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온갖 괴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이곳 한 복판에 덩그러니 자리한 서탁. 그 위에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것은 손빈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손빈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전각 중앙의 서탁으로 다가갔다. 젊은 옥룡은 주위를 경계하며 손빈의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서탁에는 기본적인 지필묵과 불을 밝히기 위한 등, 그리고 검은 표지의 책 한 권뿐이었다. 서탁 앞에 있는 의자는 제법 편해 보이는 것이었지만 딱히 화려하거나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슥. 손빈은 손을 뻗어 검은 표지의 책을 들었다. 혹시나 표지가 무언가 이상한 것으로 되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고급품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의외로 평범했다. 파라락. 먼저 손빈은 가볍게 책 전체를 살폈다. 언뜻 보아도 작고 세밀한 글씨들이 가득했다. 글씨도 대단히 보기 좋아서, 줄이 흐트러지거나 획이 튀어나온 것도 없다. 사락. 손빈은 책 표지를 살펴 제목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채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렸다. “무슨 책이지?” 젊은 옥룡이 묻는다. 고개를 든 손빈은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손빈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젊은 옥룡이 말했다. “그건 전대가 네게 넘긴 것이다. 내가 볼 이유는 없어. 다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봐도 괜찮네.” 손빈은 책을 젊은 옥룡에게 내밀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그가 관심 있던 것을 이것저것 기록한 책이네. 말하자면 잡설, 혹은 잡록 같은 것이지.” 그 책에 기록된 것은 특별한 주제나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이 전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설명도 아니었다. 중구난방으로 맥락 없이 기록된 그 글들은 손빈의 말처럼 잡설, 혹은 잡록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한 단락에서도 주제가 여러 번 바뀔 정도로 정신이 없기도 했다. 단아하고 섬세한 글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필요 없어.” 젊은 옥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대의 글씨 따위, 보고 싶지 않다.” 고개를 돌리며 거절하는 젊은 옥룡의 모습에 손빈은 책을 든 손을 거뒀다. 그리고 한 장씩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내용을 살펴보았다. 사실 책을 이렇게 대강 대하는 건 문사로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많은 책을 읽어 온 손빈은 이런 식으로 살펴보는 방법에도 익숙했다. ‘응?’ 손빈은 문득 단어 하나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손빈은 그 부분을 천천히, 주의 깊게 읽기 시작했다. 그곳에 적힌 내용은 단순한 발상과 결과뿐이었다. 정작 중요한 과정이나 실제로 어떻게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손빈에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랬군.’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팔락, 팔락. 두꺼운 책이 거의 끝에 다다를 무렵, 손빈은 또 다른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다른 내용들 사이에 생뚱맞게 끼어 있는 단 한 줄뿐인 문장이었다. 하지만 손빈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손빈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훅. 문득 서탁에 놓인 등에 불이 켜졌다. 고개를 든 손빈은 젊은 옥룡이 등에 불을 켠 것을 알아차렸다. “……어두워져서.” 젊은 옥룡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전각 안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 이런. 미안하네. 내가 너무 오래…….” 서생으로 살아온 버릇 탓일까? 자신도 모르게 책에 너무 빠져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손빈은 그제야 젊은 옥룡이 그동안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괜찮아.” 젊은 옥룡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끝까지 다 봐라. 네 것이니까.” “고맙네.” 손빈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책으로 시선을 향했다. 팔락, 팔락. 책의 나머지 부분은 별것 없었다. 끝까지 살펴본 손빈은 책을 덮고 서탁에 내려놓았다. “가져가지 않을 건가?” 젊은 옥룡의 물음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것을 가져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젊은 옥룡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 책을 다 살펴본 것이다. “나가세.” 손빈의 말에 젊은 옥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있는 것들은?” 고개를 저으며 손빈이 말했다. “필요없네. 이런 은밀한 곳이라면 아무도 모를 테고.” “아무도?” 젊은 옥룡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는 길을 알고 있는 건 생각 안 하나?” 손빈은 웃었다. “자네가 이걸 건드릴 것 같지는 않네만.” 그는 자존심 강한 젊은 옥룡이다. 손빈은 그가 이것을 탐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자네’라는 스스럼없는 호칭에 젊은 옥룡이 흠칫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더 안 된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네가 뭐라고 날 믿는단 말이냐? 정히 필요 없다면 전부 불태워라.” 손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문득 눈에 들어온 시신들의 관을 보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건 결코 경솔한 결정이 아니었다. 시신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결코 좋은 것들이 못된다. 이 장소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 대답에 젊은 옥룡도 살짝 놀랐다. 하지만 곧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대답이로군. 좋아, 그렇게 하지.” 정말로 기쁜 듯, 젊은 옥룡은 서가로 가득한 전각을 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불태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지 않는 것도 있을 테니까. 터트리고 부순 후에 불태우면, 혹여 누가 이곳에 오더라도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터트린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손빈이 반문했다. 하지만 젊은 옥룡은 대답대신 서가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손빈은 그곳에 무언가 익숙한 것이 놓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 그것은 바로 화탄이었다. 예전에 당문에서 보았던, 사천당문 비전의 화탄이라던 천뢰가 서가 한구석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지 않겠나?” 젊은 옥룡이 씨익 웃었다. 그것은 손빈이 본 그의 웃음 중 가장 밝고 꾸밈없는 환한 표정이었다. (작가의 말) 난데없는 불꽃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