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93)
낙향문사전-493화(493/494)
493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 이국적인 운남의 모습은 아이들에겐 새로운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혁련세화와 화사, 경희 공주는 물론이고 사라스바티 역시 생전 처음 와 보는 운남의 이색적인 풍물에 푹 빠졌다.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보는 것마다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내일 떠난다고요?” 아이들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업을 해야지.” “우에에엥.” 아이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하며 젊은 옥룡의 명을 지켜 온 한월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 잘생긴 오빠는 어디 갔어요?” 소소가 손빈에게 물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잘생긴 오빠, 혹은 착한 형으로 불리는 젊은 옥룡은 설산에서 내려온 이후 아직도 혈룡문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음, 아마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못 올 것 같아.” 손빈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젊은 옥룡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손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서원까지는 먼 길이고, 아이들을 기다릴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래요? 가기 전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젊은 옥룡은 은근히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제일 큰 원인은 바로 한월이었는데, 맛있는 것을 먹거나 신기한 것을 보며 아이들이 감사할 때마다 그가 무뚝뚝하게 ‘옥룡 님의 명이다’라고 한 덕분이었다. “괜찮아. 또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풀 죽은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손빈은 젊은 옥룡이 무사히 어머니와 재회했기를 바랐다. 소중한 인연은, 때로는 그 소중함 때문에 오히려 커다란 상처를 남기기도 하니까. “언제 출발할 거야?” 화사가 불쑥 물었다. 그녀는 운남의 민속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현란한 색의 이 지역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물론 어떤 옷을 입든 그녀의 당당한 여성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히려 운남 민속 옷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정도다. “내일 아침에 떠나면 되지 않을까요?” 손빈의 말에 화사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나 오늘은 선물 사러 가야 해! 우리 그이 줘야 하거든.” 화사의 ‘그이’는 물론 탈혼도다. 그녀의 말에 노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넌 그냥 그 옷만 입고 가도 탈혼도가 좋아할 것 같은데…….” 노부인 당운영이 살짝 노려보자 노군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앗! 저도 선물 사야 해요!” 소소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언니가 올 때 선물 사 오랬어요. 안 사 가면 혼나요.” “나도 사야 해.” 앵앵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남자 아이들도 모두가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들 형제자매나 부모님께 선물 사 오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저도요.” 서린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사형 할아버지한테 선물 드리고 싶어요.” 그 ‘사형 할아버지’는 바로 무당의 현허 진인이다. 천외사성이었던 황학 진인의 제자이자 현 무당 장문인의 사숙이며, 사실상 무당의 최고 어른이다. “그럼 나도 할아버지께…….” “나도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어.” 사수연의 말에 당월아도 면사 뒤에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가족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할아버지’와 ‘언니’가 북해의 빙제에다가 당문의 총괄군사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빙제와 당문 총괄군사에게 선물이라……, 어지간한 걸로는 턱도 없겠는데?” 노군이 다시 중얼거린다. 손빈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선물은 누가 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지.” 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혁련세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선물 사러 갈까요? 저도 사야 하거든요.” “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합창을 하듯 대답했다. “어, 그런데 선생님은 벌써 많이 사셨잖아요.” 소소가 혁련세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혁련세화는 항주에서부터 지금까지 들른 곳마다 기념품이며 선물을 챙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그래도 재미있잖니. 받는 사람들도 좋아하고.” 혁련세화는 살짝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물론 감사를 표해야 할 무관이나 세가의 어른들도 많긴 하지만, 본래부터 그녀는 이런 작은 선물을 주거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것을 좋아했다. “순랑, 나도 뭔가 선물을 받고 싶어요.” 노부인 당운영이 노군에게 말했다. 노군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래? 뭘 받고 싶소?” “아무것이나 좋아요. 당신이 사 주는 것이라면.” 노군은 피식 웃었다. “어린애 같긴……. 알았소. 같이 갑시다.” 노부인 당운영은 미소를 지으며 노군과 팔짱을 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손빈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럼 다 같이 나가지요.” 그날 손빈 일행은 운남의 마지막 날을 선물 사는 것으로 보냈다. 손빈은 숙부님과 숙모님께 드릴 선물을 샀고, 신의도 오르한에게 줄 작은 장신구를 샀다. 별로 관심 없는 듯 보이던 경희 공주와 사라스바티도 작은 노리개 같은 것들을 골랐다. 정말이지 별것 아닌 것들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일행은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다. *** 무사 한월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손빈 일행은 혈룡문을 떠났다. 그사이 정이 들었는지 마차 뒤편으로 모인 아이들은 멀어져가는 한월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정이 많은 앵앵이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혈룡문을 떠난 손빈 일행은 바로 운남을 벗어나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 태산에서 보낸 마수들이 운남 남부의 삼림 지역에 있기 때문이었다. “와아! 야옹이들아!” 서린은 마수들을 발견하자 공중을 날아 그대로 달려들었다. 마수들 역시 오랜만에 보는 손빈 일행이 반가운 듯 작게 그르렁거리며 만족감을 표했다. “음, 이 정도면 딱히 민가에 피해는 없겠군.” 노군이 새카만 흑표의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마수들이 있는 곳은 험한 운남의 삼림지대 중에서도 매우 깊은 곳이라 민가는커녕 사람 발자취를 보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서원 아이들 역시 제법 먼 마을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안전 문제도 있었지만, 노군이 인상을 쓰며 ‘그러다 아이들이 기르자고 하면 어쩌려고?’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수가 손빈 일행을 대하는 태도나, 누구에게든 금방 정을 붙이는 아이들의 성격을 볼 때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크고 강하며 자기를 따르는 듬직한 짐승은 아이들에겐 거의 꿈만 같은 친구가 아닌가? “얘네들이야? 오빠를 따라 온 야옹이들이?” 눈을 반짝이던 화사가 겁도 없이 마수들에게 다가갔다. 마수들은 화사를 향해 몇 번 코를 대어 보더니 이내 친근감을 표시했다. “귀, 귀여워.” 화사는 마수들에게 뺨을 부비며 좋아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빈을 돌아보았다. 순간 손빈은 화사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나, 이 애들…….” “안 됩니다.” 손빈은 얼른,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서원 인근에 이 아이들을 키울 곳은 없습니다. 흑사련 산채도 마찬가지예요.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여기가 좋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마수들을 ‘아이들’이라고 말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사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하지만 마수들이 그르렁거리며 머리를 들이밀자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서린은 아예 마수들 등에 올라타고 있고 사수연이나 당월아도 스스럼없이 마수들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혁련세화나 노부인 당운영까지 용기를 내서 마수들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마수의 매력은 생각보다 대단해서 늘 침착하던 노부인 당운영조차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경희 공주도 새하얀 설표를 매만지고, 사라스바티 역시 유난히 애잔한 눈빛으로 세 마리의 마수들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이 아이들이 잘 있는 것을 알면 수마신이 좋아하겠네요.” 사라스바티의 말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겠군요.” 손빈 역시 수마신의 기억을 되새기며 세 마리의 마수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수들은 손빈의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고 그르렁거리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 세 마리 마수들과 작별한 손빈 일행은 귀주성의 성도 귀양으로 향했다. 한때 혈봉련이 있었던 귀양은 예전처럼 몇 개의 중소 문파들만 남아 있을 뿐, 혈봉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대 세력이었던 운남 혈룡문이 빠지고 혈봉 금사련과 귀견수라가 사라지자, 노군의 예측대로 구심점을 잃은 연합이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손빈 일행 역시 오랜 마차 여행으로 힘들어 할 아이들을 쉬게 하려고 들렀을 뿐, 귀양에선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손빈 일행과 아이들이 탄 세 대의 마차는 선물과 먹을거리들을 가득 실은 채 순조롭게 청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따각, 따각. “그런데 말이다.” 말고삐를 잡고 있던 노군이 문득 말했다. 옆자리에 앉아 지나는 경치를 보고 있던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노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닌데,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 “네?” 그건 정말이지 난데없는 말이었다. 손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무슨 말씀이냐고?”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빈을 돌아보았다. “너, 태산에서 연아랑 월아를 덥석 끌어안았잖냐.” 손빈은 그제야 노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손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저기 그때는…….” 그건 넘치는 감격과 감동을 이기지 못한, 어디까지나 순수한 행동이었다. 그 전에 서린이도 안아 주었고, 노군 역시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던가? 만일 마수들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안아 주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친애의 뜻으로…….” “친애 같은 소리하네.” 노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과년한 아가씨들을 막 끌어안아? 연아나 월아가 무슨 네 맘대로 끌어안는 베개인 줄 알아?” 손빈은 할 말이 없었다. 젊은 남녀가 손만 잡고 다녀도 행실이 나쁘다고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다. 제아무리 무가의 여식들이 자유분방하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엄연한 외간 남자와 끌어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손빈은 머리털이 주뼛 서는 것을 느꼈다. 지금 여기에 사수연이나 당월아가 없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간 정말이지 얼굴조차 들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고 지금 이 마차엔 잠든 아이들과 선물 보따리만 가득했다. “남자라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노군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들 다 보는 데서 와락 끌어안아 놓고 ‘난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한 겁니다’ 그러는 건 개소리야. 아주 나쁜 놈이지. 무책임한 거다. 그건 사기야, 사기.” 노군의 어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구절구절 옳은 말이라 손빈은 꼼짝없이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다니, 손빈 스스로 생각해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렇군요.” 손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통렬한 노군의 지적에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책임질 거냐?” 노군이 넌지시 물었다. 손빈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질 일을 했다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 말에 노군이 반색을 했다. “그래? 그럼…….” “허나.” 손빈이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상대방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인륜지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막상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없을 수도 있으니…….” “있어.” 노군이 단칼에 손빈의 말을 잘랐다. “그럴 의향이라면 넘치도록 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일랑 마라.” 손빈은 미심쩍은 눈으로 노군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확언하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있다니까!” 노군은 버럭 소리를 쳤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 놓고 확신할 수가 없다니, 답답해서 복장이 터질 정도였다. “아이들 깹니다.” 다급한 손빈의 말에 노군은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느껴지는 박력은 여전했다. “그럼 연아나 월아가 뭐하러 그 먼 곳까지 너와 함께 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데도 모르겠다고?” 그건 당연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손빈은 노군의 생각보다 더욱 진지하고 신중했다. 게다가 쓸데없이 아는 것도 많았다. “그건 수연 소저나 월아 소저의 책임감 탓일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어려운 일을 함께 겪은 사람은 심리적 동질감을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 그 감정이 진실 된 사랑인지는 본인 스스로도 잘 모르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하는 손빈의 모습에 노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노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진실 된 사랑은 언제 확인되는데? 아니, 확인이 되기는 하냐?” 손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세상의 그 누가 확인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조차 있으니 말이다. “네 뜻은 잘 알겠다.”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것도 좋고, 진실 된 마음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러다가 언제 혼인하고 언제 애를 낳느냔 말이다. 영매처럼 평생 기다려 주는 사람이 어디 흔할 것 같아?” 그 와중에도 노군은 부인 자랑을 했다. 노군은 손빈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랑 앞에서 자존심 같은 건 필요 없다. 깨지고 거절당하더라도 좋아하면 일단 당당하게 들이받고 보는 거야.” 사뭇 비장한 어조로 노군은 말했다. “그게 남자다.” 그 말은 손빈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허나…….” “왜, 또?” 짜증 섞인 노군의 말에 손빈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옛 성현께서는 가례(家禮)를 통해 혼인이 가문의 결합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허나 노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가문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노군은 손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손빈은 물론이고 그의 숙부도 딱히 내세울 만한 가문은 못 된다. 그런데 상대방이 북해의 빙궁이거나 무림 오대세가 중 하나인 당문이라면 감히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스러울 지경이다. “허어어.” 노군은 긴 탄식을 내뱉었다. 손빈의 입장에선 당연한 걱정이겠지만 노군으로선 이런 답답한 말이 또 없다. “그딴 거 없으면 어때서! 자기들끼리만 좋으면 되지!” “허나 혼례란…….” “없으면 만들어!” 결국 노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원에 현판 하나 달면 그게 가문 아니고 뭐냐? 옛말에도 있잖아. 자수성가라고. 물려받은 게 없으면 만들면 되지!” 엄밀히 말하자면 자수성가(自手成家)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손빈은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뼈대 없는 가문을 과연 북해빙궁이나 당문에서 인정할까? 하지만 손빈은 더 이상 가문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다. 노군이 화를 낼 것 같기도 했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런데…….” “왜?” 짜증 섞인 노군의 반응에 손빈은 주저하며 말했다. “사람 없는 데서 끌어안은 건 괜찮습니까?” 노군은 와락 인상을 썼다. “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구랑 뭘 한 거냐?” 손빈 스스로도 말해 놓고 보니 어감이 매우 이상했다. 손빈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딱히 뭘 했다는 것이 아니고…….” 노군의 눈치를 보며 손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책임을 져야 하는 행동의 정의가 조금 모호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안게 되었다거나, 상대방의 위태한 상황을 도와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면…….” 노군의 허연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알고 보면 그도 반평생을 홀로 지내 왔다. 그러니 남녀관계에 있어서 책임을 져야하는 행동의 정의 따위 알 게 뭔가? 노군이 듣고 싶었던 말은 그저 ‘책임지겠다’는 손빈의 한마디뿐이다. 다만 노군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손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끝도 없이 진지했다는 점이다. “나도 모른다.” 이젠 포기한 노군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반응에 손빈은 왠지 모르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손빈은 속으로 열심히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책임질 일을 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따각, 따각. 잠시 인상을 쓰며 과거를 더듬던 손빈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저기 어르신.” “왜?” 퉁명스러운 노군의 목소리가 익숙했기 때문일까? 손빈은 떠오른 의문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제가 안긴 경우도 포함됩니까? 그렇다면…….” 손빈은 말을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노군은 아주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알. 아. 서. 해.”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따각, 따각. 마차는 무심히 청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손빈은 지나 온 과거를 본의 아니게 반추하며 연신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사귄다거나 연인이 된다는 건 패스하고 그냥 혼인으로 돌진하는 손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