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494)
낙향문사전-494화(494/494)
494화. 지혜는 사람들 가운데 숨고 청원 초입에는 서원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심한 혁련세화가 그간 정기적으로 청원에 서신을 보내 상황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소소의 언니, 소은표국의 국주 대행 은초빈은 물론이고 손빈의 숙부와 숙모도 마중을 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 역시 혁련세화의 배려였다. “아, 손 공자께서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따로 서신을 보냈어요.” 단아한 미소를 짓는 혁련세화의 말에 손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하지만…….” 물론 뵙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혁련세화는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운남에서 선물을 사셨잖아요. 그런 선물을 드릴 만한 분은 두 분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수연 소저나 월아 소저도 같은 생각이었고요.” 혁련세화는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혹시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걸까요?” “아니, 아닙니다.” 손빈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세화 소저.” “아니에요.” 혁련세화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손빈의 예에 답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두 분 모두 나오셨을 거예요.” 손빈의 숙부와 숙모는 전에도 손빈을 마중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두 사람의 표정은 반쯤은 당혹해하고, 반쯤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작은 서원을 꾸려 가고 있는 줄 알고 있던 조카가, 그 대단한 혁련세가의 아가씨를 서원 선생님으로 둘 정도로 성공했다는 건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엄마아!” “아이구, 내 새끼들.” 아이들은 이미 부모님들과 감동의 재회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님들의 품에 달려가 안겼고, 어른들은 힘껏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이미 한번 겪은 일이라 그런지 예전처럼 펑펑 우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어른이든 아이든 다들 눈가가 촉촉한 건 여전했다. 손빈도 숙부와 숙모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숙부와 숙모 역시 손빈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전의 불안한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자랑스러운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손빈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 먼 여행에 지친 아이들을 위해 손빈은 며칠간 수업을 쉬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은 어차피 서원으로 다들 놀러 오겠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선물 보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소소 역시 언니 은초빈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손빈은 오랜만에 만난 은초빈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여전히 그녀는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우리도 가자.” 노군은 마차의 말고삐를 쥐고 걸었다. 오랜 마차 여행 탓인지 다들 마차에서 내려 걷고 있었다. 당월아의 다섯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벅, 저벅. 청원 외곽에 위치한 서원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고 한산했다. 천천히 길을 걷던 사수연이 문득 말했다. “좋네요.” 그 느낌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손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좋군요.” 햇볕은 환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그저 평범한 이 길이 이토록 편안한 것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손빈이 느긋하게 정취를 음미하는데, 말고삐를 쥐고 걷던 노군이 문득 사라스바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애들은 어찌 됐냐?” 노군이 말하는 ‘너희 애들’이란 사라스바티와 함께 있던 천축 사람들을 뜻한다. 사라스바티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희는 해남도 인근에 정착하게 됐어요. 정식으로 허락도 받았으니 이제 그쪽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될 거예요.” “흠, 그러냐?” 말하자면 일종의 정착촌이다. 해남도라면 남방 해양 무역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그들이 가진 전함은 다른 곳에 숨겨야겠지만. “다들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해요. 특히 라흐만이 꼭 손 공자님을 뵙고 싶어 하더군요.” 라흐만은 손빈 일행과 파사 사막까지 동행했던 전 황실 수호 위사다. “아, 그리고 자이나도 잘 있어요. 요즘은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지요. 노군 어르신을 보고 싶어 하고요.” “자이나? 아, 그 여자아이?” 자이나는 파사 사막에서 손빈 일행이, 정확히는 노군이 구해 준 소녀다. 고개를 끄덕이던 노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라흐만을 따라왔구나?” 그 말에 사라스바티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노군은 혀를 찼다. 오갈 데 없었던 자이나가 라흐만을 따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뭐, 어쨌든 해남도 인근이라면 제법 괜찮지. 이곳까지 관도도 뚫려 있고, 바닷길도 있으니까.” “네. 그래서 라흐만이 제게 연락하긴 편해요.” 사라스바티의 말에 노군은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연락이라니? 너는 안 가냐?”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라스바티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보란 듯 말했다. “전 여기 있을 건데요?” “뭐? 왜?” 노군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라스바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가 좋아서요. 이미 허락도 받았어요.” “허락이라니? 누가 그런 허락을…….” “물론 집 주인인 월아 소저지요.” 노군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당월아의 집에 다들 머물고 있었다. 노군과 함께 사는 노부인 당운영만 제외하고. 당월아의 집에 살면서 서원에 놀러 온다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다. 그걸 막을 손빈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끙.” 노군은 신음을 흘렸다. “월아가 왜…….” “대신 그림을 가르쳐 주기로 했어요. 저는 그림에도 제법 조예가 있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은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포기는 빨랐다.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라.” 득의의 미소조차 우아한 사라스바티가 웃는데, 어느새 서원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와! 서원이다……. 어?” 반가운 듯 소리치던 서린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마차는 뭐죠?” 언제나처럼 문이 열려 있는 서원 앞에 작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안쪽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나 겨우 탈 것 같은 마차였는데 장식이며 색이 제법 고색창연했다. 노군이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외사는 아닌데? 누구지?” 서원 안쪽에서 특별한 기세는 느껴지지 않는다. “손님이신가 보군요.” 손빈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외사의 고수가 아닌 손님이라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손님이 대부분 외사, 혹은 그와 연관된 사람이라는 게 더 특별한 일이지만. 저벅. 손빈 일행은 조심스럽게 서원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 서원을 찾아온 두 사람의 손님을 볼 수 있었다. “……누구야?” 노군이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두 사람의 손님이 전혀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뭇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복식을 한 또 다른 노년의 사내가 그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는 노인의 모습은 한가로이 볕을 즐기는 여유 자적한 할아버지 같았지만, 그를 본 순간 손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 드디어 왔나?” 차를 마시던 노인도 손빈을 발견했다. 그리고 즉시 손을 들어 올렸다. “필요 없네.”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곧 푸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만한 자리도 아니고, 여기서는 내가 손님이니까 말이야.” 노군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노인의 시선이 손빈과 경희 공주를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손빈은 분명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경희 공주의 얼굴은 그보다 더했다. 늘 냉정하던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엇들 하나? 어서 들어와서 앉게.” 노인은 손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인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으음.” 노군은 신음을 흘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부정할 수도 없다. 대담한 노군조차 놀랄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순랑?” 노부인 당운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노군에게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앗! 내 찻잔!” 갑자기 화사가 소리쳤다. 그 노인이 들고 있는 것은 화사가 아끼던 찻잔이었다. 화사는 얼른 노인에게 달려갔다. 서 있던 다른 노인이 움찔했지만 화사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히잉. 이거 내 건데…….” 자신의 찻잔임을 확인한 화사가 반쯤 울상이 된 표정으로 말했다. 찻잔을 들고 있던 노인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아, 이거 자네 거였나? 마음에 들기에 부엌에서 가져왔네만…….” 그리고 놀랄 일이 벌어졌다. “미안하네.”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옆에 선 다른 노인이 대경실색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다음이다. 곧 고개를 든 노인은 정중한 목소리로 화사에게 말했다. “자네 것인 줄은 몰랐네. 함부로 쓴 것을 사과하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경희 공주는 아예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버렸다. 화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알았어. 괜찮아. 아니, 괜찮지는 않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상대에게, 그것도 노인에게 무어라 할 화사가 아니다. 화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미 쓴 걸 어쩌겠어?” 일단 정리가 되자 화사는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사뭇 대범한 대응이었지만 옆에 서 있던 노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그런가? 고맙네.”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다른 것을 사고 싶거든 말하게. 언제라도…….” “아, 괜찮아. 나중에 내가 팍팍 삶으면 되니까.” 화사는 웃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사실은 나도 남이 쓰던 걸 가져온 거거든. 똑같은 걸 사서 우리 그이랑 같이 쓰고 싶었는데 여긴 없더라고?” “그런가?”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이것과 같은 걸 찾아줄 수 있겠나?” 옆에 서 있던 다른 노인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진짜? 정말로?” 화사가 놀란 눈으로 좋아했다. 그 반응에 만족한 노인은 다시 화사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넨 아주 건강해 보이는군. 발육도 좋고. 남편에게 사랑받겠어.” 그 말에 손빈이 뜨끔했다. 젊은 여인에게 저런 말은 두말할 여지없는 희롱이다. 하지만 사람의 기색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화사는 노인의 말에 희롱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탈혼도에게 사랑받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도 한몫했다. “그렇지? 내가 한 몸매 하거든.” 화사는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훌륭하게 자란 모습이 아주 보기 좋네. 나도 보람이 느껴지는군.” 그 말에 화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날 알아? 그리고 보람이라니? 내가 잘 자라는데 보태 준 거 있어?” “직접 보태 준 건 없네만…….” 노인은 여전히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혀 상관이 없다고도 할 수 없지.” 화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몇 사람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손빈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확실히 상관이 없지는 않지만.’ 태평성대는 군왕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다. 그러니 백성이 잘 사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는 건 통치자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화사의 경우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우선 짐을 정리하도록 하지요.” 손빈이 일행에게 말했다. “이대로 손님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의아한 눈빛들은 여전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손빈이나 노군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흩어져 짐을 정리하는 사이, 손빈과 경희 공주는 노인 앞에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빈이 손을 모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누추하지만 이렇게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사락. 경희 공주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미 노인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무리 허리를 깊이 숙여도 결례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 노인은 권력의 정점이자 붉은 빛의 거대한 황궁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황실의 주관자, 바로 현 황제였기 때문이다. “앉게.” 황제의 말에 손빈과 경희 공주는 자리에 앉았다. 감히 황제와 같은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옆에 선 태감이 표정으로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황제도, 손빈도, 경희 공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거, 차가 더 필요하겠군.” “여기 있어요.” 달칵.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를 내온 사람은 바로 혁련세화였다. 그녀는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물이 끓고 있더군요. 마음에 드시면 좋겠어요.” “고맙네.” 황제의 말에 혁련세화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눈치 빠른 그녀가 이 노인의 정체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 보통은 아니다. 혁련세화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노군과 신의에게도 차를 가져다주었다. 노군은 찻잔을 쥔 채 딴 곳을 보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의 귀는 손빈과 황제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으리라. 스륵. 황제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찻잔을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서역에 다녀왔다지?” “네.” 손빈 역시 찻잔을 쥔 채 답했다. 은은한 차향이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쪽은 어떻던가?” 그건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질문이었다. 손빈은 찻잔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힘을 다투고, 또 누군가는 자신들의 대의를 따라 움직이고 있더군요.”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도 다른 이들을 보살피는 분들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공정한 평가는 아니었으리라. 그 어느 곳이든, 심지어 서장조차도 결코 희망이 가득한 곳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고, 낯선 이방인이었던 손빈 일행에게 선의와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들은 있었다. 손빈에게서 희망을 본 서장의 포탈라 공주도, 불가촉천민이라지만 누구보다 밝던 천축 마을의 사람들도, 그리고 작은 호의를 베풀어 준 파사의 소녀 자이나까지도. “그런가?” 황제는 손빈의 말에 조용히 답했다. 아마도 그가 원한 대답은 아니었겠지만 예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렇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황제는 고개를 들어 서원을 보았다. 자신의 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사람들의 웃음과 온기로 가득한 서원을. “……한 번쯤 와 보고 싶었네.” 황제는 고개를 돌려 경희 공주를 보았다. “네가 잘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그건 경희 공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어쩌면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그렇게 말했다는 의미는 컸다. 경희 공주의 눈동자가 그녀의 격동을 숨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감사합니다.” 황궁에서는 감히 꿈도 못 꿀 결례를 저지르며 경희 공주는 그렇게 말했다. 본래라면 당장 땅에 엎드리며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소리쳐야 할 터였으니까. “여기는 좋은 곳이군.” 찻잔을 들어 올리며 황제가 말했다. “사는 곳을 보면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능히 알 수 있는 법이지. 자네는 역시 내가 본 그대로의 사람이로군.” 그 말에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것이 황제가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 중 하나이리라.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존재의 진의를 확인하는 것은 통치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일 테니까. 다음 세대의 치세(治世)를 준비하는 자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감사합니다.” 손빈 역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렇게 답했다.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자그마한 정원에서, 그렇게 세 사람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 황제는 곧 마차를 타고 떠났다. 손빈과 경희 공주가 배웅했고, 노군 역시 마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서원 밖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저 할배는 누구야?” 화사가 서원 문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물었다. 손빈은 빙긋 웃을 뿐이었지만 노군은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했다. “저 사람? 천하에서 가장 큰 집의 주인이다.” “큰 집?” 화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큰 집 별로더라. 청소하기 귀찮아서.” 흥미를 잃은 화사는 서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군은 피식 웃고는 손빈과 함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희 공주는 여전히 문밖에 서서 마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놀라긴 했다만, 어쨌든 다 끝난 거지?” 노군의 말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났습니다.”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손빈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검을 수련하면서, 가끔 외사 분들과 비무나 하면 되겠군요.” 그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이었다. “무슨 소리.” 노군은 피식 웃었다. “애도 낳고 알콩달콩 살기도 해야지.” 손빈은 슬쩍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책은?” 문득 화사가 물었다. 손빈은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을 껌뻑였다. “책 쓴다며? 그때 무제가 그랬잖아.” ‘아!’ 손빈은 화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책요?” 사라스바티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묻는다. “무슨 책인데요?” “천하에 오직 빈이만 쓸 수 있는 책이다.” 노군이 말했다. 그는 손빈을 보며 웃었다. “그렇지 않냐?”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손빈의 가슴을 단번에 뛰게 만들었다. ‘천하에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책.’ 문사로서, 글을 아는 자로서 그 어찌 가슴 떨리는 말이 아닐 수 없으랴? 그것은 천명과도 같은 장엄함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자혁과 겪은 일들이 밀물처럼 손빈의 가슴에 밀려 들어왔다. “왜 손 공자만 쓸 수 있는 책인 거죠?” 노부인 당운영이 속삭이듯 노군에게 물었다. 손빈의 반응이 특별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군은 어깨를 으쓱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제가 빈이에게만 허락을 해 줬거든.” 당운영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저렇게까지 감동한단 말인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좋아하고 있으니 그냥 놔둡시다.” 노군의 말에 당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보고 싶어요.” 사수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빈에게 말했다. “제가 모르는, 제가 알아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요. 손 공자께서 쓰신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녀의 말은 손빈의 열정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손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쓰겠습니다. 아니, 당장 쓰겠습니다.” 빙긋 웃는 사수연의 모습은 정말이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책 제목은 뭐라 할 거냐?” 노군의 목소리에 손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무제의 희망대로 ‘비천무서’라고 하지요. 이건 그의 책이니까요.” “그래? 네 이야기도 쓸 거지?” “저요?” 손빈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 반문했다. “무제에 대한 책에 제가 끼어들 이유가 있을까요? 책 내용의 통일성이라든가, 저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서라도…….” 그건 손빈으로선 당연한 말이었다. 사자혁의 책에 왜 자신이 들어간단 말인가? “그럼 네 이야기는?” 노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기대하는 듯 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제가 제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조금…….” 자서전을 쓴다는 건 낯 뜨거운 일이다. 결국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차라리 참회록이나 고백록을 쓴다면 몰라도. “그럼 내가…….” 당월아의 작은 목소리에 손빈은 얼른 대답했다. “책은 모름지기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월아 소저는 제 편이라 안 됩니다.” 대놓고 거절을 당한 셈이지만 당월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듯 살짝 홍조를 띄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아무 언급도 없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노군은 여전히 강하게 말했다. “이런 대단한 사람을 따라다닌 저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독자들이 궁금해하지 않겠냐?” “맞아요.” 서린이 그렇게 말하자 사수연이나 당월아도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다. 혁련세화와 다른 사람들은 두말할 것 없이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그러면…….” 손빈이 결국 항복을 했다. “한 문장 정도만 쓰도록 하지요.” “뭐라고 쓸 건데?” 손빈은 말문이 막혔다. 무엇이라고 쓸지는 아직 생각도 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불현듯 한 문장이 영감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힘은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가운데 노닐고, 지혜는 땅으로 내려가 사람들 가운데 숨었다.” 노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대 옥룡은 ‘손빈은 결코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자혁은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를 배운다’고 말하며 남아 있겠다는 손빈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니 그건 어쩌면 사자혁과 손빈의 선택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별론데?” 눈살을 찌푸리며 노군이 말했다. “그렇게 쓰면 아는 사람만 알아듣잖아. 네 이름도 없고. 좀 더 명확하고 뭔가 직접적인, 말만 들어도 콱 와 닿는 그런 문장 없냐?” 손빈은 웃었다. “그러니까 좋은 것입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것이야말로 책을 통한 교감 아니겠습니까?” 노군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벌써 집필 의욕이 넘치는지 손빈은 무언가 연신 중얼거리더니 곧 지필묵을 찾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노군이 피식 웃었다. “으이구, 그저 좋단다.” 반쯤 놀리는 듯 말하는 노군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사수연도, 당월아도, 혁련세화도, 그리고 서린과 다른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좋네요.” 노부인 당운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주름진 얼굴에 피어난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처럼, 작은 서원에 피어나는 따뜻한 온기가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은은한 햇살과 함께 서원의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낙향문사전 2부, 검향만리 완>
(작가의 말) 낙향문사전은 이것으로 완결입니다. 사실 내용상으로는 이미 몇 화 전에 끝났습니다만, 미련이 남아 이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글에 끝까지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수고해 주신 일러스트 Dhalephin 님과 편집팀의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글이 재미있으셨다면 여러분은 저와 취향이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만났다면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르겠군요. *^^* 다음 연재 작품이나 연재처, 일정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에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