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56)
낙향문사전-56화(56/494)
제56화. 달빛 아래 빛나는 검2014.03.15.
타닥, 타닥.
화톳불 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표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졸리긴 할 것이다.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난 셈이니까.
“윽.”
졸던 표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앞에 있는 손빈의 모습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으으으. 이거 진짜 졸리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을 쫓으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자넨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표사는 손빈과 같은 청원 사람이었다.
정작 청원에서는 얼굴 한번 마주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같은 마을 사람이라고 표사 나름대로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일단 호남성 회화 쪽으로 간다 하지 않았나? 내일 정도면 아마 호남성으로 들어갈 걸세.”
표물을 인수하고 출발한 일행은 남쪽을 향해 걸어 귀주성의 성도 귀양을 지났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남성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손빈이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목적지 말입니다.”
“그건 나도 모르네.”
표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한 목적지는 아마 행수님과 장 표두만 알고 있을 거야.”
행수와 표두는 표행의 정확한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대략 앞으로 사흘간 어느 방향으로 간다는 것 정도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표행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도 많아. 다 표행의 안전을 위한 일일세.”
“그렇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표사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지.”
“짐작이오?”
“표물을 인수하고 일단 남쪽으로 내려와 동쪽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번 표행이 한 달 조금 넘게 걸릴 것이라 했으니 대강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오지.”
크게 한번 팔을 움직인 표두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이번 표행은 좀 위험하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겁니까?”
“그야, 길이 처음이니까.”
표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표행이 처음이라고 했지?”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행은 말이지, 전적으로 행수의 관계(關係)에 달려 있다네. 길을 잘 알고 평소에 좋은 관계를 쌓아 왔다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날 수 있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면 바로 도적들의 방문을 받게 되지. 그래서 우리도 꼬박꼬박 객잔에 묵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지역을 어떤 놈들이 쥐고 있는지 정보도 얻고, 알아서 인사도 좀 해야 하니까. 객잔하고 주루를 누가 쥐고 있는지 보면 대강 답이 나오거든.”
표사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졸음을 쫓아내고 시간을 때우기에는 잡담이 최고의 특효약이다.
“하지만 표두가 무림에서 이름난 고수라면 이런 모든 게 다 필요 없게 되지.”
씨익 웃으며 표사가 말했다.
“그러면 표국 깃발만 걸어도 다들 건드릴 생각도 못하거든. 혁련세가와 남궁세가가 강남 무림의 양대 맹주를 자처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표국은 세가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걸세. 게다가 표국뿐일까? 각종 기루나 주루는 물론이고 상단들이며 무관이며……. 아마 세가 놈들이 그냥 앉아서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장난이 아닐 걸세.”
표사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돈이라…….’
무력과 돈은 필연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납득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손빈은 입맛이 썼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 매일 밤 번을 서도 괜찮다고 했다면서?”
문득 들린 표사의 목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곤하지 않나? 자네도 하루 종일 걸었을 텐데.”
표사들은 말을 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는다. 손빈도 마찬가지다.
“괜찮습니다.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어차피 밤에 일어나야 하니까요.”
“수련 때문에?”
“네.”
손빈이 가지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을 표사가 힐끗 쳐다본다. 그 시선에서 탐탁찮은 느낌이 물씬 묻어난다.
“표두께서도 알고 계시나?”
“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매일 밤 일행과 떨어져 수련을 한다고 하면 자칫 의심을 받기 쉽다. 손빈은 이에 대해 은초빈에게 허락을 구했다.
은초빈은 알았다고 짧게 대답했지만, 장 표두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말하는 이 표사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건 평소에 하지 그러나?”
“평소에도 합니다.”
“행수님이나 표두님이야 자네를 믿고 허락했겠지만, 다른 표사들은 그리 좋은 눈으로 보고 있지 않네. 가능하면 표행 중에는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아니면 새벽에 하든가. 자네는 문사 출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본래 무공이란 것은 새벽에 대자연의 정기를 받아 가면서 운기조식을…….”
표사는 충고 반 잡담 반으로 손빈에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화톳불에 시선을 던졌다.
타닥, 타닥.
“그리고 검도 한 자루만 가지고 다니게. 검이 많다고 다른 사람이 겁먹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오히려 자기가 초보란 것만 들통 난다고. 게다가 지금이야 초반이라 괜찮지만 나중에 가면 깃털 하나도 엄청 무겁게 느껴질 거라네. 내가 처음 표행을 갔을 때에는…….”
표사의 충고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대로는 정말로 끝이 안 날 것 같아서 손빈은 슬쩍 다른 쪽으로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혹시 마차 안에 있는 그 소녀는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 그 마차 면사녀?”
‘마차 면사녀?’
손빈은 몰랐지만 표사들이나 쟁자수들은 그 가녀린 소녀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 여자야말로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자네, 그 여자가 밥도 안 먹는 걸 알고 있나?”
“밥을 안 먹어요?”
“그래. 누구도 그 여자가 밥을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저녁에 객잔에 머물 때에도 바로 방에 들어가서는 나오지도 않아. 듣기로는 화장실도 안 간다는데? 누구도 본 사람이 없대. 가까이에서 봤다는 어떤 표사 말로는 숨도 안 쉬는 것 같다더군. 가슴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데, 그건 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야 그렇겠죠.”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손빈은 표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실 그 여자가 가슴이라고 할 만한 게 어디 있나? 그건 아무리 자세히 봐도 모를걸?”
표사의 말에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믿지 못하는 이유가 손빈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다.
“게다가 그 면사 뒤에 과연 미녀가 있을지, 아니면 추녀가 있을지도 꽤나 관심거리란 말이지. 내기도 많이 걸렸는데, 미녀일거라는 사람이 절반, 세상에 얼굴 가리고 다닐 미녀는 없다는 사람이 절반이라네. 의외로 판돈도 많이 쌓였어. 자네도 걸겠나?”
“어디다 거셨습니까?”
“나? 나야 당연히 미녀 쪽이지. 나는 아직 세상엔 꿈과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낙천적 긍정주의자니까.”
미녀라는 것과 세상의 꿈과 희망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 않나 하고 생각했지만, 손빈은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번을 바꿀 때가 거의 된 것 같군요.”
“아, 벌써? 역시 떠들다 보면 시간은 잘 간단 말이야.”
하품을 하던 표사가 문득 손빈을 보고 말했다.
“그런데 자네 이 기회에 아예 표국에 들어올 생각 없나?”
“네?”
난데없는 그의 말에 손빈이 반문했다.
“하루 종일 걷기도 잘 걷고, 한밤중에도 잘 일어나고. 완전 체질인데? 이 기회에 아예 표국에 말뚝을…….”
대답 대신 쓴웃음으로 손빈은 그에게 답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표사와 쟁자수가 하품을 하며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수고했네.”
다음 차례로 나온 표사와 쟁자수에게 인계를 하고 손빈은 부근의 공터를 찾아 조금 걸었다.
찌릭, 찌리릭.
풀벌레 소리와 밤새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푸른 달빛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펼쳐진 세상은 은은한 활기와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아름답구나.’
손빈은 차가운 밤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쉬었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러나 이제는 아늑함마저 느끼게 하는 감각이 온 몸을 휘감는다.
세상에 홀로 깨어 있는 것 같은 호젓한 밤을 만끽하며 손빈은 천천히 걸었다.
곧 적당한 빈터를 찾아낸 손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만히 검을 꺼내들었다.
그 잊지 못할 여정을 함께했던, 손빈에겐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반자와 같은 한 자루의 검을.
스릉.
백로의 하얀 칼날이 푸른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그녀를 깨운 것은 창밖으로 비쳐 들어온 달빛이었다.
잠들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밤하늘을 가득 채운 달빛을 마치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바라보았을까? 한참 동안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떠올렸다.
이곳엔 그 잔혹한 제약도, 감시하는 자도, 제지할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바스락.
작은 소리였지만 은초빈은 바로 눈을 떴다.
순간 긴장했던 은초빈은 곧 소리의 정체를 알아채고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깼어요?”
대답은 없었다. 면사를 한 소녀, 표사들이 마차 면사녀라고 부르는 그녀가 조용히 일어나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에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리고 마치 눈처럼 하얀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도.
‘아름답네.’
은초빈은 속으로 감탄했다. 처음 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은빛 머리카락은 여전히 신비롭다.
보통 말하는 백발과는 전혀 다른, 약간 은빛을 띄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 반짝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운 색의 면포 아래 가려져 있었다.
‘밤에도 얼굴을 가리다니.’
은초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낮에는 길게 늘어뜨린 하얀 면사가, 그리고 밤에는 흡사 복면 같은 어두운 색의 하늘거리는 면포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대체 어떤 모습이 저 뒤에 있는 걸까?’
문득 은초빈은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사량표국 국주의 말이 떠올랐다.
‘전적인 호의로 말하건대, 그분에 대한 모든 호기심을 버리는 것이 좋을 거요.’
국주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은초빈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바스락.
그사이, 소녀는 면사가 달린 자신의 모자를 썼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면사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완전히 외출 준비를 끝낸 모습이라, 은초빈도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왜…….”
거칠고 탁한 목소리.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질 것 같은 음색이었다.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라고는 더더욱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면사 소녀에게서 나온 음성이었다.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은초빈은 외투를 여미고 자신의 검을 들었다.
“밤 산책인가요? 좋아요. 마침 나도 갑갑하던 참이었어요.”
자다가 깬 사람이 산책을 가고 싶을 리가 없다. 아마 면사 소녀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한 말일 터였다.
면사 소녀는 물끄러미 은초빈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객잔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면사 소녀는 천천히 걷다가, 문득 멈춰 서서 밤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도 했다.
은초빈은 조금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지금도 소녀는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없는 빈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쳐다보면 보이는 것은 그저 별것 없는 빈 들판뿐이다.
‘뭘 보는 걸까?’
고즈넉하고 조용한, 지루하기까지 한 밤 풍경이다. 저 소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후웅.
‘웃.’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나온 지도 꽤 되었고 밤공기도 제법 차다.
‘이제 슬슬…….’
그만 들어가야겠다고 은초빈이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사락.
면사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나무 그늘 사이로 어딘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은초빈도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는 것은 나무들과 어두운 그늘뿐이다. 은초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빈 들판 다음엔 숲인가?’
나무 그늘 사이를 바라보던 소녀는 결국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은초빈이 그녀를 따라 한걸음을 옮기는데, 소녀의 하얀 손이 은초빈의 걸음을 막는다.
슥.
하얗고 가느다란 소녀의 손목에 걸린 옥색 고리가 반짝였다.
“오지 마세요.”
소녀의 목소리는 탁하고 아주 작았지만 단호했다.
“말했잖아요? 혼자 둘 순 없다고.”
은초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면사 탓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다.
“잠깐이면…… 돼요.”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던 은초빈은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솔직히 그녀 혼자 두는 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강압적으로 나가는 것도 좋지 않은 데다, 이 부근이라면 특별히 위험한 것은 없을 것이다.
“좋아요. 하지만 잠깐이에요. 너무 멀리가도 안 돼요.”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은초빈이 말했지만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수풀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은초빈은 불안감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하나?’
하지만 이미 허락한 다음이다.
이후로는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은초빈은 그녀가 사라진 수풀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삭.
소녀는 수풀 사이를 걸었다. 밤이슬을 머금은 풀잎들 탓에 옷자락이 조금씩 젖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소녀는 자신이 들었던 그 희미한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웅.
지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그러나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소리.
바삭.
소녀의 발걸음이 빈터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환상과도 같은 아름다운 검의 궤적이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
숨이 막히며 소녀는 말을 잊었다. 그저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자연의 경이와도 같은 압도적인 광경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한 걸음으로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웅.
희미하지만 분명히 흐르는 검의 울음소리, 그리고 마치 허공을 수놓듯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푸른 칼날의 궤적.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눈앞에 도도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아.’
검이 흐르고 달빛이 빛난다. 자유롭고 도도한 검의 흐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춤추고 있었다.
그 순간 소녀는 모든 것을 잊었다.
태어난 이후로 단 한순간도 벗어나보지 못한 그 천형(天刑)과도 같은 굴레가, 지금 이 순간만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고 있지 못했다.
또르륵.
온몸에 전율이 일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그 열기는 이내 한 줄기 눈물이 되어 소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지도 않으리란 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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