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61)
낙향문사전-61화(61/494)
제61화. 격화(激化)2014.04.01.
자신을 당월아라고 밝힌 소녀는 손빈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푸른 달빛 아래 선 그녀는 작고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지만 그 목소리만은 섬뜩할 정도로 낮고 거칠다.
“월아 소저셨군요.”
손빈은 그녀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
“저는 손빈입니다. 새삼스럽지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새삼스럽긴 하다. 그래도 인사를 나눈 것은 처음이니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소녀에게 손빈의 반응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당황한 듯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저, 저는 당월아예요.”
“압니다.”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들었으니까요.”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이미 이름을 밝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는데.’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소녀를 상대로 대화를 하려면 아마도 시간과 인내가 아주 많이 필요할 듯싶었다.
“짚어 봐도 됩니다.”
소녀가 고개를 든다.
“제 맥을 짚어보고 싶다고 하셨죠? 괜찮습니다. 해 보셔도.”
면사 아래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손빈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삭.
소녀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작고 귀여운 실타래 같은 것이었는데, 그녀가 끝을 잡고 풀자 가느다란 은빛 실이 그녀의 손끝에서 선을 그린다.
실타래에서 어느 정도 길이의 은사를 끊어 낸 그녀가 두 손으로 은빛 실을 쥐고 손빈을 쳐다본다.
손빈은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다른 손으로 옷소매를 살짝 걷어 손목이 드러나도록 한 채로.
사박.
조금 망설이면서도 그녀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손빈을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사락.
소녀는 살짝 무릎을 굽혔다.
휘릭.
그녀의 은사가 손끝에서 가볍게 회전하더니 손빈의 손목을 한 바퀴 감는다.
그리고 소녀는 은사의 끝을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의 검지와 중지를 가볍게 은사 위에 얹었다.
그리고 소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손끝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진동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웅.
은사를 통해 느껴지는 은은하고 무거운 진동.
그저 맥이 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소녀의 섬세한 내기에 반응하며 손빈의 내면이 낮은 울림으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깊은 내면을 향해 소녀의 의식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호오.’
그사이, 손빈은 소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조금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빈의 맥을 짚는 방법은 손빈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직접 손목 위에 손가락을 얹는 대신 은사를 통해 맥을 짚는 방법이었다.
은사를 통해 전해지는 은은한 진동이 살짝 감각에 거슬렸지만 본래 이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다.
‘의학에 조예가 있나?’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지만 이제껏 본 소녀의 성향상 납득이 가기도 했다. 손빈이 정말 궁금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아.”
손빈의 생각은 소녀의 짧은 탄성에 중단되었다.
“정말…… 대단히 순수한 내기로군요.”
소녀는 감탄했다.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것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느낌 그대로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빛나는 별처럼 투명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대체 어떻게 해야 자신의 내기를 이렇게 정련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곧,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크기로 보자면 다만 한 줌. 아름답지만 너무나 연약한 별빛과도 같아요. 만일 절정 고수와 내력의 강함을 겨루게 된다면…… 반드시 지겠군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데 어떻게 그런 검결을…….”
“어떻게라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소녀의 가녀린 어깨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손빈은 말을 이었다.
“흐름에 내 검을 실을 뿐이니까요.”
사락.
면사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면사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이 흐릿하게 비쳐 보인다.
“흐름……이라고요?”
“네.”
손빈은 말했다. 손빈은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보았다.
“흐름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큰 흐름을 따라 검을 실으면, 모든 것은 물이 흐르듯 자연히 열리고 따라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그저 시작일 따름이죠.”
그건 사자혁의 말이었다.
흐름을 따를 뿐 아니라 그 흐름을 넘어선 자.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파월삼식의 세 초식은 지금도 손빈의 뇌리에 선명하다. 그에 비하면, 지금 손빈이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작일 뿐이다.
“제…… 판단을 정정해야겠군요.”
소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게 정말이라면, 천하에 당신을 위태롭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네?”
손빈은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곧 실소를 머금었다.
천하는 너무나도 규모가 큰 이야기다. 본래 과장된 표현을 즐겨 하는 문사인 손빈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될 정도로.
“그럴 리가 있나요? 저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 기록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소녀는 손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켜보고 기록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그의 말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다.
초절정 고수라 해도 다만 그 끝자락을 잡을 뿐이라 하는, 천지에 가득한 흐름을 보고 그 흐름에 자신의 검을 싣는 그 경지조차 그저 시작일 뿐이라 하는 이 사람이 보는 것을 그녀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온몸에 전율이 달린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부탁해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눈앞의 무엇인가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것 같은 그것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과도 같은 본능적이고 절박한 몸짓이었다.
소녀는 말했다.
“제발 날 구해 주세요.”
“네?”
너무나 의외의 말에 손빈이 반문했다.
그러자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을 깨달은 소녀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손에 들렸던 은빛 실이 맥없이 풀려 땅으로 흘러내렸다.
“미, 미, 미안해요.”
소녀의 말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약했다.
방금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자신이 해 놓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소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잠깐만요.”
손빈의 말에 소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린 듯했다.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고 있는 그녀에게 손빈이 말했다.
“돕겠습니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손빈은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건 소녀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환상과도 같은 말이었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서 맥이 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며 이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론 안 된다. 자신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도 겁이 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자신의 면사마저 벗어 버릴지도 모른다.
탁.
그녀는 그대로 뛰어갔다.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밤의 나무 그늘 사이로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소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손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고 싶었는데…….”
손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투른 소녀의 모습은 사수연을 연상시켰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말하던 소녀의 그 슬픔 가득한 목소리는, 어쩐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사수연의 처연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그녀의 그 소극적이고도 제멋대로인 모습은 어쩐지 겁먹은 어린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귀여운 꼬마 제자들의 선생님인 손빈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다.
‘응?’
문득 손빈의 시야에 땅바닥에서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소녀가 흘리고 간 은빛 실이었다. 손빈은 반짝이는 은사를 들어 올렸다.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신경 쓰며 은빛 실을 쳐다보던 손빈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은사의 양쪽 끝단, 소녀가 쥐고 있던 부분이 시커멓게 색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손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은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달빛 아래 반짝일 뿐이었다.
*
*
*
표행은 어려웠다. 넓고 편한 길을 피하다 보니 자연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표행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일행들 사이에서 형성된 기묘한 동질감 탓이었는데, 표사건 쟁자수건, 청원 출신이건 외지 출신이건 가리지 않는 그 동질감의 중심에는 바로 손빈이 있었다.
“손 선생님. 이쪽으로 오셔서 같이 드시죠.”
“이 표사가 꼬불쳐 놨던 고기를 푼답니다. 어서 오세요.”
“꼬불쳐 뒀던 게 아니라니까? 원래 같이 먹으려고 가져온 거야.”
표사들이 떠드는 사이, 은초빈은 손빈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녀오시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손빈은 은초빈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슬쩍 당월아의 마차를 보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날 그녀가 했던 말이나 행동 모두 손빈으로선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오늘도 안 나오려나.’
쳐다본다고 마차 안에 있는 소녀가 나올 리 없다.
고개를 돌린 손빈은 표사들이 모여 솥을 걸고 있는 곳으로 갔다. 어느새 쟁자수들 몇 사람도 은근슬쩍 그쪽으로 끼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은초빈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보기 좋네요. 표행이 이렇게 즐거웠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네. 손 선생님 덕분입니다.”
장 표두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은초빈은 장 표두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공 지도를 받은 것은 어땠어요? 괜찮던가요?”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장 표두가 말했다.
“허나 가야 할 바를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마음은 가볍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아가씨께서도 한번…….”
“아, 그리고 장 표두가 한번 소양에 다녀오지 않겠어요?”
장 표두의 말을 얼른 끊는 것처럼 은초빈이 말했다.
“소양 말입니까?”
소양은 부근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중소 도시다.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작고 험한 길을 택한 표행이 일부러 돌아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서 상황이 어떤지 한번 알아봐 줘요. 만일 소문이 그대로 가라앉았다면 더 이상 이렇게 험한 길을 갈 필요도 없으니까요. 말을 타고 다녀오면 저녁때 즈음엔 다시 합류할 수 있을 거예요.”
은초빈은 장 표두에게 표행의 예정 진로를 일러 주었다.
평소 같으면 표두 혼자 표행을 이탈할 리가 없지만 지금은 손빈도 있고, 행수 은초빈의 말대로 상황을 파악할 필요도 있었다.
장 표두는 즉시 말을 달려 떠났고 표행은 그날 하루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길은 물론 힘들었지만, 은초빈이 계획한 여정을 소화하여 밤에 장 표두와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 표두가 가져온 소식은 은초빈의 얼굴을 단숨에 굳게 만들어 버렸다.
“더 심각해졌다고요?”
“네.”
장 표두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듣고 있던 손빈과 은초빈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녹림과 군소 사파에 소문이 퍼진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정파 무관이나 군소 세가 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파 무관이나 군소 세가 들까지요?”
“네. 녹림이나 사파에 당문의 보물이 흘러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데…….”
은초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 표두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들이 우리를 보호하겠다는 뜻입니까?”
손빈이 묻는다.
은초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
이어지는 은초빈의 목소리는 뾰족했다.
“우리는 강제로 표물을 압수당하고 그들이 당문과 직접 거래를 하려 들 거예요. 당신들이 빼앗긴 표물을 우리가 찾았다면서요. 우리로선…… 녹림을 상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지요. 호랑이든 늑대든 표행을 실패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니까요.”
사실은 날강도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목격자나 관계자는 없는 편이 좋으니 표행을 전부 죽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빈이 무림과 어떤 관계인지를 모르니 함부로 악평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늑대나 호랑이나 어차피 잡아먹힌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뜻이군요.”
“네.”
손빈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사이 장 표두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우리 표행의 행적도 일부 노출이 된 것 같습니다.”
은초빈의 안색이 다시 굳는다.
“그럴 거예요. 어차피 길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특히 지역 무관들이나 문파들은 주변 지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겠지요.”
우회로나 소로를 택한다는 건 본질적으로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몰래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길은 여럿이고 지키는 상대는 그 수가 한정적이니까.
그러나 그 상대의 수가 많아진다면 결국 어느 길을 택하건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손빈이 묻는다. 은초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하건 표물을 뺏기는 건 정해진 결과라는 것이죠.”
“그건 대단히 좋지 않은 결과군요.”
손빈이 말했다.
“어차피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앞으로 한발 나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무슨 말이죠? 혹시 무슨 생각이 있나요?”
은초빈이 물었다.
손빈은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러더군요. 호랑이를 모르면 당하지만, 알면 사냥할 수 있게 된다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은초빈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아, 그보다 먼저 이 표행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전부, 모두 다.”
“전부…… 다 말인가요?”
은초빈이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네.”
진지한 표정으로 손빈은 말했다.
“그러고 나서 호랑이 얘기를 하도록 하죠. 사냥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좋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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