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69)
낙향문사전-69화(69/494)
제69화. 우리 동네 고수들2014.04.29.
“어서 와, 초빈아.”
활짝 열린 호연무관 앞에서 적세화가 밝은 표정으로 맞이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은초빈은 미소로 그녀에게 답했다.
“아? 이분들은…….”
적세화가 의아한 눈빛으로 묻는다.
“함께 온 표사분들이야. 잠시 시내에 나올 일이 있다 하셔서 여기까지 동행했어.”
“반가워요. 적세화예요.”
“바, 반갑습니다.”
적세화의 부드러운 웃음에 은초빈을 호위하듯 서 있던 표사 차림의 두 사내는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이제 가 보셔도 돼요.”
은초빈의 말에 두 표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대행님. 그럼 저희는 이만.”
그들이 떠나자 적세화가 웃으며 은초빈을 쳐다본다.
“‘대행님’이라고?”
은초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듯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표국에 국주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은초빈이 국주 대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친구를 놀리는 것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적세화는 오랜만에 만난 친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 맛있는 과자를 구했어. 좋은 차도 있고.”
“그래?”
은초빈의 얼굴이 밝아진다.
예전부터 단것이라면 유독 좋아했던 그녀다. 마치 소녀 때로 돌아간 듯, 두 아가씨는 손을 잡고 호연무관의 뒤뜰로 향했다.
호연무관의 뒤뜰은 무관답지 않게 아기자기하고 꽃이 만발한 곳이었다. 적세화의 취향이긴 했지만 은초빈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이번에 아주 힘들었다며?”
문득 적세화가 말했다. 느긋하게 과자를 즐기고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은초빈이 쓴웃음을 짓는다.
“표행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정말 잘됐어. 모든 게 잘 끝나서.”
적세화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은초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은초빈의 답례 역시 진심이었다.
“내 덕분은 무슨, 난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아무것도 못 해 줬다니.’
손빈을 소은표국에 보낸 사람이 바로 적세화다. 말하자면 그녀가 표행을 성공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네가 손 공자님을…….”
“아 참, 손 공자님은 좀 도움이 되었니? 검 실력은 어땠어? 쓸 만했어?”
은초빈은 잠시 당황했다. 적세화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쓸 만했냐고?’
“아니, 손 공자님은…….”
“그야, 궁금하잖아. 손 공자는 향시에 합격한 거인인데 언제 검을 배웠을까? 중오도 집에 오면 늘 선생님 이야기만 하고.”
말하던 은초빈은 친구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은초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이건…….’
잠시 그 의미를 헤아리던 은초빈은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아마도 적세화는 손빈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손 공자님은.”
달칵.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은초빈이 조용히 말을 잇는다.
“표행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어. 총관과 장 표두, 표사들이나 쟁자수들까지. 언제나 성실하게 표행을 위해서 힘써 주셨고, 어려울 때는 검을 들고 앞에 나서주셨어. 그분이 없었으면 아마도 이번 표행은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
그야말로 최상의 칭찬이었다. 적세화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은초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세화야. 혹시 그분께 뭔가 해 드리기로 한 것이 있어?”
“음. 약속한 것이 있긴 한데…….”
“그럼 잘해 드려. 그게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으로 말이야.”
은초빈은 사례를 하고 싶었지만 손빈이 사양했다. 그가 정색을 하고 사양하니 감히 더 강권할 수가 없어서 결국 손빈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흐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적세화가 은초빈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초빈이가 이렇게 차분하게 말할 때는 항상 뭔가를 숨기고 싶어 할 때란 말이야.”
찻잔을 입술에 대던 은초빈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슬쩍 시선을 피해 보지만 먹잇감을 발견한 적세화의 눈빛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결국 은초빈은 한숨을 쉬며 항복해야만 했다.
“맞아. 하지만 이건 손 공자님의…… 뭐랄까, 개인적인 일이라서 좀.”
“아니,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적세화가 빙긋 웃었다.
“너,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컥.”
이번엔 아예 찻물을 뱉을 뻔했다.
“뭐, 뭐라고?”
“맞아. 네가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까 확실한데?”
적세화는 자신이 정곡을 찔렀음을 확신했다.
“아까도 모든 사람이 좋아했다면서 은근슬쩍 넌 뺐지? 어릴 때부터 너랑 같이 다닌 나야. 네 표정만 봐도 다 알거든? 얘가 누굴 속이려고 그러는…….”
말하던 적세화는 은초빈의 표정에 그늘이 지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라고 길길이 뛰었을 은초빈이 오히려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맞아. 손 공자님은 좋은 분이야.”
은초빈이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찻잔을 손에 쥔 그녀는 정원 한편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접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오거든.”
“초빈아, 너…….”
적세화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은초빈이 말했다.
“어려서부터 표행을 다녀서 그럴까? 난 참 계산이 빨라. 그렇지 않아?”
말하는 은초빈의 눈빛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적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친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바로 떨쳐 냈을 은초빈도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친구에게 안겨 있었다.
*
*
*
“이야, 방금 그 아가씨 예쁘던데요?”
“그렇지? 우리 대행님도 잘 꾸미면 제법 미인이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화 아가씨를 따라 갈 순 없지. 말투며 행동이며 아주 단아하신 것이, ‘그야말로 아가씨구나’ 하는 느낌? 하지만 호연무관의 금지옥엽 둘째 따님이라고. 멋모르고 길에서 추파라도 던졌다간 나중에 아주 작살나는 거야.”
신입 표사는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저야 이곳이 처음이니 잘 좀 가르쳐 주십시오.”
선배님이라는 말에 표사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자넨 나만 믿게. 내 나중에 광주의 좋은 기루도 알려 줄 테니까 언제 한번 마시러 가자고.”
“오, 광주의 기루라니 이거 기대되는데요?”
시시덕거리며 걷던 두 사람 옆을 한 무리의 꼬마들이 우르르 스쳐간다. 꼬마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시끄럽게 떠들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응? 저 꼬마…… 대행님과 비슷한데요?”
“아, 맞아. 우리 표국의 소소 아가씨네. 아, 그리고 저쪽은 아까 호연무관의 셋째 도련님이고.”
“그래요?”
‘이거 지나가는 꼬마들 꿀밤도 함부로 못 때리겠는데?’
내심 잘못하단 큰일 나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중 한 꼬마가 힘껏 발을 내디디며 양팔을 앞으로 뻗는다.
탕!
“난싫어쌍장!”
그건 아주 숙달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꼬마들은 서로 맞았네 안 맞았네 하며 왁자지껄 노느라 바쁘다.
‘어라? 방금 그거 진각을 밟은 거 아닌가?’
“아, 저기 저 대장간 보이나?”
문득 들려온 선배 표사의 목소리에 신입 표사는 고개를 돌렸다.
“저기 대장간 주인이 제법 실력이 좋거든. 종류는 별로 없지만 꽤 쓸 만해. 하지만 철을 두드리는 동안에는 말 걸지 말게. 자네 머리로 철퇴가 날아올지도 모르니까.”
언뜻 보이는 그곳엔 ‘정련야장’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흥정 같은 거 하지 말고. 괜히 성질 건드리면 아예 근처에도 못가는 경우가 생겨.”
“그, 그렇군요.”
“아, 과자나 당과는 저기서 파네. 저 집이 당과만 삼 대째인데…….”
설명을 들으며 신입 표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길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문사 차람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인상이 제법 견실해 보였다.
‘꼬마들 선생님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문사 차림의 청년이 앞서 가는 꼬마들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 선생님!”
하지만 청년을 향해 선생님이라 부른 사람은 꼬마들이 아니라 바로 선배 표사였다.
‘어?’
청년이 돌아보자 선배 표사는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예를 표한다. 엉겁결에 신입 표사도 청년에게 엉거주춤 예를 표했다.
문사 차림의 청년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역시 정중하게 답례를 하고는 꼬마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저기, 누굽니까?”
아직도 청년의 뒷모습을 향해 서 있는 표사에게 신입 표사가 물었다.
“누구냐니? 선생님이시잖아. 우리…… 크흠, 우리 소소 아가씨의 선생님.”
그의 뒷말은 급히 얼버무린 감이 있었지만 신입 표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꼬마들 선생님이라고?’
아가씨의 선생님이라 하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지만, 아무래도 선배의 예는 지나치게 정중한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예를 표합니까? 저 청년은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어허!”
선배 표사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배움에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저 청년이라니, 말조심하게! 만일 선생님께 함부로 대한다면 대행님이나 표두님께, 아니 당장 나한테 단단히 경을 칠 줄 알게!”
얼굴까지 붉혀 가며 화를 내는 선배의 호통에 신입 표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가 화를 내는 모양새를 보아선 그저 아가씨의 선생님 정도가 아니다. 국주 대행 은초빈이나 장 표두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아선 아무래도 소은표국과 예사 관계가 아닌 듯했다.
‘설마 이 표국에선 글도 배우나? 저 청년한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깍듯하게 선생님이라 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선배 표사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듯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말도 없이 걷던 선배 표사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응?’
선배 표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신입 표사는 고개를 돌려 선배 표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웬 노인 한 사람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흰머리에 흰 수염, 게다가 눈썹까지 하얗다. 보아하니 아까 그 문사 청년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눈썹 한번 멋지네.’
신입 표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 표사가 파랗게 질릴 정도로 놀랄 광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배님?”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선배 표사는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노인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얼어 있던 선배 표사는 바로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번에는 신입 표사도 잽싸게 허리를 굽히며 선배 표사를 따라 정중한 예를 표했다.
노인은 그들의 예를 보고도 다만 눈썹을 한번 꿈틀할 뿐,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제 갈 길을 간다.
하지만 두 표사는 노인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기, 선배님.”
신입 표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 가셨는데요.”
선배 표사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노인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마, 맙소사.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신입 표사는 선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 노인도 조심해야 합니까?”
그러나 선배 표사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가만,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중얼거리던 선배 표사는 급히 소은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서 이 소식을 표국에 전해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그는 결국 뛰어가기 시작했고, 신입 표사 역시 그를 따라 뛰어야 했다.
‘이 동네는 왜 이렇게 조심해야 할 사람이 많은 거야?’
영문도 모른 채 쫓아가던 신입 표사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노인도 조심해야 하는 게 분명했다.
“아가씨도 조심하고, 꼬마도 조심하고, 청년도 조심하고, 대장장이에다가 노인까지 조심해야 되네, 젠장.”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선배 표사는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신입 표사는 그 뒤꽁무니를 좇아 열심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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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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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발견한 것은 이번에도 소소였다.
“어?”
붓으로 글을 쓰던 소소가 발딱 일어나더니 손빈을 향해 소리쳤다.
“손님이에요, 손님!”
“손님?”
꼬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하고, 책을 펴고 있던 손빈도 고개를 들었다. 늘 열려 있는 낡은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 소저?”
흰 면사를 쓴 채 단아하게 서 있는 가녀린 소녀. 바로 당월아였다.
“헐, 넌 여기 웬일이냐?”
먼저 반응한 것은 좀 떨어진 곳에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던 남악노군이었다. 당월아는 남악노군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소저?”
그사이 손빈이 다가가 당월아를 맞이했다.
“잠시 청원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그래서…….”
당월아는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손빈은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이해했다. 당연히 인사를 하러 왔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하는 것도 그녀로서는 대단한 일이리라.
“그러시군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손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월아는 잠시 손빈의 집과 꼬마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꼬마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당월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집이군요.”
문득 당월아가 말했다.
“저곳은, 비어 있나요?”
당월아의 시선이 향한 곳은 두 채의 건물 중 비어 있는 곳이었다.
“아, 저긴…….”
“거긴 내 방이다. 넘보지 마라.”
손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남악노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거할 곳은 이미 구했어요.”
당월아가 말했다. 그러곤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은 집이네요.”
당월아의 시선은 여전히 비어 있던 방을 향해 있었다.
“감사합니다.”
손빈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답했다. 그리고 꼬리처럼 남악노군의 말이 날아들었다.
“미련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으니라.”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당월아는 그제야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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