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98)
낙향문사전-98화(98/494)
제98화. 청류(淸流)와 백로(白露)2014.08.09.
우웅.
백로가 울었다. 손빈은 검을 들고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달빛 아래 펼쳐진 널따란 강변은 장강어옹의 표정까지 보일 정도로 환했지만, 어둠 속을 날고 있는 무언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위협적으로 들려올 뿐.
쉬익, 쉬이익.
“과연, 믿는바 재주가 한가락은 있다는 뜻이로구나.”
장강어옹이 말했다. 그는 마치 강 위에 낚싯대를 뻗은 사람처럼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청류를 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청류가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허나 조금 전 그 한 수에 정신을 잃는 편이 네게는 더 좋았을 것이다. 네 어설픈 재주가 오히려 널 괴롭게 하겠구나.”
말을 하던 장강어옹은 들고 있던 청류를 뒤로 크게 젖혔다.
핑.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장강어옹이 손빈을 향해 청류를 휘둘렀다.
쌔액―.
웅.
어둠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치 경고 같은 백로의 낮은 검명을 들으며 손빈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그곳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디며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검을 쳐올렸다.
카앙!
텅빈 공간에 불꽃이 튀었다.
손빈의 사각에서 쇄도하던 무언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손빈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휘릭.
마치 춤을 추듯 손빈이 빙글 몸을 돌리고 하늘을 향했던 백로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푸르게 빛나는 낚싯대, 청류가 바로 눈앞에서 손빈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청류 뒤에서 장강어옹의 가느다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뿜었다.
카앙!
백로와 청류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손빈을 짓이겨 버릴 듯하던 청류는 백로에 의해 본래 뜻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빗겨 나갔다.
하지만 장강어옹은 빗겨 간 청류를 되돌리는 대신 오히려 더욱 기세를 더했다.
후우욱. 콰앙!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고 작은 돌들이 비산했다.
백로에 의해 방향을 잃은 장강어옹의 청류가 애매히 땅을 치자, 청류에 담겨 있던 내력이 지면과 격돌하며 폭음을 일으킨 것이다.
휘익.
장강어옹은 자신이 일으킨 그 기세에 몸을 실어 공중으로 뽑아 올렸다.
깡마른 노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가볍게 몸을 회전시켜 본래 서 있던 자리에 사뿐히 내려섰다.
탁.
“제법이군.”
여전히 자신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청년, 손빈을 보며 장강어옹이 말했다.
“내력도 정순하고 검로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다. 이토록 깨끗한 검로는 정말로 오랜만이야. 특히 방금 전 내 청류를 흘려 낸 그 감각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이에 비해 제법 경험이 있는 것도 확실한 듯하구나.”
말하던 장강어옹은 피식 웃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손빈에게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극명하다. 이래서야 어찌 네가 외사의 사람이라 하겠느냐?”
손빈의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단정하던 그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방금 전의 기세에 휘말려 낭패를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정작 직접 상처를 입힌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장강어옹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쉬익.
어둠을 가르는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장강어옹이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회는 항상 때늦은 법. 이제 너는 네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핑.
청류를 쥔 장강어옹의 손이 보일 듯 말 듯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와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더욱 강해졌다.
쌔애액.
마치 어둠 속의 공간 그 자체가 찢겨 나가는 듯 날카롭고 거북한 소리가 흘렀다.
그 사이로 장강어옹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새어 나왔다.
“푸른 물결 위에 청류를 드리우니 온 세상이 낚이도다.”
후우욱.
장강어옹의 허름한 옷자락이 마치 폭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그의 손에 들린 낚싯대가 짙푸른 기운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날던 그 무엇이 삽시간에 기세를 더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곽.
그것은 어둠을 가르고 손빈에게 쇄도해 왔다. 그러나 그것에 실린 기운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 내 버릴 것 같은 파괴적인 기세. 그 섬뜩한 기운을 담은 채, 그것은 똑바로 손빈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쳐 낼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 같은 그때 손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삭.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손빈의 귓가를 울리던 위협적인 파공음도, 장강어옹의 청류가 뿜어내는 날카로운 기세도 자취를 감췄다.
현천대강결의 도도한 흐름이 손빈을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눈과 귀를 현혹하던 일체의 현상이 색을 잃고 세계가 그 진실 된 모습을 손빈에게 드러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작고 가는, 그러나 파괴적인 기세를 담은 무엇.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자신에게 짓쳐들어오는 장강어옹과 그의 손에 들린 청류의 푸른 기운까지.
모든 것이 손빈에게 그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나의 흐름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손빈의 앞에 떠올랐다.
우웅.
마치 비단실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 한 줄기 흐름 위에 손빈은 검을 실었다.
천천히, 그러나 결코 주저함 없이.
문득 손에 쥔 백로의 희미한 온기가 무척이나 포근하다고 손빈은 생각했다.
사락.
그것은 소리조차 없었다. 어옹의 눈에 백로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느려 보였고, 반쯤 눈을 감은 손빈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백로의 검 끝이, 파괴적인 기세를 담은 어옹의 또 다른 벗 청파직침(靑波直針) 위에 이슬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해 버리고 말았다.
콰과곽.
‘헉!’
손빈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던 장강어옹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손빈을 향해 쏘아져 가던 청파직침이 어느새 장강어옹 자신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언제……. 아니 어떻게…….’
쳐서 튕겨 낸 것도, 교묘한 수법으로 비틀어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청파직침이 손빈의 검 끝과 닿는 것을 직감한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이미 청파직침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손빈이 자신을 향해 쏘아 낸 것처럼.
한순간 어옹의 인식, 아니 세계 그 자체가 뒤틀린 것 같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큿.’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가느다란 청파직침이 장강어옹을 향해 곧바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몸체에 모든 것을 박살 낼 듯한 파괴적인 기세를 담은 채.
휘릭. 탓.
청류를 크게 뒤로 넘기며 장강어옹은 급히 자신의 몸을 뒤틀며 공중에 띄웠다.
천잠사를 통해 청파직침에 전달된 내기가 침의 궤도를 비틀고, 장강어옹은 그야말로 종잇장 차이로 청파직침을 비껴갈 수 있었다.
콰과곽.
스쳐 지나는 청파직침에 실린 막대한 기운이 날카로운 충격파를 일으키며 야수의 발톱처럼 장강어옹의 외투를 찢었다.
‘큭.’
그러나 장강어옹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내기를 청류에 담아 그대로 손빈을 향해 내리쳤다.
“타아아앗!”
우우웅.
어옹의 의지에 답하듯, 청류가 푸른빛을 줄기줄기 뿜으며 손안에서 울었다.
그러나 엄청난 내력이 담긴 청류가 손빈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어옹은 이미 그곳에 손빈이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도 없던 것 같았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맹수가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울부짖는 포효처럼. 그러나 그것은 이미 죽어 가는 짐승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다.
화악.
흙먼지를 가르고 손빈이 장강어옹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 백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사락.
그 순간 장강어옹은 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세계가 둘로 나뉘는 것을.
*
*
*
―살아는 있냐?
퉁명스럽고 무성의한 물음에 장강어옹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멍하니 있음을 깨달았다.
청류는 여전히 자신의 손에 쥐여 있었지만, 두 팔은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였고 두 무릎은 지면에 닿아 있었다.
―흘흘, 꼴좋구나. 그래도 나는 너 정도는 아니었다.
노군은 여전히 멀리 서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명확하게 들렸다.
장강어옹은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눈앞에 선 청년이 조용히 묻는다.
“너, 너는 대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고, 어떻게 그런 검로를 펼쳐 낼 수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 검로에 그저 놀라고 경악할 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제의 도(道)다.
노군이 그의 심정을 읽은 듯 대신 답했다.
―네가 평생 그토록 보고 싶어 했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들려오는 노군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제의 도가 바로 그것이다.
“무제의 도.”
장강어옹이 멍하니 되뇌었다.
―이래도 저놈에게 진인의 검이 어울리지 않는다 하겠느냐?
들려오는 노군의 목소리엔 웃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어옹은 화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눈앞의 손빈이 묻는다. 조금 상기되어 있었지만 손빈의 얼굴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진인께…… 검을 부탁받았다 했더냐?”
목소리가 메였다. 그러나 장강어옹은 반드시 물어야 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건 아닙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말했다. 장강어옹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는 진인께 무슨 가르침을 받은 것도, 그분의 뜻을 이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문득 온화한 모습으로 웃던 노도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분명 사자혁과 생사결을 펼친 상대였지만 어쩐지 미워지지 않았던 늙은 도사의 태평스러운 표정이.
“인간적인 정리를 따라 그분께 작은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장강어옹이 손빈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가는 눈동자에는 이전 같은 싸늘함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진인의 제자도, 진전을 이은 자도 아니라는 뜻이냐? 그저 다만 인간적인 정리에 따라 부탁을 받았을 뿐이라고?”
“네. 그러니 정파도 사파도, 저와는 무관합니다.”
손빈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답했다.
“현천의 무제와는 어떤 관계냐?”
순간 손빈의 얼굴에 아련한 그리움이 내려앉았다. 손빈은 답했다.
“그의 길벗이었습니다.”
“길벗…….”
장강어옹은 그 단어를 조용히 되뇌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일컬어 무도라 하기도 하고, 무인의 마음가짐을 무도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무도(武道)란, 무인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 추구하며 도달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진리다. 그러니 무제의 길벗이라 함은 곧 현천의 무제와 같은 길[道]을 걷는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너는, 현천의 무제가 걸어간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자더냐?”
‘무제의 길.’
장강어옹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손빈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아, 그랬구나.’
그건 손빈에겐 갑작스러운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설산을 떠난 이후, 아니 사자혁을 만난 때부터 점차 자신의 마음에 자리 잡아 왔던 막연한 무엇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명확한 하나의 단어가 되어 다가온 것이다.
그것이 매일 밤 손빈에게 검을 들게 했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토록 매달렸던 과거 시험에 미련조차 갖지 않게 되었고, 세상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것을 바라보게 했다.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지만 손빈의 삶에 어느새 빛나는 별처럼 분명한 지표가 되어 버린 그것.
그것은 바로 사자혁이 보여 주었던 그 길[道]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조용히 손빈은 답했다. 문득 사자혁이 보여 주었던 세 번의 초식, 파월삼식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그 태산 같은 뒷모습도.
과연 자신은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히 할 수 있다 말씀드리진 못하겠습니다만, 이미 보아 버린 것을 어쩌겠습니까?”
바다를 본 자는 호수에 만족하지 못한다. 사자혁을 본 손빈이 그 무엇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손빈의 얼굴엔 어느새 그리움 대신 잔잔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 미소에, 장강어옹은 전율을 느꼈다.
‘아아.’
지극한 도란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의 극의에 이른 자라 하더라도 그 끝자락을 간신히 보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도(道)다.
그러나 눈앞의 이 청년은 그것을 이미 보았다 말한다.
‘그랬던가? 이미, 보았던 것인가?’
자신이 패배한 것이, 이 순간 너무나 당연한 결과로 느껴졌다.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는 이 청년에게, 어떻게 그런 검로가 가능했는지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그는 이미 본 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끝자락조차 잡을 수 없는 바로 그 무의 도[武道]를.
“허어.”
장강어옹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향해 낮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그렇게 있던 장강어옹은 문득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손빈이 차마 말릴 새도 없었다. 장강어옹은 손빈을 향해 늙은 머리를 숙인다.
“성급한 예단으로 무고한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무거운 죄다.”
장강어옹은 말했다.
“특히나 그것이 정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이는 더욱 무서운 것이다. 악함과 탐욕에서 비롯된 폭력은 누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으나 의와 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그 판단마저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흰머리가 가득한 장강어옹은 손빈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 어리석은 판단으로 너에게 죄를 범했으니, 너는 네 뜻대로 나를 심판하라.”
그 말에 손빈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심판을 하라니, 당황스럽기까지 한 상황이다. 그러나 장강어옹의 진심이 너무나 절절하게 전해져서 감히 가벼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가 어찌 어르신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어옹께서는 이제 그만…….”
“그렇지 않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장강어옹은 말했다. 그의 가느다란 뒷목이 달빛 아래 앙상하다.
“죄인을 심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 죄의 피해를 당한 자뿐이다. 그러니 너 외에 나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 자는 없다.”
손빈은 말문이 막혔다. 장강어옹의 말은 본질적으로 법과 정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학문적으로 꽤나 심오하고 복잡한 주제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야 ‘나는 판관이 아닙니다’라 말하겠지만, 손빈은 오히려 아는 덕분에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이거 과거시험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난감한 주제를…….’
그렇다고 여기서 장강어옹과 난해한 토론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손빈이 쩔쩔매고 있자 문득 노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냐? 이겼으면 얼른 끝내지 뭘 질질 끌어?”
“저, 어옹께서…….”
손빈이 노군은 향해 하소연하듯 말하자 노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아닙니다. 좋은 비무였습니다’ 하고 끝내라. 그놈 말에 일일이 상대하다간 내 속만 터지니까. 저리도 꽉꽉 막힌 놈이니 상대해 주는 게 장강의 물고기들밖에 없지. 에잉.”
노군이 말해 주었지만 손빈은 고개 숙인 장강어옹 앞에서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노군은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그가 무제의 도(道)를 지닌 자라는 것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만이 아니지.’
놀라운 것은 그가 가진 무제의 도(道)만이 아니다.
처음 혈룡문의 무사에게 손빈이 펼쳐 냈던 태극의 검은 황학진인의 경지에는 많이 부족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전대 뇌검 남궁천을 상대할 때는 단숨에 그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저 까다로운 청파직침을 소리조차 없이 자신의 뜻대로 뒤흔든다. 장강어옹 정도 되는 상대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미친 듯이 성장하는 게 이 아이뿐인 줄 알았더니, 저놈도 마찬가지구나. 대체 장강어옹 같은 놈하고 싸우면서 뭘 또 깨닫는 거냐? 나는 암만 싸워도 보이는 것 하나 없더만.”
투덜거리듯 중얼거렸지만 노군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당월아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여전히 고개 숙인 장강어옹을 어떻게든 일으켜 보려 애쓰는 손빈의 모습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담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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