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101
101
외전
햇살 좋은 여름날, 마루에 앉은 창은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총총과 노는 범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저리 자랐을까…….’
열다섯의 총총은 벌써 여인 태가 나고, 범이 역시 이제는 제법 사람 같아 보였다. 목이라도 가누면 좋겠다 싶던 것이 기어 다니면서 폭풍 질주를 시작하더니, 세 살이 된 지금은 잠시만 눈을 떼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초오. 초초초오.”
“범아. 이모 해야지, 이모.”
“아니아니. 초초. 초초오.”
장호가 나무로 깎아 놓은 곰을 입에 문 범이의 관심을 돌리려 총총이 나무 사슴을 집어 들었다.
“입에 물지 말고. 이거는 사슴이야.”
“단이 거. 단이 밥.”
냉큼 목각 인형을 뺏어 든 범이가 알락범 입에 사슴을 가져다 놓았다.
“단이 사슴 조아해.”
“단이는 칡범이고 요거는 알락범. 이모는 총총.”
“아냐. 아냐. 이모는 초초초.”
“엄마 아빠 다 하면서 왜 나만 초초야.”
총총이 아무리 가르쳐도 총총은 끝까지 초초다.
투닥대는 총총과 범이를 바라보며 바느질하는 창의 일상은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었다.
세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창은 바느질 고수가 되었다. 사내인 장호보다 총총의 바지가 먼저 닳고 구멍이 터지니, 살살 다니라 잔소리하던 할매가 이해되었다.
‘세상 공평하다니까. 때 되면 얌전해지겠지.’
하루 두 끼 솥단지 가득 밥을 하고, 청소와 빨래가 태산이지만 그 정도쯤이야. 전쟁 같던 나날들에 비하면 꿈결 같은 평온함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는데…….’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자 쨍쨍하던 매미 소리가 몽롱하게 멀어져 갔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꽃밭에 선 창은 향긋한 꽃 냄새에 취해 발밤발밤 걸었다.
“살어리랏다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흥얼흥얼 노래하며 걷는 그녀를 감싸는 미풍이 그리운 목소리로 화답한다.
“울어라 새여 울어라 새여 자고서 울어라 새여~”
돌아선 창은 꽃밭에 앉아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색 치마에 새하얀 모시 적삼은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그녀에게 부채질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왈칵 눈물이 솟구쳐 달려간 창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어, 머니.”
“우리 효옥이 왔구나.”
곱게 미소 짓는 어머니의 치마폭에는 범이가 누워 있었다. 곤히 잠든 손자에게 부채질을 하는 어머니는 울먹이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썼다.”
“너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사무치게 쌓아 온 그리움이 속절없이 쏟아져 내리자 창은 눈물을 훔치며 두리번거렸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아버지야 사랑방에 계시지?”
‘천지 사방이 꽃밭인데 사랑방이라니.’
눈을 비비며 돌아본 창은 알록달록한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우리 범이 좀 보아 주시렵니까? 아버지께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금방 오겠습니다.”
“천천히 가거라. 또 혼나지 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음 짓던 창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행여나 어머니가 사라질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내당 문을 넘어 사랑방으로 달렸다.
“아버지! 하아, 하, 아버지.”
“허어. 양갓집 규수가 어찌 이리 경거망동인고?”
아버지와 바둑을 두던 장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창은 거친 숨을 삼키며 두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갑사 생활은 몇 년이나 하였는가?”
“8년 정도 하였습니다.”
“서책 좋아하는 딸아이가 무장에게 시집을 갈 줄이야.”
껄껄 웃음 짓는 아버지의 모습에 창은 와락 달려들지도 못하고 조신하게 대청으로 올라섰다.
“아버지, 제가…….”
“가서 차 좀 내오련?”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품에 안겨서 한껏 울어도 모자랄 판에 차를 내오라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창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부엌을 향해 내당 문을 열자 다시 꽃밭이 펼쳐졌다.
아차 싶어 돌아선 창은 대청에서 내려서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아버지! 가지 마셔요.”
조용히 머리 위로 내려앉는 손길에 창은 아버지의 도포 자락에 얼굴을 비벼 댔다.
“꿈이어도 좋으니 가지 마셔요.”
“걸음걸음 절벽 위에 들꽃 따라 걸어왔으니, 이제는 쉬엄쉬엄 꽃길 따라 가거라.”
“스승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버지는 사라지고 주름진 얼굴의 스승님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승님, 가지 말라는 길을 가서 죄송해요.”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되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을 감싸는 다정한 손길에 스르륵 눈을 뜬 창은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스승님을 부르기에 깨우지 못했소.”
잠이 들어 기울어지던 얼굴을 감싼 장호의 손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리운 이들을 보았습니다.”
팔을 뻗은 창이 장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말없이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눈물이 쏟아진다.
“꿈에서라도 보기를 소원했는데. 흑흑.”
“소원을 이루면 환하게 웃어야지 어찌 이리 서러울까.”
“너무나 짧았습니다. 행복한 시간들은 어째서, 어쩌면 꿈결조차 이렇게나 빠르게 스쳐 가는 걸까요.”
아내의 등을 토닥이던 장호는 창을 안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펴고 그녀를 뉘었다.
“한숨 더 자구려. 혹시 아오. 다시 만나게 될지.”
“곱단이는 못 만났습니다. 꿈에 나와 줄까요?”
얇은 여름 이불을 덮어 아이처럼 토닥이는 그를 올려다보던 창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낭군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바둑을 두더이다.”
창의 곁에 팔을 괴고 누운 장호는 잔잔하게 이어지는 꿈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젖은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어깨를 토닥이는 그의 손길에 잠이 들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선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다가서는 총총에게 손짓했다.
“형님, 괜찮아요? 바느질하는 내내 졸았어요. 나쁜 꿈 꾸는 줄 알았으면 깨울 걸 그랬나 봐요.”
“가족들을 보았다더구나.”
멍석에 앉아 노는 범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장호가 마당에 내려놓은 서책들을 주워 들었다.
“호굴에 다녀오셨나 봐요.”
“저녁에 읽을 서책들 좀 가져왔다.”
반야 선사의 집에 신접살림을 차리며 스승님의 물건들을 하나도 태우지 않고 단이의 호굴로 옮겨 놓았었다.
“대학은 네 방으로 들여놓거라.”
“저 오늘부터 대학 배워요?”
신이 나서 범이를 안아 코를 비비던 총총이 누런 서책을 들어 옆구리에 끼었다.
“범아. 아버지 나무 얼마나 해 왔나 볼까?”
땔감이 수북이 실린 지게로 향한 그녀는 지게 기둥에 걸린 꿈틀거리는 보따리를 들여다봤다.
“세상에! 이게 뭐예요?”
쉑쉑거리며 이빨을 드러낸 털 뭉치는 콧등부터 이마 양쪽에 흑백 무늬가 선명하고 회색 눈동자가 보석 같다.
“고양이가 어디서 나셨어요?”
“살쾡이 새끼다. 사흘째 같은 자리에서 울어 대기에 어미를 잃은 듯하여 데려왔다.”
살아 있는 삵을 처음 보는 총총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붉은 흑색이 섞여서 밝은 털빛의 새끼 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가져도 돼요?”
“탈진이 심하여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제가 살릴 거예요.”
범이를 장호에게 건넨 총총이 새끼 삵을 품에 안았다.
“야생 짐승인데, 살게 되면 산으로 돌려…….”
장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엌으로 뛰어든 총총이 고기 조각을 움켜쥐고 방으로 달려갔다.
‘살쾡이라면 질색을 하더니. 어인 일인고?’
총총의 관심에서 순식간에 밀려난 아들을 품에 안은 장호는 그녀가 떨어트린 서책을 집어 들었다.
등잔불 아래 서책을 읽던 장호는 좌탁에 팔을 괴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범이를 가졌을 때 할매가 했던 말이 떠오른 장호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부쩍 잠이 많아진 창이지만 입덧도 없고 밥도 잘 먹으니 둘째가 생긴 건 아닌 듯하다.
‘낮부터 자기 시작했는데 아침까지 자려나?’
잠결에도 범이를 토닥이는 아내를 바라보던 장호는 그녀가 눈을 비비자 재빨리 서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호굴에 다녀오셨나 봅니다.”
좌탁으로 다가앉는 창에게 장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야 선사의 서책들이 한성에 두고 온 내 책들과 일치하니 참으로 신기하오.”
“어릴 때 읽은 서책이 팔자도 바꾼다 하지 않습니까.”
서책을 뒤적이던 창이 낯익은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소학은 총총이 가진 것 있는데, 또 가져오셨습니까?”
“서체가 부인의 필사본 같아 범이 읽어 주려 가져왔소.”
“제가 쓴 것 맞습니다.”
후드득 책장을 넘기던 창의 치맛자락으로 누런 종이가 툭 떨어졌다.
‘무명과 무진.’
스승님이 창과 곱단이를 부르던 이름이 적힌 서신을 펼쳐 든 창은 굵직한 서체를 보는 순간 목이 멨다.
[너희 자매가 이 글을 볼 때면 나는 먼 길 떠나고 없을 것이다. 나의 본관은 개성, 자는 태운이며, 호는 석담이었다. 백부에게 너희 자매를 수양딸 삼았노라 서신을 보내 두었으니, 문경으로 가면 너희를 받아 줄 것이다.]9년 만에 발견한 유서에는 역적의 족쇄를 벗겨 주려는 스승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끝끝내 그녀들을 가슴으로 품었던 스승님 생각에 눈물이 솟구친 창은 유서를 붙잡고 엎드렸다.
잠든 범이가 깰까 울음을 삼키는 그녀를 품어 안은 장호의 가슴도 뜨겁게 젖어 들었다.
“스승님의 자호를 알았으니 정암사에 다녀오리다.”
태백산 자락, 정암사의 명부전에 들어선 장호와 창은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 아래 단상을 향해 절을 했다.
단상의 가장 아랫단에는 이름이 비어 있는 장호의 생모 위패 옆으로 백지의 위패들이 자리해 있다.
역적의 누명을 쓴 창의 부모님과 죽어 간 식솔들의 서러움이 저마다 새하얀 백지로 메워져 있었다.
가슴 저린 그리움을 향해 절을 하는 부부의 땀방울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이름을 되찾은 스승님의 위패를 바라보는 창의 가슴은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였다.
“언젠가는 다른 이들도 제 이름을 찾아가겠죠.”
한숨짓는 창을 바라보던 장호가 그녀의 손을 감쌌다.
“오늘 하루 묵어가는 것이 어떻소?”
“총과 범이 달랑 둘뿐이라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인 바깥나들이 오랜만이니 쉬엄쉬엄 다녀오라더군.”
“총총이 그리 말하더이까.”
풍경 소리가 영혼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명부전을 나선 그들은 산사를 거닐었다. 소리 없이 스며든 푸른 솔 향이 먹먹하던 가슴을 다독인다.
“마라히에게 푹 빠졌던데, 밥이나 잘 챙겨 먹을지.”
“마라히?”
“여진에서는 살쾡이를 그리 부른답니다.”
*하지: 24절기 중 열 번째. 양력 6월 22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