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102
102.
삐~
새파란 하늘을 가르는 솔개를 쳐다보던 창이 마루에 잠든 범이가 깰까 슬그머니 돌아본다.
‘자라……. 눈뜨지 말고 자라.’
구멍 난 저고리를 꿰매던 창은 숨소리마저 삼키며 바늘을 잡아당기는데, 귀에 익은 발소리가 요란하다.
‘사박사박 다니라니까!’
벌새처럼 부산한 창의 손짓에 할딱이는 숨을 삼키던 총총이 잠든 범이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마라히가 오늘 사냥에 성공했어요.”
마루로 뛰어오른 삵은 지난날의 비루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위풍당당하게 대들보를 긁어 댔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습니까.”
“야생의 짐승은 사람 손을 탈수록 명이 짧아진다.”
“형님도 단이를 산군으로 만들었잖아요?”
“나는 단이를 귀호로 만들었다.”
창은 마라히를 끌어안는 총총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불에 익숙할 정도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진 단이는 언젠가 그들 손에 죽게 될 게다.”
그 현실을 피하고자 호굴로 거처를 옮기고 불도 때지 않으며 살았지만, 창의 노력에도 소용없이 단이는 천적인 착호군을 공격하는 대신 동족을 물어다 주었다.
“최대한 빨리 산으로 돌려보내거라.”
근엄한 충고에도 총총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에 창이 고개를 틀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범이가 서 있었다. 세 살짜리 아들을 둔 엄마는 잠든 아이가 눈을 뜨고 있을 때가 가장 무섭다.
“버, 범이 깼구나.”
방끗 웃는 입에서 침이 죽 흘러내린 범이가 마라히를 쫓아 마루를 달렸다. 순식간에 고꾸라진 아이의 머리가 바닥에 닿는 찰나, 물을 길어 오던 장호가 몸을 던졌다.
“이노~옴!”
아들을 낚아챈 장호가 번쩍 들어 올리자 까르륵 웃음을 터트린 범이가 신이 나서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괜찮으십니까.”
가슴을 부여잡은 창의 물음에 범이를 내려놓은 장호가 흙바닥에 긁혀 옆구리가 뜯어진 저고리를 잡아 올렸다.
“어제 꿰매어 준 옷인데 미안하구려.”
“그보다 힘들게 길어 오신 물이 저리되어 어쩝니까.”
나무통에서 쏟아진 물로 질퍽해진 마당에 주저앉은 범이가 찰박찰박 흙바닥을 두드려 댔다.
“물이야 또 길어 오면 그만인데, 빨랫감이 늘었군.”
“날이 좋아 빨래하기 괜찮습니다.”
발갛게 얼굴을 붉히는 창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장호 사이로 총총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도대체 범이는 누굴 닮아서 저런대요?”
총총의 얼굴을 밀어낸 창이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날 닮아서 극성이다. 되었느냐.”
“형님 닮아 나오라고 기도하신 거예요?”
낭군을 닮아 나오기를 그토록 기도했건만, 범이는 겉모습만 장호를 닮고 알맹이는 영락없이 창이다.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더냐. 너도 너와 꼭 닮은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구나.”
“절 닮아 나오면 좋죠.”
“배 속에 있을 때야 다들 그리 생각하지.”
창의 미소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총총이 마당을 구르는 범이를 바라보았다.
“줄에 묶어 놔야 할까 봐요.”
‘허리를 묶어 천장에 걸어 놓으면 덜 다치지 않을까?’
창이 대들보를 올려다보는 사이 장호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아들을 안아 들었다.
“물 길으러 가는 김에 씻겨 오리다.”
낭군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아들이 지난날의 그녀를 보는 듯하여 창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세상 참으로 공평하다.’
심기일전하여 바늘을 집어 든 창이 이마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냈다. 염소 뿔도 녹는다는 대서가 코앞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초옹? 날도 더운데 빨래하러 안 갈래?”
“아니요.”
총총의 거절에 창은 바느질감을 미뤄 두고 장호와 범이가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들었다.
“진짜 안 가?”
“안 가요. 사냥하러 갈 거예요.”
마루에 누워 마라히와 놀고 있는 총총을 바라보던 창이 소쿠리 가득 빨랫감을 머리에 올렸다.
“구룡골 근처는 가지 말고, 거기 누가 장창 파 놨대.”
“알아요. 제가 나뭇가지에 노끈 묶어 표시해 놨어요.”
“잘했네. 그래도 가지 마. 해 떨어지기 전에 들어오고, 절벽 타지 말고…….”
“걱정 마세요. 마라히 데려갈 거라 절벽 안 타요.”
총총이 마룻바닥을 톡톡 두드리자 바짝 엎드려 엉덩이를 굼실대던 마라히가 사선으로 몸을 튕기며 달려왔다.
“멧돼지 다니는 길 잘 피해 다니고.”
“빨래하러 안 가세요?”
“간다.”
집을 나서는 창을 바라보던 총총이 두 손을 포개어 턱을 얹었다. 부부의 넘치는 관심 속에 부족함 없는 삶이건만, 때때로 찾아드는 서늘한 바람이 가슴에 맴돌았다.
“마라히……. 엄마랑 형제들 다 죽고 외롭지 않아?”
한숨짓는 총총에게 다가온 마라히가 그녀의 눈썹을 핥았다. 그르렁대는 숨결이 묘하게 위로가 되려는 찰나 총총의 머리를 부여잡은 마라히가 뒷발차기를 시작했다.
“이야아아앗. 너, 이 자식!”
개울에 도착한 창은 멀찍이서 물놀이하는 장호와 범이를 바라보며 빨래를 두들겼다.
“만지지 말아요.”
“부인, 힘 좋은 내가 두어 번 두들기면 될 듯하오.”
“지난번에 두들겨 오신 천 기저귀 전부 터졌습니다.”
창의 말에 장호는 집어 들었던 기저귀를 슬그머니 내려놓곤 그녀가 두들겨 놓은 빨래를 비틀어 짰다.
“살살 하세요.”
“살살 짜고…….”
두두두둑. 실밥 터지는 소리에 놀란 장호가 슬그머니 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먼 산을 쳐다보고 있다.
“총총 말입니다. 요즘 부쩍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말수도 많이 줄었습니다.”
“어른이 되느라 그런 것 아니오?”
“저는 안 그랬습니다.”
“부인과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지 않소.”
하긴, 총총의 나이에 창은 원수 갚겠다고 활촉에 독을 바를 두꺼비 잡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제가 범이를 낳은 뒤로 부모님 생각이 깊어진 것처럼 총총도 그런 것 아닐까요?”
“…….”
“마라히 말입니다. 어미와 형제를 잃은 것이 총총과 비슷하니 그런 생각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갈수록 감성이 풍부해지는 창의 말이 이해는 되지 않지만 장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총이 사냥 나간다 하니 한번 가 보셔요.”
“나보다는 부인이 낫지 않겠소?”
“요즘 입만 열면 잔소리가 터져 나와서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낭군님이 한번 가 보세요.”
아내의 부탁에 장호는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 가고 뭐 하십니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생각 중이오.”
스물네 살 창과 소통하는 데 육천 리 여정이 필요했건만, 열다섯 총총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한편, 사냥에 나선 총총은 수풀에 숨어 낮게 포복하며 풀을 뜯는 사슴을 노려봤다.
‘좋았어. 오늘 저녁은 사스음~’
아기살을 끼워 넣는 통아를 시위에 걸어 당기며 가슴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가두었다.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빠드드 비틀어 놓으려는 찰나.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멀쩡하게 서 있던 사슴이 쓰러졌다. 재빨리 시위의 방향을 튼 총총은 수풀 속에서 포복하고 있는 시커먼 털을 발견하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고, 곰이다.’
살금살금 뒷걸음질 치며 곰의 머리를 겨냥한 총총은 등줄기를 태우는 섬뜩함에 머리털까지 곤두섰다.
타각.
뒷걸음질 치던 총총이 나뭇가지를 밟자 쓰러진 사슴을 향해 가던 곰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통아를 벗어난 아기살이 바람을 가르며…… 퍽!
“맞았나? 맞은 것 같은데?”
주저앉았던 곰의 머리가 들썩이자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천왕봉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단아아아아아아아!”
호굴이 있는 절벽에 다다른 총총은 떨리는 손으로 통아에 아기살을 끼워 넣으며 돌아섰다.
‘고, 곰이 둔갑을 했나?’
“젠장……. 왜 이렇게 빨라.”
웅피를 두른 거구의 사내가 귀까지 온전하게 달린 곰의 머리를 모자처럼 뒤로 넘겼다.
“토, 토이…….”
“그새 이름도 까먹었냐?”
토이모가 씩 웃자 토끼 눈이 된 총총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뒤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단이의 모습에 솜털이 곤두섰다.
“단아, 괜찮아. 아무 일 아니야. 그냥 한번 불러 봤어. 단이야?”
“단이?”
고개를 돌리던 토이모는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단이의 앞발에 맞아 그대로 고꾸라졌다.
“토이모! 토이모!”
앞발을 할짝이는 단이를 밀어낸 총총이 토이모를 끌어안았다. 뺨을 두드려도 기절한 토이모는 깨어날 줄 모르고 총총을 찾으러 왔던 장호가 뛰어왔다.
“어찌 된 일이냐?”
“옘병할 단이가 토이모를 때렸어요.”
이리저리 토이모의 머리를 살피던 장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둘러업었다.
“외상도 없고 기절한 것뿐이니 집으로 가자.”
“너…… 이 자식!”
총총의 욕설에 휙 돌아선 단이는 숲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토이모의 화살이 꽂힌 사슴을 물고 따라온다.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뜬 토이모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둑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슴을 사냥하고, 총총을 만나서……. 왜 기절했지?’
뚝 끊겨 버린 기억에 머리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나선 그는 마루에 우뚝 멈춰 섰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실핏줄이 터진 눈을 문질렀다.
‘죽어서 저승에 온 건가?’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 위로 사슴 고기가 익어 가고, 단란하게 둘러앉은 이들은 혈족만큼이나 그리운 벗들이었다.
고기를 굽는 장호와 아이를 안은 창, 총총 옆으로 사람처럼 앉아 있는 거대한…….
“토이모! 괜찮아?”
돌처럼 굳어 있는 그를 발견한 총총이 한걸음에 달려오자 토이모가 눈을 문질렀다.
“안 괜찮은 거 같아. 버, 범이 보이네.”
자꾸만 눈을 문지르는 토이모의 모습에 창이 웃음을 터트리자 장호가 그녀의 입에 고기를 물렸다.
“지리산 지키는 산군이야. 형님이 어려서부터 길러서 괜찮아. 이리 와.”
총총이 손을 잡아당겼지만, 산군급의 대호를 마주한 적 없던 토이모는 마루에 들러붙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늑대도 아닌 범을 기르는 건가?’
“머리는 괜찮아? 안 아파?”
“아파. 나한테 돌 던졌냐?”
“단이가 살짝 쳤어.”
“단이가 누군데.”
“쟤.”
총총의 손가락 끝으로 단이와 눈이 마주친 토이모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근사하게 재회할 줄 알았는데…….’
“단이 가라고 할까?”
크르르르르.
뼛속까지 파고드는 울림에 토이모가 숨을 들이켰다.
“쟤……가 말도 알아들어?”
“안 돼랑 가라는 소리를 제일 싫어하더라고.”
총총의 말에 못마땅한 듯 단이의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마당을 내리쳤다.
“손님한테 버릇없이 굴 거야?”
두툼한 주둥이를 잡아 흔드는 창을 쳐다보던 토이모가 다가서자 부부는 자리를 내주곤 단이의 좌우에 앉았다.
“갑자기 어인 일이더냐?”
“어떻게 된 거야? 집에 무슨 일 있어?”
장호와 창의 질문에도 토이모는 모닥불 너머로 사람처럼 앉아 있는 단이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쟤 처음 보고 기절했잖아. 그런데 정말 어쩐 일로 온 거야? 혼자 왔어?”
“얻어맞지 않았다면 기절 안 했어.”
구겨져 버린 자존심에 토이모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지리산으로 오라며.”
“내가? 언제?”
순식간에 역적이 되어 버린 총총은 장호와 창의 시선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진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단풍 보러 오라며, 아이신 대신 온 거야.”
“다, 단풍?”
헤어지던 날 아이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 총총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어이없어 쳐다보던 창이 피식 웃었다.
“조선의 단풍이 사람 여럿 잡네. 아이신은 잘 있어?”
“응. 지금 만삭이야.”
시큰둥한 토이모의 말에 창이 함박웃음 지었다.
“푸린에게 축하한다고 전해 줘.”
“아이신은 도로고에게 시집갔어.”
“첫 번째 복진이 낳은 넷째 아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창과 눈이 마주친 장호가 토이모에게 술잔을 건넸다.
“전쟁 같은 삶이라면 정면 돌파만 고집할 순 없지. 멀더라도 안전하게 우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푸린도 그리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요양의 태화당에 있어요.”
청림의 뒤를 이어 태화당을 이끄는 무진의 아래로 들어간 푸린은 일 년 만에 이랑 중장이 되었다.
“만 귀비가 죽은 뒤로 황제가 앓아누웠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요양의 태화당은 소당주 때부터 황태자에게로 돌아섰으니, 제2의 번성기를 맞이할 겁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열아홉의 토이모는 새로운 물살을 탈 생각에 의기 충만해 있었다.
“명으로 건너가 상단 일을 배워 볼까 합니다. 식량 수급만 원활해져도 부족 간의 분쟁이 잦아들 테니까요.”
대국인 명과 조선이 오만함의 대가를 치를 거라던 복진의 경고가 떠오른 창은 그녀의 계획대로 되는 건가 싶어 불안했다.
“어머니……께서는 잘 지내시지?”
“장가가라고 하도 닦달해서 잠시 피해 온 거야.”
“하긴, 열아홉이면 장가갈 때 지났지?”
은근하게 곤두선 창의 물음에 토이모의 시선이 총총에게로 향했다.
“너도 열다섯이면 시집갈 때 안 됐어?”
“남이야 시집을 가든 말든. 단풍이나 실컷 보고 가셔.”
새치름한 총총의 대답에 토이모가 웃음 지었다.
“모르지. 단풍보다 예쁜 살쾡이 만나면 눌러살지도.”
두 눈을 부릅뜬 총총이 사슴 고기를 노리는 마라히를 집어 토이모에게 안겼다.
“옛따. 미니 마라히.”
“앙칼진 게 누구랑 똑같네? 내가 그렇게 좋아?”
뒷발차기를 하는 마라히를 들어 올린 토이모가 웃음을 터트리자 총총이 뜯어 먹던 사슴 다리로 그를 찔러 댔다.
“그게 좋아하는 걸로 보이니?”
“버릇없는 것도 너 닮았다.”
마라히가 토이모의 머리 위로 올라앉자 범이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의 머리를 핥는 단이의 혓바닥을 움켜쥔 창이 장호에게 속삭였다.
“저 둘 괜찮은 겁니까.”
사슴 정강이뼈로 토이모를 찌르는 총총의 모습에 장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별빛이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밤은 무르익어 가고 열아홉 소년과 열다섯 소녀의 투닥임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절벽 위에 들꽃 따라 범이 온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