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ree that lives for many years RAW novel - Chapter 7
07. 재회
“아버지!”
부쩍 심해진 건망증이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기억이 오락가락 할까 걱정이었다. 그저께는 신. 그저께는 곡괭이. 오늘은 새참 거리로 싸준 밥 덩이를 그대로 두고 나갔다. 나는 부엌에 덩그러니 놓인 밥 덩이를 발견하자마자 밭으로 나간 아버지를 쫓았다.
저 멀리 영수 아저씨와 웃으며 걷는 아버지가 보였다. 영수 아저씨와는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사이가 좋은 모양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우의가 좋은 두 분이었다.
“아, 자경이 짝으로 딱이라니까!”
“됐다니까.”
한데 두 분은 내 얘기 중인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 놀래킬 준비를 하던 나는 한 발자국 뒤에서 떨어졌다. 들뜬 마음이 한풀 식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였다.
“거참. 언제까지 어, 저, 저 나이만 먹게 내버려 둘 거여. 내가 저거, 그래, 자경이. 송덕에서 갔다가 고생해서 살이 쫙 빠져 온 것을 보고 얼매나 가슴이 아팠는지 알어?”
“자경이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영수, 너는 입 닫어.”
“걱정한다는 양반이 이랴. 걱정한다는 양반이.”
나는 시달리는 아버지를 못 보겠어서 영수 아저씨의 등을 툭툭 쳤다.
“무슨 걱정이요?”
“아이고! 애 떨어지겠다! 애 떨어지겠어!”
“자경아!”
“아버지. 밥 덩이.”
나는 들고 온 보자기를 살살 흔들었다. 아버지는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요즘 내가 왜 이러냐. 자경아.”
“그러니까 밭일 가지 말래도.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큼은 있고.”
“아휴. 손발 멀쩡한 사내새끼가 딸 등골 뽑아먹으면서 어찌…….”
“등골 한 수십 개는 있으니까. 뽑아 먹을 만큼 드셔보시고나 말하시지.”
아버지는 독한 면이 있었다. 내가 보낸 엽전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셨고. 하여 이 마을에서 가장 비싼 땅을 사둘 정도의 값이 되었다. 그것도 아니 되면 안쪽 내륙으로 가서 튼튼한 집을 짓고, 나머지는 아끼면서 살면 그럭저럭 풀칠할 수 있을 정도인데. 아버지는 단호히 그건 네 몫이라며 쓰기를 망설이는 것이었다.
“아, 한데. 영수 아저씨.”
“으, 으이?”
“제 걱정 무얼 해 주셨는데요?”
“그게, 그것이…….”
영수 아저씨를 비롯한 이 마을 사람들은 내가 사내 복장을 하고 전국을 쏘다녔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다. 내가 얼굴을 가린 밤에만 아버지를 찾아온 것도 있고. 와도 마을이 가장 바쁠 때만 골라서 오곤 하였다. 하여 내가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다들 내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며, 어디 기생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하거나, 아버지가 말을 하도 안 하여 혹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줄 알았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다행히 순박한 시골 사람들은 내가 송덕에서 부잣집 아기씨를 돌보며 엽전을 꽤나 벌어 왔다는 것을 믿었고, 돌아온 뒤로 세 달이 가까워지는 시간 동안 뒹굴뒹굴 눌러앉아도 일을 하느라 고생했다며, 밥만 까먹는 놈팡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까지 댕강 잘려왔으니 어디 가서 험한 일을 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어미 그렇게 죽고, 아비를 부양하기 위해 혼기고 뭐고 다 포기한 효녀가 되어 있었다. 미리 여러 변명을 준비했는데. 역시 송덕과 이곳은 인심이 달랐다.
“아이, 자경이. 네 중매가 들어 왔어가지고. 놓치기 아까운 자리라서 내가 말은 한 번 혀 본다고…….”
“뭐 하는 사내인데요?”
“아니, 이게 웬 떡이래. 자경아, 할 것이여? 할 것이여? 딱 말해. 딱 말혀 봐. 잉?”
내가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안심하고 있던 아버지가 오히려 펄쩍 뛰며 난리였다.
“아이! 뭔 중매를! 됐다. 듣지도 마라.”
내가 혼인한다고 하면 얼싸안고 좋아하실 우리 아버지가 이런 반응인 걸 보니. 상대가 영 시원찮은 모양이다.
“아이고. 자경아. 네 아버지가 뭘 모른다. 그 치가 아들 하나는 딸려있어도 사람 성품은 어찌나 구수한데…….”
“두 번 구수했다가는 아주.”
아버지와 영수 아저씨가 다툼을 시작하는 틈을 타서 나는 슬그머니 그 개싸움 난 곳에서 걸어 나왔다. 세 달간 이곳에 있으면서 자주 겪는 일이었다. 내 중매를 서려고 여기저기서 손을 뻗는 마을 사람들과 상대가 썩 마음에 차지 않아 성을 내는 아버지.
송덕에서 허드렛일하며 푼돈을 모았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는지. 실없는 처녀애보다 낫다며 나를 재취 자리로 찾는 이가 많다고 들었다. 재취. 나는 내 일이 아닌 듯 웃기기만 한데 아버지는 당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듯 울분을 터트렸다. 나는 어느 날 궁금해서 한 번 물었다. 내가 아무나 잡아서 혼인하길 바라는 건 아버지 아니냐고. 왜 이리 성을 내느냐고.
‘자경이 너는 더 귀한 사람하고 맺어져야 하는데.’
‘귀한 사람?’
‘너는 퇴치 일하면서 사람 구해 주는, 아주 높은 사람 아니여.’
그때 알았다. 내가 사라진 그 세월 동안. 아버지는 이 어촌에서 나를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살았다는 걸.
나는 지금까지 잠깐씩만 내려와 얼굴을 보고 간 것이 전부라, 특별히 아버지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크게 생각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는 내가 하는 일을 묻지도 않으셨고, 또 묻는다 하더라도 대략적인, 아주 대답하기 쉬운 것들만 질문했다. 무얼 먹고 사냐, 언제 자느냐, 힘들진 않느냐. 같은 것들.
내가 퇴치사 일은 때려치우고 이제 아버지 딸로서, 나로서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 하였을 때도 아버지는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지 말라는, 대체 왜 그러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취한 행동은 그저 내게 잘 돌아왔다고, 아버지의 곁으로 끝끝내 돌아와 다행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마을에서는 아버지를 일견 골칫거리를 둔 딸로 볼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여타 다른 부모처럼 나를 빨리 치워버려야 할, 썩어가는 반찬처럼 생각하질 않았다. 아버지께 나는 귀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간 돌아와 빈둥거리며 눌러살았던 것이 미안했다. 얼마나 속이 애탔을 것이며, 내게 어찌 된 일인지 묻고 싶으셨을 텐데.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스승에 대해 말했을 뿐이었다. 스승에게는 내가 수하라에서 송덕으로 돌아가자마자 찾아갔다. 무릎을 꿇고 송구하다 말씀을 올리고, 그간의 일을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마친 다음, 나는 퇴치사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하니 그만두겠다고.
‘송구합니다. 제 그릇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
내 안에 계신 신을 옮겨서 다른 이에게 주어도 할 말은 없다고 하였다. 요수에게 속아 연민을 느끼고 연정으로 변했지만, 그 감정에 대해 죽을 만큼 밉거나 후회스럽지는 않다고. 마음 한편에서는 스승님이 아, 어쩌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은 길길이 날뛰며 여인이 그럼 그러하지, 그러기에 진즉에 내게 신을 값을 받고 팔라 하지 않았나. 하며 쓴소리라도 아낌없이 풀어낼 줄 알았다.
‘자경아.’
‘예.’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예.’
‘푹 쉬고 있어라.’
스승님은 이후에도 별다른 말 없이 경운이의 제사라도 지내줘야겠구나, 한 것이 전부였다. 나를 비난하는 말도, 나를 깎아내리는 말도 하지 않으셨다. 스승님의 성격상 매운 소리를 잔뜩 퍼부어야 정상이거늘. 스승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고향에 내려가 그간 못 푼 네 마음을 다 풀고 오라고만 이야기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아 스승에게 쫓겨나 집에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정정해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더 나를 안쓰럽고 대접해줘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불이 꺼진 내 작은 방 위에 누워 가슴에 손을 얹었다.
[계십니까.]어떻게 그자가 요수인 것을 몰랐냐며 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지주 양기석을 단 한 번도 요수라고 의심한 적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의 눈이 요사스럽게 붉을 때는 요수가 잠시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며 신에게 추궁하기에 늦었다. 나는 이미 요수에게 홀려있었고, 신은 그것을 알고 있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이자들의 곁에 있고 싶다고. 그것이 내 선택이니까. 자신을 담은 그릇의 선택이니까.
나는 신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에서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제일 잘못한 사람은 속고 만 내가 아닌가. 미친 사람처럼 누군가를 원망하며 시간을 죽이기에 나는 지금 너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저 쉬고 싶었다. 앞으로 뭘 해야 빌어먹고 살지에 대한 고민도 잠시 미루고 설렁설렁할 만큼.
나는 일부러 이곳 시골에서 아버지를 졸졸 쫓아다니며 챙겨드리고, 마을 아이들에게 요수 이야기를 하며 놀려주고, 이따금 들어오는 혼인 중매 상대에 대해 듣고서 코웃음 치며. 그러며 양기석, 그 요수를 어떻게든 떠올리지 않는 것이 중했다.
그와 헤어진 후 첫 번째 달은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고. 두 번째 달은 천연두에 걸려 짓무른 것처럼 아팠고. 세 번째 달은 체증이었다. 밥을 넘기다가 체하고 국을 마시다가 체하고. 당밀과도 달지가 않았다.
잊히질 않았다. 그의 눈매나 손이나 부드러운 말이나 그런 것들. 내가 사내를 만나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중매가 들어오면 빼지 않았다. 한 번은 건너 집 아낙이 하도 괜찮다고 사정 사정을 하여 나가 보았다. 여인네의 마음은 같은 여인네가 잘 알지 않겠냐고. 촌스럽게 농사일만 하는 사내가 아니라 하였다. 지주가 탐이 나 마름으로 삼을 것이라며,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인재라 하였다.
중매는 으레 과장된 면이 있기에, 개중 제일 괜찮다고 하도 자신하는 아낙에게 속는 셈 치고 한 번 만나보게 되었다. 별 기대도 없어 만나자는 방앗간 앞에서 하품이나 쩍쩍하고 있는데, 은근히 생김새 멀끔한 사내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신장도 요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내가 그만하면 훤칠했고, 코가 약간은 삐뚤어지긴 했지만 이목구비는 모난 데 없이 정갈한 편이었다. 괜찮은 사내 찾기가 익은 조롱박을 깨서 금싸라기가 나올 확률과 비슷하니. 못해도 나 같은 처지보다야 더 괜찮은 처녀들이 줄을 설 얼굴이었던 것이다.
해서 왜 나인가. 아낙의 중매 솜씨가 그렇게 좋은가 하였더니. 이자는 대뜸 내가 모아놓은 엽전은 얼마나 되는지. 마름이 되기 위해 지주에게 얼마나 알랑방귀를 뀌어줄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굉장히 계산적이고 마음이 메마른 사내였다.
어찌하여 그 하고 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이 마을에서 내가 된 것인가 했는데, 그는 여인이 처녀이고 아니고 아름답고 아니고를 떠나서, 제게 대들지 않을 친정과 어느 정도 수완이 좋은 여인을 찾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나를 어찌 설명했는지 모르겠으나. 푼돈 조금 모아두었을 뿐이지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돌려 돌려 말하는데도 상대는 조심스럽게 대관절 얼마기에 그러냐며 모아둔 값을 따져보는 것 같았다.
나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 돌아서서 집으로 그냥 간 참이었는데. 그게 이 사내에게는 우쭐대는 것으로 보였던 것인지. 아주 엽전을 옆구리에 쌓아두고 사는, 깐깐하고 수전노인 여인으로 보는 것인지. 오히려 값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내 태도가 더 마음에 들었다는, 아낙을 통해 전한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은 참으로 웃긴 것이었다.
하여 그로부터 그 사내. 김용철인지 무엇인지는 참 뺀질나게도 우리 앞마당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살았다. 그것이 벌써 한 달이 넘은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곧 자경이 시집간다고 소문을 내며 살던 마을 사람들도 내가 어림잡아서 삼 년은 그러해도 생각이 없다고 하자 시들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꽃노래도 매번 같은 꽃노래를 하면 지루하지 않은가. 처음에나 신선했던, 마을에 과년한 여자애의 중매 상대가 마름 후보라는, 그런 재미난 소식에 흥한 것이지. 내가 시큰둥하고 상대방은 매번 거절만 당하자 이제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쯤 떡을 얻어먹을 수 있냐고 돌려 물었지만, 내가 삼십 년은 더 기다려야 될 것이라고 얘기하자 혀를 차며 그저 가버리는 게 일쑤. 결국 내 집을 자주 찾아오는 마름 청년의 이야기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
무더위가 다 가신 추계. 나뭇잎은 붉게 치장되고, 마당 비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이 누가 낙엽을 잘 치우는지 싸우며 노는 이 계절에. 나는 한여름이라도 된 듯 땀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어설픈 잠에서 깨어날락 말락. 병상에 목을 축이듯 머리맡에 둔 물그릇을 깨어나 벌컥벌컥 마시기도 하고, 또 돌아누워 자다가 윗옷을 벗어 던지기도 하였다. 이불은 저 멀리 치워둔 지 오래. 너무 더워 잠을 자다가 눈을 설핏 떴는데. 그때 차가운 손이 내 등을 쓸어 만지는 게 느껴졌다.
조심조심 내 등뼈를 어루만지다가 쓱 등을 쓸어내리고 내려가 살짝 둔부를 움켜쥔다. 내 몸의 열을 재는 아비의 손이라기에는 음탕하고 끈적이는 손길이었다. 서늘한 무언가가 내 등에 닿고,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꽉 움켜쥔다. 끌어안긴 자세에서 서늘함을 느낀 나는 그 의문의 존재에게 잠결에 치대었고, 뒤편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숨에서 좋은 향이 맡아졌다. 무척 그립고 떠올리면 아픈…….
순간 생각이 났다. 이 향의 주인이 누군지에 대해.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내 몸을 더듬어보고, 내 뒤에 있을 손길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헛꿈을 꾼 것인가. 내 뒤에는 너부러진 목침과 낡은 경대만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망상까지 실재처럼 꾸는구나. 땀이 목깃을 적셨다. 나는 애써 부정했다.
헛꿈을 꾸는 것이야, 헛꿈.
한데 아침이 밝아오고. 강가에 빨래를 좀 하려고 떠난 그 날 아침. 빨래터에 주저앉아 방망이를 든 나는 무심결에 강에 비친 내 목덜미를 보고 떨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에 옅게 난 저 붉은 자흔. 자다가 구르면서 보아도 사내가 남긴 것이었다. 곁에 그럴 자라고는 김용철인지 용팔인지 밖에 없었으나, 그자는 딱 보아도 그리 대범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자면 하나다. 내가 미쳤거나. 놈이 돌아왔거나. 설마 나를 농락하고, 이제는 제힘을 되찾은 요수가 무엇 하러 이 촌구석에 내려와 나를 희롱하겠는가. 나는 다시 마음을 잡고 방망이질을 하며 더운 열기에 정신이 흐릿해져, 모기에 빨린 것을 별별 생각을 다 얹어 음탕하게 만들어냈다고 애써 부인했다.
볕도 좋고 날도 좋고. 묵은 때까지 벗겨낼 듯 방망이를 내려쳤다. 간만에 개운한 빨래를 했다. 나는 앞마당에 널어놓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가장 볕이 좋은 자리에 줄을 걸었다. 아버지의 해어진 바지를 보며 이참에 한 벌 새로 지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괴이한 꿈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쓰린 마음에 묻혔다. 곧잘 잊고서 살 것 같았다.
바스락. 마른 나뭇가지가 동강 나는 소리였다. 빨래를 널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누군가가 일부러 낸 소리였는데. 기이하게도 뒤에는 사람은커녕 짐승 한 마리도 없었다. 들고양이가 내고서 사라진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짓밟혀 반으로 갈라진 나뭇가지가 꽤 굵었다.
누군가 있었다. 아버지와 내 삶의 터전에. 그리고 난 그것이 더는 착각이 아님을, 그리고 요수 양기석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착각이 모두 사실이라면. 양기석의 향기. 그의 손길. 그리고 지금도 느껴지는 예리한 시선.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지독하고 날카로운 시선. 덤불 근처, 나무 뒤에서 느껴지는 사특한 기운. 나는 물기 털어낸 치마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양기석.”
대답 대신 바람이 불었다. 그가 밟은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바람을 타고 굴러다니는데. 나는 화가 나기보단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가 맞다면 여기서 이럴 이유가 무엇인가. 봉인이 잘못되었나, 또 봉인 당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완전히 끝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들어서?
애초에 그가 왜 내 목숨을 살려줬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는 당연히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을 기만한 요수가 일말의 연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나 무슨 이유로 왔건 간에. 여기는 사람이 모여 사는, 요수가 접근해서는 안 되는 마을이다. 무엇보다 내 아버지가 살고 있다. 아무리 퇴치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어도 마을에 요수를 친절히 들일 만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여길 왜 왔지.”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풀이 우거진 곳, 한 나무에서 유독 탁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숨을 생각도 없는 것인지 밑으로 진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곰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길쭉한 그림자는 응당 사내의 것이었다. 숨기려 애써도 내 눈에 다 보였다. 들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이건 내 착각일 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 환각이나 환청이 들리는 지경에 이른 것일지도. 혹시 내 착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은 더욱 굳어갔다.
나는 더는 그쪽을 신경 쓰지 않고 싶어 마저 빨래를 널고 들어갔다. 잊고 싶어서 안달할수록 더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왜일까. 언제쯤 그를 완전히 잊을 수 있을까.
이 사무친 미움을. 이 뼈저린 그리움을.
***
“아야! 아야! 자경아!”
그날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하는 일 없이 약방 영감의 집에서 굴러다니는 서책을 구해서 읽다가 얼굴에 두고 잔 참이었다. 한데 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얼굴 위에 둔 서책으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굴렀다. 구석으로 가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서 잠을 계속 자자, 밖에서 들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안까지 넘어왔다.
“자경아! 아야!”
손으로 어깨까지 흔들어대니 별수 없었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입맛도 사라지고 뭘 하기도 싫고. 잠만 쏟아져 대니 의욕도 없고. 하여 나를 깨우는 아버지의 호들갑에도 귀찮은 목소리로 답하고 말았다.
“나중에…….”
“나중이고 자시고. 그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에 결국 나는 눈을 뜨고 말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생각하다가도 마음이 걱정까지는 가지 않았다. 무얼 생각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하나 아버지는 완고했다. 나를 어떻게든 일으킬 작정인 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한숨을 동무 삼고 일어나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는데.”
“바깥에, 바깥에 그 사람이…….”
“사람?”
아버지의 하얗게 질려 놀란 얼굴을 보고 나는 설마 싶었다. 설마 그 요수가 우리 집 마당까지 찾아온 것인가. 피가 차게 식어, 아까까지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질린 얼굴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의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 요수가 내 주변에서 맴도는 것인가. 나는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내가 나가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숨을 헐떡이는데. 설마 사람을 죽이고 쳐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헐레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내 뒤에 두고 문을 열어젖혔다. 땀을 흘리며 떠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하늘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본다. 생긋 웃는 그 얼굴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스승님.”
씻지 않고 있기를 어언 이틀에 가까워져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나는 내 꼴을 생각지도 못했다. 봄꽃처럼 화사하기만 한 비단이 나를 반겼다. 그다음에 뒤를 돌며, 내 얼굴을 확인하며, 심히 뻔질거리는 얼굴. 영락없는 내 스승이었다.
“아주 넋을 빼놓고 살고 있구나.”
스승은 나 때문에 습관이 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천히 신을 신었다. 스승의 그림자가 내 눈앞에 이르러 그늘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따끔한 통증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사고는 네가 치고 여기에 이리 숨어 있느냐.”
사고. 순간 등골이 쭈뼛 섰다. 엔간한 것은 정리를 하고 왔으나 혹여 심각한 일이 터진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누군가 내가 여인임을 알고 스승께 항의하러 왔거나. 지금껏 있었던, 수하라에서의 일들을 누군가 일러바치었거나. 잊고 살고자, 외면하고자 했던 경우들이 내게 돌팔 질을 했다. 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녀석. 얼굴이 왜 그러냐.”
“무슨 문제입니까. 기어코 제가 사내 행색 한 것을 누군가 알아채 고발이라도 해버린 것입니까? 아니면 누구한테…….”
“고발은 무슨. 내가 사고라 말했다고 얼굴이 허옇게 질린 것을 보니. 네가 찔려도 한참 찔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스승은 혀를 쯧쯧 차더니 소매에서 부스럭거리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게 건넸다. 이게 무언가 싶어 눈앞에 들이 밀어진 벽보 같은 것을 한 번 보고, 스승을 한 번 보고, 자신 없는 손길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사람을 찾는다는 벽보. 그 찾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이 사람을 찾으면 사례를 두둑이 준다는 글까지 적혀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림에 그려진 자는 누가 보아도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찾는 겁니까.”
“수하라의 지주가.”
수하라의 지주. 나는 그것이 양기석을 지칭하는 바가 아님을 알고도 입안이 말랐다. 내게 수하라의 지주는 지난여름 내내 한 남자였기에. 마지막에 보고 떠난 그 병약한 지주의 얼굴은 잊힌 지 오래였다. 정작 잊어야 할 얼굴은 잊지 못하고 지독하니 남고. 잊지 말아야 할 얼굴은 개울가에 씻어낸 듯 말끔히 잊고 말았으니. 나는 내 마음을 붙들고 대체 불만이 무어냐고 묻고 싶은 심경이었다.
“한데요. 수하라의 지주가 왜 저를 찾는답니까.”
“너를 무슨 무녀를 넘어 하늘에서 내린 선녀쯤으로 아는 모양이던데. 가문의 평화를 찾아다 준 이라며. 하도 지주께서 과장된 말로 여러 번 떠드는 통에 다른 엽전 꽤나 있으신 분들께서도 너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예?!”
“그리 놀랄 게 아니다, 자경아.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 있지 않겠어?”
“기회라니요.”
“네가 여인임을 숨기지 않아도 될 기회 말이다.”
스승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휘날리는 내 머리칼을 살며시 잡아다가 뒤로 넘기어주었다. 그 간지러운 손길에 살포시 웃음이 났다. 하나 내 무거운 목소리는 툇마루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과연 그럴 자격이 제게 있겠습니까.”
“그래. 속 시원히 얘기나 해 보거라. 대체 수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승님께는 대강 말한 참이었다. 요수의 꼬임에 넘어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심지어 나아가 요수의 발을 자유로이 풀어준 것은 나이니. 훗날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모두 내 책임이었고, 나는 더는 신을 모실 그릇이 될 자격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내 입장만을 전하고 내려온 길이기에 스승은 황당할 법도 하건만. 의외로 가뿐히 보내주는 차에 내가 더 놀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네가 지쳐 보였어.”
스승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내 어깨를 잡았다.
“네가 날 따라나설 때의 그 패기를 보고 안심한 내가 바보였다. 경운이가 네게 상처를 주고, 여인임을 드러내지 말라 시시때때로 꾸짖는 내가 있고, 밤마다 지쳐서 하루하루 시드는 너를 볼 때마다 이러다가 나아지겠거니 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그러셨습니까.”
스승은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나를 그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승은 언제나 바빴으며, 내게 퇴치를 가르칠 때는 엄하기 그지없는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경아.”
“예.”
스승은 내 어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미를 죽인 요괴를 네 손으로 잡는다는 말. 아직 유효하냐.”
나는 고개를 들어 스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상시 그에 대해 말하면 사람이 되어, 퇴치사가 되어 원한을 품고 있으면 되느냐며 반쯤 농담 식으로 말하던 스승이 떠올랐다.
“다시 일어서자. 이 기회만 잘 이용하면 여인으로, 자경이 네 진짜 모습으로 살아도 될 터이니.”
“하나 스승님. 저는 아직 일어설 자신이 없습니다.”
“그만큼 쉬었으면 걸음마 한 번은 떼 볼 때가 되었다. 너답지 않게.”
나다운 것. 스승은 할 말은 다 했다는 태도로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우리 집 옆에 수풀이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 잠시 그를 향하고, 다시 돌아와 나를 향했다.
“진득한 놈이 달라붙었구나.”
“예?”
그때 수풀에서 일어난 날카로운 바람이 내 앞으로 스쳤다.
“알고 있던 것이냐?”
나만 느끼는 기척이 아니었단 말인가. 두려움과 설렘. 양감정이 들었다. 양기석이 나를 죽이려고 아득바득 온 것일지도 모르는데도 나는 말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가 죽여주었으면 했던 나날들이 있으니까. 심지어 지금까지도. 익숙한 향기를 담은 바람에 눈이 가는 찰나, 스승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사흘 뒤에 찾아오겠다. 그때까지 채비를 하고 있어라. 나는 근처 약방 영감 집에 있을 터이니.”
스승을 수풀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서는 혀를 찼다. 스승께서는 별 대수롭지 않은 요수가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기척은 옅었으니까. 하나 나는 그 기척에서 느껴지는 향이나 그 노련한 숨김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보낸 시간이 만들어내 준 감각이었다. 이런 내가 다시 퇴치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더군다나 신의 힘을 내가 마음대로 써도 되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요수에게 속고 난 것을 안 뒤로 나는 신을 부르지도, 신의 힘을 써본 적도 없었다. 아직 내 안에 담겨 있는 것만을 느낄 뿐. 그것도 마지못해 여기에 계실 거란 생각에 나는 죄책감으로 무너져가는 중이었다.
두려웠다. 감히 신을 부르고, 그 신께서 나를 꾸중한 뒤에 홀연히 떠나실 것 같아서. 이제 더는 퇴치사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신께서 나를 버리실까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상반되는 내 두 가지 마음에 나도 질린 참이었다.
나는 대관절 어쩌고 싶은 것일까. 나는 앞마당을 떠나가는 스승의 뒷모습을 보면서 뛰는 가슴을 눌렀다. 악명 높은 수배자를 찾는 것처럼 생긴, 내 얼굴이 그려진 벽보를 보며 나는 스승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한가. 내가 그간 많이 지쳐서 나도 모르게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가. 마침 요수와 이렇고 저런 일을 벌여 그만둘 수 있다는 핑계도 좋았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처럼 어미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퇴치사가 되겠다는 나는 어디에 갔을까.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진정한 얼굴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다른 퇴치사를 보며. 어둡고 탁해진 내 열등감을 나는 그제야 직시했다.
나는 괜찮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괜찮다며 나 자신을 다독거려도 인정받고 싶고, 당당하게 내 본모습을 보이고 싶고, 여자임을 들킬까 걱정하는 하루하루 속에서 말라가는 나를 사람들 앞에 보이고 싶고. 하여 그 마음이 썩어가고 있었다. 곪을 대로 곪아 있었던 나의 마음은 요수를 만나고, 한 사내를 연모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잠시 잊는 듯했지만, 결국은 모든 마음은 배신당한 채로 내게 돌아와 짐이 되었다.
하여 이곳에 박혀 그 짐에 짓눌려 살고 있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도 모르는 채. 내가 퇴치 일을 그만두고 여기에 숨어 살면 다 잊고 살 수 있는 것처럼. 나약한 마음을 사내로 포장해서 지금껏 잘 눌러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잘살지 못한 모양이었다.
***
기다리던 밤이 깔리고, 아버지가 잠든 것을 본 후에야 나는 도둑괭이처럼 슬금슬금 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섰다. 골골거리며 모두가 잠이 든 밤에 나는 발소리. 일순 경쾌하게도 들릴 법하였다. 나는 설렘 반, 두려움 반.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걸었다. 나를 지켜보는 둥근 보름달을 향해 잘 봐달라며 아양을 떨 듯 미소를 지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영험한 무녀의 사당을 꼽자면, 그 옛날 문어처럼 생긴 바다의 요수로부터 이 마을을 지켰다는 무녀가 두고 간 신, 그 신 하나를 모셔둔 신당이 가장 유명했다.
무녀의 신 한쪽은 요수가 삼켰고, 나머지 한쪽은 무녀가 자신의 힘을 담아서 이 신당에 모셔두었다고 들었다. 이 근방에서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무언가를 간절히 빌 일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이 신당에 들를 정도로. 나도 어릴 적부터 부모가 아프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밀과를 바치며 빌곤 했었다.
그 밤에 신당에 들어선 나는 그 어릴 적의 마음과 똑같았다. 낡지만 아직도 무언가 요요한 기운을 내뿜는 신 앞에서, 그 앞에 놓인 촛대에 불을 밝히고 두 손을 가만히 모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온 마음을 다해서 무녀에게 존경함을 표한 뒤, 천천히,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열었다.
“언젠가 제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사내처럼 글을 배우고 쓰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을. 혹 기억하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열린 신당의 문으로 차가운 밤바람만이 불어올 뿐이었다.
“그 소원 때문에 제게 신을 주신 것은 아닐지. 혹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신을 보낸 것인지 저는 알 길이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을 깨달았는데.”
나는 두 눈을 뜨고 고요히 빛나고 있는 신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한 번도 고맙다고 한 일이 없던 것 같습니다.”
내내 걸렸던 것이었다. 한 번은 찾아가야지. 두 번은 찾아가야지. 하다가 매번 밤늦게 도둑처럼 들러 아버지만 보고 가느라 이곳에 들를 시간이 없었다. 스승께서 정신을 차리라, 채비를 하라 한 것. 내가 먼 길을 떠날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나는 그간 미루었던 일을 했다.
“그래.”
그간 나는 신께서 내게 질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혹 양기석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시고도, 내게 별다른 말을 하시지 않은 줄 알았다. 양기석이 그러나 말거나. 이 그릇은 볼품없고 요수에게 빠져 허둥거리니 차라리 이러다가 죽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나를 그대로 방관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으니. 하여 나는 무언가 두려워 신을 부르지도, 신께 묻지도 않고 있었다.
하나 신은 딱히 별다른 말 없이 아직까지 내 가슴에서 뛰고 계셨다. 고개를 쳐들고 마주 보아야 할 때다. 도망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나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올렸다.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쉬고 갈라졌다.
[그곳에 잘 계십니까.]동굴에 울리듯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가 마음에 닿고, 느지막이 깨어난 따듯한 기운이 답신을 보냈다.
유일하게 내가 여인이니 사내이니 묻지 않으신 분. 사내도 있을 텐데 왜 내게 깃드셨는지. 가끔은 안타깝다가도 고맙다가도 원망스럽다가도. 그러다가도 나는 신께서 내게 깃든 것이 운이고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신을 외면하는 것은, 신의 입장으로 보나 내 입장으로 보나 우습지 아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제가 싫지 않으십니까? 요수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싫지 않은데.]예상치 못한 신의 답변에 나는 잠시 마음이 흐트러졌었다. 미약한 기쁨. 피어오르는 의구심. 나는 재차 가슴을 두드리며 물었다.
[한데 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는지요. 아무리 신께서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하셨다고 하셔도… 분명히 수상한 점을 눈치챌 법도 하셨을 텐데.]내 투정 어린 목소리에 신께서 맑게 웃으셨다.
[나는 네게 깃들어 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가 아니냐. 자경아.] [제 마음이요.] [네가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데. 내가 나서서 죽이라고 종용할 수 없는 것. 알고 있지 않아.]신은 그저 지켜보는 자이기 때문에. 도움은 구해도 나를 강제하라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길을 밝혀줄 뿐, 그 길로 나아가라 말하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면 제게 실망하셨겠습니다.] [마음을 뺏기는 일을 누가 막아설 수 있을까.]의외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믿기지 않아 날숨처럼 답했다.
[이해…하신다는 뜻입니까?] [넌 사람이니까.]그것은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신은 신이고 나는 사람이었다. 하고 많은 말 중의 이해한다는 들을 줄은 몰랐다. 신께서는 흔쾌히 내게 말했다. 사람만큼 번민이 많은 종은 없다고. 나를 다독이는 듯이 가슴을 따듯하게 덥히셨다. 나는 긴장이 풀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신께서 내게 말했다.
[너뿐만 아니라, 그 요수도 막을 수 없었을 터다.] [예……?]갑자기 세찬 바람이 들이닥쳤다. 바싹 다다른 바람이었다. 탁하고 차가웠다. 바람은 내가 켜놓은 촛불을 끄고, 신물인 무녀의 신까지 흔들었다. 방울이 조잡하게 흔들리며 울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신물이 떨어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뻗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때 허리에 손이 감겼다. 따스한 숨결이 내 귓가에 쑤욱 내뿜어졌다. 따스하다기보단 화가 나 내뿜는 것 같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내 뒤에 기척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멎었다. 한데도 내 뒤에 기척은 그대로였다. 숨을 내쉬는 것까지 그대로 느껴진다. 상대는 숨길 생각이 없으며, 나는 그러한 상대의 냄새나 숨결을 두루두루 기억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상대는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줬다. 당겨진다. 그의 품에 넋을 빼놓고 안기고 말았다.
“내가 온 것을 알잖아?”
그가 돌아올 줄 몰랐다. 내 어깨에 자신의 코를 문지르며, 나지막이 말한 그 목소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가능한 딱딱한 껍데기를 만들어놓았다. 적어도 그를 떼어놓을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한.
“놓아라.”
“싫은데.”
나는 그의 팔을 두들기며 내려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꽉 껴안을 뿐이었다. 그의 품에서 바둥거리는 내 꼴이 우스웠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나는 신의 힘을 발휘하려고 했다.
“놓지 않으면 너에게 힘을 가할 것이다.”
“야박하네.”
“셋 셀 동안 놓아.”
“아. 늦게 왔다고 내게 투정 부리는 거야?”
“…뭐?”
어이가 없어 내가 고개를 뒤로하자, 웃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렇잖아. 온종일 누워 내 생각만 했으면서.”
험한 욕설이 나올 것 같았다. 그를 피해 얼굴을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하면 진짜였다. 그간 내가 감지한 기운이 모두 양기석의 것이란 소리였다. 그는 정말로 내 곁을 빙빙 맴돌며 감시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가 그럴 이유가 무언가.
“나를 죽이러 왔나.”
“자경이를, 내가?”
“하면. 네가 나를 지켜볼 이유가 무어야.”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애정이 물러나 차갑게 식어가는 두 눈. 가슴 안쪽 생채기가 덧났다. 한 번도 무심하게 나를 본 적이 없는 눈인데. 따스하다 못해 그 더운 여름보다 더 덥게 느껴진 눈이었는데. 쓸모없다고, 소용없다고. 저런 눈을 망설임 없이 보내는구나 싶었다.
“그자가 네 스승이지.”
한데 요수는 영 내가 물은 것과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자와 어디를 가려고?”
“그건 네가 알아 무엇 하게.”
요수의 잘난 입술이 더는 떠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능멸하듯 입술을 내려 뺨에 살짝 맞대고, 그립다는 듯 귓불에 제 턱을 부드럽게 문댔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 다 들킨 마당에, 제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룬 마당에. 대체 내 마음을 흔들어 무엇 하려고. 이렇게 해서 그가 얻는 게 무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가닥을 잡았다.
“내 신을 잡아먹으려고 왔구나.”
그는 퇴치사들이 품은 신을 뽑아내, 제 수하에게 먹이던 자였다. 분명 거대한 요수임이 분명하다. 하여 내 신을 놓아준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술법이 있을까. 다 제쳐놓고 먹힐 만한 것이 있을까. 고민하는데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자와 밀월이라도 떠나기로 하였어? 내가 묻는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딴말을 하네.”
나는 그의 손을 풀고자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한 지 오래. 다 체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딴말을 하고 있는 건 너겠지.”
“네 스승이라는 자. 이 근처에서 묵고 있던데.”
“왜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지…….”
“둘이 만나 무얼 하려 그럴까. 다정하게 어깨까지 어루만져주면서 눈빛을 보내고… 그다음은 무얼까.”
나는 점차 어두워지는 요수의 눈을 보다가 일을 저질렀다. 서러운 마음에 나간 손이 그의 뺨을 덮었다.
“왜 이러는 것이냐. 대체.”
속이 상했다. 이리 모질게 굴 이유가 더는 없는데. 그가 나한테 이럴 까닭이 없는데. 분노도 쓸모없었다. 죽여주었으면 하는 한심한 사람이 나니까. 하나 이제 체념한 후였다. 연모의 마음이고 무엇이고. 아버지 때문에 죽지도 못할 이 삶을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있는데. 자꾸만 이리 나타나면 착각하게 되고 설레게 되고, 종내에는 겨우 식은 그 마음에 다시 불씨를 지핀다.
활활 타올라 나를 삼킬 마음이었다. 싹을 밟고 밟아도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나 나를 넝쿨째 감고, 결국에는 저 바다 밑바닥에 던져 수장시킬 마음이었다. 이 위험하고 저어해야 하는 마음을 자꾸 들쑤시는 것, 하여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이 요수의 목적이겠지마는. 나는 풍파될 것 같은 이 마음을 수리할 기운이 없었다.
“그만해. 이제 내게서 더 얻을 것이 없잖아.”
“얻을 것?”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재밌어서 그래? 그래서…….”
젠장 맞게도 눈물이 흘렀다. 그의 손에 놀아난 것을 인정하자 먼지 앉지 않도록 닦던 추억이 기울어졌다. 꺾이고 마모되었다. 내 눈물샘을 찌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가온 그의 손길이 눈꺼풀 찌르는 머리칼을 치웠다. 그 다정하고 쌀쌀맞은 손길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나만 하지 싶었다. 여전히 끔찍해서, 여전히 연모의 정이 남은 것 같은 그 손길이. 하여 거칠게 얼굴을 돌리자, 따라오던 손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제발 사라져라.”
“내가 사라지길 바라?”
“내 손으로는 널… 봉인할 수 없으니까.”
내 마음이 도저히 거기까지 가질 않는다. 무릇 봉인이라 함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 강력하게 발휘되는 힘이건만. 그에게는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도 죽음까지 연결될 무언가가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분노를 덮어씌울 만큼 애틋한 그리움. 그리고 내 연모를 평생 전할 일 없어진 것에 대한 서글픔.
나는 그의 앞에서 적도 무엇도 아닌 약자일 뿐이었다. 하여 그가 요수지만, 사람을 해할지 모르는 요수지만, 이 땅에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 하여 나는 이 모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를 보는 게 끔찍이 괴로웠다.
“사라져. 제발.”
“자경아.”
“그리 부르지도 마.”
그는 숙이려는 나의 얼굴을 붙잡아 강하게 위로 끌어 올렸다. 억지로 고개가 들려졌다. 붉은 시선이 나와 충돌했다. 나를 부실 기세였다. 일렁대는 가슴이 절규했다. 더 마음을 뺏기면 안 된다. 제발.
“이럴 것 없어. 날 연모하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사라져.”
“내가 그리웠을 텐데. 날 속이려 들지 말고 마음껏 그리워해. 입술을 맞대도 좋고 안겨도 좋고. 것도 아니면… 품어줄까?”
“뭐……?”
“원하잖아. 내가 그리웠지? 잠을 자려 해도 잘 수 없고. 떠올리면 속이 타는 것 같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말이야. 응?”
요수의 눈은 반쯤 미친 것 같았다. 자신이 뱉은 말의 의미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게 달려들어 걸신들린 듯 입술을 부딪치고, 내 머리칼에 제 코를 묻고, 하다 하다 애무까지 하려는 품새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하지 마.”
요수는 말없이 돌아간 내 고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내 뺨을 살살 어루만진다.
“솔직해야지. 자경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메슥거리는 감정을 죄 용기에 몰아줬다. 그를 똑똑히 올려다보았다.
“널 또 보면. 이제 두 번 다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후회가 될 것 같다.”
“후회.”
“널 만난 것. 널 연모하게 된 것. 다 잊으려고 해. 한데 자꾸 나타나 내 마음을 농락하려고 든다면 내가 안고 살려 했던 그 모든 기억을 후회할 것 같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후련했다. 나의 뺨에 올려진 그의 손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잘 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갈하게 올려진 신물을 바라보다가,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직까지 서 있는 그를 지나쳐갔다. 그는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이 되살아났다. 그를 마지막으로 한번 보자는 마음이 우세하기 시작했다.
이제 가면 언제 보려나. 아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저 요수가 왜 찾아온 것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 찾아올 것 같지 않으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요수가 내게 기웃거릴 일이 무어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보자. 딱 한 번만.
“자경아.”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 신당을 다 빠져나간 내 걸음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후회하지 말고.”
그를 마지막으로 보자던 마음이 죽고 없어졌다. 느른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화를 담고 있었다. 내가 제 유혹에 넘어가지 않자, 제 손바닥 위에 올라가 춤을 춰야 하는데 빠져나가자, 그래서 저리 화가 난 것이었다. 그의 속셈을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농락하고도 연모한다고 말할 인간을 어디서 구할까.
“이제 더는 너 보러 안 와.”
달큼하게 나를 유혹하는 목소리. 그 말을 들은 내 손이 병증마냥 떨렸다. 제 말 하나에 엉망진창이 되는 것도 모르고. 나는 울음을 지웠다. 씩씩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굳었던 요수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그럼 그렇지. 이런 얼굴로. 내가 당연히 돌아볼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는 팔을 뻗고서 제게 안기라는 듯 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마저 하려던 말을 했다.
“이름이 정말 양기석인가?”
요수는 그걸 물을 줄 몰랐다는 얼굴로 갸웃거리다가, 씨익 입매를 올리며 웃었다.
“응.”
“내게 어머니에 관해 말한 것. 그것도 거짓이었나?”
“궁금해?”
“그래.”
“이리 와 안기면 알려줄게.”
“양기석.”
그는 내가 제 이름을 부르자 놀란 것인지 기분 나쁜 것인지. 묘한 표정으로 내 입술을 바라봤다.
“어디서든 잘 살겠지만. 내 귀에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건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그의 얼굴이 다시 굳어져 갔다.
“그때는 너를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
“잘 살아. 말 안 해도 그렇겠지만.”
그 뒤로는 어떻게 그곳을 뛰쳐나왔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그는 쫓아오지 않을 게 분명한데. 나는 그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계속 뒤를 힐끔거리며 걷다가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에 가슴이 뛰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까 확인하고픈 심정이었다.
내 불합리한 마음이었다. 욕망을 이기지 못해 혹여 그를 다시 찾아가게 될까. 나는 내 발을 집이 아니라 스승이 계신 약방 영감의 집으로 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이라면 나를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막아줄 것 같아서. 자꾸만 기울어지려는 내 마음을 스승은 막아줄 것 같아서.
하나 나는 약방 영감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후회하고 말았다. 막 잠에 들어 계실 터인데. 다 큰 제자가 무섭다고 찾아오면, 안 그래도 심란한 스승의 마음에 똥물을 끼얹는 꼴 아닌가. 나는 침울한 걸음을 돌리기 위해 발을 떼었는데. 그때 기다린 듯 약방 영감 집의 문이 열렸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뭣 하러 서성이고 있어.”
웬만하면 울지 않으려고 했다. 스승의 앞에서는 더욱. 스승은 어찌 됐건 처음에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니까. 그 뒤에 받아준 것도 내 억지 아닌 억지로 받아준 것이고, 일단 들였으니 가르치기는 했으나, 나는 못 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 있었다. 버려질 것이란 불안에 저몄었다. 남들보다 빨리. 남들보다 강하게. 남들보다 용기 있게.
스승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스승이 원래 칭찬에 인색하다고 했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한 무언가를 버릴 수 없었다. 내가 여인이라 못마땅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한데 오늘은 눈물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인데. 나는 마치 오랜만에 방문한 것처럼 달려들어 스승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엉엉 우는 내 등을 스승은 어설픈 손길로 쓸어 달래주었고, 따듯하게 어루만져주며 방문을 닫았다.
“나도 요수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말해 준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새끼를 지키고자 스승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한 요수에 대해. 요수는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울면서 스승의 앞에서 빌었는데.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놓아주었다고. 한데 그 모습으로 또 나타나 스승에게 은혜를 갚고자 음식을 가져다주었는데, 스승은 그때 처음으로 요수라는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정을 느꼈다고 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정에 약하니까. 스승은 그날 밤 우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차차 감정이 잦아들며, 의심 없이 그 요수를 잊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간 내 미련으로 잡아놓은, 상냥한 추억이라고 한 것까지 모조리 도려내야 함을. 사람은 정에 약하니까. 이런 식으로 한 번 두 번 사골 우려내듯이 기억하다 보면 언젠가 그에 대한 그리움에 떠밀려 나도 모르게 찾아 헤매고 있을 테니까.
“더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
스승은 그렇게만 말할 뿐, 날 책망하거나 올바른 길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세월이 해결해 줄 것이라면서 나를 다독였다. 그 밤에 스승의 목소리는 그게 다였다.
***
내가 이 마을에 잠적해 있는 동안, 수하라의 지주께서 애타게 나를 찾는 바람에 내 얼굴이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 하여 높으신 분들께서도 종종 나를 찾곤 하는 탓에 스승은 혹여 내가 남장을 하고 다닌 것이 알려질까 했으나,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내가 부호들을 맡은 적은 별로 없고, 맡는다 하더라도 말을 별로 하지 않았기에 설마 나인가 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천만다행이지.”
약방 영감이 차려준 조반상을 받으며 스승은 내게 너도 앉으라고 말했다. 밥상을 나르던 약방 영감은 이 아이가 대체 왜 여기에 있나 싶은 얼굴이었는데, 스승은 별다른 설명 없이 약방 영감에게 그리 말했다.
“내 제자일세.”
“예?!”
약방 영감은 내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늙어, 이제는 눈이 침침해 약을 제조하는 일도 제 아들에게 내맡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여러 번 깜빡이며 나를 보더니, 큰 소식을 물었다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딱 보아도 마을에 소문을 퍼트리러 가는 모양새에, 내가 밥술 뜨던 숟가락을 놓고 스승을 재촉했다.
“저러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는 건 일도 아닙니다.”
“내가 다 생각해둔 바가 있어서 그러하니까 너는 잔말 말고 고깃국이나 많이 먹어둬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밥술을 떴으나, 채 입안에 넣기도 전에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족히 열 명은 모여 와글와글 떠드는 모양새였다.
“자경아.”
“예.”
“넌 앞으로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퇴치사가 될 게다.”
“예?”
“이 길로 일어나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요 뒷산에 내가 준비시켜둔 자그마한 초가집이 하나 있을 게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스승의 눈은 진지했다. 스승은 먹던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수하라 지주가 얼마나 대부호인 줄은 알지?”
“압니다.”
“한데 그자가 자리를 눕게 한 사특한 요괴를, 지나가던 한 여인이 들러 물리치고 홀연히 떠나갔다 그거야.”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 아닐 게 뭐란 말이야. 넌 여인이고. 물리치고 홀연히 떠난 것도 맞는 소리인데.”
그걸 그리 해석하자면 못할 것도 없으나 나는 영 석연치 않았다.
“이대로 뒷산에서 잘 숨어 거기서 마음 수련이나 하고 있어라. 내가 생각해둔 바가 다 있으니까.”
“생각만 하지 마시고 얘기를 해 주십쇼. 나중에 놀라자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넌 지금까지 거기서 홀로 세상을 등지고 수련하고 있던 한 신비로운 여인. 한데 어느 날 수하라 쪽에서 안 좋은 기운이 풍겨 가보니. 이게 웬걸. 지주는 쓰러져 있고…….”
“스승님.”
스승은 기가 찬다는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더욱 들이밀었다.
“잔말 말고 따라라. 이거 아니고서 네가 여인입네 하고 퇴치 일할 기회가 또 있는 줄 알아?”
“하오나.”
“하오나건 저오나건. 솔직히 네가 뒷산에만 묻혀있단 소리만 약간 변형한 것이지. 송덕 뒷산에 묻혀 수련하며 요수 퇴치하고 다닌 세월 하며. 또 수하라에서 안 좋은 소식이 있어서 찾아간 것도 맞는 소리이고. 극적으로 변했을 뿐이지 좌우지간 다 맞는 소리 아니냐.”
스승은 이 나라에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며 큰소리를 치고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네 스승 자리에서도 물러서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스승의 등쌀에 떠밀려 약방 영감에 마당에 떨구어졌고, 옹기종기 그 앞에 모여 나를 힐끔대는 사람들의 눈치에 또 골치가 아렸다.
“얘, 어부네 아야.”
언제적 어부란 말인가. 아버지가 은퇴한 지 한참인데도 나는 아직 어부댁 딸이었다. 나는 그 아낙을 천천히 돌아보았으나, 내 눈길 한 번에 수십 명의 인파가 달려들었다.
“네 그 무녀가 이제 되는 거냐?”
“하면 저 바다에 그 요수도 네가 때려잡으려고?”
“그래. 잘 됐다. 안 그래도 찜찜하니 속이 텁텁한 것이…….”
나는 달라붙는 팔들을 떼어놓고 황급히 집으로 뛰어갔으나, 이미 저기 우리 집 담장이 보일 때부터 예상은 했었다. 그 앞에도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우리 아버지를 된통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 아버지의 팔에 달라붙은 사람들을 떼어놓았으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친분을 내세우며 별의별 소리를 다 하고 있었다. 죽은 아들의 영혼을 달래어 달라, 옆 마을에 요수가 나타났다는 데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자경이가 무녀가 되니 엽전도 많이 벌 것인데 조금만 꿔 달라. 아주 난리가 법석인지라 나는 스승이 약간 원망스러웠다. 조용조용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을.
하나 스승은 아주 계획적이었다. 겨우 사람들을 떨어트리고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설명 드리려는 찰나, 스승이 찾아와 아버지를 송덕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선포했다. 아버지는 날벼락이 떨어진 입장이었으나, 스승은 내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말로만 이 마을 떠나겠다고 한 게 몇 번이냐. 아버지 모셔 내륙에 좋은 집 지어 살게 해드리고 싶다더니. 엽전도 모을 만치 모았더만. 왜 이리 통이 작은 것이냐?”
하며 나를 꾸짖으니 나도 별다른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스승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기에 평생을 처박혀 궁상맞게 살았을 거라며 혀를 차고선, 아버지께는 공손한 목소리로 대강 짐만 꾸려서 떠날 채비를 하시라 일렀다.
“너는 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열심히 닦고 있어. 신께 송구한 만큼 열심히. 알겠느냐?”
그 길로 우리는 빚쟁이에게 쫓기듯이 오밤중에 일을 치렀다. 스승은 말을 구해 간단히 꾸린 짐을 메고, 아버지와 송덕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인질이라며, 혹여 네가 스승을 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에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무얼 해야 좋을지 몰라 헤매던 게 엊그제인데. 불에 콩을 볶아먹듯이 나는 황급하게 고향을 떠나고 있었다. 한데 울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예전 그때처럼. 속이 후련한, 드디어 발에 묶인 무언가를 풀고 떠나는 기분.
그에 대한 감정까지 한결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
스승은 말은 매섭게 ‘여기서 팔자 좋게 먹고 늘어질 생각 말고 이참에 마음을 닦는다 생각하라.’ 그러하니 먹는 것, 입는 것, 그 모든 것은 내 손으로 해결하라고 무섭게 말하였으나, 막상 도착한 초가집은 겉으로는 낡았으나 바람 한 점 들어오는 곳이 없었고, 쌀독도 두둑하며, 텃밭에 난 푸성귀들도 골고루 자라는 중이었다. 배를 곯는 일은 어찌 됐건 없는 와중에, 방을 데울 땔감도 넉넉하니, 이것은 수련이 아니라 휴식이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다만 먹먹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시냇가 하나만을 앞에 두고서 사는 이곳은 오전에 잠깐 산책 삼아 텃밭을 가꾸고, 혹여나 땔감이 모자랄까 잔가지를 줍고 다니면 금방 해가 지고 나니. 저녁 밥 지으랴. 스승의 말대로 물을 떠놓고 신께 기도를 드리랴. 하루가 금방 동이 나고 없었다.
처음 일주일은 마음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것 같고, 그간 불안하고 불편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추세에 기뻤으나, 간악한 것이 또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매일 텃밭에 난 것들로만 뜯어다가 삶아 먹고 비벼 먹고 하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기도도 한두 번이지 자기 전까지 할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은 내게 지루함의 극치를 주었다.
하여 스승의 당부고 나발이고. 일주일 동안 순결하게 살아온 나는 손으로 장날을 계산해 보고 산을 내려갈 준비를 했다. 옷도 시냇가에서 직접 빨고 말리는 통에 몇 개 남은 것도 없었고, 하여 내려가서 고기와 천을 조금 끊어 온 다음, 필요한 의복은 바느질하여 대강 만들고, 고기는 아껴두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있다면 생선도 사고.
사실 옷은 지어다 입으면 편하고 좋지만 어차피 스승이 언제쯤 부를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할 일은 만들어내면 만들어낼수록 좋았다. 심심하다가 못해 기어 다니는 지렁이랑 말을 할 정도니. 달이 넘어가면 분명 누구라도 붙들고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할 것이 뻔했다.
물론 스승이 한 번은 찾아오리라 얘기를 하긴 했어도 그게 언제인지 알 수도 없고. 가끔씩 스승 몰래 이렇게 장이라도 내려갔다 오며 서책도 구해 오고, 사람도 만나고 하면서 정신을 환기 시킬 작정이었다.
한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흐릿한 하늘이 심상치가 않더니. 산을 중턱쯤 내려가자, 눈앞을 가릴 정도의 장대비가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엽전도 챙겨 넣고 머리도 살짝 빗어 넘겨 사람 꼴은 그럭저럭 갖추고 내려간 것인데. 이대로 가면 장날에 빌어먹으려고 내려온 거지꼴을 면치 못하게 생겼다.
하는 수 없이 징 하게 내리는 비를 피해 다급히 산으로 올라가는데.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해서 죽을 고비를 넘길 듯 말 듯, 짚으로 덮은 지붕이 안쓰럽게 젖어 있는 내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고기는커녕 오늘은 풀죽을 진하게 끓여서 먹어야 할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툇마루에 무릎을 꿇고 옷감의 물기를 짜는 그때. 낯선 숨결이 내 한숨과 동시에 흘러나왔다.
“가여워라.”
초가집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입으로는 가엽다고 하나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하여 나는 젖은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더는 보지 않겠다고, 저쪽도 그리 말했으니 나도 마음을 확실히 끊어야 할 것 같아 어찌나 기도에 매달렸는지. 나는 온갖 상상을 다 했다. 저자가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는 상상도 해 보았고, 나의 어머니를 죽였던 그 요수와 다를 바 없는 놈이라는 것을 수백 번 상기하고, 정 안 되겠으면 신께 말해 나를 강제로 재워달라고 부탁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저 수상스러운 요수에게 간단히 헤벌쭉 할 수는 없었다. 꺼트릴 수 없는 화도 났다. 저 요수가 무얼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나를 농락하려는 것인지. 죽이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니다. 마지막 경우는 나의 욕심이 빚어내고 있는 그릇된 희망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삼키고 빗속에 있는 그를 뒤로한 채 문고리를 잡았다.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저 요수에게 말을 걸면 걸수록 마음속에서 이상이 되살아나 나를 짓밟는데. 나는 그 발길질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약자였다.
“나를 여기에 두고 가게?”
잠깐 멈칫했지만 찰나였다. 나는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안에 들어가, 그 얇은 문풍지가 성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심했다. 일단 눈에 보이질 않으니 마음이 많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보이질 않길 원했다. 무엇보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비록 나를 속였을지라도. 그가 내게 준 추억이 손댈 수 없을 만큼 보배로운 것은 속일 수 없는 진실이니까.
적어도 그때의 그를 보아서라도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잘 살기를. 어떤 무녀나 퇴치사와 대립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 세상에서 살기를. 그리 빌었던 것 같다.
나는 초라하게 불이 꺼진 촛대와 떠다 놓은 물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빈 것이 고작 그런 것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초가집이 낡은 것은 낡은 것인지. 비는 들이차지 않으면서도 바깥에 바람의 소리나 빗줄기의 소리 같은 것은 전혀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얇은 흙벽에게 무엇을 바라겠느냐마는.
이 빗소리가 굵어지고 길어질수록 나는 나무 밑에 서 있는 한 요수를 생각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매정하게 매몰차게 벗어던지고자 했는데. 혹여 밖에 나가서 있을 때 그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어떡하지. 이 추운, 가을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 오는 비를 맞고서 서 있으면 어떡할까. 그런 아픈 가정으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확인할까. 아니다. 확인하고 없으면 그 허전함에 산을 돌아다닐 것 같았고. 만약 있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였다. 이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도 비에 다 사라지고 먹힌 지금이라면, 그의 젖은 모습을 모른 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이 되었든 한 번은 확인해야 되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힘없이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하며, 어찌나 바깥에 그가 있을지를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리 마음고생을 하건 말건. 그가 있건 말건. 더는 질질 끄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를 오래 생각할수록 지워야 하는 시간은 늘어갈 뿐이고, 또 그가 서 있다고 해서 내가 온정을 베풀 위치도 아닌 것이었다. 모른 체하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 씻겨 주고 재워주랴.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문을 밀어젖혔다.
비가 더 거세졌다.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것인지 이제는 코앞에 새가 날아다녀도 모를 정도였다. 한데도 내 눈에는 나무 밑에서 젖어가고 있는 요수가 확실히 보였다. 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님에도 저 이목구비나 어깨선, 짚고 선 자세는 얼마나 잘 보이는지 모른다.
“가.”
그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했다는 것을 요수는 모를 것이다. 요수는 표정이 없다가, 내 입술이 열리고 나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야 해?”
“뭐?”
“내가 가길 원치 않으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당장 반박해야 하는데. 내가 고르고 고른 말을 꺼내기 위해 숨을 들이쉰 순간. 빗줄기를 뚫고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하고 말았다. 이 깊은 산속에 내가 도망갈 곳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기를 원해?”
나는 망설임 없이 걸어와 지붕 밑에 들어올락 말락 하는 그를 바라봤다. 참 아름다운 요수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기에 좋을 정도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거짓말.”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 말에 요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가 굳어진 채로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안 믿기는데.”
“그건 네 문제니까 더는 내게…….”
“안 믿긴다고.”
나는 그의 손을 쳐내려고 어깨를 흔들었으나, 요수는 한층 더 내게 달라붙었다.
“여기서 그자를 기다리는 거야? 요조하게?”
“그자?”
스승을 말하는 것을 눈치챈 나는 상황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웃을 뻔했다. 스승은 딱 보아도 불혹을 넘긴 것처럼 보이는데, 대체 나와 엮을 것이 무엇이 있어서 자꾸 엮는단 말인가. 한데 요수의 눈에는 인간은 다 같은 나이로 보는 것인지. 그는 말끝마다 스승을 찾아 부르고 있었다.
“날 연모한다고 한 게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아?”
“정확히는. 연모했었던 것이지.”
요수는 초조한 눈빛으로 입안을 훑다가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못 믿겠는데.”
“너. 같은 말을 듣는 게 좋아서 이러는 건가?”
“하룻밤만 같이 보내.”
“뭐?”
“궁금해서. 궁금하니까.”
“…….”
“정말 저버렸을까? 그 마음이. 너도 궁금하지 않아?”
요수가 몸을 가까이 붙이고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생각할 사이도 없이 요수의 입술이 내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게 조금 빨고서는, 다시 내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긴 요수가 갑자기 내 몸을 안아 들고 발로 문을 밀쳤다.
“너……!”
순식간이었다. 내가 무어라고 말할 사이도 주지 않고, 요수는 혀를 내 입에서 굴리며 빨고 핥고 난리를 피웠다. 내가 그 정신없는 입맞춤에 같이 정신이 없어지는 틈에, 저고리에 손을 가져다 댄 요수를 겨우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 마.”
“왜……?”
요수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그는 처연하게 내 가슴에 얼굴을 붙여왔다. 살짝 비비대고, 다시 올려다보고. 가여운 강아지가 비를 피하기 위해 몸을 치대는 것처럼. 거부하는 사람이 더 미안해지게 만드는 그 꼬락서니에 나는 이를 물었다. 독하게, 더 독하게 나가야 했다.
“네가 내게 말해 준 것. 태반이 거짓 아니었던가? 어떻게 내가 하룻밤이라는 말을 믿지?”
“손이라도 자를게.”
“뭐?”
“지금 원해?”
그의 왼팔이 망설임 없이 오른팔로 향했다. 설마 진짜 그렇게까지 할까 싶어 두고 보자 했는데. 그의 왼손에 팔이 꺾어지고 있었다. 나는 저절로 몸이 튕겨 나가듯 그의 손을 붙들었다. 사정하고 빌듯이 말했다.
“그만해.”
“하라며.”
“내가 언제 그리했어.”
속이 답답해서 머리를 짚고 있는데. 문득 그의 젖은 어깨나 머리칼이 보였다. 저대로 두기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제 말려서 개어 둔 윗도리를 발견하고 손을 뻗어 집었다.
“가만히 있어.”
그의 젖은 머리칼에 그것을 성의 없이 문질렀다. 물기가 많이 묻어나오는 와중, 가만히 손길을 받던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배가 있는 부근에 슬그머니 뺨을 문지른다. 아무리 봐도 비에 젖은 강아지였다. 나는 나오려는 웃음을 눌렀다. 그의 물기를 닦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이것 봐.”
바깥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 시끄러운 빗소리를 뚫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조용히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무엇을.”
“넌 나를 연모해.”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도 딱히 답을 바란 것 같지 않고. 나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에 집중하며, 이 빗소리에 내 시끄러운 속마음을 숨겼다. 그 부드러운 머리칼에 손을 넣고 쓸어 만질 때마다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며칠 산속에 혼자 있었다고. 또 마음이 외로웠다고. 요수가 주는, 누군가 내게 전해 주는 온기가 좋았다.
이 작은 방이 꽉 차도록 그는 엎드려 누워 내게 기대고 있었다. 머리칼을 조금 쓰다듬어주었을 뿐인데 그는 금세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잠든 척하는 것인가 싶어 오래 바라보았는데.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깊게 잠들었는지 내가 그의 눈썹을 엄지로 쓸어 만져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이용하기 위해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일 텐데. 왜 난 지금의 그가 그때의 그와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덜 데여서 그러한가. 삶아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살짝 데여서. 아직 고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지 못해서.
나는 그의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숨소리를 듣다가, 의도치 않게, 정말로 무의식에서 나온 몸짓으로 얼굴을 내렸다. 나도 모르게 그 숨소리에 집중하다가 끌려간 것이었다. 그러다가 입술이 맞닿았다. 아주 부드럽고 따듯한 입술에.
“자경아.”
입술이 닿았다는 것을 깨닫고 떨어지려는 찰나. 그가 눈을 뜨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도 젖었고 그도 젖었고. 서로 옷을 입은 것이 무의미한 상황에. 그가 내 윗도리를 뒤로 넘기며 거칠게 벗기고, 내가 그의 젖은 겉옷을 밀어내듯이 벗기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였다. 기억이 끊긴 것은.
이후에 일어난 일은 전부 들짐승 같은 마음이 저지른 것이었다. 머리는 사라지고 가슴만 남았다. 그가 젖가슴을 아이 같이 빠는 모습을 보고 밑이 젖었고, 그는 악하게 웃으며 내 치마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속곳이 내려갔다.
“아……!”
그는 여유가 없었다. 항시 나를 굴리고 울리다가 느긋하게 들어온 지난 정사들과 확연히 달랐다. 양물이 음부를 젖히면서 들어올 때부터 탁한 액을 뱉고 있었고, 움푹하게 끝까지 집어넣을 때는 그가 내 어깨에 무너지며 신음을 흘렸다.
“하… 아…….”
그 목소리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찾아 달큼하게 빨았다. 물기에 젖은 서로의 머리카락이 엮였다가 풀어지고. 그사이에 그는 양물을 빼내었다가 음부에 거칠게 비비면서 다시 들어오고. 혀를 살짝 내밀고 정사에 몰두하는 요수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의 머리칼을 넘겨주고 그 얼굴을 자세히 보려 했으나, 그는 내가 만지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피하고 있었다.
“아, 으응… 왜…….”
“싫어.”
그러는 그는 정작 나를 뒤로 돌려, 내 등에 무수한 입맞춤을 내리고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양물에 푹 박힌 나는 몸을 떨다가 그에게 양팔이 붙잡히고 말았다.
“만지지 마.”
“뭐……?”
분명 우리는 서로를 갈구했다. 눈길이 스치고 몸이 스치고 서로의 입맞춤을 바라고. 한데 그는 내 몸을 제 것처럼 만지면서, 정작 나는 만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나는 서운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애썼다.
“만지면, 하으… 안 돼?”
“안 돼.”
“왜… 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양물을 깊숙이 집어넣고 허리를 살짝살짝 움직이며, 속살을 못살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더 가져야 해… 네가 만지면, 하아… 느긋하지 못하니까.”
그 말을 들으니 묘한 반항심이 생긴 것은 왜일까. 내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을 살금살금 만지고 놀았다. 처음에는 내 의도를 몰라 허리를 느긋이 움직이던 그가 갑자기 눈빛이 돌변해 이를 드러냈다.
“그만해.”
그럴수록 더 하고 싶었다. 저 빨간 눈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왜 그렇게 좋을까. 그의 손가락을 붙잡고 혀를 내밀면서 핥는 시늉을 하자, 그가 거칠게 잡아둔 손목을 흔들었다.
“하지 말라니까?”
“기석아.”
그렇게 한 번만 불러 달라고 했었는데. 마지막에 떠날 때까지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게 한이었다. 그는 진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정말 그의 이름을 한 번 불러줄 것을. 나는 그의 뺨을 붙잡고 싶어서,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경아…….”
그가 달려들었다. 내 목을 휘감고 넘어뜨려, 내 위에 덮치듯 올라섰다. 푹푹푹. 정신을 잃고 날뛰는 그의 양물은 끝까지 가지 않고도 금방 빠져, 다시 차고 올라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계속 혼잣말을 하다가,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리면 내 귓불을 물거나 목덜미를 물었다.
“아, 응, 아아! 아!”
그가 내 뺨에 입술을 붙인 채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더 끝까지. 속살이 따라서 밀려 나가듯 하다가 그의 양물에 묻은 축축한 것들과 함께 다시 맞아 들며 갈라진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양물을 맞이한 속살은 물을 끊임없이 보내고, 그의 양물이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딸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두 번. 세 번. 꽂아 들어오는 양물을 맞이하다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기어가듯이 앞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그는 따라붙으며 양물을 박고 올라왔다.
“하지 말랬잖아. 하지 말랬어.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혀를 내밀어서. 내 좆 핥아주는 것처럼, 그렇게.”
그는 갑자기 내 입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신음을 내기 바빴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핥고 깨물다가, 그가 소리치듯 내 귓가에 뱉는 말에 더욱 열성적으로 그것을 빨았다.
“매일 내 생각했지? 자기 전에. 젖은 밑에 내 생각하며 손가락을 넣었을 거야. 내가 그리웠을 텐데. 젖가슴 빨아 달라, 다리를 배배 꼬면서. 그 꼴로 내 꿈에 찾아와서 울더라고.”
“하, 아, 으읏, 아… 아!”
“내가, 안 미치고, 배겨?”
그가 푹 찌른 그 자세로 빼내지 않고 더 끝으로 파고들며 온 속살을 눌러댔다. 나는 그때쯤 벌벌 떨면서 울었고, 그는 그 순간을 노려 내 벌어진 입술에 제 혀를 넣었다.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다 빼앗겼다. 절정에 달은 몸을 아무리 뒤틀어도 그는 배려하지 않았고, 이윽고 밑을 채우는, 그의 양물이 싸질러대는 음란한 씨물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씨물을 내 속살에 펴 바르듯 천천히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나는 그 느린 자극에도 다리를 떨면서 울었는데, 그는 그것이 몹시 만족스러운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가 내키면 다시 푹 찌른 다음 허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나는 자지러지며 허리를 흔들고, 하면 다시 시작이었다.
밤이 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구름에 가린 해는 볕을 내주지 않았고, 나는 비가 내리는 이 초가집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는 채 요수와 내내 몸을 나누었다.
온몸이 허여멀걸 정도로 씨물이 잔뜩이었다. 그가 양물을 다급히 빼내서 내 입 안에 넣은 다음 흔들어 입 주위에도 시큼한 냄새가 났고, 그는 흐르는 씨물을 내 둔부나 젖가슴에 공들여 바르기도 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말없이 젖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양물을 박아 넣을 뿐이었다.
그 뒤로 그의 기이한 행동은 계속됐다. 그는 양물을 빼내고 잠시 휴식을 준 뒤, 절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떠는 내 몸을 방치해뒀다. 그는 굴러다니는 내 치마를 주워 다가 제 양물을 닦은 뒤, 재밌다는 얼굴로 그것을 내 음부에도 가져왔다.
“닦아주려고.”
하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음부를 벌려 제 양물이 흘린 씨물을 떨어트리게 한 후, 내가 그만한 자극에도 난리가 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에 빠졌다. 혀끝으로 음핵을 살짝 건드리면 내가 다리를 배배 꼬고, 아예 손가락을 음부에 박아 넣고 다리를 오므린 그 채로 두었다.
“움직여봐.”
그 한마디를 하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쾌락을 느끼고 싶어, 음부에 박힌 그의 손가락을 빼내고자 다리를 더 오므렸으나, 그는 그것을 노린 듯 손가락 끝만 살짝살짝 움직였다.
“하, 아……!”
“내 손 잡고 직접 씨물을 빼내.”
그의 요구는 황당한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으나, 그는 그러면 일생을 이렇게 있자고 말하면서 놀리듯 손을 또 움직이는 것이었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속살은 그의 손가락을 양물 대하듯 축축하게 감쌌고, 다리는 오므리면 오므릴수록 그를 깊숙한 안쪽으로 안내해 오히려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아… 아으읏…….”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약간 휘어지게 만들어, 무언가를 파내기 좋은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안쪽부터 살살 넣어, 속살에 잔뜩 쌓인 씨물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하, 아, 아… 안 돼, 응!”
그는 처음에는 얌전히 내가 그의 손을 이용해 씨물을 긁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조금씩 천천히, 그러다가 더 빠르게,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며 나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미칠 것 같다. 돌아버릴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울다가 그에게 애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빼, 빼내……! 어서, 아, 아으, 아!”
“입 맞춰주면.”
그리고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정신없이 그의 입가를 핥고 혀끼리 얽고서 난장을 피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약속을 어긴 것이다. 그는 더 푹푹 손가락을 깊숙한 곳에 찔러 긁어낸 다음, 내가 울먹이며 둔부를 들썩이자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더 거칠게 움직였다.
실신 직전이었다. 눈물을 매달고 그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내리쳤으나, 그는 벌을 내리는 스승처럼 손가락으로 나를 희롱할 뿐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을 것 같으면, 입맞춤을 그만두고 음핵으로 내려가 쭉 빨고, 다시 미칠듯한 자극에 내가 울면 손가락을 넣어 살살 간지럽혔다.
“아!”
그리고 다시 꼿꼿해진 양물을 받았다. 울면서 그의 어깨를 할퀴자 그는 좋아하며 내 양 뺨에 입술을 맞췄다. 그러다가 내가 도망가듯이 기어가면 다시 붙잡아 와 제 위로 올려 앉히고 마구잡이로 박은 다음, 장난하듯이 나를 풀어주었다. 하면 양물을 억지로 빼낸 내가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을 기어가고, 쫓아온 그는 웃으며 음부를 갈라 그 사이로 양물을 넣었다.
울다가 빌다가, 종내에는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는 내게 아름답다며 하다가도 스승과의 사이를 추궁했고,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오늘 잠은 없다고 협박하듯 소리쳤다. 나는 계속 반복해야 했다. 나는 스승과 아무 사이가 아니다. 연모했었던, 그런 감정과 비슷한 사내는 너 하나다.
지칠 대로 지쳐 내가 발음조차 되질 않자, 그는 시원한 물 한 동이를 떠와 내 입가에 흘려 넣어줬다. 그쯤부터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데도 밤이었다. 그는 내 젖가슴을 가볍게 빨다가, 또 동한 듯 나를 제대로 눕히고 있었다.
“아… 자경아, 내 부인. 아까처럼 허리 흔들어 봐. 응?”
결국 그 밤은 통째로 기억이 없었다. 지독하게 운 기억뿐. 날이 밝든 말든, 그건 그와 나에게 상관이 없는 현상인 것처럼.
***
비가 그쳤으니 날이 개야 할 텐데. 가을의 끝을 준비하는 날씨는 그럴 마음이 없는 듯 여전히 흐린 날을 보여줬다. 나는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그런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내 아래를 바라보다가. 또 그런 나를 제 무릎에 앉히고 있는 요수를 바라봤다.
“저녁은 사슴으로 할까?”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그 지독한 정사 이후에도. 그것은 그가 약속한 하룻밤을 훨씬 넘은 정사였지만, 나는 그걸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고, 이후에 그가 떠나지 않았음에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요수는 내 곁에 머무르며 내 점심이나 저녁거리를 어디선가 구해왔고. 적당히 먹이고 나면 이 초가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나를 안았다. 나는 속곳을 입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그가 벗겨놓은 이 몸 그대로 돌아다녔고, 또 막상 옷가지를 찾아서 입으려고 해도 그가 어디에 숨겨둔 것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안 돌아가?’
첫날밤이 가면 가지 않겠냐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는 알겠다고 웃으며 내 앞에서 팔 한쪽을 부숴버렸다. 이제 됐냐며 웃는 그의 얼굴에 나는 욕설을 내뱉었고,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며 하는 뻔뻔한 얼굴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안 그래도 없는 내 치마를 찢어다가 그의 팔을 동여맸다. 그는 금방 낫는다고 말했지만 동여맨 팔을 풀지는 않고 있었다. 떠나지도 않고 있었고. 나는 그 이후로 더는 묻고 있지 않다.
“저녁은 사슴으로 하냐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냉한 목소리를 낸 뒤 내 젖가슴을 움켜쥔다. 먹지 않으면 잠자리. 그렇게 은연중에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를 돌아보았다.
“기석아.”
그는 말없이 나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누가 보아도 다정한 그 몸짓에, 나는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죽이지 못한 이유. 끔찍하다던 인간에게 이렇게 입 맞추고 맞대고 있는 이유. 내 착각이라고 하고 싶지만 착각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여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그만 가.”
“다리를 부러뜨릴까? 왼 다리? 오른 다리?”
“네가 사지를 분지른다고 해도. 이제는 더 있을 수 없어.”
곧 스승이 올 것 같았다. 못해도 내 쌀독에 쌀이 떨어질 때 즘은 오시지 않으려나, 그리 마음먹은 게 엊그제인데 벌써 쌀독이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스승은 곧 올 것이다. 하면 그는 내 곁에 없는 요수여야 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가 내 턱을 잡아서 제게로 돌렸다. 그의 눈은 확신을, 입가는 기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 연모하고 있는 것을.”
나는 그의 확신에 찬 어조에서 그의 마음을 읽었다. 불안. 신경질. 약간의 설렘. 그가 계속 이리 말하는 이유는 내게서 듣고 싶기 때문이다. 저를 아직까지 연모한다는. 하나 이제 우리에게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일까.
“한데?”
요수의 입가에 미소가 썰물에 밀려 나가는 모래처럼 밀려 나갔다.
“그게 중요한가.”
그는 요수다. 사람을 잔인하게 가지고 노는 요수. 내가 수하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퇴치사들의 신을 빼먹고 놀며 힘을 키우고 있었고. 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경운이도 그의 곁에서 죽었다. 혹시나 그의 손에 죽었을까. 아니면 제 욕심에 죽었을까.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툭 까놓고 말하자면 그랬다. 경운이에게 미안함은 콩알만큼 작지만, 그 콩알은 몹시도 세기가 셌다. 내버려두면 가슴이 갈라질 게다.
나를 변장시키지 않고, 어엿한 퇴치사로 만들려는 스승도 있었다. 나를, 내 모든 걸 알고도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나를 구렁텅이에서 이끌어내 다시 잘 살게 하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또 어떻고. 내가 요수랑 붙어먹은 것을 알면. 네 어미를 죽인 것과 똑같은 것. 그게 요수가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그처럼 이 감정은 덧없다.
“널 연모해.”
요수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차오르는 찰나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한데 그것이 끝이야.”
“이해가… 안 가는데.”
“말 그대로야.”
나는 나를 끌어안고 있는 요수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너와 혼인할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내 연인이라고 당당히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없고. 이리 도둑처럼 만나 몸을 나누는 것. 그런 덧없는 연모밖에 나는 해 줄 것이 없다는 거다.”
나는 표정이 사라진 새하얀 요수의 뺨을 붙들었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요수는 목소리로 내지도 못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널 보면 괴로우니까.”
나는 천천히 그의 얼굴에서 손을 내려, 그의 어깨에 감싼 내 치마를 풀었다. 예상대로 다 나았다. 그처럼 강한 요수가 이따위 상처에 매여 있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
나는 곧장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그 낡고 찢어진 치마라도 매었다. 아무것도 없이 스승을 맞이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리고 그는 자존심이 센 요수다. 아니, 요수라는 종족이 원체 그러했다. 인간을 깔보고 무시하고. 하니 이쯤 하면 그가 사라지리라 생각했는데.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할 일이 생각난 척 텃밭으로 걸어갔다. 앉아서 잡초를 고르는 것밖에 더하겠나 했지만. 그를 보는 것보단 나았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돼?”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계속 물어왔다.
“내가 무얼 하면 돼?”
“…….”
“내 두 다리를 잘라 너에게 주면, 그러면 옆에 있어도 돼?”
“…….”
“자라나면 다시 자를게. 사람의 살을 파먹는 이가 꼴 보기 싫어 빼내라면 빼낼게.”
점점 더 잔혹해지는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음이 다 녹아내리고 말았다. 저가 우는지도 모르고. 턱에 고인 눈물이 그의 손등으로 떨어진다. 요수는 빨갛고 말간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렸다.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너를 연모해.”
그는 무릎을 꿇을 듯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나한테 너무하지 않아?”
무엇이.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내 발은 이미 그에게로 가고 있었다. 안아달라고 손을 뻗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말았다.
“나는 네가 죽고도 여러 해를 살 텐데. 남은 네 세월이라도, 내게, 조금만…….”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들어 입술을 삼켰다. 억누르자. 모른 척하자. 그러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나를 삼켰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사람이고 요수고. 그런 것 모르겠다. 나는 그가 너무 애틋했다.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부정하려 했으나 잃으려 했으나.
만난 순간부터 알았다. 돌이킬 수 없었다.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여인이 아닌 사람이길 바랐고, 조금 더 강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하나 내 안에 연모를 심어둔 그의 앞에서 나는 물러터진 약자일 뿐이었다.
비겁한 마음이 솟았다. 제 사지를 부러뜨리겠다는 끔찍한 말에 안심이 되고 몸이 녹아들 것 같았다. 나 혼자 느낀 감정이 아니라, 그가 나를 농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함께 나눈 연모라는 것을 알자마자 녹아내린 가슴이 뛰었다. 꾸며낸 사내가 아니라, 자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 자신으로 살자고, 그리고 그 길이 겨우 보였는데. 먹구름처럼 끼어든 양기석을 나는 길에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자경으로 산다면, 그는 내가 부려도 될 마지막 욕심이 아닐까. 더는 꾸며내고 아닌 척하는 것에 지쳤다. 여리고 나약한 마음은 그에게 손을 뻗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네 동족을 많이 해할 텐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래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만약 그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그에게 곁을 내줄 생각이었다. 양기석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였다.
“나에게 동족이란 없어.”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양기석에게 여기서 떠나가라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그도 내 의중을 알아차린 것인지 스승이 오기 전까지 내 곁에서 머물며, 정말 살림이라도 차린 듯 그렇게 살다가 떠났다. 스승이 떠나면 다시 오겠다며.
스승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려해준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겨우 마음잡고 퇴치사 일을 다시 해 보겠다고 한 나인데, 요수에게 넘어가 마음을 나눈 것을 안다면 스승은 나를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은 비밀과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집을 뛰쳐나온 뒤부터 어느 갈래를 선택하든 그러했다.
하나 이제는 그랬다. 그것이 숨이 막힌다거나 후회되지 않는다. 그를 버리고 후회하는 것보다 곁에 두고 후회하는 삶이 나으니까.
부스러기 같은 욕망에서 발현된, 보기만 해도 애틋한 비밀.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비밀을 삶에 걸어두었다.
훗날의 이야기 01
황도변에 나타난 요수는 심심하면 땅굴을 파는 징글징글한 요수였다. 황도변 지주의 삶을 크게 궁핍하게 만들 정도로 땅속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질 않고, 농작물이 다 익어갈 때만 되면 튀어나와 한 해 농사를 망치니. 소작인들은 쥐어짜도 나올 것이 없고, 막상 그 소작인을 쥐어짜서 사는 황도변 지주의 삶은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하여 황도변 지주는 남은 땅이라도 팔아 저 요수를 요절내고 말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나라에서 강하다는 퇴치사나 무녀를 부르고 싶었으나, 그들의 몸값은 혼란한 시대에 하늘을 찍었고, 지주의 주머니는 그보다는 한참 밑이었다.
결국 산에서 은닉한다는 도사를 어렵사리 구해 어찌어찌 모시려 했으나, 그 도사가 또 내려오다가 다리를 삐는 바람에 의원에 들른다는 것이 아닌가. 황도변 지주는 뭐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다 있나 싶었으나, 불평을 늘어놓다가 마음이 상한 도사가 돌아가 버릴까 홀로 분을 삭이는 신세였다.
“무엇이라?”
한데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도사가 실력이 없는 것인지 늙은 것인지 의원에게 치료받고도 느릿느릿 걸어와 속이 타는 와중에, 지나가던 퇴치사 하나가 그 땅굴 요괴를 파내어 절단을 내버렸다는 게 아닌가. 황도변 지주는 너무도 기뻐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할 뻔했으나, 그래도 황도변을 구한 은인의 얼굴은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신도 신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더랬다.
어디냐. 어디야. 입에 침을 발라가며 땅굴 요괴가 죽은 자리까지 온 지주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퇴치사를 찾아댔다.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아들만 셋인 관계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곳 지주이십니까?”
“아이, 아, 예.”
한데 맨발로 뛰쳐나온 지주를 맞이한 것은, 쥐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는 땅굴 요괴 하나와 곱다란 여인이었다. 여인도 퇴치사를 하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 머리를 빙빙 돌린 지주는 그제야 요즘 항간에 떠도는 퇴치사 하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무녀도 아닌 것이. 산에서 홀로 수련하며 신을 받든 신묘한 여인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 수하라의 대지주를 살려주고 이름값을 높인 여인이었는데, 스스로를 무녀가 아닌 퇴치사라고 부르며 다니는 모양이었다. 지주도 그 여인을 보고 싶은 마음은 강했으나 당연히 값이 비싸겠지 싶어 포기한 참이었다.
“아니, 이리 감사할 데가. 어찌, 어찌 여기까지 오신 것인지.”
지주는 귀족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여인에게 경어를 써가며 말을 섞었다. 한데 여인은 지주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땅굴 요괴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지주는 여인의 눈길을 따라 땅굴 요괴를 살피다가 땅을 울리는 코골이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이, 이놈이 잠이 든 것이 아닙니까?”
그제야 여인이 지주 쪽을 바라봤다.
“그러합니다.”
“아니. 어째 머리를 동강을 내지 않으시고요?”
“저는 봉인술만 행할 뿐입니다.”
“하면…… 하면 저게 언제 깨어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족히 칠백 년은 잠들어 있을 겁니다.”
칠백 년. 지주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세월이지만 그래도 찜찜한 것은 찜찜한 것이었다. 지주는 여인이 떠나면 사람을 시켜 요수의 목을 잘라낼 마음을 먹었다. 지주는 목을 큼큼 가다듬은 다음, 시꺼먼 속내를 숨기고 여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혹 소문을 들으셔서……?”
“아니. 이분이 제게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여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지주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한 농민을 가리켰다. 지주는 약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고, 여인은 당당하게 지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면 이제 값을 치르셔야지요.”
“예?”
의뢰는 애먼 놈이 하고 값은 왜 내게서 받느냐고 지주는 소심하게 항의했지만, 여인은 그러하면 왜 요수가 죽었을 때 맨발로 뛰쳐나오셔서 감사하다고 했냐 물었고, 준비한 값이 분명 있을 텐데 하며, 지주의 주머니를 훑었다.
사실 도사가 오면 주려고 모아놓은 것은 있었으나, 기왕 여인이 잡아준 것을 아껴볼 심상이었다. 한데 여인은 그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바라봤고, 왠지 등골이 서늘해진 지주는 억지로 웃으며 엽전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그제야 여인은 표정이 풀렸다. 참 뻔뻔스러운 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엽전 주머니를 펼쳐 보는 게 아닌가.
“예. 이 요수는 제가 밤이 되면 인적이 드문 곳에 묻어둘 것이니. 딱히 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수를 잡아다가 분해할 생각이었던 지주는 끙 신음만 내었고, 여인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떠나려고 했다.
“왜 내 엽전이 그쪽으로 가는가?”
저 밉상. 지주는 발을 쩔뚝거리며 다가오는 늙은 도사를 향해 혀를 찼다. 본인이 늦게 도착해 놓고 할 말이 있느냐며 지주는 속 시원히 하고픈 말을 다 했고, 도사는 쓰러진 땅굴 요괴를 보고, 다시 여인을 보다가, 이번에는 지주를 보았다.
“잡았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는지. 지주는 싱거워져 짜증이 났고, 여인은 헛웃음조차 비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건진 게 없는 도사는 머쓱해져 돌아가리라 생각했건만. 그는 갑자기 헛소리를 하듯 여인의 뒤에서 소리쳤다.
“아주 좋은 신을 지녔수다.”
여인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고 뒤를 돌아보며, 도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수그렸다. 도사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땅에 여러 신이 계신데. 잔혹한 분은 많으나 그처럼 다정한 분은 드무시지. 잘 모시오. 그대의 복이니.”
“감사합니다.”
“한데.”
훈훈한 말을 주고받던 그때. 제 턱을 쓰다듬는 도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사특한 기운도 함께 몰고 있구려. 저기 저, 나무 뒤에.”
그 말을 들은 여인의 표정도 함께 싸늘해졌다.
“봉인도 아니 하고 달고 다닌다, 라. 이거, 이거…….”
여인은 싸늘하게 굳힌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나오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영감.”
도사는 나무 뒤에서 풍기는 기운이 보통이 아님을 알았다. 그 기운이 온통 이 여인을 향하고 있는 것도. 한데도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요수를 봉인하는 것에 여러 형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사는 여인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제가 알아서 잠재우고 있으니. 더는 신경 두지 마십쇼.”
여인의 발밑에 나무 그림자가 졌다. 주위에 나무 한 그루가 없음에도. 산속에서 오래 살았나. 별별 것을 다 본다고 도사는 헛웃음을 쳤다.
여인은 저 먼 곳으로 걸어갔다. 그 사특한 기운에 도사는 숨이 막힐 지경인데.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새까만 기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참…….”
하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산속에서 도를 닦는 몸. 이 속세와 오래 엮이면 끝이 좋지 않으리라. 여인은 이미 나무를 타고 넘어간 지 오래. 그의 생각도 거기서 그쳤다. 도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지주를 향해 걸어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혹여 저 땅굴 요수의 머리를 자를 생각이라면 그만두시게. 요수의 원한은 자네의 생을 뛰어넘으니 말이야.”
꽤나 신기한 것을 보았다. 도사는 그 여인과 그 여인의 발을 묶으려고 애쓰듯 구는 나무 그림자를 떠올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여전히 이 혼란한 시대에는, 더 혼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자신 같은 한량이 도 닦기 좋은 시대였다.
훗날의 이야기 02
“제발 받아주십시오. 예?”
“어허.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라니까.”
퇴치사 이영임은 말썽꾸러기 제자 하나를 받아준 후부터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 맑은 눈망울에 홀랑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고놈 참 당돌하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에 홀라당 마음이 넘어가 버려 여인인 것을 제자로 받아들였더니, 노후까지 아주 자신을 못살게 굴 모양인가 보다.
“글쎄. 여기는 여인을 받아주는 곳이 아니라니까.”
“어째서요. 저번에 그 무녀님이 이쪽에서 의뢰받는 것을 제가 똑똑히 보았는데요.”
어릴 적 자경이를 생각나게 하는 당돌한 눈빛에, 싹수없는 말투였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그리움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 눈빛에 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걸 수는 없었다.
“되었다니까. 제발 좀 가거라.”
“밭을 구르라면 구를 것이고 서리를 해오라면 해올 것입니다. 한 번만 절 받아주세요. 예?”
“이게 떼를 쓴다고 될 일이냐? 더군다나 네놈은 신도 보이지 않는…….”
“신이라니요?”
또 잘못 말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자들은 뭐 하나 꼬투리 잡히면 물고 늘어지기 대장들이었다. 자경이 그것도 제 어미를 내가 죽였다며 난리 난리를 하는 통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나라에서 최초로 여인을 제자로 받아들였지 무언가.
여인을 사내로 둔갑시킨 것을 들켰다면 지금쯤 자신의 목은 왕성에 걸려있을 것이었다. 어쩌다가 제 동료들이 그 유명한 여인 퇴치사가 혹 자네 제자와 닮지 않았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는데, 사촌 지간이라고 둘러댄 것이 며칠 전이었다.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혹시 모른다. 증거가 없으니 잡아떼면 그만이라고 말하기엔 사안이 너무도 컸다.
결국 이영임은 혀를 차며 어린 소녀의 등을 밀쳤다. 그런 도박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가라. 가. 제발 가.”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앙증맞은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겨우 열다섯을 넘겼을까. 저 어린 것이 무슨 한이 있다고 이 먼 데까지 찾아와 생떼를 부리는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저 아이도 분명 사정이 있겠지마는, 이영임은 더 이상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자경이 하나만으로도 골이 아플 지경인데 말이다.
이영임은 축 처진 어깨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차마 보지 못했다. 정말 딸자식이라도 생긴 것처럼 자경이를 제자로 들인 후에는 저런 어린 여자애의 슬픈 모습이 꽤나 가슴 아픈 탓이었다.
“그나저나…….”
이영임은 해가 저물어가는 산등성을 바라봤다. 오늘은 제 아버지와 무사히 송덕에 이사를 마친 자경이 문안 인사차 들리겠다고 한 날이었다. 하여 의뢰도 마다하고 이 절간에 처박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오라는 제자는 오지 않고 그 제자와 똑 닮은 아이만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히고 떠났다.
다 출가하고 하나 남은 제자가 시간을 엄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약속을 칠렐레팔렐레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는 이였는데. 이영임은 슬슬 걱정이 되어 산 아래로 마중을 나가볼까 하였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동료도 그렇고 제자도 그렇고, 몇 달씩 소식이 없으면 괜히 걱정이 됐다.
게다가 자경이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강한 신께서 머물러 다행히도 요수에게 당할 가능성은 줄었다고는 하나, 요수를 줄기차게 상대해온 이영임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수하라에 내려가 완전히 달라져서 돌아온 제자였다. 그 후로부터 쭈욱 무슨 대단한 사연을 숨기고 있다는 걸. 자경이는 제 입으로 다 끝난 연정이라고 말했으나 눈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던 제자가 염려되는 차에, 저녁노을이 다 저물어가 슬슬 막된 걱정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려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이영임은 요수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산길에 걸어둔 부적이 마구 흔들림을 느꼈다. 더군다나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부적 몇 개가 떨어진다. 그 부적의 힘을 실어두었던 이영임은 손바닥이 축축해져 갔다.
누구지. 설마 몇 달 전에 봉인했던 그 요수의 어미인가. 제 자식을 감히 봉인했다며 울부짖던 이리 요괴였다. 봉인술 중에 다리가 빨라 놓친 요수였는데. 하필 제자가 찾아오는 날에 불길한 조짐이 일었다.
이영임은 생각은 그만두고 부적을 걸어둔 나무로 재빠르게 내려갔다. 어찌 됐건 제자인 자경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해 다른 이에게 피해 주는 것은 퇴치사로서 최악의 일이었다.
이영임은 아직 나무 근처로 가지도 못했는데 느껴지는 살벌한 요기에 질리고 말았다. 짙은 붉은색. 뭉게구름처럼 바닥에 깔린 요기를 보다가 문득 아까 내려간 아이가 생각났다. 자경이처럼 여인임에도 퇴치 일을 하고 싶다고 난리를 피우던 그 아이가.
이영임은 순간 두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리 요괴는 냄새를 잘 맡기로 유명한 요수였다. 자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눈이 뒤집혀있을 게 분명한 요수였다. 그 요수 앞에 어린아이라니. 살쾡이에게 생선을 던져준 격이었다.
“안돼.”
안 그래도 산에서 급하게 뛰던 이영임의 움직임은 이제 굴러가도 손색없을 것처럼 바뀌었다. 차라리 한 번 생각해 본다고 할 것을. 자신의 단호함에 내쳐진 아이가 싸늘한 시신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했다.
자경이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고, 덕분에 여인의 몸으로 퇴치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늘었지만, 굳이 또 다른 여인을 제 밑으로 둘 필요는 없다는 오판이 불러온 결과였다. 고작 여인네를 제자로 들였냐는 비아냥을 감내하기 귀찮아서. 이영임은 온몸을 차가운 땀으로 적셨다.
“하, 하아, 아…….”
사방에 부적이 떨어져 있었다. 그 이리 요수가 이렇게 강했었나. 이 기세를 보건대 잘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데는 몰라도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곧 자경이가 오고, 차마 자신의 시신을 제자가 수습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죽는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끔찍한 뒷수습은 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그리하여 목숨 걸고 분노에 찬 요수를 유인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차였다.
발목까지 차올라있었던 짙은 요기가 갑자기 물러서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것처럼 산 밑으로 내려가는 요기가 어처구니없었다. 요수가 내뿜는 기운은 대체로 악의를 짙게 담고 있어, 퇴치사에게 자신의 위치나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퇴치사를 겁먹게 하는 용도로 쓰기도 하였고. 한데 이처럼 물러나는 듯한 모양새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제 자식을 봉인한 퇴치사를 죽이러 온 요수라면.
“이게 무슨…….”
이영임은 황당한 심정을 가지고 계속 추적하였다. 퇴치사 일을 오래 했지만 악의를 가진 요수가 물러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팔이라도 하나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종족이거늘. 이영임은 멍청히 입을 벌린 채로 계속 아래를 향하였는데. 요기가 다 걷힌 산의 입구, 거기서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경아?”
머리칼이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특이한 머리 모양에, 순해 보이는 동그란 눈매. 그리고 약간의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얼굴이 그를 돌아보았다.
“스승님.”
“아니. 방금…….”
“예?”
“뭘 보지는 못한 것이냐? 이 산에 요기가 가득 차 있었는데.”
자경은 잠시 입술을 꾹 다물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이영임은 제자에게 한발 다가갔으나, 곧 얼굴색을 바꾼 제자가 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못 느꼈습니다. 제가 조금 둔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다 안다는 눈빛이었다. 아무리 속이려고 들어도 스승인 그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영임은 혀를 물었다. 넘어가자, 넘어가자 했는데 안 되겠다. 오늘은 꼭 이 이상한 느낌에 대해 물어야겠다.
“정말 본 적 없느냐.”
“예.”
“정말로.”
“예.”
이영임은 그 흔들림 없는 눈빛에 묻고 싶었다. 누가 네 입을 막는 것이냐. 요수? 두려움? 아니면 네 자신? 설마 아직도 그 요수를 못 잊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대관절 무슨 사정이기에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너 설마…….”
“스승님.”
생글생글 웃던 제자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그 차가운 얼굴에 놀란 이영임은 잠시 주춤거리고 말았다. 제자는 싸늘해진 눈으로 이영임의 뒤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뒤에 있는 누군가를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요수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자는 예외였지만요.”
“그래?”
“제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해하는 요수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이고요.”
“자경아.”
“설령 그것이 그자라도 말입니다.”
더 말하지 말라는 듯 결연한 눈동자가 이영임을 향했다. 이영임은 이 주제가 제자에게도 자신에게도 별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퇴치사가 요수를 마음에 담아두었던 적이 있는 것은 크나큰 실책이니까. 하여 이영임은 냉정한 제자의 태도에 일말의 의심을 접었다. 더 건드리면 자신까지 송곳으로 찌르는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아까 한 꼬맹이가 찾아왔는데.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구나.”
“꼬맹이요?”
“딱 너 같은 아이였는데 말이다. 이참에 너도 제자 하나 들여보는 게 어떠하냐.”
이영임은 아까 전까지 자신을 못살게 굴던 소녀의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잔뜩 굳어있던 제자의 어깨도 그제야 풀려가는 게 보였다. 자경이는 만약 내일도 그 아이가 찾아온다면 자신에게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제자로 둔다는 것은 아니지만, 퇴치사는 여인의 일이 아니라는 이 팍팍한 세간에서, 또 다른 동지가 생긴 것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아직도 절 무녀라고 칭하는 이들도 있더이다.”
씁쓸하게 웃지만 자경은 좌우지간 기쁜 소식을 들어 좋다고 했다. 이영임은 제자와 산을 오르며 지나간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요수를 잡았는지. 얼마를 벌었는지.
바닥으로 떨어진 부적은 자경이 올라가며 제 손으로 걸어두었다. 아마 어떤 큰 요수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소리에 이영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는 마주칠 폭풍우처럼. 하나 이영임은 더는 묻지 않았다. 제자의 기쁨에 차서 실한 얼굴을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었다. 어떤 비를 품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건. 이영임은 당장 그걸 제 손으로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훗날의 이야기 03
‘내 목숨과 맞바꾼 것이니까. 어디 한 번 발버둥 쳐 보거라.’
‘그래? 끔찍해? 그거 재미있구나.’
‘한 번 끔찍하다는 이들과 몸을 섞어보렴. 하면 자유로워질 테니.’
‘그리 분해하지 마라. 나는 목숨을 잃고 있지 않니.’
동족의 비웃음, 반 토막 난 힘. 내 밑에 깔려 신음하던 동족들이 기세가 등등하여 나를 물었다. 예전이라면 손짓 하나에 사라졌을 상처가 내 목숨을 위협했다. 비천한 짐승처럼 도망쳤다. 요기를 숨기고 끔찍한 인간의 사이로 숨어들었다. 내 눈에는 분노밖에 없었다. 인간을 증오했고, 그 무녀의 시신을 갉아 먹고 싶었고, 내 것을 돌려받고 싶을 뿐이었다.
지주님. 지주님. 종알거리는 인간들이 주변에 있었다. 이번에는 이런 인간이었다. 나는 수많은 인간 속에 있었다. 한때는 농부로, 한때는 장사치로, 한때는 어떤 이의 아들로. 이번에는 모든 인간이 굽신거리는 인간.
약간의 환몽술로도 인간은 쉽사리 자신의 착각을 진실로 믿곤 했다. 그 무녀가 죽은 지도 백 년이 흘렀다. 봉인이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해 턱도 없는 힘이었다. 그렇다고 무녀의 말대로 신을 가진 자를 안자니 구역질이 나고. 건드리기도 싫은데 품는 게 가능할 리가.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여자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사내라고 말하는데 풍기는 향은 여인의 것이었다. 하여 흥미가 갔다. 어디까지 속이려나. 이걸 내가 안다는 걸 알리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신이라는 것들을 심심풀이 삼아 잡아먹고 해도 돌아오는 힘은 바다에 물 한 동이를 버리는 정도였다. 이 짓도 질리면 다른 껍질을 써야지. 곧 질리려나. 그런 무의미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리던 중에.
사람이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그 여자에게서. 코웃음 나오는 말이었다. 먹지도 못할 금덩이에 제 아비, 형제, 자매. 다 버리는 족속이 사람이었다. 적어도 요수는 제 새끼나 암컷을 먹지도 못할 돌과 바꾸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나 요수를 멸시하지만 정말 멸시를 받아야 할 족속은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재미였다. 사내인 척하는 고고한 여인이 언제쯤 버리고 갈까. 내 수하들은 간식거리 삼아 퇴치사들의 숙사로 가서 식음을 하곤 했다. 한데 고작 몇 년밖에 묵지 못한 기운을 가진 그 여자가 내 수하 하나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
수하의 울음을 들었다. 자신의 복수를 대신 해달라면서 내게 말을 전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요수였기에, 또 아무리 재미난 인간이라고 해도, 내 수하를 죽인 자를 살려줄 수 없었다.
그날 죽일 생각이었다. 병약한 지주 놀이도 질린 참이고. 한데 여자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절대 내가 요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분명 나는 그 여자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꺼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정성스럽게 나를 돌봤다. 내가 사람에게 하는 심심풀이를 요수가 한 짓이라고 굳게 믿으며 나를 가르치고 도와주려고 했다. 여자의 말이 재밌어서 몇 번 따랐다가 그래도 지루한 마음은 가시지 않아 사람을 괴롭혔다. 그러자 여자는 우습게도 내게 사람의 놀이를 가르쳤다.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나는 그때부터 여자의 우는 얼굴을 상상했다. 나를 사람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저 얼굴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어떤 얼굴로 울면서 나를 볼까.
나는 인간을 흉내 낸 이래, 처음으로 다음 날이 기다려졌다. 여자가 가지고 온 놀이들이 재밌는 게 아니었다. 여자가 재밌었다. 그 여자는 나를 보듬고, 요수인 줄도 모르고 봉인의 노래를 불러주고, 사람이라도 된 양 내 아픔을 보듬어주었다. 이렇게 노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더 나빠지지 않는다면 보름 후에 떠나려고 합니다.’
너는 다를 줄 알았는데. 조금 친해지니까, 재미있다고 살려주니까 떠나간다. 병약한 지주가 아니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하나 여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재미난 복수가 생각났다. 내 봉인술을 풀 열쇠. 그 황당한 무녀의 봉인. 이 여자라면 가지고 놀다가 내 봉인도 풀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며 죽여주고. 그리하면 내 원한이 다 씻겨 내릴 것 같았다.
나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인간과 내가 섞인 것이라는. 여자라면 믿을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어미에 대한 아픔을 가진 것 같았다. 내내 날카롭던 여자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 것도 그때였다. 내가 지주의 어머니 사당에 가서 내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을 때. 그때 내게 다가와서 연민의 눈을 했다.
여자는 연민에 약했다. 나는 그 점을 이용했다. 요수 양기석이 아니라 지주 양기석을 이용했다. 여자는 금세 내게 넘어올 듯하다가도 넘어오지 않았다. 나는 여자를 찾아가 재촉했다. 여자는 분명히 흔들렸다. 내 외양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얼굴을 붉혔고, 코끝을 찡그리며 거부하려고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양기석을 좋아했다.
한데 그 지주 양기석도 나였다. 나는 요수와 사람을 구분 짓지 못하게 만드려고 했다. 지주일 때 웃었던 눈으로, 요수라는 이름만 걸고 여자와 대면했다. 여자는 그리하면 진절머리내는 듯하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를 좋아했다. 한데도 요수인 나한테는 퉁명하게 굴고 내가 지주를 흉내 내면 미소라도 지어주었다.
둘 다 나인데 질투가 났다. 여자와의 잠자리가 만족스러워서 더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여자는 잠자리에서 살쾡이처럼 굴다가도 내가 저를 어루만져주면 어찌할 줄 모르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 간극이 얼마나 좋았는지. 내가 요수라서 내게 설레면 안 되겠고. 가지고는 싶은데 사람과 요수인지라 티는 내지 못하고. 내 눈에 훤히 보이는 그 갈등하는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저걸 짓밟게 되었을 때 내 기분을 떠올리면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을, 죽고 없어진 그 무녀에게 재미 삼아 입이라도 맞출 정도의 기분.
한데 밀고 밀어 벼랑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도. 여자는 끝까지 연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 죽을 것 같으면서도. 내가 붙어서 바라보면 애틋한 눈을 하면서도. 연정을 인정하지 않는 입술이 얼마나 가증스러웠는지 모른다.
의도를 벗어난 화를 내고 진심을 담아 투정 부리고, 내 손아귀에서 길 잃은 감정이 잦았다. 나는 저 여자의 마음을 가져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멀어지지 않을까 고민하는 새에 여자가 왔다. 끝끝내 그 입으로 연모를 말했다. 그때의 기분을 말할 수 없다. 계략이 성공하여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올곧은 눈이 나를 향하여 좋은 것인지.
복수를 할 날이었다. 무녀의 시신을 파내 목을 따내도 시원치 않을 복수. 한데 왜 나는 그토록 저조한 기분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할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입장이 아니었던가. 한데 나는 여자가 진실을 알고 죽여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죽음을 선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수하를 데리고 도망쳐버렸다. 후퇴도 아니었다. 비겁한 도망이었다. 여자의 죽음을 생각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아버지!”
어떻게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을까. 분명 내게 배신당해서 치를 떨고 있어야 맞지 않나.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 대한 복수라도 다져야 하는 것 아닌가. 나를 찾겠다고 이라도 갈고 있어야지. 나를 만나면 죽이겠다고 해야지. 왜 나를 찾지 않지. 왜 나를 그리워하지 않지.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다니는 걸까.
‘널 만난 것. 널 연모하게 된 것. 다 잊으려고 해. 한데 자꾸 나타나 내 마음을 농락하려고 든다면 내가 안고 살려 했던 그 모든 기억을 후회할 것 같아.’
입 안에서 피의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또 손가락을 입에 넣고 물고 있던 모양이었다. 피범벅이 된 손을 무심히 내려 보다가 나는 다시 눈길을 아래로 돌렸다.
나는 저 여자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나무 위에 처량히 앉아 훔쳐보는 신세였다. 나는 뿌리를 잃은 나무였다. 어디든 뿌리를 내릴 수 있고, 언제든 뿌리를 거둘 수 있다. 뿌리 내린 땅을 썩게 하고, 자비 없는 가지로 사람의 배를 뚫을 수 있었다. 그리할 예정이었다. 미천한 인간 때문에 가두어진 세월만 몇 년이었는데. 하여 나를 갑갑하게 만든, 나를 숨어 살게 만든 모든 것을 없앨 작정이었다.
“아야. 또 바다에 나가려고 그러냐.”
“할 일도 없잖아.”
내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나를 구해주겠다고 한 것. 처음에는 같잖았을 뿐이다. 인간 주제에 나를 구하다니. 실컷 이용하다가 배신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재물로 쓸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 복수의 시작이라고. 한데 멍청하게 제 목을 가져가라고 내놓은 인간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주변을 얼쩡거리며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다리 건넛집 아저씨랑 술 먹으러 가는 거지?”
“아 그것이…….”
“되었네. 되었어. 이대로 갈라져 난 바다로, 아버지는 돌다리 건너로 갑시다.”
여자는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홀려 가만히 듣다가 겨우 비축해둔 힘까지 놓칠 뻔한 전적이 있었다. 그것이 자경의 봉인술이었다. 요수를 흔들어놓고 다 줄 것처럼 달큼하게 노래하는. 하여 그 마음에 파묻히고 싶게 만드는.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입을 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거렸다. 더 듣고 싶고, 그런 뜻이 아님에도 그녀가 구원해준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빌어먹을.”
나를 연모한다고 속삭이더니. 재수 없는 인간들 만나고 다니는 꼴 보라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웃고 떠들고 마시고 인간들과 어울린다. 가슴이 허했다. 저것을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겨우 저따위 애송이 퇴치사의 손에 죽어줄 수는 없으니 내가 죽여야 맞는 것인데. 그러자고 마음먹었다가도 자꾸 저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연모해.
그리고 어여쁘게 내 입에 입을 맞추고 안겨 왔던 것도. 두 손이 떨려 와서 그 여자를 제대로 만져줄 수 없던 한심한 나도. 결국 나는 죽이지도 못하고 새처럼 여자를 지켜보았다. 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내 거짓된 연인을.
나는 계속 지켜봤다. 힘을 얻고서 하는 일이, 그 어렵다는 봉인을 푼 요수의 말로는 인간 여자의 뒤꽁무니 쫓기였다. 여자가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아버지를 관찰하다가 여자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면 웃기도 했고. 그것도 아니면 나는 여자의 주변 관계를 질투하며 하루를 보냈다.
왠지 여자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할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여자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지킴이가 되었다. 여자의 관계 중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녀의 스승이었다. 사제 지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저 남자도 그러할까. 수하라에 있을 때부터 여자는 매양 저 스승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안달이었다.
나는 눈에서 안 보이면 멀어지겠지 싶어 며칠을 잠적했다. 한데 사람을 죽이자는 말도 성가시고 수하들은 징징거리고. 다 쓸데없었다. 여자를 안고 싶었다. 내 품에서. 당장.
그 생각이 들자마자 여자의 집으로 지금까지의 인내를 모두 잊고서 달려갔다. 한데 여자가 없었다. 그 며칠 사이에 없어졌다. 나는 황당함에 머문 것도 잠시. 여자의 기척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그 여자가 품고 있는 신은 눈부신 노랑이고, 끔찍이 따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까.
나는 여자가 산속에 있는 초가에서 홀로 지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자마자 눈이 돌았다. 여자는 초가에서 지내며 제 스승을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순간 상상해봤다. 여자가 스승과 살림을 차리는 상상을 해봤다. 참을 수 있을 리가. 여자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여자를 만지는 것을, 여자가 다른 사내의 것이 되는 것을, 내가 참을 수 있을 리가.
결국 나는 자경이의 앞에 나타났다. 무얼 하고 싶은지 몰랐는데. 자경이를 보니 알겠다. 나는 자경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던 것이다. 내 일생에 놓지 않을 흥을 만난 것을. 자경이는 이미 내 삶의 구렁으로 걸어들어왔다.
***
오늘 퇴치를 끝내고 마중 온 양기석을 따라서 갔다. 양기석은 사람으로 치면 한량으로 딱히 먹을 필요가 없어 식량이 요하지도 않고, 나무의 요수이므로 자신이 가고 싶은 어디든지 뿌리를 내리는 재주가 있었다. 하여 양기석이 뿌리내리는 그곳은 양기석의 터전이 되었고, 왜 양기석이 봉인당한 요수임에도 수하라 성벽을 다스릴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도 따라왔지?”
황변도는 송덕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이었다. 땅굴을 파는 요괴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더니 거기 도인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양기석의 존재를 눈치챈 것처럼. 점점 세지는 봉인술처럼 눈치도 세지면 좋으련만. 나는 양기석이 얌전하게 있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서 이리저리 일을 다니다가 보면. 그는 항시 나무 위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자유라는 게 없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 녀석은 왜 그렇게 스승을 싫어하는지 스승을 만나러 가는 날에는 엎드려 떼를 쓰기 일쑤였다. 질투심이 대단한 놈이라는 것은 일전에 알았지마는 설마하니 스승을 괴롭힐까 싶어서 내버려 두었더니 이놈은 제 감정이 무슨 권리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만 오라니까. 낮에는 너도 네 일을 해.”
양기석은 나를 돌아보고 가볍게 웃더니 다시 앞을 봤다. 양기석의 발이 신이 난 듯 들썩거리며 나를 숲속 깊은 곳으로 끌고 갔다. 나도 참 이럴 때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게 퇴치사가 되어서 요수가 음습한 곳으로 끌고 가는데 홀랑홀랑 따라간단 말인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지 오래이지. 이 발칙한 요수와 연모의 정을 나눈 후부터.
양기석은 산 중턱에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나도 잘 아는 굴이 있었다. 산짐승들이 폭우나 산재를 피해 숨는 곳으로, 사람도 비를 피하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곳에 화려한 비단 보가 깔려있고 앞에는 모닥불을 피워놓은 것을 보아하니, 오늘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 모양이었다.
양기석은 일을 마치고 가는 나를 자주 불러다가 다양한 곳을 데려가 줬다. 나라에서 가장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 앉아있다던가. 바다 한가운데에 띄운 나룻배 위에서 조마조마하게 있다던가. 그는 자신이 요수임을 믿고 오만 위험한 곳을 나를 끌고서 다녔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근래 송덕에 지은 집에 늦게 귀가하곤 하는 것이었다.
귀가하면 그를 아니 볼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귀가할 때까지 잠도 못 주무신 우리 아버지가 나를 마중하고 잠자리에 들면, 양기석은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가 내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오곤 하였다.
양기석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하얀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우리 집 마당에도 양기석이 올 때마다 하얀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내가 수하라에서 본 그 나무였다. 양기석은 온종일 나를 쫓아다니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가지다가 내가 홀로 있을 시간만 되면 나를 잡고 아주 놓아주지를 않았다.
“내가 오늘은 일찍 가봐야 한다고 했잖아.”
“왜?”
양기석은 내가 자신이 준비해놓은 곳을 보고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굉장히 시무룩한 낯을 하였다. 나는 입을 다셨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가 저녁상을 혼자 차려 드시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일찍이라도 가서 이 못난 딸이 같이 먹어주지는 못할망정, 일이 끝나면 요수와 놀러 다니느라 바쁘니 말이다.
“아버지가 가여워서.”
“나도 가여운데.”
“넌 낮에 진종일 보고도 내가 보고 싶으니.”
일각만 앉아있다가 가라며 나의 어깨를 끌어다가 앉히는데, 그의 빛이 사는 눈동자 앞에서 나는 항상 무기력했다. 하여 딱 일각만 앉아 있다가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을 저지르고 말았다. 양기석은 추위에서 지키듯 제 팔에 나를 안았고, 나는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기석아.”
“응.”
“따라다니지 좀 마.”
“왜.”
“그러다가 너 잘못되면 나는 어떻게 해.”
오늘도 불안불안했다.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요수는 따라왔고, 내 일에 특성상 도인이나 무녀나 퇴치사를 자주 마주치는데, 안 그래도 나는 여인 퇴치사로 주목을 많이 받는 와중에, 그가 어떤 감 좋고 능력 좋은 이에게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꼼짝 없이 죽는 그를 바라볼 수도 막아설 수도 없이. 나는 헤까닥 정신을 놓고 봉인된 그의 몸을 끌어안아 숨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단지 상상만으로 눈이 따끔따끔한데 양기석은 헤프게 웃기만 했다.
“자경아.”
그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따듯한 기운이 모닥불인지 그의 체온인지 모르고 있는 그 찰나였다. 그가 내 손가락을 들더니 백옥 가락지를 쑤욱 끼워 넣었다. 먼젓번 옷감을 끊으러 그와 함께 포목전으로 가는 길에 본 가락지였다. 당밀과를 나눠 먹으며 이것저것 껴보았는데 결국 사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헛돈이라고 생각했고 요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사질 않았다. 나는 내 손가락에 들어온 가락지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사람들 현혹시키지 말랬지.”
“값은 치렀어.”
양기석은 내 뺨에 짙게 입술을 눌렀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나는 근엄한 척하던 표정이 다 무너져 내렸다. 양기석은 그걸 아주 잘 아는 놈이었다.
“어찌 치렀어.”
“그자의 앞마당에 범 가죽 두 개를 놓았지.”
살다 살다 은혜 갚은 요수라는 말을 내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들이 듣는 민담에서도 나오질 않을 이야기였다. 나는 범을 잡느라 고생한 그의 손을 잡아 입술을 맞추었다. 양기석은 바다 산호처럼 어여쁘게 웃었다.
“자경아.”
“왜.”
“혼인할래.”
나는 입술에 대고 있던 그의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모닥불 타는 소리만 타닥타닥 들렸다. 밤이 깔린 산에는 산짐승 우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산이 들려주는 소리에 내 뛰는 심장 소리가 묻혔으면 싶었다. 양기석은 매보다 눈썰미가 좋고 고라니보다 기척에 예민하며 괭이보다 귀가 좋았다. 내 반응을, 표정을, 소리를 그가 놓칠 리 없었다.
“안 돼.”
하여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더 미안쩍고 아팠다. 그는 기대한 대답이 아닌지 살짝 미소가 죽었다.
“혼인해줘.”
“넌 요수야.”
“알려줘 고마워.”
“농이 아니고.”
“나도 농이 아닌데.”
이게 양기석의 문제였다. 그는 장난스럽게 굴며 모든 상황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고 한다. 하나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있고 그럴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기석아.”
양기석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내가 농으로도 넘어가지 않음을 안 것이었다.
“십 년만 지나도 상황이 많이 달라질 거야.”
그는 상급 요수의 아들로 태어나 둔갑술을 일찍이 깨우쳤고, 여러 해 동안 저 얼굴이었다. 하나 나는 사람이었다. 십 년이 무언가. 난 오 년 전과 오늘만 비교해도 달라질 대로 달라지었는데. 그가 변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이십 년을 같이 있고, 삼십 년을 같이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늙어서 모래로 없어질 팔자고 그는 스스로 생을 끊거나 이 땅을 저주하며 살아갈 요수였다. 갈래가 달랐다. 그뿐이었다.
“기석아.”
나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려고 손을 뻗었으나, 양기석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십 년.”
양기석은 낮게 뇌까렸다.
“나와 흘레붙는 내내 각오한 게, 고작 십 년. 그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빼.”
“뭐?”
“혼인할 수 없다며.”
양기석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내 손에 끼워진 가락지를 바라봤다. 나는 가락지를 매만지다가 서글픈 생각에 눈이 감겼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가 죽고 없는 이 세상에서 홀로 외로워할 양기석을. 요수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살다가 또 사람을 해하며, 나를 잊고 살아갈 그를.
“혼인했는데 내가 죽기라도 하면. 양기석 너는 어찌하려고.”
“죽다니.”
“몰라 물어?”
“넌 안 죽어.”
그건 확신에 찬 어조였다. 양기석의 차가운 손이 내 뺨을 잡았다. 그리고 제게로 당겼다. 다붓한 그의 입술을 느끼며 나는 가슴이 퍽 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용서한 지 오래였다. 용서할 수 없는 기억이라도 사랑으로 덮으면 그만이었다. 하나 그에 대한 복수라고 칭하기 우습게도. 그는 나를 사랑한 대가로 큰 벌을 받기로 약조된 몸이었다.
설령 오랜 세월 끝에 나를 잊는다고 하여도 그가 나를 기억하는 동안은 나를 연모했던 만큼 고통받을 테니까. 먼저 떠난 자는 홀가분할 수 있었다. 나는 저승에 가서 그에 대한 모든 걸 잊을 터였다. 그가 가장 아파하고 있는 그 시각에. 그 생각만으로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자경아.”
그는 겨우 미소를 찾았다. 모닥불 때문에 붉어진 그의 얼굴이 연지곤지 바른 신부 같다고 하면 곤장을 맞을까. 나는 그를 속세의 규칙처럼 서방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어도 내 마음에 품고 살 단 하나의 반려로 둔 지 오래였다. 설령 그가 나를 배반한다 하더라도.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하더라도.
“네 신의 음성으로 약조해.”
나는 요수가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내가 가진 신의 목소리를 빌어 약조한 것은 내세에 반드시 지켜야 했다. 엄격한 맹세였다. 어긴다면 일생을 불행할 터였다.
“이 땅이 멸하는 날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그것은 불가했다. 나는 내 뺨을 잡은 그의 두 손을 쓰다듬었다.
“안 돼. 기약할 수 없어.”
“억지로 내가 그 입을 벌려…….”
“다만.”
그의 입술이 살며시 떼어진 그때를 노려 나는 말했다.
“네 연모가 죽기 전까지 곁에 있을게.”
이게 좋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가늘게 눈을 뜬 요수가 머리를 굴리기 전, 나는 따듯한 신의 음성을 꺼내 들었다.
[네 연모가 죽기 전까지 곁에 있을게.]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께 죄송하지만 나는 여하튼 막 애정에 눈뜬 여인네였다. 이런 애틋한 순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 밤 달을 중매로 혼인을 했다. 나는 그것으로 족하였는데 양기석은 더 큰 것을 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아이. 아버지의 장인. 스승의 앞에 나설 수 있는 신분. 그가 혼인을 꺼내든 이유는 그것이었다. 온통 나의 낮을 염탐하기만 하는 그가 기어코 그것까지 탐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여간 요수의 욕심은.
밝은 태양 아래서 네 남자이길 인정받고 싶어. 그는 그렇게 다디단 말을 내 귀에 흘려 넣었다. 나는 그래서 물었다. 우선은 아버지의 눈에 들어야 하는데 괜찮으냐고. 농처럼 한 말이었다. 그게 실현될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수십 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내 서방을 괴이쩍게 여길 것이고, 어미를 요수로 잃은 딸이 요수를 서방으로 들인 것을 알면 어떠할까. 차마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순 없었다.
평생 연을 끊을 수 없는 스승과도 그랬다. 스승을 속일 수는 없어도 그게 영원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항시 전전긍긍할 것이다. 내 서방과 내 스승이 서로를 죽이지 않기를. 그를 잃을 수도 있었다. 스승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나 양기석은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내 처마 밑 그림자를 떠나 안뜰까지 탐내고 있었다. 안타깝고 나는 이뤄줄 수 없음을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양기석은 마음먹은 것은 이루는 놈이었다.
혹시 모른다. 몇 년 후면 나도 그의 말에 홀려 또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지. 나는 헐벗은 내 연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석아. 서방이라고 불러줘?”
“불러줘.”
“한데 나는 마누라 여편네 싫어. 네가 자경이라고 할 때가 제일 좋은데.”
원체 어린 시절부터 이름 없이 살았었기 때문이었다. 그 촌구석에서 송덕까지 올라와 요수를 꿰차고 서방 놀이라니. 기가 차야 하거늘 나는 왠지 이 놀이가 싫증 나지 않았다.
그와 하는 건 무엇이든지 그랬다. 기마든, 활이든, 뱃놀이든, 낚시든. 우리의 연정이 피어난 수하라의 여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질린 역사가 없었다.
큰일이었다. 점점 그의 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까짓것 그를 스승의 눈에 숨겨두고, 아니면 아버지를 모시고 깊은 시골로 들어가고, 나이에 걸맞게 그를 분장시키고. 그리하면 될 일인데.
한데 누구보다 잘 알지 않은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거짓된 분장 속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를. 그는 요수였다. 그리고 나는 요수 양기석이 좋았다. 내 곁에서 사람 분장을 하다가 말라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밤새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얘기하는 요수의 등을 쓸어주며, 도대체 이 놀이는 언제쯤 질릴 것인가 생각했다.
아버지 몰래 바쁜 척하는 퇴치사 놀이에, 사내는 모르는 순진한 퇴치사에, 요수와 서방하며 노는 이것이. 나는 도무지 질릴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다.
“자경아.”
“알아.”
“내가 연모하는 것?”
저 말은 내가 무덤까지 가는 그 날에도 질리지 않음이라.
[여러 해를 사는 나무여 (完)]여러 해를 사는 나무여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