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ree that lives for many years RAW novel - Chapter 8
01. 서로의 생.
갈대 줄기 위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추위를 헤치는 새의 날갯짓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꽁꽁 언 먹이를 향한 갈망, 칼바람 속에서 무리를 지키고자 하는 집념. 하나 새들에게 계절의 냉담함보다 위협적인 것은 하늘이 버린 재앙이었다. 저기 먼 동산부터 걸어오는 그 음함에 새들이 지레 겁먹은 것은 당연지사. 겨울은 만물을 얼릴 뿐이지만, 그 자비 없는 종족의 손은 만물을 삭혔다.
새들이 떠난 자리, 흰 눈이 낙하한 나무 위에 곤히 자던 요수가 하나 있었다. 그가 살며시 눈을 떴다. 감을 무시하려 했으나 무시할 수 없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는 당당하며 살심이 묻었다. 요수는 졸음에 젖은 눈을 두 번 끔뻑거렸다.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그 눈매 끝에 곤함이 덜렁 걸려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자신과 같은 재앙을 훑었다.
손톱이 길고, 송곳니는 막 갈아둔 칼 같고. 끼니를 막 때운 참인지 잇새에는 짐승의 살점이 껴있었다. 누리끼리한 털이 온몸에 났으며, 무리 지어 움직이는 요수였다. 나무 밑에는 열댓 마리의 요수가 당도해있었다. 빙 둘러 나무를 에워싼 채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무 위의 재앙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우두머리와 나무 위의 요수가 눈을 맞췄다.
“너. 맞는 게지.”
식솔을 바리바리 끌고 온 우두머리는 이를 드러냈다. 나무 위의 요수는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엇이.”
“삽곳의 양씨를 가져간 요수, 아닌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나무 아래에 있는 자들은 답을 기다렸다. 나무 위에 있는 자는 급할 것이 없었다.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한데.”
요수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만일 우묵을 차지한다면, 그 요수의 새끼까지 우묵 정씨를 갖는 식이었다. 같잖은 사람 흉내가 아니었다. 그리 구분해두지 않으면 열흘에 한 번 피바람이 불어, 저마다 주인이랍시고 깽판 치기 때문이었다.
나무 위에 있는 자는 삽곳 양씨였다. 나무 밑, 미련한 곰처럼 생긴 요수의 새끼는 일곱이고 형제는 셋이었다. 무리는 이 겨울에 몹시 굶주렸다. 전례 없는 혹독한 추위였다. 더욱이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있었다. 손바닥 닳게 빌어도 쫓아내기 일쑤. 결국 걸출한 요수의 가랑이 사이를 기거나, 여의찮은 떠돌이 생활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데 삽곳은 날이 훈훈하고 살찐 먹이가 넉넉함에도 불구. 정작 삽곳을 소유한 자는 사방팔방 떠돌아다닌다는 풍문이 일었다. 군침 뚝뚝 흘리며 눈독 들일 요수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겨우내 굶어 죽는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됨은 물론이거니와 대대손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이미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우두머리였다. 사라진 주인을 찾는 일에 사활을 걸었다. 삽곳을 가져, 살아남아야 했다. 격식대로라면 주인과 싸우거나 아니면 순순히 물려받거나. 후자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게 요수의 생 아니던가.
“내게 삽곳을 다오.”
요수가 어떤 종인가. 욕심의 깊이가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요수였다. 저자는 심드렁해 보이지만, 글쎄. 그 속을 누군들 알겠는가. 기운은 만만치 않으나, 이쪽은 식솔을 주렁주렁 달고 온 요수였다. 해 볼 만 한 접전이었다. 우두머리는 나무 위 요수에게 손을 뻗었다.
“거부하는 건가?”
나무 위의 요수는 흥 난 얼굴이었다. 죽음을 불사할 각오를 읽은 터였다. 그는 팔을 베고 누우며 웃었다. 일견 친근하다고 느낄 법한 웃음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끌고 온 무리의 인내심이 허물어져 갔다. 송곳니를 보이고, 손톱을 세운다. 나무 위의 요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태평스러웠다.
“고민 중이야.”
“고민?”
“줄까, 말까.”
까불며 놀리는 태였다. 무리는 곧장 나뭇결에 손톱을 박았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순순히 넘겨받을 생각 따위 하진 않았다. 인간들 등쌀에 떠밀리랴. 같은 요수끼리 아옹다옹 다투랴. 제 무리와 치열하게 살아남은 터였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잇새로 바람을 내보냈다. 다섯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나머지 다섯은 목표가 내려오길 기다린다. 진격은 목표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우두머리는 막판에 등장할 작정이었다.
아아아아악-
나무 밑에 있던 어린 요수가 피를 토했다. 영근 벼처럼 선 나뭇가지에 사지가 꿰뚫렸다. 우두머리의 새끼였다.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제 겨우 제 몫을 해내 가는 녀석이었다.
우두머리는 원한을 곱씹을 새도 없었다. 제 두 번째 자식은 내장이 터져 흐르고, 세 번째 자식은 와들와들 떨다가 고간이 뚫렸다. 네 번째 자식, 다섯 번째 자식, 여섯, 일곱. 봐주는 바는 없었다. 차례대로 저승의 문간을 밟았다. 땅에서 솟아오른 가지는 기척도 없었다. 땅을 딛고 선 자는 어김없이 저승길이었다.
“우선 흩어져라!”
생존한 자는 울분을 토하는 심정으로 새끼를 버렸다.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빨리 나아가기 위해 네 발로 갈대밭에 뛰어들었다. 차가운 눈이 등으로 쏟아지는 걸 느끼는 그때. 우두머리의 형제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땅이 꾸물거린다. 거대한 뿌리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젠장!”
우두머리 형제의 발이 뿌리에 휘감겼다. 거대한 뿌리는 그를 냉큼 집어 들어 땅으로 곤두박았다. 형제의 머리가 박 터지듯이 터졌다. 흠잡을 데 없는 사냥이었다. 더는 새끼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지에 핀 꽃처럼 꿰뚫려 죽어있었다. 일곱 마리가 모두 그랬다.
남은 형제의 말로도 비참하긴 매한가지였다. 우두머리의 형제는 초조한 듯 굴다가 다리를 삐끗했는데, 집요히 따라오던 뿌리가 그 찰나를 놓칠 리 없었다. 곧장 요수의 사지육체를 뿌리가 휘감는다. 구렁이가 먹이를 기절시키듯 휘감고, 또 휘감고. 형제의 신음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애통함보다는 겁이 먼저 찾아왔다.
우두머리는 한순간에 식솔을 잃었다. 우뚝 멈춰 섰다. 더 이상의 도망은 소용없음을 알았다. 이 재앙은 뿌리친다고 될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들을 살려줄 아량은 없었다.
“널 저주한다.”
참살 앞에서 꺼낼 말이라곤 그뿐이었다. 우두머리 가슴께에 후회가 얹혔다. 제게 다가오는 요수는 손끝이 희었다.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손이었다. 애초부터 간 볼 상대가 아니었던 게지.
“생각해보니까 줄 수 없어.”
어느새 우두머리의 코앞까지 온 요수였다. 살의가 씻겨 나간 얼굴로 도륙한 것 또한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우두머리는 두 눈을 감았다. 한 번의 판가름으로 무리를 잃었다. 패배자의 뿌리는 저승에 박힌다. 어차피 땅의 권리를 넘볼 적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내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라.”
한데 요수는 흥타령 부르듯 딴소리를 했다.
“무어?”
“내게 귀해.”
의의를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찮은 상대를 깔보는 것인가. 차라리 농락보다 죽음이 나았다. 우두머리는 굴욕감을 씹었다. 한데 아까부터 이 자는 정신을 뒷간에 싸고 온 것인지, 몽롱한 표정으로 뒤만 힐끔거리는 게 아닌가. 분명 누구를 기다리는 눈짓이었다.
우두머리는 잠시 단꿈에 빠졌다. 어딘가 하나 비어 보이는 이 요수라면, 홀린 듯한 지금이라면, 저 새처럼 훌훌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복수심 또한 쌓였다. 여기서 살아나가기만 해 보아라. 제 손으로 반드시 이 자를 짓이길 것이고…….
“늦었네.”
요수는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두머리는 귀가 어두워 듣지 못했다. 도망칠 기회만 엿본 탓이었다. 발을 뒤로 빼고, 몸을 낮추고. 하얀 갈대숲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칠 차였다. 울퉁불퉁하게 변한 땅에서 뿌리가 치솟았다. 음심을 알아차린 듯, 우두머리의 다리를 묶고 팔 한쪽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저 먼 뒤편에 꽂혔던 요수의 시선이 돌아왔다.
“죽이려면 차라리 깔끔하게……!”
이러한 치욕 없이, 고통 없이. 그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요수가 왔다. 사지를 무참히 찢어서 죽이겠구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한데 사지는 붙었고, 대신 손톱 밑으로 상대의 살점이 고였다. 그 생소한 느낌에 눈을 떴다. 자신의 사지가 찢겼으면 찢겼지, 당최 할퀴고 파낼 입장이 아닌 것을.
이 작자는 정신을 싼값에 판 것일까. 자신의 손톱을 이용해 그 어깻죽지에 상처를 내는 게. 죽음이 목전에 있는 상황임에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지, 지금 이게…….”
우두머리가 이 땅에 마지막으로 흩뿌린 말이었다. 용도가 다한 듯, 뿌리는 그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가 목을 비틀어버렸다. 긴 생에 비해 허망한 끝이었다.
목 없는 사체를 바라보던 요수는 긴 숨을 뱉었다. 곧 그의 아내가 지나갈 길이었다. 수습하듯 가지와 뿌리를 땅 밑으로 집어넣었다. 핏자국은 흙으로 덮고 사체는 땅 밑에 묻었다. 저녁의 계획이 찌부러졌다. 느긋이 나무 위에 앉아 아내를 훔쳐볼 작정이었다. 한데 방해꾼들의 피로 저녁을 물들였으니, 두루 부정 타기 딱 좋은 노릇이 아니던가. 요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제 아내가 보였다.
일이 고된 모양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고단함이 굴러다녔다. 여인은 새삼스럽게 어여뻤다. 동글한 눈매나 밀밭 같은 머리칼,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나 축 처진 어깨.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또는 차례대로. 요수의 눈은 끊임없이 여인을 읽었다.
요수에게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자. 우습게도 그의 아내였다. 골골거리면서도 퇴치 일을 꼬박꼬박 맡고, 제 목숨이 서른 개인 양 굴곤 한다. 남들 앞에서는 사리 밝은 퇴치사인 것처럼 지내다가도 저리 혼자 있으면 시무룩해져 돌아오곤 했다. 아마도 진이 빠졌거나 치른 일에 비해 보수가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요수는 갈대밭 너머로 제 아내의 걸음을 지켜보았다. 아교처럼 달라붙은 시선을 아내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힘없이 민가로 내려간다. 요수의 눈길은 아내가 사라지자마자 거두어졌다. 요수는 어깻죽지에 난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 피가 철철 흘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 쌓인 산등성이에 해가 내려앉았으니, 비로소 방탕한 아내에게 돌아갈 밤이었다.
***
구전되어 온 말이 있지 않은가. 만남은 둘만의 일이라지만 혼사는 양가의 일이라고. 좋아서 앓고 살 때는 말이지, 상대의 말이나 눈길이 전부이고. 훗날 부부라는 선을 밟는 순간부터 말은 달라진다. 그간 연정에 가려져 있던, 서로의 주변을 마냥 못 본 체하기 어려운 것. 아마 것부터 시작일 터다.
구경꾼 없는 혼례를 치른 나조차 알 만한 소리였다. 요수의 양친은 땅 밑에 봉해진 지 오래고 내 아버지야 영영 모를 테지마는, 우리 문제는 인척이라기보다 종에 관한 것이었다.
첫해는 순조로웠다. 손끝만 스쳐도 정분난다는 농조가 더는 농조가 아님을, 낯짝만 보아도 배부르다는 뜻을, 그 간질간질한 전부를 납득했다. 달다 못해 알알한 봄, 뙤약볕이 도리어 싱거운 여름, 모처럼 가을은 풍족하며 겨울은 훈훈했다. 요수가 봄철 꽃을 따와 엮은 화관은 귀했고, 한여름 초가에서 깎아 먹은 참외는 구첩반상 저리가라였고, 빨간 낙엽을 서로에게 뿌릴 때는 우스웠고, 겨울 노을 아래서 이듬해를 기다릴 때는, 그때는, 찬바람에 이가 시린 줄도 몰랐다.
단 가마에 눈처럼 바뀐 것은 금년 봄부터였다. 여름에 꽃핀 인연이 이렇듯 흘렀으니, 미주알고주알 캐지 않아도 상대를 곧잘 안다고 믿었다. 하나 내 식견이 좁았음을, 요수라는 종을 얕보았음을 깨우쳤다. 별것 아닌 일로 말이다.
무더운 여름이 담을 넘나들락 말락 하던 날이었다. 퇴치 일은 허탕에 무고한 헛걸음에, 눈 시린 볕 아래서 구시렁거리며 귀가하던 차였다. 낯익은 대문을 봇짐 진 사내가 열고 나오는데. 보아하니 내 집이고, 아마 서신을 전달하러 온 이 같았다.
‘저 집에서 나오는 길이요?’
‘그렇소만.’
‘서신?’
봇짐을 한 번 고쳐 맨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기야 의심스러울 법도 하지. 나는 바로 패를 꺼내어 보였다.
‘내 앞으로 온 것 같아 묻는 거요.’
그제야 사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그 도령에게 전달을 했소. 뒷산에서 온 것인데…….’
‘도령?’
그 호칭이 우리 집 대문에서 나올 수 있는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는데 때마침 아버지가 마당을 쓸고 계셨다.
‘아버지. 서신 온 것 없어?’
‘서신?’
아버지는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초저녁부터 죽치고 앉아 있었지만 서신은커녕 사람 발길조차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경우밖에 없지 않은가. 내 서신을 중간에서 훔칠 자가 둘도 아니고.
나는 방에 들어앉아 혀를 찼다. 아주 줄수록 양양이었다. 이 막된 요수를 어찌 손보아야 좋을까. 팔짱을 끼고 발끝을 까닥이는 찰나, 왼편에서 싸한 기운이 엄습했다.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어긋남 없이 예상대로였다. 신출귀몰한 양기석이 내 무릎을 베고 누운 게 아니던가. 나는 분함을 누그러뜨렸다. 웬만하면 싸움의 불길을 꺼트려 볼 요량이었다.
‘스승님이 보낸 서신. 어디다 둔 게냐.’
‘나는 모르는 일이야. 자경아.’
‘이 집에 도령이라고 불릴 자가 너 하나밖에 더 있나?’
‘나 하나밖에 없지.’
‘말장난 말고. 어서 내보여 봐.’
하나 내가 내민 손에 양기석은 제 입술을 붙여왔다. 또 어물쩍어물쩍 농으로 넘어갈 심산이었다. 여태껏 스승이 주야장천 보냈다고 한, 나는 받지 못한 서신이 이놈 안주머니로 간 것이었다. 허구한 날 전달하는 자만 닦달했지 무언가. 엄한 사람을 쥐 잡듯이 잡은 과거가 창피할 뿐이었다. 놈은 뻔뻔하게 한술을 더 떴다. 서신을 토해내기는커녕 스승 뒷소리에 정성이었다. 임자 있는 처에게 서신을 보냈다나 무어라나.
한 해간 순하던 양기석이 바뀐 것은, 그러니까 아버지가 중신아비 노릇을 할 때였다. 무보수로 퇴치해줬더니 고맙다는 인사차 두어 번 들른 사내가 있었다. 나와 동년배이고, 또 아버지 눈에 찼던 모양이었다. 당신이 나서서 맺어주려고 안달복달이었으니. 나는 한철에 식을 주책이라고 보았으나 요수는 아닌 눈치였다.
‘자경아.’
‘응.’
‘아이를 원해?’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중매 얘기를 흘린 그 밤에. 요수는 슬그머니 잠자리로 들어와 물었다. 나는 엄지로 요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훑었다.
‘아니.’
어차피 백날 빌어도 입만 아플 바람이었다. 몰래 배필을 탐하는 이때야말로 내가 가질 극치일 것이다. 하나 양기석은 부족한 듯 물어왔다.
‘혹시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예상치 못하게. 아이를 가지고 싶으면.’
‘내가?’
요수는 듣고픈 말만 쏙쏙 새길 놈이었다. 한 말 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성싶었다. 어떤 기막힌 말로 이 밤을 건너뛸 수 있을까 고심하는데, 요수는 내 침묵을 달리 해석한 눈치였다. 눈을 내리깔고 목소리를 낮춘다.
‘다른 사내를 품을지 몰라. 그렇지?’
요수는 이따금 섭섭하게 물어왔다. 새끼를 배고 싶으면, 다른 아낙처럼 제 서방을 끼고 다니고 싶으면, 혹은 퇴치사인 내가 저를 싫증 내거나. 종종 묻어나던 불안감이 물 위로 떠오르고 말았다. 것도 흙탕물만 일으킬 싸움까지 끌고서.
요수는 틈날 적마다 내게서 답을 구했다. 혀로 얼마든지 거짓을 구워낼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요수만이 악특하다고 믿는 건, 어찌 보면 놈의 오만함일 지도 모른다.
양기석은 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외며 어르고 구슬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진즉 내 손을 떠나고 남은 사안이었다. 어째 달이 넘어갈수록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연정의 단맛보다 훗날의 울적함이었다. 물론 하루하루 내 남은 날을 세어보는 양기석의 절박함이란, 그 홀로 될 처지란, 내가 감히 따져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하니 껄끄러워지고 말았다. 그에게 후년 봄에 무얼 하자, 후년 가을에는 무얼 먹자, 딱 붙어 떠들어대도 이래저래 시들할 뿐이고. 요수는 나날이 작아지는 내 삶을 염려하고, 근심하고, 종내는 하루의 끝을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그 씁쓸한 여름을 지나 가을이, 결국 겨울이 왔다.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이라. 가락지를 끼던 그 밤을 장식한 계절이었는데. 금년 겨울은 온 듯 만 듯 맞이할 성싶었다.
“아야. 자경아.”
수저로 멍하니 밥그릇만 긁고 말았다. 아버지의 손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가버린 딸의 넋을 되찾고자 한 손이었다.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밥상을 차려낸 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시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한술도 뜨지 않는 일이 잦으니.
“얼른 들어.”
“응.”
나는 은근슬쩍 시큰한 손목을 돌렸다. 괄괄한 황소 요수를 겨우 잠재웠으나 눈치 없는 의뢰인이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렸다. 제 분풀이로 요수를 친 것이다. 순탄하던 봉인이 난항을 겪은 것도 그즈음. 이를 갈던 요수가 봉인을 거부하고 나는 맨손으로 막아서고. 손목이 잘려 나가지 않은 게 용한 일이었다.
“아야.”
아버지가 국을 뜨다 말았다. 아궁이 불 때울 장작은 부족함 없고 배곯는 법도 없고. 하나 아버지 얼굴은 윤기가 없었다. 아마 이 연고 없는 송덕으로 온 것이 적적하신 모양이다. 그나마 근방 주막에서 반주하거나 소일거리 삼아 텃밭을 꾸리시거나, 기를 쓰고 송덕에 정 두려는 것으로 보였건만. 여전히 딸의 퇴치만큼은 심란한 기색이셨다.
“또 요수한테 맞은 것이여?”
“아니야. 엊저녁부터 어깻죽지가 결리는 것이. 잠을 잘못 잤나 봐.”
“거, 숟가락도 제대로 못 들고 있고만.”
“점심에 떡을 먹어 그러한가. 입맛이 없어서.”
그 낯짝에 기름기 도는 의뢰인을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남의 잔칫상을 엎어도 유분수지. 한 군데라도 상하면 아니 된단 말이다. 아버지는 흙빛이 되고 내 서방은 싸늘해진다. 성한 꼴로 들어오고 싶지 않을 리가. 하나 금일은 글러 먹었다. 저 아버지의 주름 진 눈가를 보아라.
“자경아.”
“응.”
아버지는 새까맣게 모르셨다. 내가 어찌 퇴치를 하는지, 요수라는 건 어찌 생겼는지. 모두 송덕에 온 뒤부터 아신 것이었다. ‘깨지고 다칠 게 무어냐.’아버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물어왔다. 재수 옴 붙은 날은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데. 아버지의 입장에서야 하늘이 노래졌다가 파래졌다 하는 충격일 터였다.
“퇴치하고 와 곤할 텐데. 어여 자.”
아버지는 씩씩한 기상으로 상을 들었다. 하나 아버지의 그릇에는 밥이 반이나 남아있었다.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느라 제대로 드시지 못했을 텐데. 쓰린 마음에 소금이 뿌려진 듯하다. 아버지는 애써 내게 웃어주셨다. 당장 퇴치를 그만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텐데도. 그 인자한 눈은 구석구석 내 몸을 훑다가 이내 손가락에 멈추었다. 백옥 가락지를 낀 그 손가락이었다.
“아야. 그거 가락지 아니냐?”
아차차 싶었다. 매번 빼고서 들어왔었거늘. 나는 재빨리 등 뒤로 숨겼으나 아버지의 뿌듯한 시선은 끈질겼다.
“짝이 있는 게지. 그치?”
“짝은 무슨…….”
“가락지 색이 참 고와. 누가 우리 자경이한테 고런 고운 가락지를 끼워줬을까.”
사실 아버지의 이루고픈 바람은 그것일 터였다. 내가 얼른 족두리 쓰고 시집갔으면 하는 눈치셨다. 몸이 깨지는 것보다 시집살이가 낫다는 뜻이렷다. 지아비 품에 의지하다가 보면 퇴치도 시들시들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나가다가 고와 보여서 내가 산 거야.”
대충 둘러댔지만 아버지의 눈치가 빤하지 않은가. 내숭꾸러기 대하듯 나를 흘깃흘깃하다가 웃어젖히셨다. 내가 사내를 만나는 기미만으로도 좋아 죽으시려고 하다니. 아닌 척한 아버지 역시 뒤로는 꿍꿍이가 있음이었다.
“곤하다. 나 그만 잠자리 들러 갈게.”
“그려. 이부자리 다 펴놨어.”
아버지의 입술과 눈은 따로 놀았다. 입술은 내게 인사하나 눈은 가락지에 가 있으셨다. 적잖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점순이도 귀순이도 옆구리에 애를 끼고 다니는 걸로 보건대, 아버지의 동년배는 손주 앉혀놓고 재롱 보겠지 싶다. 물론 아버지의 꿍꿍이가 손주는 아니지마는 불효막심한 딸은 맞지 않은가.
자식은 달랑 나 하나요. 친인척이라고 해봐야 다 뿔뿔이 흩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나한테 살가운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 사후에 이 땅을 어찌 살아갈까, 뿌리 깊은 근심이 자리 잡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나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정인은 있었다. 오히려 내가 죽은 훗날을 걱정해야 할, 그러한 정인이. 나는 가락지를 손바닥으로 덮은 뒤에 일어섰다. 하루 한 번은 생각하게 된다. 점심을 먹다가 문득, 퇴치를 하다가 문득, 이처럼 가락지를 만지며 문득. 문득문득 머릿속을 침범하여 한바탕 휘젓고 떠난다.
그 뒤죽박죽 엉킨 그리움은 밤마다 절절해졌다. 나는 문지방을 넘으며 기대했다. 그는 이슥한 밤이 되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오는 이였으니까. 다쳤다고 앙탈인가 싶지만 지친 몸을 그에게 치대고픈 건 사실이었다. 내 연약하고 말랑한 속내를 보여줄 수 있는 자. 터놓고 낭군밖에 더 있으랴.
“기석아.”
하나 아버지가 펴놓으신 이부자리 위에 인영은 없었다. 상시 저 이부자리 위에 누워서 나를 반기던 요수였거늘. 나는 창에 다가가 양문을 열었다. 벌어진 사이로 달빛이 쏟아졌다. 그는 오지 않았다. 왔다면 하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을 터. 텃밭 위에 눈만 쌓였을 뿐, 내 님이 오실 나무는 간데없다.
안 그래도 시큰거렸던 손목이 더욱 말썽이었다. 나는 숨을 누르고 창밖만 바라봤다. 언제고 요수가 올 것처럼 주저앉아 달을 본다. 내가 없는 낮을 보낸 그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나타날 기미가 없다. 유난히 보고픈 날이었는데. 세간의 법도로 묶이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가 마중해주고, 함께 눕는 것이 당연했음 싶었다.
욕심인 것을 안다. 그러하니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자르고 쳐내도 싹이 움트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물이 움츠러든 겨울, 아랫목 위에서 정인을 끌어안고픈 건 당연하지 않겠나. 나는 바깥에 입김을 뱉은 뒤, 천천히 창의 양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요수의 걸음이 늦는가 보다.
“아.”
두툼한 팔이 내 허리를 쑤욱 감싼다. 뒤를 덮는 온기에 마음이 후끈해지고 녹아내렸다. 그 예의 없는 손은 내 허리를 타고 올라와 손등에 얹어졌다. 아픔을 아는 듯 손목뼈를 다정하게 쓸어 만졌다. 약초 바르는 것도 아닐진대 손목의 시큰거림이 잦아들다니. 손목이 아니라 마음이 다친 것인지.
“늦었다. 다 아프고 나서 쓰다듬으면 뭐해.”
민망스러움에 거칠어졌다. 뒤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날숨이 한풀 꺾인 무더위 같았다. 적당히 덥고 적당히 견딜만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웃는 그의 눈을 보다가 저절로 시선이 밑을 향했다. 향긋한 살 내음에 피비린내가 섞였기 때문이었다. 오밤중에 놀랄 일이 있을까 싶었다. 살짝궁 벌어진 그의 윗옷 틈으로 어깻죽지를 보기 전까지.
“이게 무어야.”
그에게 끌어안긴 채로 뒤돌았다. 마주 보고 안은 탓에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지만 설렐 겨를은 없었다. 그의 어깻죽지가 찢어져 있었다. 심지어 채 같은 손톱자국이 난, 살점마저 떨어진 상처였다. 웬만한 자잘한 건 내버려 두면 없어질 그였다. 어떤 자일까. 이리 피까지 볼 험난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윗옷을 거칠게 끌어내렸다.
“염려해주는 거야?”
한데 이 요수의 행실이 불량했다. 꼭 일부러 다치고 와서 내 반응을 확인하는 양 눈웃음 살살 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몸에 난 상처는 안중 밖이고, 안달 난 내 얼굴만 즐거이 살폈다. 하면 의심이 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나는 말려둔 약초를 찾다 말고 그를 쏘아봤다.
“어쩌다가 이리 된 것이야.”
“입 맞춰주면 알려줄게.”
“너, 정말.”
이런 사고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내 눈길을 끌지 못해 조급한 사내애처럼 굴었다. 몸이 상하는 것은 다반사에, 퇴치사나 무녀 앞에서 봉인을 당할 듯 아슬아슬하게 요기를 풀거나. 내 심장을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하게 만들고, 기어이 눈물까지 뽑아야 만족스러워하는 놈이었다. 나는 화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철없는 이마를 맞대었다. 이만하면 진실을 불 줄 알았으나 그는 시큰한 내 손목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내가 염려로 목이 졸리는 게 보기 좋아서 그러해?”
손톱 거스러미로 인한 상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어쩌자고 매번 흉측한 상처를 달고 다니면서 괴롭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속이 탄 나는 그의 어깨를 조심히 어루만졌다. 스스로 나을 수 있음에도 나를 애태우는 터였다.
“어서 가라앉혀.”
“싫어.”
“너.”
그전까지 밑바닥에 깔려있던 의심이 응어리 채로 치솟았다. 머리끝까지 닿아 불을 지피는데도 요수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째서. 왜 싫은데.”
“어째서일까.”
“지금 나랑 농을 하자는 건가?”
나를 끌어안은 그의 팔을 매정하게 내리쳤다. 달큼하다가도 이따금 허를 찌르는 작태가 혼란스러웠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종자 같아서 불안했다. 요수는 내가 몸을 비틀며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팔을 더 꽉 조였다. 숨이 가쁠 정도로 그와 몸이 붙었다.
“자경아.”
“놔.”
“너는 내 낮에 대해 관심 없어 하잖아.”
별 뚱딴지같은 이유였다. 역시나 나를 놀린 게 맞았다. 하루에 몇 번이나 그의 하루를, 외로운 낮을 동정한다. 그걸 안다면 이리 까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다부진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당장 놓아.”
“입맞춤도 해주지 않고서?”
“너한테 화나서 해주고 싶지 않아.”
“내가 다칠 때마다 글썽이는 눈을 하는 게 좋아. 그럴 때면 네 연정에 끝이 없을 것 같거든.”
그을린 마음 위에서 요수가 웃는다. 요사이 연정을 운운하는 말이 늘었다. 가을이 죽고 겨울이 오고, 또 한 해의 봄이 열린다. 나는 철마다 그에 대한 연정을 윤이 나게 닦는다 하나 요수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제 동료 위에 쌓여가는 눈처럼 요수의 정은 냉정했다. 그는 약조할 수 없는 우리의 사이를 의심하고 경계했다. 그 날카로운 경계는 이처럼 자신을 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면서.”
내 연정은 끝이 보인다. 인정한다. 죽 식는 것처럼 식든, 죽어서 소멸되든. 그에게는 끝이 보이는 연정일 게다. 하나 다 알고서 우리는 발을 담갔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물임을 알면서도 한쪽씩 서로의 영역에 발을 담근 셈이었다.
나도, 그도 번뇌가 있었다. 하루는 요수가 침상에 누워 종일 성을 내기에 물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러하냐고.
‘네가 영영 내 곁에 있으면 싶어서.’
한 해는 그저 무시로 넘겼다. 하나 금년은 유독 끈질겼다. 서로가 중할수록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어쨌건 내가 그를 버리고 떠나는 꼴이 되고 말 테니.
‘기석아. 방도가 없잖아.’
‘있다면.’
여느 때처럼 그를 달래려고 한 말이었다. 하나 요수의 눈은 독을 품었다. 마치 해묵은 원한을 풀길 기다린 것처럼. 그때 우리는 봄바람 아래에서 몸을 섞고, 발가벗은 채로 누운 상태였다. 요수는 제 상체를 내게 들이밀었다. 내 손을 잡고, 이끌어 제 가슴팍을 만지게 했다.
‘느껴지지 않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무얼 느끼라는 겐지. 그의 살갗에는 잔가지처럼 우둘투둘한, 늘 보던 흉터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몸에 요수를 봉인시킨 흔적인 줄 알았던 그것.
‘무얼 느끼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요수는 너그러워졌다.
‘자경아. 한 마디만. 나와 같이 있겠다는, 그 한 마디만 허락하면 돼.’
본능으로 느꼈다. 그의 살갗에 저 잔가지 같은 것들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으려는 걸. 나는 억지로 손을 내렸다. 말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친 채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수의 기대하던 눈빛이 죽었다. 감정이 빠져나간 뒤, 그가 음산해진 낯으로 물었다.
‘내가 강제하길 원해?’
‘해 봐. 어디.’
봄날에 칼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그날부로 삐걱거렸다. 며칠 뒤에 낯을 바꾸고 찾아온 요수가 철썩 붙긴 했어도, 어딘가 사나운 인상은 두고두고 기억나는 법이었다.
나는 금일도, 모레도, 글피도 그의 동족을 잠재울 사람이다. 요수는 내가 죽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가라앉힐 종이었다. 하나 그러자면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나는 그것까지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그도 감수해야 할 것은 감수해야 했다.
“네 낮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야. 무얼 먹었을까, 무얼 하고 있을까. 전할 수만 있다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아.”
“한데.”
“너한테 온종일 치대고 싶은 마음이 있어. 하나…….”
나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연정에 대한 불안으로 그의 눈동자가 냉담해졌다. 한겨울 바람을 쐰 뺨은 몹시 서늘했다. 나는 발돋움해 그의 입술을 훔친 뒤, 그 여린 뺨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내 삶이 길지 않다는 게 서글펐다. 그가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안다. 얼마 없을 내 삶이나마 온전히 자신의 손에 쥐고 싶은 것일 터였다. 하나 그러자면 나는 포기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연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를 위해 다 포기하고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것부터 없애고 이야기하자.”
나는 그의 상처 위에 손을 가만히 올려두었다. 요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반대편 손을 집어 들어 입술을 댔다. 내가 가락지를 끼고 다니는 그 손이었다. 그는 가락지가 끼워진 부분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내 수천 개의 말보다 그를 위해 끼고 다니는 가락지 하나가 위안이 된다는 것처럼.
나는 조심조심 그의 상처를 쓸었다. 요수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손길 한 번에 반을 지우고, 입맞춤에 나머지 반을 지웠다. 나를 제대로 휘어잡아 놀고 있었다. 하나 화낼 수 없었다. 나를 진득하니 바라보는 시선에는 불안이 고여 있었다. 다그친다고 해서 사라질 불안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했다. 진심을 담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삼키고, 모조리 가질 것처럼 입 안을 헤집는다.
“자경아…….”
가만히 입맞춤을 받던 요수의 눈이 언뜻 풀어졌다. 요수는 천천히 내 허벅다리부터 주무르듯 만져, 살금살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귓불이나 뺨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입맞춤은 이어졌다. 차마 닫지 못한 창가 사이로 흰 눈발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 등에 닿아 녹는 눈송이가 느껴진다. 하나 겨울의 야성을 간직한 그 눈송이조차 이 열기를 식혀주지 못했다.
“하아…….”
그의 붉은 요기가 바닥에 깔린다. 기어가고 기어가 문에 덕지덕지 치덕거린다. 잠든 아버지의 귀에 우리의 부정이 들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의 손이 내 윗옷을 벗겨냈다. 봉긋한 젖가슴에 곧장 요수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산딸기보다 붉은 혀가 살갗을 핥고, 가지런한 이가 젖가슴을 베어 문다. 혀로 녹여 먹는 듯한 놀림에 나는 가슴께가 저릿했다.
요수가 내 허리를 안아 들었다. 아버지가 고이 펴주신 이불 위에 나를 드러눕혔다. 그리고 혀를 입 안에 넣는다. 그 부드러운 혀가 나를 훑어냈다. 요수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내주었다.
그사이 요수의 손은 내 속곳을 잡아당겼다. 입맞춤만으로 젖어 든 것을 아는 모양이다. 그의 차가운 손끝이 내 밑을 툭툭 건드렸다. 그 얄궂은 움직임에 음부는 물기를 비친다. 손가락의 주인이 주는 농밀함을 아는 탓이었다. 요수의 손가락은 간 보듯 속살에 담갔다가 빼내 본다. 무언가 그 손가락에 묻어 나갔다.
“자경아.”
“으, 하아…….”
“이것 봐.”
요수는 제 손가락 끝에 묻은 축축한 걸 내게 보였다. 내가 흘린 것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피했으나 요수는 웃으며 아래로 손을 옮겼다.
“아!”
손가락 두 개가 찌르고 들어왔다. 찌걱찌걱. 음탕한 소리를 내벽 곳곳에서 이끌어냈다. 자비 없는 손길이지만 언제나 희락을 준다. 살짝 긁고 크게 휘저으며 돌리고. 이다음을 아는 음부는 오므라들며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은밀한 단속에 내가 창피해질 즈음, 요수는 혀로 제 마른 입술을 적셨다.
“해줄까. 목으로 넘기면서.”
“하, 읏…… 무엇을.”
“자경이가 흘리는 거. 손가락만 넣으니 아쉽다고 하네.”
음부에 정박한 손가락의 끝이 구부러졌다. 갈퀴처럼 휜 그것을 굽혔다 폈다, 느리게 반복하며 물길을 텄다. 허리가 꼿꼿해지는 만큼 그의 손은 느려졌다. 요수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안다. 내가 울며 빌며 제게 사정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발 넣어 달라, 울면서 빌기를. 아마 작정하고 덤빌 터였다. 그는 늘 그래왔으니까.
이럴 때는 수다스럽지 않은 게 좋았다. 끌면 끌수록 잠 한숨 못 자게 괴롭히는 것이 요수였다. 달거리를 빼고 끼니 챙기듯 잠자리를 가졌다. 상대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고 말았다.
“이리 와.”
요수의 머리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찾는다. 그리하면 요수는 순순히 제 입술을 내려주었다. 그걸 삼키고 혀를 얽는다. 요수는 인내심이 짧다. 갈수록 동작은 거칠어지고 숨은 가빠진다. 그때를 노려야 했다. 나는 무릎을 들어 그의 툭 불거진 하반신에 가져다 댔다. 무릎을 앞뒤로 비비면 요수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어댔다. 제 양물을 욕심껏 누르기 위해서. 요수는 이를 악물었다. 앙증맞은 반항이었다.
“자경아. 느긋하게 가지고 싶어. 응?”
“또 새벽이 떠오르는 걸 생눈으로 보라고?”
“자경아…… 그만.”
싫으면 허리 짓을 그만해야 할 터. 그럼 될 일이었다. 하나 못된 요수인지라, 내 무릎에 양물을 비비적거리는 짓을 반복했다. 그 짧은 접촉에 성난 요수였다. 아예 내 발목을 붙들고 무릎 정강이가 튀어나온 곳에 제 양물을 치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도긴개긴이었다. 입술을 벌리고 제 양물을 문지르는 모습에 홀린 걸 보면.
“아…….”
그는 아직 내 음부에 손가락을 쑤셔 넣은 채였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축축해진 밑을 알아버린 눈이었다. 점점 손가락을 깊숙이 넣는다.
“아, 아으…….”
푹. 내가 우는 부분을 누르고 떠나갔다. 손가락을 빼내는 찰나에 조금 구부려서, 나약한 둔부를 흔들도록 했다. 빼낸 손가락을 제 혀에 가져간다. 붉은 혀가 젖은 손가락을 휘감는다. 그가 정신 나간 요수처럼 웃었다.
“안 되겠다.”
그것이 경고 같은 거였다. 요수는 내 무릎에 잇따라 문지르던 양물을 치웠다. 대신 내 발목을 더 세게 쥔 다음, 들어가기 편하게 양옆으로 벌려놓는다. 아랫바지를 다 벗지도 못한, 흉흉한 양물만 꺼내놓은 채로 다가왔다. 내 어깨에 잇자국을 내고, 뺨에 제 코를 비빈다. 그렇게 정신을 쏙 뺄 이유가 있었다.
“아!”
“하…….”
받는 자는 비명을 지르고, 넣는 자는 안도한다. 그 큰 것이 차근차근 들어오지 않고 제 뿌리까지 삼키라며 안달이었다. 받아들이는 데 이골이 난 음부조차 버거워 울었다. 내 무릎에 한 번 싸지른 양물이었다. 받은 순간 하얀 씨물이 엉덩이골에 뚝뚝 떨어졌다. 흘린 음부의 물과 합쳐진다. 방탕하고 난잡한 색이었다.
요수는 끝에 끝까지 밀어 넣고 기다렸다. 그가 뱉는 더운 숨은 모조리 내 차지였다. 어깨에 쏟아지고, 머리칼 사이사이로 들어갔다.
“갈수록, 왜 부드러워질까.”
그가 질끈 눈을 감고 있는 내 뺨을 제게로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라는 의미였다. 나는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요수의 눈이 여전히 탁한 상태였다.
“무어……?”
“매일 씨물을 발라 그러한가.”
답할 정신은 없었다. 다급하게 허리를 흔든 요수 때문이었다. 성의 없이 제 허리를 빼내더니, 속살을 짓쳐 가를 때는 사악하게 웃었다. 푸욱, 누르고 들어오는 그의 양물이 느렸다. 그는 즐기는 것 같았다. 양물을 무심히 데려가고, 찌를 때는 거칠었다. 그 간격이 점차 짧았다. 찌르고 들어와 속살을 힘껏 짓이기고, 내가 울먹이는 것을 보고 웃고. 다시 빼내면서 표정을 없애고.
“하, 으읏…….”
요수는 가능한 이 밤을 느릿느릿 끌어나갈 생각인가 보다. 제 성질에 못 이겨 두세 번 박아 넣긴 하였어도, 금세 진정한 듯 문대며 나갔다. 일종의 심통이었다. 내가 저를 내버려 둔 낮에 대한 복수였다. 요수는 내 삶 전체를 바랐다. 매번 밤만 주고서 먹고 떨어져라 하는 것 같다며, 그렇다면 떨어진 밤을 느긋하게 잡수셔야겠다며. 별난 무뢰한처럼 밤을 빼앗는 것이었다.
“아, 아……!”
나는 느린 몸짓에도 절정을 겪었다. 간악한 요수의 목을 끌어안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요수는 내가 끌어안으면 끌어안는 대로 이끌려 내려왔다. 내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고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다. 그리고 양물을 깊게 처넣었다.
“아, 으!”
“좋지.”
“너무, 너무 곤해…….”
“좋아 죽겠으면서.”
거북스럽게 들어와 쿵 찧고서, 뱀처럼 스르륵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다시 한번 쿵, 스르륵 빠져나가고. 요수는 갈증 나는 듯 내 뺨을 깨물더니 다시 허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앙알거리는 소리밖에 줄 것이 없었다. 요수의 등허리든 무엇이든 꼭 붙잡았다.
“아, 흣, 으!”
정신없이 박아대고 있었다. 떠는 다리를 어디에 둘지 몰라서 그의 허리를 감았다가 풀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데 안간힘이었고, 요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반신을 밀착했다. 숨이 요수의 어깨로 쏟아졌다. 요수의 숨은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의 달큼한 숨 냄새가 사방 가득이었다. 나는 입술을 물고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푹푹푹. 찌르는 그의 양물이 부풀 대로 부풀었다.
“자경, 아…….”
양물은 싸지르는 중이었다. 하나 그는 해사한 얼굴로 허리를 흔들었다. 뺨을 가만두지 못하고 물어놓고서는, 언제 무례했냐는 듯 내 머리칼에 코를 박고 숨을 골랐다. 오가던 양물이 후희를 즐기듯 느릿해졌다. 그는 싸지른 씨물을 양물에 묻혀 끄집어내고, 다시 음부로 들어가 묻히고. 그의 말마따나 새끼를 배지 않는 것이 용한 몸짓이었다.
“조금 무거우니…… 옆에 누워.”
나는 나를 깔아뭉갤 듯한 요수를 밀어냈다. 요수는 순순히 안은 손을 풀고서 내 옆자리로 내려갔다. 그러자 양물이 쑤욱 뽑혀 나간다. 별난 느낌에 내가 허리를 떨었다. 요수는 빤히 지켜보고 있다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다시 넣어?”
“미쳤구나.”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동이 트자마자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오늘은 이쯤하고…….”
부드럽게 내 머리칼에 엮이던 그의 손이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싸늘해진 눈이 내게 머물렀다.
“거기가 어딘데.”
“말을 하면 네가 알까.”
“말을 해야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는지, 모르는지.”
“또 따라오려고.”
“네 밤밖에 가지지 못하는 서방인데. 이 정도 간섭쯤이야.”
그에게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 날이 늘었다. 그는 항시 나를 감시하려했고, 나는 그것이 두려워지는 차였다. 무녀나 도인이나 광주리 노리는 참새처럼 널리고 널려있는데. 심지어 아는 척하며 내 옆에 선 적도 있거늘. 기척을 숨겨봤자 아닌가. 만에 하나라도 들켜, 봉인당할 수 있었다. 속이 울렁이고 어질어질한 이야기였다.
한데 이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떼어놓고 간 아내 취급이었다. 산이 거꾸로 뒤집힐 만큼 억울하나 어쩌겠는가. 그도 나처럼 억울한 면이 모여 이리 된 것이겠지. 나는 뭉친 이불을 끌어다가 그에게 덮어주었다.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고 내일을 도모했다. 그만 자야 할 시간이었다. 머뭇대면 일에도 차질이 생길 터였다.
“자자.”
늘 그랬듯이 요수는 노여워했다. 내 마음은 그의 아래이고, 손해는 제 차지라고 계산한 모양이었다. 내 얼굴을 구멍 낼 기세로 보고 있다. 정인만 아니었어도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죽일 눈이었다. 나는 그의 등을 쓸며 화를 풀 당과 하나를 쥐여 주었다.
“글피쯤이면 바쁜 일이 다 마무리가 되니. 어디 네가 가고픈 곳에 놀러 갈까.”
그쯤이면 풀려서 헤실헤실할 줄 알았던 요수는 내 뺨만 눌렀다. 한참 말없이 보기만하는 눈에 홀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요기가 자욱한 방 안에서 숨을 내쉬고 마셨다. 내가 곤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글피 후에.”
“응.”
“나랑 살자.”
또 그 말이었다. 사람의 짐을 벗어 던지고 저 하나만 믿으라는 뜻이었다. 홀몸이면 한 번쯤 고민해 볼 법도 했다. 하나 정정하신 아버지, 가닥가닥 어긋 매어진 관계는 어찌하고 떠난단 말인가. 내 발로 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자경아.”
그가 조르듯 말을 걸어온다. 하나 나는 응해줄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 땅이 멸하는 날까지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요수는 신처럼 이 땅에 묶인 자들이었다. 한낱 필멸의 생 따위가 그를 따라잡을 수 없음은 명확했다.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자연스레 제 팔을 골침으로 내주는 요수였다. 그 품이 주는 안락함에 감겼다. 요수가 무어라한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고단함이 떼쓰듯 눈을 닫았다. 요수는 손에 힘을 주었다.
놓아주지 않는다는 듯이. 내 고집이 이기나 제 고집이 이기나 해보자는 듯이. 우리는 양보가 없는 정인이었다. 눈치만 보며, 언제 저것을 자빠뜨릴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 천생연분이다. 그래서 하늘이 짝을 이따위로 지어주셨나 보다.
***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가 배춧국을 내왔다. 텃밭에, 정 들여 키운 배추로 끓인 것이었다. 그 국으로 으슬으슬한 몸을 덥히고 돌아오니 요수는 떠난 후였다. 보통 인사라도 해주고 떠나는 것을. 어젯밤 대답도 않고 먼저 잠든 것에 대한 복수렷다.
요수의 속이나 내 속이나 푸른 멍이 들 대로 들었다. 오는 길에 요수를 녹일 밀과라도 사 들고 와야겠다. 아니면 깍지 끼고 껴안아 장을 보러 나가도 좋지. 구슬릴 미끼야 얼마든지 있었다.
금일 나를 부른 곳은 산등성이 굽이치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거기에 요수 한 마리가 터를 잡고 새끼 치는 통에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보기보다 먼 길이었다. 나귀 한 마리를 빌려, 해뜨기 전에 출발한 참이었다.
끼니를 삶은 나무껍질로 때우는 마을인 데다가 계절은 겨울이었다. 산에 터줏대감인 다람쥐조차 모아둔 밤톨만 끌어안고 동면하는 중인데. 겨울잠 없는 사람이 어디 버틸 재간이 있으랴.
하면 죽을 둥 살 둥 잡아도 시원찮지. 엽전은 없거니와 명물이랍시고 낼 것도 없다. 하나 작금 퇴치사들이 꺼릴만한 그 마을은 문전성시였다. 까닭은 싱거웠다. 나라님의 명령 덕이었다. 고리탑탑한 선왕이 죽고 용포를 물려 입은 자가 꽤 민생을 돌보는 듯한데. 더욱이 난리가 난 곳이 왕비가 요양하는 온천 근처인지라, 혹 귀한 신변에 문제라도 생길까 싶었는지. 부수든 불태우든, 내려가 요수를 속히 잡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왕가의 명은 엽전은 짜지만 명예가 있었다. 하여 명성 좀 날리고픈 퇴치사들은 죄 거기로 몰리는 참이었다. 나는 명성 따위 차고 넘치는 쪽이었고. 것보다 부탁에 의해 끌려가는 입장이었다. 스승의 친우 중 하나가 참가하기로 이름을 적어 냈는데, 하필 팔다리가 골절되는 바람에 일을 망쳤다. 한 번 참가하기로 한 자는 필히 지켜야 하는 터. 스승님께 대신 나가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것을, 내가 엽전 이백 냥을 받고 대신 가주기로 한 사정이었다.
“여기, 여기입니다. 아씨.”
내게 나귀를 빌려준 노옹은 도통 호칭에 대한 감을 못 잡았다. 아씨, 했다가. 무녀님, 했다가. 나는 멋쩍게 삯을 치를 뿐이었다. 꼬치꼬치 호칭에 대해 캐묻고 가르칠 정신이 없었다.
“조심히 내려가시오.”
“아, 예.”
올라오는 길목부터 지저분했다. 나무껍질에 요수의 진액이 묻어난다. 요수가 미끈거리는 살결을 지녔음이라. 한데 요수의 살결이고 나발이고 간에, 산속에서부터 마을 초입까지 이어진 요기가 미약했다. 초가가 옹기종기 모인 중앙으로 들어서자 아예 끊기기까지 하니. 사람의 고혈을 빨아먹는 요수의 행보치고 턱없이 약해빠졌다.
나는 겨울바람이 발가벗긴 나무 앞으로 갔다. 이리 빈 가지를 뻗은 나무를 올려다보니 또 양기석이 생각을 차지하려 든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잡념을 지우고, 나무 겉면에 묻은 진액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냄새가…….”
코밑에 진액을 가져다 대자 썩은 내가 났다. 듣자 하니 요수가 무리 지어서 마을을 점하고 있다 하던데. 그런 것 치고는 기운이라든가 살기라든가 느껴지는 게 없고, 도리어 과시하듯 나무에 묻힌 흔적만 널렸다.
나는 걸음을 다시 마을로 돌렸다. 닦아놓은 것처럼 요수의 흔적이 끊기는 게 말이 되는가. 겨우내 먹이가 없어 이 외지까지 숨어들었을 터고. 하면 사람 내장이라도 끓여 먹을 게 요수라는 것들이고. 요번 것은 제 흔적을 숨기기에 탁월한 듯 아닌 듯 아리송하니.
요수는 퇴치당하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쓴다. 한데 이 무리로 몰려다니는 놈들이 영양 없는 나무만 건드리고, 그네들의 쌀독이나 다름없는 마을을 깨끗이 썼다, 라.
“어허, 이게 누구신가.”
마주치는 이들마다 비리비리하고 야위었다. 그럴 것이다. 겨울 산속에 먹을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요수 때문에 산 밑으로 가는 길도 막힌 사람들이. 한데 퇴치사를 맞이하는 자, 이 촌락의 두령쯤으로 보일 사내는 살집이 제법이었다.
이 촌락의 으뜸이라고 해봐야 나무껍질 벗겨 먹긴 매한가지일 터. 나는 멀뚱히 악수라도 하려는 듯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봤다.
“이 먼 곳까지 어찌 오셨는가.”
“나를 아시오?”
“하하. 이 처자 좀 보게.”
사내는 불뚝한 배를 내밀며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 이내 손바닥을 비비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눈자위가 비열하게 빛났다.
“유명한 퇴치사 아니신가. 계집인데도 여기저기 설치고 다닌다던.”
주위에서 키득거리는 비소가 들렸다. 비열한 퇴치사 놈들이었다. 이미 마을에 눌러앉아 여우처럼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솜은커녕 헝겊을 덧대어 기워 입은 사람들에게 술상이나 다과상을 조른 이들이었다. 제 자식 못 먹이고 못 입히는 아낙들의 원통한 눈길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무너질락 말락 하는 툇마루서 이쪽을 흘깃거린다.
“그쪽이 의뢰인이요?”
나는 사내가 뻗은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수염이 듬성듬성 난 사내는 손을 물리며 대답했다.
“딱 보면 모르겠나. 여기 촌의 주인이나…….”
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구부렸다. 가슴께에서 통통 튀는 불꽃을 끌어왔다. 갓 태어난 수캉아지 혀처럼 빨간 불이 손끝에 붙었다.
[원죄의 술]“지금 뭐 하는……!”
손가락을 사내의 가슴에 꽂았다. 사내는 제 가슴에 파고든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음산한 눈깔만 간신히 돌렸다.
“이게, 뭐 하는, 건가.”
“네가 뱉어낼 게 있지 않나.”
말에 응하듯 사내의 양 볼이 두꺼비처럼 부풀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갰다. 사내의 가슴에 전한 건 순수한 불길이었다. 요수라면 견디지 못한다. 살갗을 긁고 껍질을 도려낸다.
예상대로 사내는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에서 차례차례 쏟아냈다. 등판에 불이 붙은 민달팽이 요수가 물밀듯이 낙하했다. 사내의 쩍 벌어진 입에서 수십의 요수가 흘러나왔다. 적을 부식시키는 요수였다. 진액을 묻혀 살을 상하게 하고 숨구멍을 막는 종류였다.
“아니, 저것이.”
“당장 채비하게!”
뒤늦게 놈팡이들 눈에 요수가 든 모양이었다. 발견한 자마다 허둥지둥 이쪽으로 달려왔다. 곳곳에 잘도 숨어있었다. 멀대 같은 퇴치사들이 신을 찾고 기물을 꺼냈다. 그사이 요수는 발정기의 뱀처럼 뒤엉켜 제 등에 난 불을 끄려고 야단이었다.
원죄의 술이 낸 불은 죄가 사라지기 전까지 타오른다. 결국 요수는 저 불과 일생을 함께한다는 이야기였다. 요수야말로 존재하는 죄악이니까. 하나 익히 아는 것임에도 나는 주춤한다. 그리고 마음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다. 한 요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잠시 마음이 방황한 새, 퇴치사들은 종렬로 줄을 섰다. 가져다 바치기 위하여 공평하게 봉인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등을 돌렸다. 어차피 보수는 다른 이에게 받은 후였다. 명성을 조각조각 나누자고 웅성거리는 꼴이라니. 한시바삐 돌아가는 게 이득이었다.
“이보시오.”
어찌 눈 덮인 산길을 나귀 없이 내려갈까. 속으로 대책을 강구하며 걷던 차였다. 뒤에서 들린 부름은 무시했다. 또 불쾌하게 주절거리겠거니 했다. 여인이 퇴치사를 왜 하냐는 둥. 용맹한 사내에게 신을 물려주라는 둥. 어쭙잖은 시비를 터는 이들이 가끔, 아니지, 자주 있었다.
“이보시오!”
하나 따라오는 목소리는 기똥찼다.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가서 바르작거리는 요수 봉인이나 도울 것이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한데 당황한 나머지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한 명이 아니라 열이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하나는 익숙한 것이…….
“이보시오. 왜 이리 걸음이 빠른 거요?”
“할 말이 뭐요.”
와중에 그 낯익은 사내를 주시했다. 그쪽도 마주친 눈을 떼지 않는다. 기억났다. 수하라에서 만난 자였다. 나는 그 당시 사내였다. 지금은 두루두루 알려진 여인이다. 알아보면 큰일이었다. 곧 경을 치려나. 곤장을 맞으려나. 한데 나와 시선을 교환한 눈이 무심했다. 나를 족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궁덕과 아는 사이요?”
중간에 선 사내가 오지랖을 부렸다. 기름칠한 볏짚 위에서 불똥을 튀긴다.
“저기.”
“궁덕! 자네. 이리 와보게.”
궁덕이라는 사내가 갸웃거리더니 걸어온다. 긴장하여 어깨가 굳었다. 동시에 내 등 뒤로 의미심장한 기운이 볶아쳤다. 그 또한 큰일이었다.
“자네를 아는 듯한데.”
“나를?”
궁덕이라는 이름이었던가. 같은 칸을 썼고 말도 섞었다. 그때는 욱골에서 왔다며 욱골이라고 불리었다. 하나 욱골은, 아니 궁덕은 코만 후비적거릴 뿐이었다.
“우리가 일전에 만난 적이 있소?”
암만 내 머리칼이 어깨까지 길었기로서니 환골탈태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양기석의 요기가 걷힌 후에 그는 수하라에서의 기억까지 빼앗긴 듯했다. 양기석의 몽환술은 거둘 시에 기억까지 가져가 버리니까. 나는 긴장된 어깨를 풀고 고개를 저었다.
“없소.”
나는 눈을 돌려, 처음 말을 걸었던 사내에게 물었다.
“용건이 뭐요.”
“거참. 성미도 급하시지.”
“급하오. 급해서 댁들처럼 요수와 세월아 네월아 못하고. 급해서 할 일이 끝나면 내 길을 가는 거요. 더 할 말 있소?”
사내는 멋쩍은 듯 제 코를 긁더니, 한창 봉인 당하는 요수 쪽을 흘끔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소? 저자가 요수의 숙주인 것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데. 요수의 진액에서 썩은 내가 그리 풍기는 것을. 더군다나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사람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혼자 통통한 것이 말이 된다고 보오?”
명성을 떨친다더니 어디서 얼뜨기 같은 것들만 골라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더 말할 의욕이 생기질 않아 손을 휘저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차였다. 아직 사내는 할 말이 남았는지 내 앞길로 뛰어 들어왔다.
“뭐 하자는 거요?”
“용건 아직 안 끝났소.”
나는 잠시 뒤를 보았다. 아까 내 등을 감싼 것은 분명 요기였다. 지나치는 바람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나를 다독여준 온기는 양기석의 것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다. 이 퇴치사들이 잔뜩 모인 곳에. 아직도 뒤를 밟는 버릇을 못 고쳤다. 사람 피 말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빨리빨리 좀 말할 순 없소?”
“아, 알았소. 알았소.”
사내는 목을 큼큼 가다듬더니 내게 벽서 하나 건넸다.
“이게 뭐요.”
“그곳에서 곧 봉인이 있을 거요. 그것도 대대적인.”
봉인. 대대적인. 나는 끝이 뜯긴 벽서를 펼쳐 들었다. 글로 적힌 대략적인 장소와 구분된 선 안쪽에 이름을 적는 공백이 있었다.
“참가하려면 그게 필요할 터이니.”
나는 눈을 흘겼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묻는 것이다. 사내는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말을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마는. 나는 요수를 봉인하는 것에 꽤 진심이라오. 부모고 형제고 다 요수한테 잃은 터라.”
“해서?”
“남부를 주름잡던 큰 요수라고 하더이다. 이번 봉인에 참여한다는 퇴치사 수만 오십을 넘어가오. 그처럼 대단한 요수를 잠재우는데 당신만한 실력자가 빠져서는 되겠소?”
남부에 큰 요수. 근래 들어 여러 번 전해 들은 것 같다. 도인 하나가 목숨을 바쳐서 봉인을 해 놓았는데, 요즘 그 부근에서 자잘한 요수가 나타난다지. 서서히 봉인이 풀릴 징조라고 했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어찌 됐건 사내의 용건은 이게 다인 듯하니.
“일단 알겠소.”
“좋은 소식 기대하겠소.”
나는 벽서를 대충 소매에 구겨 넣고서 돌아섰다. 이에 대해 스승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아무래도 즉각 결정하기에는 이른 사안이니까. 그리고 그 전에.
이 고삐 풀린 요수를 어떻게 짓찧고 삶아야 하나.
***
저녁상을 차리기 전에 요수와 건너 장터까지 구경 다닐 작정이었다. 요 며칠 기특한 평화를 누렸기도 하고, 또 밀과에 설기까지 사줄 요량이었기에. 뭣보다 한적한 양지에서 눈발을 구경할 여유까지 계산해둔 터였다.
나는 사람이 없는 길로 들어섰다. 머리에 녹이 슬만큼 아는 길목이 아니라 스승이 계신 퇴치소로 방향을 튼 셈이었다. 뒤따라오는 이도 차이를 알았는지 사나워졌다. 내게 숨길 예의까지 구워 먹었나 보다. 왜 그쪽으로 가느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말없이 모퉁이로 돌았다. 스승이 계신 뒷산이 있는 쪽으로.
한동안 밀살하는 것처럼 은밀하던 기운이 티가 날 정도로 찌르고 가르치고. 이쪽 길이 아니라며. 왼편으로 틀라며. 하나 나는 꿋꿋이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갔다. 뒷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었다. 묵묵히 발을 올리는데 뒤에서 후끈한 기운이 끼쳤다. 팔이 휘감긴다. 내 허리는 붙들리고 말았다.
“어디 가.”
나는 고집쟁이처럼 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팔 따위 무시하고 나가려 했다. 하나 그는 자리에 박힌 듯, 더욱 제 팔에 힘을 실었다.
“자경아.”
“…….”
“화난 건가.”
요수는 오만하며 나에게 무례했다. 내 앞에서는 시큰둥하니 있다가 뒤에서 제멋대로 진행하곤 하고. 내가 저를 귀찮아해 그러하는가. 염려하여 전전긍긍하는 걸 빤히 알면서. 다쳐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고. 내 하얗게 질린 얼굴을 꼭 봐야 결이 삭는지.
“지금 네 스승에게 가는 길이야?”
“놓아.”
“왜 그래야 해.”
“너는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나는 네 말을 들어야 하나?”
요수가 용서를 구하듯 내 뒷덜미에 콧날을 눌렀다. 여기서 껌뻑 죽으면 그는 반성 없이 되풀이할 터였다. 혀를 자르는 심정으로 그를 밀쳤다. 하나 그는 밀려 나가지 않는다. 모멸할 욕설 수천 개는 외고 있으나 나는 조용히 삼켰다.
“밤에는 나와 같이 있어 준다면서.”
“놓아. 두 번 말 안 해.”
“이제는 밤에도 밀려나는 거야?”
나는 뒤돌아 그를 할퀴듯 보았다. 품에 안겨서 마주 보니 우리가 퍽 다정한 정인 같았다. 한데 나는 쌍심지를 켜고 있고, 저쪽은 스승의 모가지를 따버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외나무 위 원수를 만나도 이보다 살가울 것이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너는 기어코 나를 찾아왔지.”
“자경이가 걱정되니까.”
“네 생각만큼 나는 여리지 않아. 너한테 지켜달라고 빈 적도, 나를 감시해 달라 운 일도 없지 않나. 퇴치사들이 바글바글한 그곳에 떡하니 기운을 풍기고…….”
“네 생각만큼 나도 무르지 않아서. 한낱 인간에게 기척을 들킬 정도로 내가 무르다고 봐?”
“무르고 단단하고의 문제인가? 네 안위가 걱정된다는 뜻이잖아!”
“나도 네 안위가 걱정되어 그러한 거야. 모르겠어?”
말꼬리가 술래잡기처럼 빙 돌기만 한다. 나는 마냥 서서 그를 째려보았다. 요수는 무표정하게 내 눈길을 받았다. 각각의 입장이 철옹성보다 견고해, 과연 양보라는 게 가능할까 하는 수준이었다.
서로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다. 나는 그의 믿음이 절실했다. 내가 퇴치 일을 해도 사지가 멀쩡하리란 믿음, 스승과 정분나지 않을 거란 믿음, 바랠지언정 변치 않을 내 연정에 대한 믿음. 의뢰를 받고 그의 등에 숨는 퇴치사가 되길 바라는 겐가.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지킬 것. 스승께서 내게 뭣보다 먼저 가르친 것이었다.
애틋함으로 채워도 부족한 세월이었다. 나의 생은 촛농 흐르는 밀초처럼 줄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여 웬만한 사안에는 봐주려 했으나 나는 이 요수의 안일함이 두려웠다. 자신을 과시하다 못해 사지로 찾아가듯이 구는 게.
“자경아?”
삽시간의 일이었다. 나를 포박하던 요수의 팔이 사라지고 부스럭거림은 길어졌다. 발 빠지는 눈 위에 나타난 그림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요수는 제 기척을 빠르게 숨겼다.
“무슨 볼일이 있는 게냐?”
부적을 들고 산을 순회하던 중이었는지, 먹이 손바닥 군데군데 묻은 스승이 나타났다.
“예.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럼 냉큼 올라오지 않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
“오랜만에 그리운 경치를 구경해서 벅차지 뭡니까.”
“실없는 소리 하기는.”
나는 뒤가 가려워 죽을 노릇이지만 애써 웃었다. 스승은 혀를 두어 번 차더니 올라가자는 듯 몸을 틀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한 번을 돌아보지 못했다.
***
“남부라면 율곡도를 말하는 것이겠구나.”
“예. 아십니까.”
“알다마다. 도인 하나의 목숨과 맞바꿔서 겨우 잠재운 요수 아니더냐. 작금은 그만한 실력을 가진 이가 나타나지 않아 떼로 몰려드는 것일 터고.”
“그렇게 대단한 요수입니까?”
“참여한다는 퇴치사만 오십이 넘는다고 들었다. 나한테도 와달라고 귀띔을 넣어왔지만 고민하는 중이었지.”
스승은 어린잎 달인 차를 내 앞에 밀었다.
“갈 생각이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왕께서 지주들을 닦달해 큰 상금을 건 모양이던데. 아무래도 율곡도는 왕가의 쌀을 대주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만한 곡창지대가 요수 때문에 난리가 나면 기근이 덮쳐올 것을 안 게지.”
스승은 찻물을 목으로 넘기고 내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렇습니까.”
“무녀도 두엇 들어간다고 들었고. 상금이 많아봤자 그 많은 인원이 나누어 가지면 코딱지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일 게다.”
상이든 금이든 그건 내게 곁따른 것이었다. 것보다 복수심이었다. 곧 십 년이었다. 어머니를 죽인 요수가 바다 위로 떠오를 날이었다. 몇천 년은 재우고 싶었다. 그래야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성싶었다. 자신하다가 방바닥에서 낙상하고 싶지 않았다.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강하다는 확신이.
그러므로 율곡도는 시험하기 좋았다. 조그마한 욕심도 있었다. 나는 다수가 힘을 보태야 한다는, 이 길이길이 남을 봉인이 궁금했다. 따라가 배움도 얻고 싶었다. 보다 큰 물살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퇴치사로서 백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일이 아니던가. 수준 높은 봉인을 하러 가는 것도, 또 나라의 근간을 흔들 요수를 막는 것도.
다만 걸리는 것은 그 요수 하나라.
“겨우 그 정도에 달려들기에는 요수가 보통 험악한 것이 아니야. 그 근방에…….”
바깥 기척이 퇴치소 안을 기웃거렸다. 뽀득 뽀드득. 하야말간 눈이 밟혔다. 딱한 들짐승의 방문인가. 찻잔에 입술을 묻은 스승의 눈이 변했다. 표정을 없애고 바깥소리에 집중한다. 나는 혹 양기석이 아닐까 싶었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승은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조용히 허리를 들었다.
“자경아. 넌 가만히 있거라.”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서라. 여긴 내 퇴치소인데 네가 왜.”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스승이 몸을 일으켰다. 같이 일어서려는 나는 제지시켰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뒤를 힐끔거렸다. 스승은 기척을 죽이고 밖으로 나섰다.
타다다닥. 때를 맞춰 달아나는 발소리. 스승은 걸려들었다는 얼굴로 그를 쫓았다. 설마 양기석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은 아니겠지. 겁 없이 스승을 골리고 나를 골리기 위해서. 내 눈꼬리에 근심이 걸렸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퇴치소 밖에 나가보았다. 스승의 발자국과 그보다 한참 작은 발자국. 어둑한 산으로 촘촘히 이어지고 있었다.
스승을 노린 새끼 요수인가. 양기석이 아니라는 증좌를 찾자마자 당긴 종아리가 풀렸다. 그때였다. 돌연히 나타난 그림자가 나를 뛰어넘었다. 바로 돌아보자마자 나는 손목을 잡혔다. 부드럽게 끌려갔다. 퇴치소 모퉁이 벽에 등이 닿았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
“아직 화났어?”
요수의 팔이 내 얼굴 옆에 놓였다. 근처에 숨어 나와 스승을 지켜본 것이었다. 나는 양기석의 아래팔을 쳤다. 애태운 분풀이였다. 하나 그는 맞고도 좋다고 웃었다. 그의 얼굴이 내려와 내 코끝에서 머물렀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율곡도로 떠나려고?”
“들었어?”
“내 아내 일인데. 당연 들었지.”
이왕 일이 벌어진 것. 한번 말이나 해 보자 했다.
“한 번도 그리 큰 인원이 모여 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가보고는 싶지만.”
“내가 걸려?”
정곡을 찔렸다. 율곡도로 내려간다고 하면 내일부터 부랴부랴 출발해야 할 것이었다. 다 같이 모여 율곡도에 가기로 결정 났다고 했다. 늦어도 오늘 밤에는 갈지 말지를 정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 그러자면 글피에 그와 놀러 가기로 한 일이 무산된다. 그를 홀로 내버려 둬야 하는 날이 달포가 넘을지 달을 넘을지 모른다. 안 그래도 외로움에 투정 부리는 사내인데. 이번은 입에 벼리고 벼린 칼을 문다고 할지, 달군 창끝으로 제 눈을 찌른다고 할지, 무작정 밀어붙이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리 다정할 데가.”
“비꼬지 마. 안 그래도 가지 않아야겠다는 쪽으로 굳어가고 있으니.”
그때 요수의 손이 내 턱을 움켜잡았다. 제법 악력이 세었다. 요수는 내 턱을 제 얼굴 가까이로 당겼다.
“인간은 번민이 많아. 이래서 싫어.”
“번민?”
“나를 연모하면서도 갈팡질팡. 나와 영원으로 묶이는 것은 싫으나 나는 가져야겠고. 제 삶에 끼어드는 것은 귀찮으나 놓지는 못하겠고. 여러모로 네게 골 아픈 존재이지. 내가.”
“기석아.”
“한데도 나는 너를 연모해. 그 번민마저 애달플 만큼.”
지쳐 보이는 그의 눈에 대고 ‘그래, 영원을 약조하자.’ 뱉을 뻔하였다. 나는 그의 입가를 엄지로 쓸어 만지며, 그 우미한 목에 팔을 둘렀다. 요수는 자신이 알아서 입술을 가져왔다. 화가 난 듯 입술끼리 부딪치기만 하다가, 내숭덩어리 혀를 내밀어 살며시 나를 맛본다. 내 혀와 그의 혀가 걸려들어 섞였다. 대번에 입술이 이어졌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내가 발끝을 들고. 서로의 상체를 꼭 맞붙여 입술을 전한다.
“하…….”
중간중간 입술이 떼어질 때마다 그가 밭은 숨을 내었다. 그 청량한 향에 이끌린 나는 이곳이 어딘지도 잊었다. 그를 가져야 했다. 물기 어린 입술을 빨고, 그의 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요수는 나를 안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 자리에서 치마라도 들추고 나를 가질 작정인 것처럼. 하나 나는 수치를 내놓고 그와 다리를 엮었다. 입맞춤에 열을 다했다. 한겨울 바람도 민망스러운 우리를 지나친다.
옷깃에 치인 나뭇가지가 경고한다. 작은 비명과 스승의 엄한 목소리가 걸어온다. 요수와 나는 그때까지도 끈질기게 혀를 얽고 있었다. 눈을 감고 열중한 나를 요수가 떼어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정리한 것은 찰나. 한순간 뒷걸음질 같은 바람만이 내 앞에 맴돌았다. 비어있는 눈 위로 스승과 스승의 손에 대롱대롱 달린 그림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대강 입술을 찍어눌렀다. 그가 남긴 여운을 벅벅 문지르기까지 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녀석 좀 보거라.”
아악! 잘못했습니다! 스승의 손에 달린 것은 명량한 여자애였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어서 놀랐는데. 스승은 지겹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말이다. 이 녀석이다. 내가 언젠가 말한.”
스승은 칠색 팔색하며 손에 들린 아이를 놓아주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자애는 눈이 맑고 깊었다. 퇴치사를 시켜달라며 우는, 앞뒤 안 가리던 시절의 나 같다는 아이였다. 그간 만나고 싶었다. 한데 인연이 닿질 않았다. 내가 스승의 퇴치소에 올 적마다 아이는 종적을 감췄고, 내가 산을 내려가면 귀신같이 나타났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벌써 두 해가 가까워지니 말이다.
스승은 아이가 신을 받지 못해 퇴치사는 어려울 거란 소리를 했었다. 아무래도 신이 없는 퇴치사는 영 어려운 길이었다. 나는 아이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이 늦은 시각에 산을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아이는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았는지 기가 죽어있었다. 낡은 보따리 하나를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보건대. 아이에게 마땅한 거처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곳 송덕에 사는 토박이 같지도 않고. 나는 스승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이가 여기에 삽니까?”
“저 밑에 주막에서 일하는 모양이다.”
역시 스승은 스승이었다.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본다. 나는 풀 죽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가 데려다주마. 다시는 밤에 산을 홀로…….”
“율곡도로 내려가실 겁니까?”
당돌한 아이의 언사에 스승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거기까지 엿들은 모양이었다.
“율곡도를 아느냐.”
스승의 목소리에 아이는 말간 눈을 끔뻑거렸다.
“예. 고향입니다.”
율곡도에서 온 아이라. 아이는 제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바라보다가 이를 보였다. 갑자기 찬 눈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얘야.”
“열심히 신당마다 들러 치성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비오니 신께서 들리지 않으실 일은 없겠지만. 만약 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퇴치사가 꼬옥, 꼬옥 되고 싶사옵니다.”
스승은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게 신이 빈다고 들어오는 것이었으면, 진즉에 자신은 열 분을 업고 다닐 것이라고. 나도 실없는 소리란 건 안다. 단지 절벽 끝에서 곡예 하는 듯한 아이의 눈이 걸렸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율곡도에서 온 것도 그러하고. 나는 겨울 땅에 꿇어앉은 아이를 일으켰다.
“얘야.”
“예.”
“율곡도에는 네 가족이 있니?”
“동생들이 있지요.”
아이는 부모를 입에 담지 않았다. 동생들. 그게 아이의 살붙이였다. 아이의 눈가가 찌푸려진다. 주린 배를 더 주리게 할 울음을 참는 것이리라. 이 아이도 울면 회초리를 맞았구나. 보다 보면 안다.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보통 대요수가 깨어날 때는 조무래기 요수를 한 무더기 불러온다. 깨어나기 몇 년 전부터 그 땅에서 난동을 피우니, 퇴치사나 도인이나 무녀나 짐작하는 것이다. 조만간 저 요수가 깨어나겠구나, 하고.
“동생을 버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숙부께서 잘 맡아주시고 있고, 또…….”
굳어가는 내 낯빛이 저를 나무라는 줄 알았나보다. 금세 당돌함은 구겨지고 시무룩해졌다. 그 어린 나를 보던 스승의 눈이 꼭 이랬을까. 나는 아이의 기도가 얼마나 절박한지, 눈물이 사치일 만큼 처참한지. 이리 아이의 손만 잡아도 전달받을 수가 있었다.
“스승님.”
하늘의 윗분이 내가 해이해지는 순간마다 잡아서 일으키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가라고. 네가 가야 할 길은 이쪽이라고. 아마도 내게 주어진 명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율곡도로 내려가야겠습니다.”
몸을 감춘 요수가 빠짐없이 듣고 있을 터였다. 싸늘한 바람이 내 위를 오갔다. 그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요기로 나를 간지럼 태우거나 찌르지도 않았다. 싱거우리만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래. 나도 함께 가마.”
엷게나마 머무르던 요수의 기운이 땅속으로 꺼졌다. 마음이 상해 사라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진력난 것인지. 나는 그가 앉아 있었을 나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
아버지는 내가 봇짐을 쌀 때마다 항시 종잣돈을 넣어주셨다. 무작정 스승의 뒤꽁무니를 따라간 딸의 출가 날부터 이어진 습관이었다. 엽전의 개수가 중요한가. 아버지가 나를 귀애하는 마음이 중했지. 아버지는 내가 요깃거리를 틈틈이 사 먹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당신의 소박한 텃밭으로 가실 수 있었다.
이 종잣돈도 아마 내가 드린 엽전이 아니라, 텃밭에서 애지중지 키운 무를 뽑아다가 얻은 것일 터였다. 아버지는 이상한 데서 고집이 있었다. 보면 내 성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 만했다.
“퇴치사님!”
지정된 장소는 주막이었다. 먼저 온 스승의 옆에는 그 아이가 서 있었다. 부득불 고향으로 가겠다고 해서 데려가기로 결정한 것인데. 스승은 이게 잘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퇴치를 목적으로 모인 이들이라 아이까지 간수할 여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하나 아이는 당차게 말했다.
‘제 몫은 제가 해낼 수 있습니다.’
닦아세우고 매질한다고 얼씨구나 할 아이가 아니었다. 내 보기엔 짐 보따리에 숨어서라도 따라올 성품이었다. 용기 빼면 송장이던 내가 그랬지 않은가. 동족은 동족이 이해한다고. 스승과 티격태격하고 있는 저 아이가 지지 않았음 싶었다.
“늦었구나.”
“예. 아버지와 얘기를 좀 나누느라.”
“것 때문에 얼굴이 그리 상한 것이야?”
나는 고뿔 걸린 사람처럼 웃었다. 사실 양기석이 엊저녁 들어오지 않았다. 단단히 토라진 것일 터다. 만나서 해명하자는 각오도 고부라진 추세였다. 나는 미안함만 안고서 밤새 뒤척거렸다. 차라리 나타나 나를 옴팡지게 괴롭히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대로 형틀에 앉힌 것처럼, 율곡도로 추국 당하러 가는 것처럼. 떠나는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잠시 저기서 짐을 풀고 오겠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내 것도 좀 정리해주면 고맙고.”
“스승님은 나이가 몇 개이신데 아직도 제자의 손발을 빌어먹고 사십니까?”
스승이 내 저조한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참 골고루 못난 제자였다. 나는 애써 웃음을 밝게 손질했다.
나귀에 짐을 싣고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참여하러 온 퇴치사들 가운데 내게 벽서를 건네줬던 자도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을 구부리는 것으로 인사는 마쳤다.
“함자가 어떻게 되시오?”
“송덕에서 왔소. 그렇게만 적어주면 되오.”
짐꾼은 헷갈리지 않게 분류해두었다. 적어 받은 글자를 붙인 나귀까지 보니, 비로소 여정의 출발이 코밑임을 실감했다. 저기 뭉쳐서 나를 보며 여인이 어쩌고 하는 것도 무딜 만큼 들었고. 이만 물장구치는 구경감 신세를 벗어나고자 돌아선 차였다.
얼핏 걸린 나의 시선에 한 사내가 있었다. 고상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지치도록 긁어대는 눈. 겨울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가르고 내 코에 닿았다. 활짝 트인 향으로 인식하고, 그의 눈에서 수하라의 여름을 주웠다. 교활한 회색 눈동자. 비열하게 웃는 입매. 나는 나아가던 발을 그에게로 돌렸다.
“저기.”
다가갈수록 적의인지 기쁨인지 모르겠다.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주변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퇴치사끼리 친분을 쌓는 걸 누가 무어라 할까.
“너.”
“늦었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스승에게 잡혔다. 내가 이자에게 다가간 후부터 스승은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 재빠르게 그를 숨기듯 가려버렸다.
“제정신이야?”
양기석. 이놈이 회까닥 돈 게 틀림없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아무리 길 한복판에 차린 주막이라고 할지라도 퇴치사가 벌 떼처럼 모여 꿀을 노리는데. 더 있으면 무녀까지 올 것이었다. 한데 이 요수는 전장 한복판에 벌거숭이로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잽싸게 쥐고 흔들었다.
“일어나. 얼른.”
“입 맞춰주면 그리할까. 아니면 내 뺨을 물어주면 그리할…….”
“농이 아니야.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누구냐. 어느새 스승의 발이 성큼성큼 왔다. 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그때까지도 요수는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스승에게 이자를 내보이는 것은. 나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는데, 요수는 능청스레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기석이라고 합니다.”
그때 스승의 눈이 요수가 아닌 나를 향했다.
“누구냐. 이자는.”
요수는 누구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글쎄. 내가 누구일까요.”
스승의 눈이 그제야 요수를 향했다. 나는 땀이 차오른 손바닥으로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아는 자입니다. 얼마 전에 요수 봉인을 하러 갔다가 만난.”
“퇴치사냐?”
“아…… 예.”
“어디에 사는, 누구의 제자인데.”
스승과 요수의 시선이 맞붙었다. 한 치의 온정도 양보도 없었다. 나는 요수의 뒤로 손을 움직여 그의 윗옷을 잡아당겼다. 요수는 한 숟가락의 시선을 내게 허락했다. 나는 눈짓으로 자리를 피하라고 일렀건만, 요수는 생글생글 신이 나 보였다.
“자경아.”
“너. 지금…….”
“날 소개시켜야지. 내가 어디에 사는지, 누구의 사내인지.”
요수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내가 저랑 해둔 약조를 나 몰라라 하자 깽판을 치는 것이다.
“자경아.”
이번에는 스승의 부름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수상한 자로구나. 정말 네가 아는 이가 맞는 게야?”
“한데.”
내가 대답하기도 전, 스승의 질문을 요수가 매섭게 끊었다.
“왜 자경이라고 합니까?”
“무어라?”
스승은 자신을 깔아보고 있는 요수에게 침 뱉듯이 말했다.
“하면 개똥이라고 부르랴? 쟤 이름이 자경이인 것을, 내가 자경이라고 부르는 게 무엇이 문제라고.”
“과연 그게 다일까.”
“무어?”
기석아. 내가 그의 어깨를 끌어내리듯 붙잡았다. 그는 스승을 해칠 듯한 시선으로 뜯어댔다.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난 스승도 요수의 송곳니를 뽑을 듯 노려보았다. 나는 둘 사이에서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요수는 내 허리를 당기며 안고, 스승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주막은 왁자지껄. 초대받지 못한 폭우 같은 관계에서 아이만 오롯이 밝았다.
“이제 출발한다는데요?”
야무지게 짐 보따리를 챙겨온 아이는 호기심이 왕성했다. 요수와 스승, 쉼 없이 양옆을 번갈아 봤다.
“자경, 아니 개똥아. 할 말이 있으니 그것 떼어놓으면 얘기 좀 하자.”
마지못해 떨어진 분위기였다. 나잇살 처먹고 애 앞에서 싸우기는 모양 빠지지 않은가. 스승은 아이의 짐 보따리를 들고 휑하니 가버렸다. 하나 사로잡힌 제자에 대한 신경은 여전했다. 이따금 돌아서 나를 보는데. 저것이 노려보는 것인지 마음 쓰는 것인지. 우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양기석은 원한 서린 미운털이 박혔다는 것이다. 기다란 행렬에 섞여가는 스승을 바라보다가 나는 발을 굴렀다.
“진즉에 알았지만 제정신이 아니구나.”
요수의 어깨를 밀치며 떨어졌다. 그는 물러서며 가벼이 웃었다. 상황을 흙탕으로 만들어놓고 언제나 유유자적이었다. 나는 감 좋은 스승 눈치 보랴. 저가 어떻게 될까 염려하랴. 감당할 심장이 여덟 개여도 모자랄 판인데. 무어가 좋다고 웃고 자빠진 것인지. 일단 골칫거리는 제쳐두고 해명해야 했다. 그에게서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는 와중, 노략질하듯 다가온 손이 내 허리를 낚았다.
“너.”
그는 웃음이 싹 가신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자 더욱 힘을 준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스승의 눈치를 봤다. 스승은 도깨비불 저리 가라 할 얼굴로 이쪽을 본다. 요수가 요수인 건 모르는 듯했다. 하나 노심초사하다가 머리가 희끗해지겠다. 여정 내내 달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출발이오. 출발.”
무녀를 태운 가마가 구경꾼을 반으로 쪼개듯 물리치며 들어온다. 이 여정을 이끄는 자로 보인, 주름살투성이의 퇴치사가 일어서서 외쳤다. 일렬로 나란히 선 퇴치사들은 각자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고, 주막에 늘어앉았던 자들은 재빨리 시킨 밥부터 삼켰다. 나 또한 스승의 뒤로 가야 했다. 하나 나를 끌어안은 손은 태산 같았다. 단 한 걸음도 제게서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요수와 몸이 부대꼈다. 그에게 안겨있는 자세로 서로를 겨누어보았다. 이상하게도 주변은 우리를 소 닭 보듯 했다. 나는 심심치 않게 주목을 받는 위치이고, 요수 또한 생김새로 이목을 끌만한데도 말이다. 내 곁에 막이 쳐진 듯했다. 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는 스승님을 제외하곤. 아마 그가 사특한 수를 쓴 것이겠지.
“정말 따라올 작정이야?”
요수는 말이 없었다. 으레 짓는 웃음도 없이. 나는 일견 싸늘하다고까지 할 법한 그 얼굴에서 고뇌를 보았다. 그것은 내 제안을 수락할까 말까를 넘어선, 그야말로 거만한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이걸 죽여 살려. 처음으로 요수처럼 보였다. 물론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요수였지마는. 그 진실을 잊고 산 내게 가르쳐주듯이, 그가 낯설고 섬뜩했다.
일행은 거의 주막을 빠져나갔다. 내성을 나가는 행렬에 끼어들지 못하면 생고생이었다. 나는 부연 먼지가 부유하는 주변을 바라보고,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눈부셨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요수가 움직여 해를 가린다. 요수는 약간 부르튼 입술을 열었다.
“외로워서 말이야. 자경아.”
“외롭다니.”
“널 가졌는데도, 외로워서.”
‘안 출발하시오?’ 다 먹은 그릇을 치우러 나온 주모가 우리를 보고 한 말이었다. 일컬을 수 없이 애달픈 목소리가 나를 주저앉혔다. 넘어가서 또 말을 잇지 못했다. 요수는 내 손목을 들었다. 그리고 행렬을 따라 걸어간다. 나는 짐처럼 이끌려 갔다.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진 눈송이가 미끄러지듯 굴러다녔다. 목멘 음성을 삼킨 내 손등 위로 그 눈송이가 떨어진다. 눈송이는 곧잘 녹았다. 내 손등 위의 물방울이 되었다. 우리는 말을 주고받지 않고 걸었다. 우리는 행렬의 맨 끝자리에 위치했다. 맨 앞자리는 무녀의 가마, 중간은 걸음이 빠른 퇴치사, 뒷줄은 짐. 그 뒤가 우리였다. 짐꾼 몇몇이 나와 요수를 힐끔대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성곽을 빠져나가서는 꺼져버렸다.
일어나자마자 그리운 그였는데. 이렇게 내 눈앞에 있음에도 누구보다 멀지 않은가.
***
여정은 거창하지도 고단하지도 않았다. 감투 하나는 좋았다. 퇴치사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라, 들르는 곳마다 잠자리와 먹거리는 모자람 없이 가져다 바쳤다. 더군다나 왕명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겉은 금칠한 송아지처럼 보일 터. 머무는 마을의 코흘리개마다 입을 헤벌쭉 벌리고, 마치 전승하고 돌아온 대군을 맞이하는 듯했다. 저만한 나이 때에 나도 그랬으니. 새삼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여정이었다.
그렇다. 하나 더 있었지. 입에서 단내를 넘어선 쓴 내가 나는 여정이었다. 본디 퇴치사는 과묵해야 한다지만, 당장은 진이 빠질 정도로 묵언 중이었다. 원흉은 둘이었다. 스승과 나의 요수. 스승은 십 리는 떨어져 앉아, 눈으로 내게 훈계를 하는 중이었다.
스승은 내 붙임성에 대해 소상히 아는 터였다. 이 청자처럼 미끈한 사내가 내 곁에 없음을 잘 알며, 더군다나 그 사내가 까슬까슬한 돌처럼 굴고 앉아 있으니. 내 오라비처럼 구는 스승이야 이 불가해가 탐탁지 않아, 장난스러운 제자의 해명을 기다릴 터지.
실지 원흉은 이 거꾸로 달리는 요수다. 마을에 들러 쉴 때마다 내 옆자리에 꼭 붙어 앉아 있어, 여러 사정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칼같이 쳐내는데. 정작 내게 말을 걸지도 않으며, 사람다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참 애달픈 허수아비였다. 양 사내의 눈치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요수의 심술로 보건대 내가 스승에게 가자마자 자신이 요수임을 동네방네 까발릴 것이고. 하던 묵언수행이나 쭈욱 하는 수밖에.
“어르신, 모쪼록 많이 드십시오.”
“고맙소.”
“아유. 별말씀을 다.”
율곡도 내성에 가까운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봉인된 대요수는 두 번째 문제다. 이 자그마한 마을은 대요수가 의식처럼 불러낸, 미물 같은 요수에 의해 죽어 나갔다. 그리하여 묵는 곳마다 자신의 퍽퍽한 사정을 퍼내기 바빴으니. 대요수를 봉인한 연후에 일거리가 쏟아지게 생겼지 무언가.
율곡도 근방이 폐허라며 울고불고 난리인데. 정작 본거지인 율곡도는 어찌 생겼을지. 상상만으로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을, 옆자리를 꿰차고 앉은 요수는 말해 무어한가.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마을 빈터에 퇴치사 두셋씩 모여 장작불을 피웠다. 각자 배정받은 숙사는 따로 없었다. 작은 민가만으로 이 인원을 다 재우기는 무리였다. 하여 무녀만이 촌장의 집에서 지내기로 어렵사리 합의를 보았고, 나머지 퇴치사는 거적 가진 길바닥 신세였다.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이 급히 짚으로 막을 엮어 추위는 면하게 해주었지만, 어찌 됐건 다 쓰러져가는 마을에서는 이게 한계인 터였다.
장작불이 이 겨울에서 사람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였다. 짚으로 엮은 막은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인원이 셋이었다. 셋이 모이면 둘은 자고. 한 사람은 보초 서듯이 장작불을 지켜야 했는데. 나는 요수와 둘이서 막을 쓰게 생겼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탓이었다.
보초도 번갈아 가며 할 생각이었으나, 요수는 장작불에 원수라도 진 것인지 제자리를 지켰다. 어차피 저 짚으로 엮은 막에 홀로 들어가 자기도 뭣하고. 다들 잠든 새벽녘에 둘이 불똥 튀는 장작불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화가 났어?”
결국 입술을 떼는 것은 나였다. 아량 넓은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나는 용기를 내어 장작불의 붉음이 옮아붙은 요수의 낯바대기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시선도 저절로 그를 따라붙었다.
아뿔싸. 촌장의 집에서 막 씻고 나온듯한 무녀 하나가 이쪽을 뚫어져라 보는 게 아닌가. 무녀는 젖은 얼굴을 투박한 무명천으로 닦는 중이었다. 시선은 요수와 내가 있는 막을, 정확히 장작불을 지피는 우리에게 와있었다. 나는 발이 달달 떨렸다. 장작불을 쑤시던 막대기를 놓칠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요수를 가렸다. 하나 그는 차분하게 나를 달랬다.
“걱정 마.”
나는 숨을 길게 빼면서 내뱉었다. 기가 막혔다. 이 상황에서조차 느긋한 요수를 째려보며 돌아보았는데. 그는 서늘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들키지 않았어.”
나는 걱정스레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무녀 쪽을 돌아보았다. 무녀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여전히 요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럼 저것은 무언데. 당장이라도 널 죽일 것 같지 않아.”
그때 요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입이라도 맞출 듯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가 내뱉는 따스한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차분하고 느린 숨이었다.
“내게 반했나 본데.”
“무어?”
긴장하여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나는 입술을 쩌억 벌렸다. 그때 요수가 작게 웃었다. 벌어진 내 입술을 엄지로 스리슬쩍 만진다. 그는 한가득 웃음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뜀박질한 듯 숨이 거칠고, 잠자리라도 원하듯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니. 감은 좋아서 나를 알아봤긴 봤는데. 영 엉뚱한 구석을 짚으셨어.”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무녀를 찬찬히 봤다. 그의 말대로 퇴치를 하고자 하는 살벌한 기운은 없고, 단지 우물쭈물 이쪽을 향해 다가올까 말까 하는 걸음은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나는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오로지 요수만을 응시하며. 의식하고 긴장했던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팍 돌렸다.
“네가 무어 잘난 게 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옆에서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기분이 상해 막대기로 장작불을 두어 번 쑤셨다. 엉덩이를 움직여 거리를 멀게 앉았다. 그사이 무녀는 입술을 꽉 물고 체념한 듯 걸음을 물렸다. 퇴치가 아니고서야 사내랑 제대로 된 대화도 못하는 무녀들이니. 처녀로 영영 남겠다고 한 맹세가 아마도 걸림돌이겠지. 나는 가면서도 아쉬운 듯 돌아보는 무녀를 보고 혀를 찼다. 이 음탕한 요수가 어디가 그리 좋다고.
“질투해?”
“허!”
다들 고단함을 풀기로 작정한 듯 코고는 밤. 퇴치사들이 미역처럼 누운 빈터에 내 목소리가 퍼졌다. 질투라는 둥. 투기라는 둥. 나와는 일절 상관없는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씻고 나와 달처럼 뽀얀 무녀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아리면서도 씁쓸하고. 당장 강물에라도 뛰어들어 광을 내고 싶은 심정하며. 여러모로 기가 막혀 죽어가는 중이었다.
“백날을 빌어보아라. 내가 투기를 하는지, 안 하는지.”
“천 날을 빌면 될까.”
나는 엉뚱한 대답을 한 요수를 흘겨보았다.
“내게 투기해달라고.”
일순간 진지해진 그의 눈과 정면으로 맞서고 말았다. 막대기로 장작불 근처를 쿡쿡 쑤시던 나는 다 때려 치자는 심정이었다. 검정 재가 묻은 손을 털었다. 장작불이 일렁일렁 서로의 표정을 밝히고. 내 툭 나온 입술이나 찌푸려진 미간이나, 죄 들킨 마당에 무얼. 나는 헛기침을 하며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매섭다고 정평 난 겨울바람도 내 불난 가슴을 식혀주지 못했다.
“기석아.”
분위기가 잡혔으니 말이다. 나는 꼬이고 꼬인 그의 앙금을 풀고 싶었다.
“매번 기다리게 하여 미안해서. 먼젓번도…… 같이 경치 구경이나 하자고 해놓고선 덜컥 여기로 오는 것을 결정했고. 어쩌면 정인으로서 실망이 컸을 수 있지.”
그는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조용히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여긴 위험해. 스승도 오는 내내 너를 지켜보고 있고. 네 말로는 무녀가 엉뚱한 데를 짚었다고는 하나, 여하튼 네가 숨긴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 아니야.”
“하여.”
“돌아가면 안 되겠니.”
서글픈 말이었다. 이 땅에 제 정인을 떼어놓는 게 좋을 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나 나는 불안했다. 그가 불안했다. 나에 관한 문제는 수습할 수 있었다. 하나 그의 목이 걸린 사안은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불현듯 일어난 사고. 그로 인해 물거품이 될 내 소중한 것들. 나는 그것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응?”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 잡아주지 못한 손이었다. 장작불의 열기로 인해 손이 따뜻했다. 나는 그 손을 끌어올려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가엽고 안타까운 내 정인. 함께 있고픈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양기석은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 입술에 닿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눈이었다.
“자경아.”
“그래.”
“결국 네 고집이 이길까. 내 욕심이 이길까.”
그는 표정이 없던 얼굴에 찢어진 웃음을 그렸다. 예의 그 해괴한 웃음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무엇이.”
“나는 널 가지려 들고. 너는 날 가지지 않길 원하고.”
자신을 가지지 않길 원한다, 라. 나는 그의 손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눈을 했다. 요수는 해맑게 웃었다.
“사람과 요수는 어쩔 수 없나 봐.”
“기석아.”
“서로를 쫓고 쫓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셔라.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뱉었다. 나는 일견 멍했다. 아주 잠시지만, 복이라고 여긴 지난날이 내 머리 위로 지나가며, 그 과거에도 홀로 추격하고 있을 그가 떠올랐다. 나는 서로를 가졌다고 생각한 나날들이, 그에게는 서로를 아등바등 쫓는 추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붙잡아서 이끈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조금 문질러지고 떨어졌다.
“이만 자. 불은 내가 지킬 테니.”
결국은 거부였다. 그는 돌아가라는 내 제안을 거부한 것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물밀 듯이 몰아쳤다. 분노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속았다는 표현은 지나치고, 안쓰럽다, 고하기에는 감정이 뾰족했다. 요수는 더는 나를 보지 않았다. 제 할 일인 듯 장작불만 고요히 지켜보고 있었다. 더 말을 섞고 할 기운이 서로 바닥난 셈이었다. 어쨌든 여정은 고됐고, 우리는 율곡도 근방까지 달려온 나그네였다.
밤은 서로의 마음을 냉하게 만든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짚으로 지어진 막에 몸을 욱여넣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한데 떠오르는 것은 죄 새까만 먹구름에 가려진 마음이었다. 더 생각했다가는, 저기에 앉아 있는 요수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마음이었다.
나는 머릿속 비구름을 몰아내듯 몸을 뒤척였다. 그때 요수는 잠깐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말이 시작될 것 같았다. 다급하게 코를 고는 척을 했다. 요수는 다시 장작불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고집이 셌고, 요수는 욕심이 많았다. 어쨌건 우리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눈을 감고 뭉친 피곤을 풀며, 과연 둘 중의 승자는 누구일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그날의 결론은 없었다. 나나 요수나. 이 땅 위에, 연모라는 죄에 발목을 잡힌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칼을 겨누기에는, 우리는 너무 서로밖에 없는 처지였다.
***
“퇴치사님.”
근처 개울가에서 멱 감듯 찬물을 끼얹는데, 그 율곡도 아이가 살금살금 내 곁으로 왔다. 전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근질근질해 보이는 입을 긁고 있었다. 나는 턱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훔치며 답했다.
“스승님께서 부르시던?”
스승님, 이라는 나의 말에 씻고서 빠져나갔던 요수의 발이 멈춘다. 나는 잠깐 멈춘 요수를 바라봤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피한 것은 나였다.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응?”
온통 요수에게 신경이 쏠려있는 사이, 눈앞에 있던 여자애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나의 눈이 쏠렸다. 여자애는 개울가에 제 무릎을 담근 자세로, 그러니까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도와주십쇼. 퇴치사님.”
“얘야.”
“제가 몹쓸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이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꿇어앉은 아이의 어깨를 들어 올렸다. 아이의 치마가 다 젖어버렸다. 겨울이라 얼음장처럼 추울 텐데. 아이는 한 번 떨지도 않는다. 제 할 말만 곧이곧대로 전했다.
“제 고향에 동생들이 있사온데…….”
나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 아이를 강제로 안아 들었다. 겨울의 냉정함을 간직한 개울가부터 빠져나왔다. 참 대책 없는 아이였다. 스승은 이 아이의 어디를 보고 나와 닮았다고 하신 것일까. 나는 땅 위에 젖은 아이를 올려두고 스승처럼 혀를 찼다.
“겨울에 대담하기도 하구나. 여벌의 옷은 있고?”
“퇴치사님.”
아이의 말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대관절 무슨 거짓말이기에 이 아이가 이러나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기껏 해봐야 스승의 보따리에서 주전부리 몇 개 훔쳐먹은 것은 아닐지, 스승의 족자를 밟아 망가뜨린 건 아닐지, 내가 했을 법한 잘못을 떠올릴 때였다. 아이의 발간 뺨이 땅으로 숙여졌다.
7
“퇴치사가 되었다고 거짓부렁을 쳤습니다.”
“누구에게. 고향의 네 동생들에게?”
“꼭 퇴치사가 되어 내려올 것이라 장담을 하여서…… 또 주막에서 잡일을 하는 것을 알면 숙부의 속이 상하고, 그러할까 해서…….”
생각보다 복잡한 사정이었다. 아이의 말은 즉 그것이었다. 곧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으니, 옆에서 심심한 거짓말에 소금을 쳐달라는 것이었다.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워낙 딱하고 짠한 사정 아닌가. 퇴치사가 되고 싶어 송덕으로 올라와, 물어물어 스승께 매달린 모양이지만. 것도 먹히질 않으니 주막 일을 도와가며 송덕에서 살아가고. 솜털 소복한 애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터.
하나 이 거짓말은 끝이 없었다. 퇴치를 마치고 송덕으로 다시 올라가야 할 때. 내가 나서서 보증을 해줬으니 아이의 훗날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신도 없는 여자애를 가르치고 나설 정도로 내가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아이를 먹여 살릴 만큼 넉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쌀쌀맞게 뿌리쳐야 할까.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없이 흔들리고 있는데, 불쑥 커다란 손 하나가 아이와 내 사이를 갈랐다.
“아!”
없던 기척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소심한 아이는 놀라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손의 주인, 무정한 요수는 별것 한 게 없었다.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다.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죄밖에 없고. 손찌검하는 줄 알고 놀란 아이가 가여울 뿐이었다.
“가자.”
요수의 목소리가 낮았다. 아이 때문에 평온이 깨진 얼굴이었다. 아침부터 가타부타 말 한마디 안 한 사내였다. 아이는 아직 바닥이었다. 나는 요수를 자연스럽게 밀쳤다.
“놓아보아. 아이를 일으켜줘야지.”
요수는 기척을 숨기는 데 능했다. 마치 이 개울가에 심어진 나무 중에 하나인 것처럼. 하여 아이는 드러난 양기석을 보고 놀라 자빠진 것이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하늘에서 떨어트린 사내를 보듯 했다. 아이는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아이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뻗었다. 한데 양기석이 아이를 서느렇게 보며 말했다.
“일어나.”
있던 입맛도 빚져서 데려갈 만큼 정 없었다. 낯선 목소리였다. 아이는 얼음장 같은 땅을 짚고 일어섰다. 가여운 게 요수의 눈치까지 본다. 저 막막한 눈빛. 갈 때까지 몰려 동아줄인지 고추밭인지도 모르고 내디디는 발. 어디서 본 눈인가 했더니, 문전박대당하고 약방 마당에 버려진 그때의 나 같았다. 스승이 닮았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었나 보다. 그때 나를 보던 스승의 심정이 어땠을지.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단박에 이해가 가고 말았다.
그때 스승은 내게 기회를 줬었다. 여인은 안 된다는 이 땅에서, 그래도 쫓아와 기특하다고. 내게 하려니 말려니 물으며 권한을 넘겨주었었다. 여인은 안 된다는 퇴치사도 만들어주었는데. 나는 신이 없으니 저리 가라며, 이 아이를 내칠 주제란 말인가.
“얘야.”
제 엉덩짝에 묻은 흙을 털던 아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
“이름이 무어니.”
“제 이름 말씀…….”
아이는 말을 하다가 말고 요수를 보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를 발라먹을 듯 노려보는 요수였다. 하다 하다 아이한테까지 투기질이었다. 나는 요수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조곤조곤 ‘왜 그러해.’ 하며 말했다. 요수는 잠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를 다시 노려보지도 않는다. 내게 박힌 시선을 그대로 둘 뿐이었다. 나는 부담스러운 그것을 속으로 담았다.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무어라고?”
“예! 아, 여란이라고 하옵니다.”
“여란이.”
고운 이름이었다. 나는 여란이에게 작게 웃어준 다음, 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곡도에 도착해, 네 숙부를 내게 보여다오.”
“예?”
“내 제자로 받았다는 것을, 어찌 됐건 말씀드려야 하니까.”
그늘진 여란이의 얼굴이 펴졌다. 내가 거절할까. 싸늘한 요수의 눈치를 보랴. 이래저래 수심이 많았던 여란이는 절을 할 듯 숙였다. 나는 여란이에게 이 퍽퍽한 땅에서 쉬어갈 그늘이 되어볼 생각이었다. 그늘 밑에서 쉬던 여란이가 양지로 가는 걸 도와줄 스승이 되어. 혹 여란이가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말이다. 나와 여란이는 훗훗함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으나, 내 어깨에 달라붙은 요수 한 마리 때문에 쉽지 않을 성싶었다.
여란이는 내게 퇴청의 인사를 하고, 재빨리 뒷걸음질 쳐 개울가를 빠져나갔다. 감은 좋은 아이였다. 수풀 너머 채찍질에 우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새 채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율곡도로 향하는 걸음을 서두르는 듯한데. 사실 예정보다 이틀이 늦어졌으니.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경아.”
모두가 떠나는 이 소란스러운 아침. 요수의 목소리만 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몸을 약간 흔들었다.
“난 너와 달리, 투기를 잘 참지 못해.”
“저 조막만한 아이를 상대로 투기한다고.”
“누군들 안 그럴까. 네 스승, 네 아비, 내게로 오는 걸음을 망설이게 하는 건 무엇이든.”
순탄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나 나나 마찬가지다. 여러 풍랑을 헤엄치고 나와서 드디어 만만한 땅을 만났다고 생각했거늘. 삶은 싸움이었다. 요수와의 연모도 마찬가지였다. 늘 싸우고 거기서 패배하고 승리하고. 하나 그러한 싸움에서 얻은 결실에 매달려 또 삶을 이어나갈 생각을 해 보고.
요수와의 연모가 쉽지 않을 것을 진즉에 알았지마는. 한 해가 흐르고, 또다시 겨울을 맞이한 지금도 그랬다. 나는 늘 이러한 갈래에서 어찌 대처해야 자연스러울지를 몰랐다. 갈팡질팡하다가 그를 다치게 한 경우도 허다했다.
“기석아.”
나는 요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술을 포갤 듯 가까이 대었다.
“내 연모가 모자라?”
요수는 항시 투정이었다.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하여 옆자리를 내주었더니 혼인을 바랐고, 기어코 둘이서 밤도둑처럼 혼인을 치렀더니 내 전부를 요하고, 내 삶을 내놓으라 하고, 무작정 이 땅이 멸하는 날까지 제 옆을 지키란다. 그 억지를 들어주지 않고 거부하기에는, 내가 너무 무른 아내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연한 입술을 삼키고 포갤 수밖에 없었다.
“널 연모하는 나를 조금 더 믿어주면 안 되겠니.”
침묵으로 낭비할 세월이 아깝지 않은가. 그는 내가 삼킨 뒷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내 입술을 머금고, 눈길로 억세게 나를 묶었다. 요수의 눈은 태초의 색으로 돌아왔다. 내가 아끼는 그 선홍빛으로.
흰 눈이 쌓인 개울가에서 우리는 오래간 입술을, 서로의 일부를 나누었다. 그게 얼마간 쌓인 불안을 희석시켜주었던 것 같았다. 요수의 날 선 시선이 물크러지고 부드러워졌으니까. 전혀 무르게 풀릴 요수로 보이지 않는데. 그가 순순히 묶여있는 것처럼 굴 때마다 나의 산성은 스러지고야 만다.
종으로 보나 사내로 보나. 그는 내게 위험한 정인이었다. 이맘때 겨울이 떠오른다. 요수와 대차게 싸웠더랬다. 어디 촌구석 마을에 놀러 가, 그와 삼 일 밤낮을 틀에 박힌 듯 보낸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의 얼굴을 쓸어보고, 아무런 눈치 없이 그와 손깍지를 하고 들어오고, 그를 정인이라고 당당히 소개한 그 삼 일이 내게는 귀했다.
그 삼 일 동안 장을 보고, 서로 어울릴 옷감을 골라주었다. 그는 개나리색처럼 노오란 장옷을 입고, 나는 청록색의 치마를 맞추었다. 하나 삼 일의 달큼함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 삼 일이 끝나면 다시 퇴치사가 되어야 함을 알기에, 그가 재앙인 요수가 되어야 함을 알기에. 그는 삼 일의 끝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마무리를 중요시한 내 마음이 화근이었다. 나는 불만 가득한 그의 앞에서 윗도리를 내려깠다. 젖가슴을 내밀며 그를 보았다. 제 손톱만 들여다보던 요수의 눈을 잡아왔다.
‘뭐 하자는 거야?’
요수는 기가 차 한탄하듯이 말했다. 주막 아낙들이 이리하면 사내가 좋아 죽는다는데. 어찌 된 것이 나는 번번이 화만 꾸어가고 마는지. 겸연쩍어 윗도리를 끌어올리려는 찰나였다. 요수가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그 발끝이 내 정강이에 닿았다.
‘왜 그러는 건지, 내가 묻잖아.’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더워서.’
노루도 코웃음 칠 변명을 늘어놓는 사이. 요수는 성급하게 나를 자빠트렸다. 내 윗도리를 뜯어내, 한 움큼 잡힐 젖가슴을 어금니에 물었다. 네발로 기어와 내 위로 올라탔다. 삐져나온 젖가슴이 입 안으로 잡혀 들어갔다.
‘아…… 응.’
당시는 나도 색사가 간절한 참이었다. 젖꼭지가 얌체같이 서고 말았으니. 요수는 시뻘건 눈으로 나를 보고, 제 뺨이 홀쭉하게 빨아먹은 젖가슴을 보고. 간혹 어금니로 껍질 벗겨 먹듯 내 젖가슴을 맛보다가, 내게 정염이 일렁이는 눈으로 물었다.
‘내가 생각 없는 것이 좋지. 너만 보면 좆을 꺼덕거리며 달려드는 게 좋은 거야. 멍청이처럼, 별생각 못하는 팔푼이처럼, 그렇게 네 옆에서 좆질만 해대라고. 그렇지?’
퍽 억울한 목소리였다. 요수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음미하는 양 내 가슴살을 한없이 베어 물어 혀로 쓸고, 쭈욱 빨다가 놓아주고. 살살 물라고 흔들대면 젖가슴 위를 콱 깨물었다. 경고조로,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는 젖이 고픈 새끼처럼 밤새 빨아 젖혔다. 우직한 성미가 기막힐 따름이었다. 내가 윗도리에 꺼내둔 대로 먹는 게, 참 고지식하다고 할지 징글징글하다고 할지. 하나 소정의 목적은 이루었다. 그 갈아낸 듯한 날카로움이 줄어들었다. 내 미끼를 제 식으로 알아먹은 듯싶었다. 그게 내 애정이고, 버리지 않을 믿음이고.
그는 한 뼘 애정에 넋을 주었다가 불안증에 시달리면 기둥부터 스러져 버리고. 하나 매번 가슴을 깔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또 밤새 들들 볶이며 시달리는 게 보통 힘든지.
나는 그의 머리칼을 빗어주듯 만졌다. 당최 아귀 맞는 답이 무어란 말인가. 우리를, 이 세월을 등에 이고 사는 자의 답을 모르겠다. 내후년은 해결되겠지, 십 년은 봐야겠지. 담담했던 말이 무색하게 우리는 흔들리고 넘어지고. 오히려 처음이 명료했다. 지날수록 안개 낀 나날이 어디로 가는지, 그를 어떤 것으로 달래주어야 할지. 그 지난한 갈피를 못 잡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