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ree that lives for many years RAW novel - Chapter 9
02. 생의 마지막
여정의 끝이 성큼 다가왔다. 율곡도는 예상대로의 풍경이었다. 비대한 요수가 남긴 발자국, 팔 한 짝을 입에 문 요수가 창에 찔려 엎어져 있었고, 형태만 남은 서까래에, 초가의 뜨락마다 구덩이가 패었다. 산산이 박살 난 곳에서 융숭한 대접이 무언가. 짚으로 된 막을 치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가마를 탄 무녀의 안색도 파리할진대 나머지는 어떠하겠는가. 왁자지껄하던 무리도 제각기 등 돌리고 드러누웠다. 나는 율곡도에 도착하자마자 스승에게 찾아갔다. 요수는 모르는 일이다. 제 발이 저린 듯 핑계를 대고서 나왔다. 스승은 율곡도 한 폐가에서 부은 다리를 두들기고 계셨다. 나는 꼬리 내린 살쾡이처럼 스승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찹쌀처럼 붙은 떨거지는 버리라는 잔소리만 수십 번. 찾아와라, 찾아와라 입술 부르트도록 말했던 스승이었다. 하나 못난 제자는 연정에 세간살이 다 내다 팔 지경이니. 결국 도착하고 나서야 은근슬쩍 얼굴 들이민 셈이었다. 나를 보는 스승의 눈이 뾰족뾰족한 것도 이해하는 바였다.
“이게 누구신가.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개똥이 아니신가.”
비아냥거리지만 걱정이 한 수저 들어가 있었다. 아예 폐가에 누울 듯 신까지 벗고 올라간 스승이었다. 양기석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나 스승의 감은 무시할 게 못 되는지라.
“그자는 누구더냐?”
꼭 이렇게 곤란한 질문부터 먼저 찌르고 들어온다. 한겨울 달밤 아래, 차가운 입김을 보낸 나는 딴청 피웠다.
“일전에 알고 지낸 자입니다.”
“네 정인이냐?”
그것만은 납작이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어린 날 글공부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스승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연달아 했다. 그간 티 한 번 안 내다가 난데없이 정인이랍시고 들이밀다니. 하나 돌려 말하기에는 미안해서.
“예.”
아니라고, 머리에 구멍 나 쫓아다니는 미련스러운 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속일 수 없었다. 스승의 눈에 되도록 보이지 않길 원한 것은 맞았다. 하나 내 정인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자. 눈빛이 이상했다.”
내 말을 듣고 스승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나지막이 그 말만을 했다. 초가지붕이 무너져, 안락함을 잃어버린 폐가와 스승의 눈가는 서글펐다. 그러므로 비슷했다. 스승은 서글퍼했다. 나는 그때 모골이 송연했다.
“되었다.”
스승은 입맛만 다셨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낯이었지만 스승은 삼킨 듯했다. 묻어두자는 얼굴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하나 과연 다행일까.
“스승님.”
스승의 얼굴이 나를 보았다. 스승의 눈은 더 말하지 말라는 듯했다. 끝까지, 첩첩산중 가려둔 비밀까지 털어놓을 것이 아니면. 어설픈 거짓말 말고, 아예 꺼내놓는 것조차 말라는 엄포였다. 죄인이 이러쿵저러쿵할 게 무언가. 공손히 고개만 숙였다.
“푹 주무십쇼.”
스승은 맥이 다 빠졌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싱거운 녀석. 주변을 둘러봐라. 푹 자게 생겼는지.”
스승의 눈을 따라서 둘러보았다. 여기 문제의 요수가 봉인된 곳이 있었다.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난 요수도 아마 근방일 터였다. 이곳에 살던 이들은 피난을 간 것으로 보이지만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 마을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데다가 혹 받아주어 화를 당할까, 아예 소금 들고 덤빈다고 들었다.
“잔당들의 기운이 실하다. 정말 깨어나긴 깨어나려는 모양이야.”
율곡도에 당도한 후부터 퇴치사 몇몇이 구토 증세를 보였다. 요수의 기운에 민감한 자들이 특히 그랬다. 나 또한 율곡도에 가까워지자마자 양기석의 손을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양기석은 얼씨구나 하는 얼굴이지만, 여하튼 율곡도에서 일이 벌어지긴 벌어지려는 모양이었다.
“깊이 자지는 마라. 새벽닭이 울기 전에 진을 그려 넣을 참이니 꼭 참석하고.”
“예.”
진을 그려 넣는다. 항시 글로만 익힌 배움이었다. 이처럼 퇴치사들이 모여 요수 하나를 봉인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땅에 영험한 진을 그려 넣고, 그 위에 각자의 자리에 앉아 힘을 보탠다. 하여 열 명이라면 열 명이 공평하게 자신의 힘을 진에 쏟아붓는 것이었다. 무녀들은 아마 그 때문에 온 것일 터다. 진을 그려 넣는 것은 보통 장로들이 많이 하는 것이고, 무녀는 진을 그린 경험이 있는 자들로 추려서 데리고 온 것일 터였다.
“아. 맞다. 개똥아.”
스승은 이제 막 떠나가려는 내 등에 대고 말했다.
“너. 그 조막만한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면서.”
“아직 받아들이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으이? 그 녀석이 나한테 신나서 와 자랑을 했는데.”
“한번 겪게 해 주고. 그래도 붙어있겠다고 한다면 데리고 있을 작정입니다.”
스승은 독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독한 스승이 될 줄 모르겠다고. 나는 여부가 있겠냐며 웃었다. 이렇게 스승과 시답지 않은 것으로 웃을 수 있다니. 여정 내내 졸여온 가슴이 한순간에 맹탕처럼 싱거워졌다.
내일 진을 다 치고 나면 여란이의 집에 한 번 들려야지. 폐허가 된 이곳이 어서 제자리를 찾기를. 풀벌레도 다 피난 가버리고 없는 듯, 길에서 내 발소리만 자박자박했다.
불이 다 꺼지고, 굴뚝도 얌전하고. 정다운 말소리나 숨소리도 없이, 지붕이 내려앉고 서까래가 주저앉은 집마다 퇴치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성미가 깔끔한 이들은 빈터에 막을 친다. 끼니는 지난 마을에서 싸 들고 온 것으로 때우는 모양이었다. 나도 나귀가 실어 온 짐 보따리에서 육포를 꺼냈다.
앞서가 습기 없는 땅을 찾아낸 요수였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한데 하고 많은 터 중에 고른 곳이 소나무 밑이었다. 어련히 짚으로 막을 치고 있겠거니 하고 걸어가는데. 저 앞쪽에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축 늘어진 닭을 손에 든 요수와 그 앞에 어떤 한 여인. 복장을 보아하니 무녀는 아니었다. 여염의 여인네인가. 사정이 여의치 못한 부녀자들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모로 보나 개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러면, 저기…… 맛나게 드셔요.”
정나미 떨어지게 뚝뚝한 요수의 앞에서 수줍은 듯 머리를 넘기는 여인. 맨발로 솥뚜껑 위에 올라선 것처럼 성나고 기가 차, 더운 콧김을 쑥 쉬며 다가가는데. 천천히 고개를 돌린 요수가 나를 보았다. 피식 웃는다.
“기석아.”
요수의 눈이 나를 향하자 그 앞에 선 여인도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이 여인인지 사내인지 모르는 눈치다. 아마 내 어깨까지밖에 닿지 않는 머리칼을 보고 긴가민가한 것 같은데. 달이 비추고 내 얼굴이 드러나자 단박에 아는 표정이었다.
“아, 아시는 분이 있으셨어요.”
아시는 분. 여인은 당황한 얼굴로 나에 대해 그리 물었다. 아마도 일행이 있었냐, 동행이 있었냐,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것을 잘못 물은 듯했다. 요수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걸어왔다.
“먹을거리 구하러 간다더니. 그게 아닌 것 같던데.”
고새를 못 참고 또 내 뒤를 밟은 모양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손에 들린 닭을 보았다가, 또 뒤에서 민망해진 여인을 바라보았다.
“주시는 것입니까?”
빠져나갈 때를 놓친 여인은 내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별거, 별거 아니온데. 퇴치사들이 오셔서 고마운 마음에 드리는 것이라…….”
여인은 눈에 띄게 허둥거리다가 볼일이 생각났다며 달음박질을 했다. 보통 요수는 기척을 숨기고 다니느라 웬만한 퇴치사의 눈에도 띄지 않는데. 아마 이 닭을 얻기 위해서 요기를 쓴 게 분명했다.
“또 사람을 꾄 것이야?”
“어디를, 다녀왔냐니까.”
이글거리는 그의 눈이 다툼의 시발점 같았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서 얘기하자.”
요수는 새끼 오리처럼 내가 이끄는 데로 왔다. 한데 그가 미리 자리를 잡아둔 곳에 당연히 막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짚은 온데간데없고, 웬 나무줄기로 얽고 섞은 막사만 보였다.
“네가 한 거로구나.”
이 정도면 들키라고 목을 닦는 수준인데도 아직 잠잠한 게 용했다. 정교하게 쓰려면 요기를 발산하였을 텐데. 아마도 주변 요수의 기운이 잡다해 묻힌 듯 싶었다. 하여간 교활하기가 따라올 수 없는 요수였다.
“그자에게 갔어?”
나무 막사 앞에서 요수는 내게 물었다. 아직 끝나지 않는 전초전이었다. 나는 한숨을 동무처럼 달고 다녔다. 무시하며 안으로 걸음 했다. 나무의 질감이 역시 보통 것은 아니었다. 안은 나름 아늑한 것이 신경 쓴 태가 났다. 청량한 송진내도 맡을 만했고. 여기로 오면서 묵었던 민가보다 좋았다. 나는 침상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 두툼한 겉옷을 벗었다. 요수는 따라 들어오며 문짝을 닫았다.
“스승님이 너에 대해 물으시더라.”
나는 침상에 앉아 부르튼 발에서 신을 벗겨냈다. 눈이 쌓인 곳을 지나려면 털가죽으로 된 것을 신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인지, 담비가 아닌 싸구려 털을 쓴 것인지. 발이 젖고 발바닥이 미끄러지는 통에 물집이 잡혀 고생이었다.
요수는 팔짱을 끼고서 옷 개키는 나를 지켜본다. 감상하는 시선이 어깨를 훑고 허리선을 내려간다. 그 요망한 눈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내 정인이냐고 물으시던데.”
“해서.”
“그렇다고 했지.”
한설 저리 가라 하던 요수가 봄날처럼 누그러졌다. 홍두깨에 꽃 피듯 예상치 못한 눈이었다. 내가 스승에게 말하길 꺼리는 터였다. 아는 녀석이 오만 데를 성질부리고 다닌 것인가. 여하튼 거짓말로 그를 공연히 괴롭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요수는 단번에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굽혔다. 기르는 짐승처럼 올려다보는 요수의 눈이 말갛다.
“정말 그리 말했어?”
“내가 농을 쳐도 이런 농을 치겠니.”
“정말 나를 네 정인이라 말했다, 그 말이지.”
신이 나서 내게 와 말하는 요수를 보고 혀를 깨물었다. 하마터면 어여쁘다고 말할 뻔하였다. 어쨌거나 이 사단을 만든 것은 그였으니. 하나 내 그늘에 속하고 싶어 저리 몸부림을 치는데. 안타깝고 곱고. 그의 이마에 입술을 포개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요수는 기꺼이 그 입맞춤을 받고서 빙긋 웃었다.
“혼인한 것도 말하면 좋을 텐데.”
이게 문제였다. 요수는 하나를 넘겨주면 둘을 바랐다. 둘을 넘겨주면 넷을 바랐다. 나는 곤한 몸을 침상에 쓰러트렸다. 더 말하면 뼈까지 발라먹을 놈이었다. 요수는 드러누운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제 손에 든 닭을 흔든다.
“자경아. 먹고 자.”
“생각 없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닭을 저 구석으로 내팽개치는 요수였다. 저절로 혀가 끌끌 차였다.
“이 다 쓰러져가는 마을에서 그 닭이 얼마나 귀한 닭인 줄도 모르고.”
“네 입에 들어갈 거 아니면 내게는 그다지.”
“참. 낯간지러운 소리를 살벌하게도 하는구나.”
저 닭은 아침에 스승께 가져다가 함께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코앞에 따스한 숨이 내뿜어졌다. 눈을 뜨니 턱을 괴고 나를 관찰하는 요수가 보였다. 푸슬푸슬한 하루를 정돈시켜주던 잠이 달아났다. 요수의 눈에 내가 보였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무엇이.”
“왜 너는 저것들하고 다르게 생겼을까.”
요수는 장난치는 것처럼 손가락을 내 코 위에 얹었다.
“숨 쉬는 게 신기하고.”
손가락이 죽 올라가 내 눈 밑에 닿았다.
“이 눈.”
그는 내 눈을 다시 한번 가리켰다. 내 눈두덩 위에서 톡톡 손가락을 움직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정겹던 미소가 사라졌다. 내 눈에 대해서 조잘거리려다가 딴 길로 샌 듯했다. 요수의 멍한 얼굴이 나를 향해있었다.
“이 눈이 영영 감기면 나는 어떠할까.”
내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묻는 듯한 어조였다. 잠재운 파도가 마음을 쓸었다. 급격한 고통이었다. 이만 자자고, 말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요수는 대답을 원하는 듯 내 눈두덩을 한 번 더 눌렀다.
“감기지 않게 할 수 있어.”
요수는 틈만 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저의 청혼을 받은 후로부터 더 심했다. 굳건한 내 마음이 흔들릴 만큼. 그에 관해서는 내가 물러터진 터라 그런 것이겠지마는 이러다가 덜컥 그의 말을 따르자고 할까 봐 내심 걱정이었다.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아 등을 돌렸다. 그건 그가 아무리 원해도 내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자경아.”
마치 안 자는 것을 다 안다는 투로, 요수는 사근사근 내 이름을 불렀다.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떠할 것 같은데.”
오늘 잠은 다 잤다. 나는 오늘로 이 구덩이를 파묻자고 생각했다. 그에게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이 다른 우리에게 이제 와 명확한 선이라니, 귓구멍 후비던 양심이 놀랄 법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뛰어넘는 감정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나를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하려는 존재였다. 그에 대해 가질 감정만으로 긴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나는 장담할 수 없다고 봤다.
“기석아.”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두 뺨을 살짝 잡았다. 그에게 명확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힘들겠지. 고통스럽겠지. 하나 결국엔, 그 끝에 가서는 넌 잘 살 거다.”
“그래?”
“요수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사는지. 그 세월이 지나도 변화를 겪지 않는 몸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않아. 내 어미를 죽인 요수만 해도, 그래. 그놈은 배불리 먹었다고 바다 밑에서 십 년을 처자는 놈이야. 그게 너희들이잖아.”
나는 그의 뺨을 잡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넌 괜찮을 거야. 세월이 감정을 잊게 해줄 거야. 나를 잊게 해줄 것이고, 네 본성을 불러올 것이야. 내가 죽은 후에 너는 예전에 그랬듯이 사람을 괴롭히며 살아가겠지.”
“보았어?”
“보지 않아도 알아.”
“자경아.”
그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몸을 일으켜 내 위에 그림자를 씌우고, 천천히 침상에 제 무릎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의 상반신이 내게 드리워졌다.
“만약 반대로 된다면?”
“그럴 리 없어.”
“널 잊지 못하고 산다면. 사지가 잘려 나간 것처럼 네 묘지 앞을 기어 다닌다면. 내 본성을 잊고서 역겨운 사람 흉내를 내고 살아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무얼 할까.”
“기석아.”
“네 묘지를 파내, 흙이 돼가는 뼛가루라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나? 억지로 이 땅에 묶어두었어야 했다고 자책하며 살아가야 하나. 그때 가서 알아보자고 할 터야? 그러면…….”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하나 메마르게 울었다. 나는 가련한 요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때 가서 나는 누구에게 화를 내.”
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그가 쏟아내는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너는 이미 없는데.”
“그만.”
“왜. 네가 너무 불리해서?”
그를 오늘 내로 설득시킨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제발 그만 좀 아프게 하라는 애걸로 변하였다. 그를 연모하면 구름 위를 노니는 것처럼은 아니어도, 적어도 혼자 고독을 씹는 것보다 수월하리라 생각했는데. 네 감정에 자신하지 말라, 망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묻어준다. 하나 그러는 나조차 이 짧게 번민한 세월, 어머니의 함자만 나와도 눈시울 붉히는 것을.
그는 코끝이 빨개진 내 위로 쏟아졌다. 침상에 등이 닿고, 그가 내 위로 올라온다. 결국 해소 못한 불안은 이리될 것이었다.
***
요수는 비꼬는 재주가 있는 이였다. 그래서 저가 화가 나면 혀를 놀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것도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금일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바깥과 다르게 훗훗한 기운이 감도는 이 오막에서, 그는 나를 제 양물 위에 얹어두고 알아서 하라 종용하는 중이었다. 늘 치대면 치대는 대로, 받으면 받는 대로 살던 나였다. 갑자기 가해진 자유 앞에서 허둥대는 것은 당연했다.
“버거워서…… 흣.”
요수가 음부를 더듬고 들어온 손가락 두 개로 뭉근하게 쑤시자마자 둑이 터졌다. 그다음에 바로 양물을 받은 참이었다. 한데 마주 보고 앉아 그의 양물을 품었건만. 도통 움직일 생각 없이 나를 빤하게 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럴 것이면…… 차라리, 하, 빼주, 빼주는 것이.”
그건 아닌듯했다. 요수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제 허리를 한 번 크게 올려쳤다. 얕게만 담그고 있던 양물이 불쑥 치솟아 안을 푹 찍었는데. 다리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아, 그 야릇한 느낌을 등허리로 받았다.
“아……!”
“움직여.”
그는 우직하게 양물을 밀어 넣었다. 양물의 대가리만 담글까 말까 하는 수준으로 있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 듯이.
“으, 응…….”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서 비비적거렸다. 그 빠듯한 느낌이, 짓쳐들어오는 그 무지막지한 양물이. 가만히 품고만 있어도 벅차서. 허리를 들고서 빼내려고 해도 안 된다. 등허리로 퍼지는 희락에 다리가 풀렸다.
“안 움직여?”
“기석아…… 네가, 흣, 해.”
“보고 싶어.”
그가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양물이 음부를 가르고 밖으로 나갔다. 뽑혀 나가면서도 속살은 짓이기면서, 온몸이 몸서리쳐지게 욕심껏 누르고 나가면서. 하나 반쯤 나갔을까. 곧추선 양물은 제 자리를 찾듯 금세 짓찧고 들어왔다.
“아, 응!”
“날 연모하는 만큼, 정신없이. 그러는 거, 보고 싶어.”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내 허리를 천천히 들었다가 놓았다 하면서, 양물을 쑤욱 꺼냈다가, 자지러지는 나를 억지로 제 양물 위에 앉히고. 말로는 내가 정신없이 흔드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나 실상은 양물 품고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원한다.
“아, 자경아, 이렇게 해, 혼자, 응?”
“아, 으, 읏!”
그 손이나 치우고 말하라고 했다. 내 허리를 끊을 듯 그러안은 팔뚝에 갇혀, 나는 의지를 벗어난 채 지시당하고 있었다. 그가 내려 꽂아버리면 속살에 양물을 받고, 서운하게 빼내면 잘게 허리를 떨고. 그의 귓가에 원하는 만큼 신음을 흩트려 보내주고. 잡을 곳도 없어서 그의 어깨를 이로 물었다. 하나 요수는 눈을 휘며 웃을 뿐이었다.
“자경아. 좋지, 그렇지…….”
“흐, 미친, 너는, 하, 아!”
빠르다. 구석구석 찌르고 들어온 양물이 속살에 가만히 꾸욱 눌러앉았다. 거기가 내 여린 부분인 것을 아는 탓이었다. 감당하기 싫은 감각이 밀려왔다. 나가라고 아래를 흔들어도 야비하게 웃을 뿐. 제 무식한 양물을 더욱 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발가락으로 침상을 긁었다. 빼내 달라고 마구 때려봤자다. 요수는 킬킬 웃어댔다.
“좋아서 그러나 봐. 내 자경이.”
“빼, 빼줘. 그만, 눌러!”
그가 부드럽게 허리를 흔들었다. 살짝 빼내었다가 다시 그 자리. 놀리듯 양물의 대가리만 떼었다가 다시 그 자리. 속고 또 속는 나는 주먹의 힘이 점차 빠져갔다. 대책 없는 신음만 허공에 뿌리며 아래를 오므렸다가 폈다가 난리였다.
“으, 흐아, 아……!”
방심한 순간이었다. 그의 어깨에 어떻게든 달라붙어 의지하려고 한 그 순간. 내 허리를 한순간에 들어 올리더니 자비 없이 양물을 빼냈다. 허전하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내가 거기만 누르지 말라고 빌고 빈 그 연한 속살에. 음부를 젖히고 들어와 사정없이 내려쳤다.
“아, 으!”
무작정 박아대는 게 아니었다. 내가 우는 곳. 싫어하는 곳. 그러한 곳만 골라서 찔러댄다. 나는 도망칠 수도 없게 두 팔로 안아 들고선. 무방비한 내 음부를 제 것처럼 쑤시고 후비고 난리였다. 나는 하릴없이 그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잔인한 놈은 그사이를 또 노려, 제 눈앞에 젖가슴을 야금야금 맛본다.
“더 내밀어, 내 혀에. 자경아.”
붙잡을 곳이 없어 그의 머리를 안았을 뿐인데. 그는 혀를 내밀어 내 가슴께를 물었다. 잇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는 아니나, 혀를 날름거리며 희롱하는 모양새였다. 잡을 곳이 없어 뿌리치지도 못하고, 아래는 계속 쳐올리고 있고. 나는 발끝부터 치고 올라 온 쾌락에 굴복했다.
치걱, 푹, 쑤셔지는 양물을 감내하다가 숨 넘어 것 같았다. 젖가슴을 입 안 가득히 물고 빠는 놈이 무어라도 나오는 양 목울대로 넘기고 있었다. 민망스러웠다. 반쯤 울면서 애원하며, 나는 그의 허리 움직임이 더욱 날렵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경아, 자경아…….”
“아!”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팔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그가 양껏 내 젖가슴을 물고 찍어 올린 그때. 기어코 여린 속살을 누르며 씨물을 싸질렀다. 부푼 성기가 진한 것을 내 안에 흘린다. 요수는 숨을 몰아쉬며 내 가슴께에 입을 맞췄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만히, 가만히 허리를 움직이며 제 양물을 내 속살에 비비적거린다. 요수 나름의 즐기는 방식이었다. 나는 온몸의 힘이 빠져 그러든 말든 내맡겼다.
“연모해…….”
드디어 내 가긍한 젖가슴을 놓아주었다. 그는 아직까지 허리를 놀리며 느긋이 즐겼다. 내 뺨을 부여잡아 제 코앞으로 끌고 온다. 입술을 살짝 맞댄다. 요수가 말을 이어갔다.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여정의 고단함에, 요수의 정욕에 시달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대답했다.
“네 옆에 있잖아.”
“다 알면서. 내가 하는 말, 그 말이 아닌 것을.”
“한다면. 내 미움을 받을 자신은 있고……?”
어림도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요수는 허락의 의미로 안 모양이었다. 허리를 멈추고, 눈을 조금 크게 뜬다.
“들어줄 거야?”
“아니. 하지 마.”
“자경이, 네가 원치 않아서 가만히 있는 거야. 네가 날 안 볼까 봐 강제하지 않는 거라고.”
“잘하고 있어. 착한 내 요수.”
요수는 잠으로 빠져가는 내 얼굴을 붙들고, 뺨에 다시 입술을 눌렀다가, 서로의 입술을 포갰다가, 더 가지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듯 굴었다.
“네가 점점 어여쁠 때마다 나는 힘에 부쳐.”
“덜 어여쁠 수도 없고. 이를 어째…….”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 우리가 진중한 날은 얼마 없으므로. 하나 그러자면 잠자리는 피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밥을 많이 먹고, 잠을 자둔 후였어야 했다. 당장은 적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마치 자장가라도 해주는 듯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내가 거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때까지였다. 요수는 홀로 말을 걸어왔다. 그만큼 절박하고 외로웠을까.
과연 내가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요수의 상태는 좋아 보였다. 쌍욕을 들었던 간에, 화를 나누었건 간에, 여하간 잠자리를 가진 요수는 대체로 싱그러웠다. 나는 반대였다. 혹사당한 탓에 기력이 빨리고 걷다가도 졸려서 멈추어 서기 일쑤. 하면 요수는 내 옆으로 와 나를 받치고 설 테니 자라며, 자신이 업어줄 테니 푹 자라며, 까무러칠 만한 다정함을 보였다. 한순간 혹했으나 함정이었다. 거기에 혹하면 그대로 끌려가 또 혹사당하리니. 아무튼 이 요수는 치대는 것에 환장하는 편이다.
나는 결국 졸음에 지고 말았다. 나무 밑에 몸을 기댔다. 눈밭에 앉을 수 없어서 꺽다리 짚고 눈을 감았는데. 앞에서는 무녀가 진을 그리는 것을 다들 구경하고 있었고. 스승은 이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다투는 무리를 구경하며 서 있었다. 여란이는 그런 스승의 뒤에 꼭 붙어서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요수의 출몰이 잦으니 스승께서 챙기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진을 그리는 것은 처음 보는 터라 잘 보고 배워두고 싶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목이 뒤로 꺾여 넘어가며 졸기를 반복하다가 눈밭 위에 주저앉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에 등을 대고, 꾸벅꾸벅 고개를 수그리다가 폈다가를 반복하며.
엉덩이는 축축해지고 손발이 얼어야 정상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동상 걸리기 딱 좋은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아랫목처럼 포근했다. 나는 그 따듯한 아랫목에 들어가 모자란 잠을 채웠다. 아득바득 축난 몸을 회복하고자 시끄러워도 눈 한 번 뜨질 않았는데. 등을 따스하게 덮은 손이 나를 깨웠다.
지친 마음까지 아랫목에 올려주는 듯한 손길. 사뭇 그리운 느낌이었다. 한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나는 눈밭 위가 아니라 사람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넓은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몸 위에는 두꺼운 털옷이 얹어져 있고. 하나하나 깨달아가며 정신을 차린 순간이었다. 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온기의 원인을 알아냈다.
“이게…….”
요수는 대신해서 눈밭 위에 앉아, 나를 제 무릎 위에 두고 재웠다. 진을 다 그린 모양인지 이것저것 정하며 싸우는 사람들은 아직 한창이요, 그걸 구경하는 무리가 또 한 무리. 그 시끄러운 돌풍에서 나와 요수만 동떨어져있었다.
겨울이 와 잎을 내준 나무에 기대어, 우리는 첫 만남처럼 한없이 바라보았다. 잠이 덜 깨어서 그러한가. 요수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손발이 저렸다. 이 자를 내 곁에 영영 두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요수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나를 훑듯이 본다.
“자경아. 거의 끝났나 봐.”
그는 아직도 내가 잠결에 머무는 줄 아나보다. 입술에 붙은 내 머리칼을 떼어주었다. 쓸데없이 다정하기는. 저도 요수면서, 같은 요수가 봉인 당한다고 하는데도 그러려니 하다니. 나는 약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요수는 그제야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을 알았다. 입술을 가만히 내 이마에 붙여왔다.
“잠이 덜 깼어?”
맹세코 나는 내 입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기석아.”
“응.”
“연모해.”
뱉고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요수는 눈알로 나를 위부터 아래까지 핥았다. 탐나서, 죽도록 탐나서 핥는 눈이었다. 내 눈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요수가 숨긴 기척 아래서, 우리는 서로를 지독히도 탐했다.
잠기운에서일까. 나는 이대로라면 영원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빠졌다. 그 가슴 아프도록 그리운 틈으로 내 스승의 목소리가 오기 전까지.
“웃기는 소리 말게나.”
그리고 스승의 목소리에 맞서는 여러 명의 목소리. 나는 잠기운이 달아나, 그대로 요수의 어깨를 짚고 일어섰다. 요수는 그런 내 등을 보내줬다.
“사람을 이용한 봉인술은 오래전부터 금해왔던 것이야.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대단한 이들이라고. 제물을 고르고, 제물에게 더 없을 고통을 짊어지게 하고. 그게 같은 사람으로서 할 일이던가?”
스승의 목소리를 듣고 곧장 나아갔다. 요수의 손등을 잠시 쓸어 만져 준 다음이었다. 스승에게로 달려갔다. 그때까지 내가 나무 밑에 있었던 것도 몰랐던 스승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잠시 눈여겨보고, 다시 제 앞에 모인 무리에게 일갈했다.
“자격이 안 될 것 같으면 여기서 그만두게. 괜히 여러 사람 인생 피곤하게 하지 말고.”
“무어? 이 시건방진 놈이……!”
나는 스승의 멱살을 잡으려고 달려든 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제야 군중의 시선이 나와 내 스승에게로 몰렸다.
“무슨 일입니까.”
달려들려 했던 퇴치사가 나를 쏘아봤다. 마침 잘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자네가 말 좀 해 보게.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건지.”
“그래. 들어나 봅시다. 무슨 일로 멱살잡이까지 하려 했는지.”
인상이 험악한 그자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그처럼 큰 요수는 봉인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주변에 작은 요수란 요수는 죄 끌어들이는데. 이 중에 몇몇은 봉인술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막아야 할 터였고. 그러자니 봉인술에 들어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하고. 그리하여 부족한 부분은 색다른 봉인술로 채우자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색다른 봉인술이지. 요약하면 봉인술에 사람을 쓰자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스승은 설명을 끝낸 퇴치사의 말에 다시 한번 토를 달았다. 눈치를 봐서는 대다수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내 스승과 그 뒤에 선 몇몇. 그리고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보이는 무녀 셋만이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는 왕께서 주시하시고 있는 봉인입니다. 한데 사람을 이용해, 괜히 우리끼리 구설수를 만들 일이 무업니까. 사람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이용한 봉인술을 금기한다기보다는, 왕께서 기대를 건 일에 괜한 잡음을 빼자는 소리였다. 거부하는 자들은 이런 쪽이 대다수인 것 같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였던가. 명예보다 봉인에 사활을 건 쪽과 봉인이고 나발이고 제 명예가 깎일 것을 두려워하는 자. 후자가 소수였으나 의견은 팽팽히 대립했다. 진을 다 그리고 나서도 분위기가 오르락내리락한다.
나는 한 발자국 떨어졌다. 내가 말을 더 보탠다고 결정 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잘하면 요수가 스스로 봉인을 깨고 나오겠다. 그래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스승은 물러나 있는 내 곁으로 왔다.
“내가 이래서 무더기로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이해합니다.”
“다들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 예민한 것은 이해한다만. 이럴수록 좋아하는 것은 이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요수야.”
나는 멱살잡이까지 서슴지 않는 퇴치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을 쓴다고 하면, 몸에 요수를 지녀줄 사람이 누가 있긴 한답니까.”
“이 마을을 지나오면서 본 어린 애들이 많지 않느냐.”
“예?”
나는 놀라서 스승을 돌아보았다.
“요수 때문에 부모 잃은 어린 것들이 얼마나 많아. 더군다나 어린 몸에 봉인해두면 여기 이 늙은이들보다는 늦게 죽을 것 아니더냐. 사후 요수의 숙주가 되든 말든. 일단 급한 불이나 꺼보자는 심보인 게지.”
안 그래도 거부감이 들었던 마음이 더 견고해졌다. 적선 한 푼 받고자 이 폐허가 된 마을까지 기웃기웃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았는데. 재물이란 그들을 겨냥해 한 말이 아니던가. 이럴 때 보면 사람을 위해 요수를 봉인하는 것인지. 제 욕심을 위해 요수를 봉인하는 것인지. 이 일을 하면 할수록 헷갈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실패하면. 으이? 실패하면 어쩔 거요. 이 요수가 어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요? 으이?”
주먹다짐까지 가지 못하고 삿대질만 하는 오후. 결국 결정은 미루어졌고, 땅속에서 잠자고 있는 요수는 그 수명이 하루 더 늘어났다. 사람 덕분에 하루하루 수명이 늘어가는 요수라.
거꾸로 가는, 요지경인 시대였다.
***
눈이 내렸다. 여정의 목표인 요수가 봉인된 곳은 정확히 짚자면, 커다란 돌 양옆으로 소나무가 난 곳이었다. 아마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해둔 듯싶었다. 요수의 발 하나가 집채만 하다고 하니. 제대로 깨어나기 전에 봉인해두자는 것이 모두의 결정이었고, 나 역시 흔쾌히 의견을 보탰다.
한데 봉인에 사람을 쓸지 말지. 그 의견 차는 달이 기울어지도록 그대로였다. 진은 그려두었는데 정작 퇴치사들끼리 옥신각신이라니. 나는 싸움판에 질려 여란이와 함께 빠져나갔다. 어차피 퇴치도 내일로 미루어졌겠다. 봉인이 끝나고 할 일을 지금 하자고 한 것이었다.
요수는 나와 여란이의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여란이의 숙부와 동생들은 진즉에 피난을 갔다고 한다. 옆 마을 친우에게 신세진다는데 빈손으로 가기도 조금 그렇지 않은가. 하여 어제 요수가 잡아 온 닭은 희생양이 되었다.
“저기, 퇴치사님.”
여란이는 아마 이곳일 거라고 얘기한 뒤에, 낡은 초가집 앞에서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잠시, 제가 먼저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고개를 꾸벅 수그린 여란이가 그 문으로 토끼처럼 뛰어 들어갔다. 요수는 내 뒤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런 요수를 올려다보고 싱긋 웃었다. 요수는 내 허리에 은근히 팔을 둘렀다.
“따듯하다.”
뚫린 마음에 단비를 채워주는 것 같다. 뒤에서 다붓하게 안아주니 뭉클해진다. 나는 나를 빙 두른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요수는 제 콧날을 내 목덜미에 두었다. 왠지 모르게 끔찍이 붙어있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간만에 찌르르 통했나 보다. 우리는 이 눈 내리는 저녁을 서로의 마음으로 덥혔다.
쨍그랑. 안에서 요란하게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요수는 앞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내 몸을 막았다. 잠시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우리의 눈은 촛불 흔들리는 초가집을 향해 있었다.
요수의 예상대로일까. 내 눈앞에 곧바로 사정이 드러났다. 문이 열리고 뒷덜미 잡힌 여란이가 끌려 나왔다. 윗옷도 갖추지 못한, 삐쩍 마른 사내가 여란이를 끌고 나왔다. 그 어린 것을 버리듯 마당에 팽개쳤다.
“뭔 퇴치사를 한답시고 쏘다녀서 집안 망신을 시켜, 망신을!”
“그게 아니고요. 연구랑 연주 먹을 것도 벌 수 있고…….”
“아. 너 말 잘했다. 이참에 너 그 떨거지들 죄 데리고 올라가라. 먹이고 입히고 재운 값 다 내놓고 데리고 가버려. 이?”
그렇지. 저만한 아이가, 여인이라는 고삐에 매인 아이가. 무탈하게 퇴치사가 될 수 있을 거란 내가 잘못이었다. 부모 잃고, 범범한 숙부 댁에 얹혀산다고 했을 적부터 불안했거늘. 숙부라는 작자의 뒤로 손가락 빠는 어린 것이 보였다. 여란이의 동생들이었다. 아까 저만한 아이들을 제물로 쓴다는 스승의 말까지 떠올리니, 이모저모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자경아.”
앞으로 나가려는 내 어깨를 요수가 훅 끌어당겼다. 끼어들지 말라는 뜻인 줄 알고 팔을 탈탈 털었는데. 요수는 도통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관절 왜 그러냐며 뒤를 돌아볼 때였다. 불길한 기운이 뇌리를 건드렸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요수는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저것이, 저것이……!”
봉인된 요수가 있는 방향이었다. 여긴 봉인이 벌어질 장소에서 떨어진 마을이었다. 한데 지금 마을 초입, 아래로는 다리가 없어 배를 끌고 다니고, 위로는 사마귀의 팔을 단 요수가 기어 온다. 어슬렁어슬렁 흙을 배로 짓뭉개고 다니며, 늦밤까지 배회하는 먹이를 노리는 듯한데. 그 눈이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 여, 연구야, 연주야. 문 닫아!”
여란이는 문 안쪽 동생들에게 소리쳤다. 여란이의 숙부라는 작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듣자마자 문을 꼭 닫아버린다. 여란이는 갓 태어난 노루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다리의 힘도 풀린 듯 보였다.
“어째서…….”
너무 이른 징조였다. 무녀나 저명한 퇴치사들이 짐작하기로는 모레였다. 가장 빠른 날을 오차 없이 계산했을 텐데. 아무튼, 계산이 틀렸든 어쨌든, 여기는 사람이 사는 민가였다. 게다가 다들 자는 늦은 저녁이었다. 도망칠 곳도 여의치 않았다.
[화경]손을 폈다.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푸른 불꽃과 붉은 불꽃이 교차하며 타오른다. 팔을 둘러싼 불길이 느껴졌다. 미물 같은 요수는 가창의 봉인술이 아까웠다. 저 요수의 근원을 찾아 태우기만 하면 되었으니. 그리하면 딱딱한 돌처럼 굳어, 제 근원을 되찾기 전까지 얌전할 터였다. 보통 요수의 근원은 눈알 혹은 신체 부위에 나타난다. 옛적에 나무 요수의 눈알을 부순 것처럼 말이다.
물구나무서고 보아도 하급 요수였다. 제 근원을 숨길 생각조차 없으니. 꽁무니에 기다란 회색 등뼈였다. 묘하게 거기만 기운이 달랐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숨긴 게 저기일 터. 나는 허리를 굽혔다. 요수에게 바닥을 쓸듯이 달려들었다.
사아아아아.
쫙 벌어진 요수의 입 안에 거미줄 같은 것이 쳐졌다. 독을 뿜을 가능성이 있었다. 자세를 낮췄으나 요수가 휘두른 팔은 위협적이었다. 칼날 같은 것. 한 번 베이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그렇다면 온몸을 불태우는 수밖에 없을까. 온갖 수를 생각하던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젠장!”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알고 보니 부부나 형제나, 여하튼 동료로 보이는 요수가 여란이에게 달려간다. 저쪽은 몸집이 더 컸다. 아무래도 하급이긴 하나 머리를 쓰는 종류인 모양이었다. 나를 한 명이 붙잡고, 나머지 하나가 어린 사람을 노린다.
“아!”
여란이는 도망가려고 몸을 들썩거렸다. 다리가 다 풀려 도망가기 여의치 않아 보인다. 입술을 물며 뛰어가려고 하는데 날카로운 발이 뒤에서 날아왔다. 곧바로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꽂는다. 방심하다간 죽일 기세였다.
“살려, 살려주세……!”
암컷으로 뵈는 요수가 여란이를 향해 입을 쩌억 벌린 그때. 철혈의 가지가 땅에서 용솟음치듯 올라와 요수의 뱃가죽을 뚫었다. 단박에 요수의 내장까지 파열시킨 공격이었다. 땅이 파도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땅속에 구렁이 수천이라도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양기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참견 말고 내 할 일이나 잘하라는 눈짓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뒤에 있는 사마귀 요수가 울부짖었다. 제 짝을 잃고 판단이 흐려진 듯했다.
[멸화]화경보다 더 강한 불꽃. 새까만 불꽃이 구부정한 내 팔에 둘러진다. 나는 땅에 꽂힌 요수의 팔에 가까이 갔다. 밤의 은총처럼 까만 불을 세게 지폈다. 요수의 팔에 그 불길이 옮아붙었다. 화마의 고통에 요수가 비탄을 끊었다. 나를 보았다. 원한이 그득그득한 눈이다. 나머지 팔 한쪽이 있었다. 요수는 타들어 가는 팔 한쪽을 내버려 두었다. 단호하게 도려낼 요량인가 보다. 나머지 팔 하나로 나를 찍으려 들었다.
사아아아아아!
팔에서 노니는 불꽃을 온몸으로 불러왔다. 옻빛의 불이 내 양팔과 다리에 둘러진다. 나는 그대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 요수의 팔이 내 이마에 꽂힐 찰나. 그 징글징글한 입 안에 불길을 떨어트렸다. 까만색 불이 거미줄 타고 입 안을 돌아다닌다.
사아아아아! 사아아아아!
내게 오던 요수의 팔이 주춤했다. 제 장기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나는 요수의 입 안에 손을 넣고, 그 탄탄한 뱃가죽을 발판 삼았다. 하늘로 도약했다. 뒤에 박힌 회색빛 등뼈. 손이 닿질 않아 쭉 뻗고 뻗는데. 고통에 몸부림치는 요수가 제 얼굴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떨어질락 말락 위태롭다. 날카로운 요수의 팔이 내 다리를 썰기 위해서 다가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아!”
바닥에서 튀어나온 밤색 나무의 뿌리가 그를 막아섰다. 쿠욱. 두꺼운 나무뿌리에 요수의 팔이 박혔다. 팔 하나는 타고, 하나는 꼼짝 못하고. 요수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비늘 박힌 배를 땅에 버무리듯 비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짜, 엄지로 그 등뼈를 찍었다.
[멸화]뭉툭한 엄지에서 빛깔 잃은 등뼈로. 마실 나간 새까만 불이 골수까지 빨아먹을 기세였다. 솔잎 먹는 송충이처럼 살가죽에서 근원을 파내간다. 불길이 근원을 먹어 치울수록 요수는 거대한 돌이 되었다. 나는 그쯤에서 입 안에 매달려있던 손을 놓았다.
“윽!”
하는 수 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요수는 사지가 돌로 굳어가는 와중에도 나를 바라보았다. 살벌한 시선이었다. 마치 너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수많은 요수를 봉인해왔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저 눈빛은 간담이 서늘했다.
“자경아.”
어느새 다가온 양기석이 나를 일으켰다.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본다. 기특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한시가 급했다.
“요수가 몰려오는 것 같은데. 설마 봉인이 벌써 풀리기 시작했나.”
“그럴 수도.”
“이 마을부터 보호해야겠다. 화경으로 불꽃을 마을에 둘러, 요수가 접근할 수 없게 만들면 괜찮을 거야.”
그때 조용히 경청하던 양기석이 한숨을 쉰다. 그의 발끝이 신경질적으로 땅을 쳤다. 이내 바닥이 꿀렁꿀렁 부풀고 가라앉는다. 아까 나를 지켜주었던 거대한 뿌리였다. 땅을 무참히 찢으며 올라왔다.
“이게 다 무엇이여……!”
하도 밖이 시끄러워서 나와 본 사람들이었다. 얼굴만 빼꼼 내민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웅장한 나무의 뿌리가 솟아 나와 마을의 주변을 똬리 틀 듯 에워싸기 시작했다. 지나갈 수 없게 저들끼리 얽혀 마을을 둘러싼다. 나는 양기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투박한 나무뿌리가 삽시에 해결할 줄이야.
“장하다.”
양기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내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요수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하나 이 긴박한 사태에 상이 무언가. 갑자기 요수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시선은 뿌리 바깥에 가 있었다. 양기석이 밤공기를 가르고 말했다.
“봉인의 진이 시작됐어.”
“무어?”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마을 바깥으로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때 양기석이 내 허리를 안아 들었다. 그가 자세를 바꾸어 나를 마주 보고 안았다. 날름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고 얼굴이 붉어지다니.
“나도 나갈 수 있는 것을.”
“내가 해주고 싶어서.”
나는 같은 박자로 뛰는 그의 가슴께를 보듬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게 만드는 사내였다. 그의 뒤편, 여란이가 마을 사람들과 몰려나와 이 장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큰 목소리로 여란이에게 전했다.
“이 뿌리 밖으로 나오지 마라. 놀란 어른들 진정시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수는 뿌리를 차근차근 밟고 올라갔다. 가볍게 튀어 오르는 그의 몸짓에 맞추어 바람이 내 머리칼을 흔들었다. 노오란 보름달 아래, 거대한 요수가 깨어나는 이 밤. 나는 내 정인의 품에 안겨서 조금은 설렌다고. 아주 잠깐 철없는 마음이 이길 수밖에.
나는 그의 살 내음을 깊이 마셨다. 그가 자신이 만들어낸 뿌리를 건넜음에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대신 달려가 주었다. 우리는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나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 자가 좋았다. 좋아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사람을 지키는 요수라. 들어본 적 없는 기행을 한 요수가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자경아!”
상념은 금세 잘렸다. 요수가 나를 땅에 내려주었다. 이럴 수가. 아수라장 한복판이었다. 스승은 바닥에 꿇어앉아 붓을 들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화지. 거뭇한 붓을 들고 있는 스승. 여기저기서 신을 부르며 싸우는 퇴치사들. 그리고 요수. 나는 양기석에게 눈짓으로 작별을 알렸다. 즉시 스승에게 달려갔다.
“스승님!”
“젠장할 노릇이다. 이 사태를 정말로…….”
스승의 말이 채 꺼지기도 전에 곰발을 가진 요수가 끼어들었다. 그 미물의 형상을 지닌 요수는 스승이 펼친 화지를 밟자마자 먹으로 변해갔다. 스승은 재빨리 봉인의 말을 족자에 적어갔다. 벌써 그런 그림이 스승의 옆에 수십 장이었다.
어떤 무녀는 춤을 추어서 요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어떤 무녀는 비단으로 요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어떤 퇴치사는 부적을 뿌리고 도망 다니며, 어떤 퇴치사는 땅 밑으로 요수를 가라앉힌다.
제각각의 능력으로 싸우는 혼란한 장 가운데. 스승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저 어리석은 것들이 기어코 사람을 써서 봉인술을 행했다. 하려면 잘이나 할 것이지…….”
스승의 분노 어린 시선이 앞을 향했다. 나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푸른 진이 떠올랐고, 흑색 손톱이 닭살처럼 자란 팔이 튀어나왔다. 그 주위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은 퇴치사 수십이 중얼중얼한다. 진에 힘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앙에 아이가 쓰러져있었다.
“실패다. 기운을 보면 알 수 있어. 벌써 요수의 팔 하나가 땅으로 기어 나왔다.”
나머지는 잔챙이 요수를 상대하느라 바빠 저 진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봉인진에 둘러앉아 힘을 쓰던 퇴치사 하나가 눈을 떴다. 왼팔만 꺼내어졌을 뿐인데 거기 앉은 사람 모두를 뭉친 것보다 컸다. 겁에 질린 눈이 보인다. 예상대로 힘을 보내는 것이 지체된다. 발을 빼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리도리 질을 하고. 기어코 그 둔중한 발을 빼내어 뒤로 옮긴다.
“저런 이가 벌써 셋이다.”
구우우우우. 땅 밑에서 요수가 운다. 자신의 봉인이 풀려남을 미리 알리고 있었다. 저 울음이 요수를 불러 모은다. 잠들어 있는 사이 쌓였던 원한이 깨어난 것이다. 살인하며 날뛰는 저기 저 요수만 보아도 그랬다. 저 거대 요수의 원한이 옮아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었다.
만약 저게 깨어난다면.
“저라도 가서 보태겠습니다.”
“아서라. 작금은 몰려드는 이것들을 헤치고 도망가야 할 때야.”
“도망갈 곳은 있는 줄 아십니까. 저게 깨어나면 당장 여기서 다 같이 제사상 받게 생겼습니다.”
나는 푸른 봉인진을 향해 달려갔다. 아까 내뺀 퇴치사가 앉은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내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내 옆자리에 앉은 이가 떠나갔다.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힘은 빚처럼 늘어나고, 늘어나고. 버티다가 못한 이가 도망치고, 다시 다른 이들의 짐으로 돌아오고. 악순환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봉인진에 손을 대었다.
[자경아.]봉인진에 손을 대자마자 온몸의 진이 빨려 들어간다. 갑작스럽게 힘이 빠져나가자 내 안에 있는 신이 놀라서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어금니가 흔들흔들하는 느낌에 잠시 휘청거렸다.
[지금, 봉인을 하는 중입니다.]나는 간신히 신께 대답했다. 신께서는 내 눈을 빌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팔 하나가 밖으로 꺼내진 요수를 보았다. 신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버거운 상대다.] [압니다.] [점점 힘이 많이 소요되는구나.]하나둘 자리를 이탈해서 그렇다. 내가 앉을 때만 해도 서른이 넘게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열둘이 고작이었다. 그 열둘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할지 고민을 한다. 땅 밑에서 팔 하나를 온전히 뺀 요수는 다음 팔을 빼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왼팔은 나왔고. 오른팔에 달린 손톱 하나가 땅 위로 올라온다. 그것을 본 퇴치사 두 명이 뛰쳐나갔다. 나까지 해서 열하나. 고작 열하나의 힘으로 저것을 버텼다.
“우욱……!”
내 오른편에 있는 자가 헛구역질을 했다. 나도 신물이 올라왔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두개골이 빠개질 것 같은 그때. 왼편에서 세 명이 동시에 일어섰다. 땅 밑에 있는 요수는 가벼이 오른팔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 아직도 있는가.
요수의 목소리가 땅 밑을 지배했다. 뼈에 태산만 한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 악하고 악했다.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두려움에 지려 하는 내 마음을 신께서 지탱했다.
하나 그 협박이 통한 네 명은 도망쳤다. 반이 날아갔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은 오기로 버티는 듯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다 풀려서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에 열 배는 넘는 사람의 수를 생각하고 만든 봉인진이었다. 겨우 버티고 있는 네 명의 생을 남김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저 요수를 봉인한, 당시 이것을 혼자 해낸 도인이 존경스러웠다. 목구멍에서 쓴물이 올라올 때, 한 명이 쓰러졌다. 그걸 본 한 명이 뒷걸음질 쳤다. 나와 어떤 퇴치사 하나. 겨우 둘이서 봉인진을 지켰다. 하나 힐긋 바라본 나머지 하나가 눈을 까뒤집었다. 봉인진 또한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자경아!”
애원에 가까운 스승의 목소리였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살짝 돌렸다. 눈물 고인 스승을 바라보았다. 스승은 바쁘신 몸이었다. 뒤에서 오는 요수를 족자에 봉인했다가, 나를 보고 계시다가. 스승이 고개를 젓는다. 당장 나오라며 손을 휘젓는다.
[자경아.]푸른색 봉인진에 가로막혀 두 팔만 겨우 나온 요수. 그는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비켜서면 너 하나만은 살려주겠다며. 이 지독한 원한의 칼날이 너만은 비켜 갈 것이라며. 마지막까지 나를 저지하려고 애쓴 그 용기를 가엽게 여겨준다며.
내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나 착각이었다.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고통만이 전해진다. 심장이 터질 듯 뛴다. 피 섞인 헛구역질을 여러 번 했다. 나의 뒤에서는 몰려오는 요수와 싸우느라 난장이었다. 봉인진에서 도망친 자가 요수에게 잡아먹혔다. 여기서 모든 힘을 다 쓴 탓이었다. 어차피 이 봉인진에서 나가도 나는 또 다른 요수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지금 비켜서면, 살려준다는 말은 거짓이겠지요.]신은 답하지 않으셨다. 하나 알 수 있었다. 요수의 말은 팔 할이 거짓이니까. 특히 원한으로 가득 찬 요수의 말은 더욱더. 요수. 요수. 내 머릿속을 각인된 단어가 누군가를 불러왔다.
힘없는 눈길로 옆을 봤다. 모두가 피를 흘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혼탁한 이 밤에, 홀로 고요한 요수 하나가. 희게 질려가는 그 요수가 나를 보고 있었다. 봉인진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 봉인진은 요수가 가까이 오면 묶는다. 저 땅 밑의 요수가 봉인될 때 함께 봉해질 것이다. 하여 어떤 요수도 이 근처로 오질 않았다.
저 겁 없는 요수만 가까이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입 밖으로 울컥 무언가가 쏟아졌다. 손등에 떨어진 뜨끈한 것을 보아하니 빨간 덩어리였다. 눈물이 고였다. 저승 물에 발을 담근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요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보지 마.’간신히 입 모양으로 전했다. 요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에서 도망쳐도, 도망치지 않아도 네 마음이란다. 자경아.]그 아름다운 요수에게 시선이 뺏겨있는 때. 신께서 신중한 어조로 말하셨다.
[다만 도망치지 않는다면 네 모든 것을 걸어야 할 터다.]결국 목숨을 걸어야 저것을 봉인할까 말까 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많은 퇴치사에 무녀에. 설마 홀로 쓸쓸히 죽어갈까 싶었는데. 나는 이번 봉인을 가볍게 생각했다. 스승이 네가 보지 못한, 이 땅에 무시무시한 요수가 많다고 했을 때도 넘기었다.
어떤 요수를 봉인하다가 죽었을 수많은 도인, 무녀, 퇴치사…… 그들은 숭고한 어떤 마음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 게 아니었다. 이 극한까지 몰리니까 알겠다. 어쩔 수 없던 것이다.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대단해서도, 거룩한 운명이어서도 아니다. 나는 살고 싶었다. 하나 내가 도망치면 이 요수는 깨어난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또다시 누군가가 희생하기 전까지 저 검은 손에 죽어 나갈 것이다. 나는 그걸 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미련을 버렸다. 신께서 알아들으신 듯했다. 아까까지 나를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심장이 깨져나가 흩뿌려지는 느낌이었다. 푸른색이었던 봉인진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나로부터 피어난 불꽃이 봉인진을 따라서 옮겨붙었다. 서서히 붉은색이 온 시야를 덮는다. 고통스러우나 따뜻했다. 그때 봉인진 밖에서 넘어온 목소리가 나를 울렸다.
자경아.
자경아. 엊저녁 나를 어르고 달래고. 영영 같이 살지 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으냐고. 제 처지를 두고 나를 협박하던 목소리였다. 버려지기 싫어한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싶은데 뜰 수가 없었다. 내가 장작이 되어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억울한 비명이 내 앞에서 찢어졌다. 저주가 쏟아진다.
너를 기억하겠다.
봉인진에서 노니던 불꽃이 요수를 땅속으로 끌고 간다. 원래의 계획대로 사람을 쓰지 않은 봉인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했다. 불꽃에 양팔이 묶여 끌려 들어가는 요수의 처절한 저주. 내 이름을 부르는 어떤 이의 목소리. 고개를 돌렸더니 붉은 눈이 보였다. 고개를 저었다. 보면 안 된다. 그도 요수였다. 가까이 오면 저 봉인에 끌려 들어갈 수 있었다.
후회가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연모한다고 해줄 것을. 한 번쯤은 저자가 원하는 대로 말해줄 것을. 나도 네 옆에 영영 함께하고 싶다고.
내 심장에서 신이 자장가를 부른다. 나는 봉인을 잇는 불꽃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을린 땅에 쓰러졌다. 머리가 닿고 나서야 고통이 퍼졌다. 하나 잠시였다. 아주 잠시. 금세 나는 구슬픈 자장가에 기댈 수 있었다.
***
붓을 휘두르던 이영임의 눈이 커졌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봉인진이 불꽃으로 뒤덮였다. 붓을 쥔 손이 떨렸다. 이영임은 재빨리 여린 어깨를 확인했다. 그 넓은 봉인진을 혼자 차지하고 앉은 미련한 제자를. 걸출한 놈이 된다더니 기어이 일을 치렀다. 요수의 굉음과 불꽃은 땅이 삼켰다. 다시는 뱉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안 돼…….”
이영임은 죽일 듯 달려드는 요수에게서 도망쳤다. 일일이 상대할 정신이 없었다. 쓰러진 몸뚱어리 앞으로 걸어갔다. 맥없이 쓰러지는 그의 제자에게로. 주변의 몇몇이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이영임은 죄 듣기 싫었다. 욕설만 중얼거리며 달렸다. 그때 봉인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땅에 그려진 밋밋한 봉인진만 남고, 그 위에 제자가 누워있었다. 이영임은 자신이 우는지조차 몰랐다.
“얘. 자경아. 자경아.”
겨우겨우 닿았다. 피를 토하고 토해, 빨간 턱을 가진 제자가 쓰러져있었다. 한계를 넘어선 봉인술. 이영임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제자의 안타까운 머리칼을 넘겨주다가, 차가운 몸뚱어리를 쓸다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자의 온 곳을 훑었다.
“자경아. 자경…….”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그때. 누워있던 제자의 몸이 하늘에 떠올랐다. 이영임은 잠시간 넋을 빼고 있었다. 제자를 안아 든 사내. 단박에 알아보았다.
“너.”
사내는 제자를 안아 들고 걸어갔다. 이영임이 따라오든 말든 제 갈 길을 가는 사내였다. 그의 등에서 짙은 적의 향이 났다. 평생을 적대하면 살아온 종. 사특한 요수의 기운. 지금껏 어떻게 몰랐었나 싶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었다. 주변은 잔챙이 요수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영임도 자칫하면 놓칠 정도였다. 이 사내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데 능했다.
“잠깐, 기다려……!”
하나 사내는 멈추지 않고 걸어간다. 이영임은 가슴께가 뻐근했다. 더 무리한다면 며칠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이를 악물고 사내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일정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길을 갔다.
거대 요수가 봉인 당하여 그런지, 아까만치 윙윙거리는 잔챙이의 기세가 등등하지 않았다. 후퇴하듯 뒤로 물러서는 요수도 있었다. 슬슬 정리해가는 눈치였다. 이영임의 제자가 눈을 뜨지 못한 것만 빼면.
이영임은 헐떡거리며 사내의 뒤를 쫓았다. 사내는 폐허가 된 마을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제자에게 부적합한 장소였다. 개벽하듯 땅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이영임은 잠시 멈춰서 밑을 바라봤다. 무언가 거대한 게 지나는 느낌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존재에 의의를 품은 이영임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사내가 어딘가에 주저앉는다. 이영임의 혼이 쏙 빠지고 말았다.
폐허의 중앙, 파멸밖에 없는 빈 땅에 하얀 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 나무의 뿌리들은 둥지 틀듯 얽혀있었다. 사내의 주체 못하는 기분을 나타내는 듯했다. 땅에서 기어 나와 저들끼리 좋을 대로 엉키고 있었다. 거대한 하얀 뿌리 밑에 사내. 이 엄동설한에도 푸르른 나무였다.
사내는 제자를 제 무릎에 앉혀놓는다. 이영임은 저지하려다가 말았다. 그 무너진 얼굴이 제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해야지 살 수 있는 것처럼 뺨을 치대고, 입술을 온갖 곳에 묻는다. 의식이 없는 제자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사내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러댄다.
“자경아, 자경아…….”
이영임은 조용히 사내의 가까이로 갔다. 사내는 사람이 아니다. 이영임은 직감적으로 제자의 요수임을 알았다. 그 연모한다던 요수 말이다.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배신감보다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이 아이가 이 꼴이 돼서일까. 사내는 제자를 숨도 못 쉬게 끌어안았다. 이영임은 사내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관뒀다.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사내가 제자의 귓가에 배출하듯 말을 쏟는다.
“내가 혼자 가게 내버려 둘 것 같아?”
거의 혀라도 섞을 듯 입술을 포개고서, 사내는 제자의 감긴 눈을 뚫어져라 본다.
“날 버린 건 너야. 내 연모가 죽기 전까지 같이 있겠다는, 그따위 위선을 떨어놓고…….”
분노에 차 제자를 찢어죽일 듯, 그러다가 다시 피가 굳은 제자의 입술을 핥으며 운다.
“자경아, 연모해. 이러지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천적인 요수 주제에, 당당히 제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이영임은 제자를 돌려받고자 손을 뻗었다. 하나 충직한 뿌리가 그 손목을 휘감았다.
“당장 이거 놓아라.”
“스승이나 제자나…… 뿌리칠 힘도 없으면서 만용 부리는 것은 같네.”
“자경이를…….”
“한데 왜 하나는 애틋하고. 하나는 부러뜨리고 싶은지.”
뿌리가 점점 조여 온다. 요수의 이를 악물었다. 정말 잘라낼 듯이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이영임이 한쪽 손을 포기하려던 그때였다. 이영임은 안타까운 제자의 숨을 보았다.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보였다.
“숨이 붙었다. 이 멍청한 요수야. 당장이라도 의원에게…….”
“나도 알아. 한데 곧 꺼질 숨이지.”
요수는 제자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는 미약하게 불어오는 숨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사내의 오른손이 위로 향했다. 이영임이 잠시 멍한 사이, 푸르른 잎이 달린 가지가 서서히 내려왔다. 그의 손을 휘감고 내려와, 천천히 제자의 몸 위로 가지는 이동한다. 자경이의 팔을 휘감고, 그 팔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다. 문양을 새기듯 지극한 움직임이었다.
요수는 제자에게 입을 맞춘다. 가지는 더욱 제자를 칭칭 감았다. 이영임은 혀를 물었다. 상급 요수는 제 근원을 금덩이 숨기듯 숨겨놓는다. 하여 하급 요수라면 근원을 찾아내 부수어, 그 살갗을 돌로 만들면 되는 법이지만. 저러한 상급 요수라면 근원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구태여 봉인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데 그 요수의 근원을 퇴치사의 앞에서 꺼내 보이다니.
이영임은 오만한 요수를 보고서 혀를 찼다. 딛고 선 우글우글한 나무뿌리들이 땅속으로 돌아간다. 사내는 이영임의 제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모셨다. 이영임은 예외였다. 그의 팔을 묶었던 가지가 시야에 차올랐다.
“무슨!”
이영임을 잡아먹을 작정인 듯싶었다. 양팔이 조여 온다. 이영임은 눈을 감았다. 숨이 꽉 막힐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숭숭 뚫린 콧속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눈을 떠보았다.
이영임은 어느 한적한 폐가 앞에 버려져 있었다.
“허…….”
이 단물나올 때까지 씹어버릴 요수 같으니라고. 그리고 망할 제자 같으니라고. 당장 나라에 알려 두 연놈을 멍석말이해서 내쫓을 것이라고 다짐하다가도. 그 죽어가는 제자의 얼굴이나 새파랗게 질려 제자를 안고 간 요수 놈이나. 참. 정이 무언지.
왜 하필 그 갈래에 섰는지 모를 일이었다. 두 종의 길은 달랐다. 기어코 어려운 길을 택한 제자가 못마땅했다. 속 터지게 안쓰러웠다. 그 길의 끝이 보이기에. 오늘 저 요수의 눈치를 보니 제자를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고. 언제 변할지 모를 영생은 제자가 거부할 성싶고.
종국에는 갈라질 것이다. 이영임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는 어쨌든 제자의 편에 서기로 했다. 그 외로울 선택에, 자신까지 외롭게 만들 게 무언가.
하나 자경아. 왜 하필 그 길이었어야 했니.
이영임은 우두커니 폐허에 앉아 있었다.
***
음침한 동굴 속에서 누군가가 불을 밝혔다. 나는 그 땡볕 같은 불을 따라갔다. 작은 뜨락이 나온다. 내가 아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가꾼 작은 텃밭에, 불그스름한 땅 위에 자란 나무. 그리고 졸고 있는 작은 새. 그 새는 고단해 보였다. 마치 나처럼.
눈을 끔뻑였다. 뺨에 닿는 눈송이가 느껴진다. 제 친우와 손을 마주 잡고 내려오는 눈송이들, 저녁이 물러서고 새벽이 거드는 그때. 이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푸른 잎의 나무. 그리고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요수.
“기석아…….”
극락은 아닌 게 분명했다. 재앙이 내 눈앞에 있으니까. 어찌 됐든 그를 보았다. 그것을 숨으로 느끼고 통증으로 느꼈다. 차츰차츰 그에 대한 마음이 떠오른다. 꼼짝없이 저승으로 끌려가겠구나, 쓸쓸히 죽었구나 생각했을 때. 그 초라한 후회가 기억났다. 요수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다. 한데 내 손이 무안하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꼴 보기도 싫은가보다.
“화났어?”
그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하얀 입김이 하늘에 널브러진다. 이 땅 위에 우리뿐인 것처럼 조용했다. 그의 숨결이 내 이마에 닿았다. 인정 없고 쌀쌀한 숨이었다.
“어찌할 수 없었어.”
처음으로 요수가 내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감정을 지운 낯으로 나를 대했다.
“해서.”
“보지만 말고 입 맞춰줘.”
잠시지만 그리웠다. 평상시라면 옳다구나 입을 맞춰 올 요수였다. 하나 한 줄기 바람처럼 보기만 한다. 깨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인가. 여기저기 다 쑤셔온다. 온 팔다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요수는 내 이런 사정을 다 안다는 얼굴이었다. 눈길로 내 몸을 쓸며 다닌다.
“나는 나락에서 기어 나와 올곧은 땅 위에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요수의 싸느란 손이 내 뺨에서 온기를 가져갔다.
“알고 보니 내가 뿌리 내린 곳이 나락이었던 거야.”
“기석아.”
“너는 내 나락이지. 내가 뿌리 내린.”
쿵. 다시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그의 일정한 표정이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그를 끌어안았다. 불안한 마음에 더욱더 세게.
“자경아.”
아직 성하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질렀다. 요수는 그런 내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내심 안심했지.”
“……무엇을.”
“내가 너보다 먼저 죽지 않는 것을.”
요수는 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해서 나는 항시 전전긍긍하고, 너는 항시 태연자약하고.”
요수의 목소리는 지금 내 어깨에 닿는 눈발보다 쌀쌀했다.
“한 번 내 입장이 되어 봐.”
“네 입장이라니.”
나는 끌어안은 그의 어깨를 밀쳤다. 요수는 잠시 내 혼란스러운 눈을 들여다보다가 손바닥을 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내 손목부터 팔뚝까지 잔가지가 피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봤던, 그 살구색의 잔가지가 내게로 옮겨졌다.
“네 안에 내 반쪽이 있어.”
양기석은 내 표정을 보고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따위 표정 짓지 마.”
그는 미소를 지운 얼굴로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누구의 잘못이겠어.”
나는 가슴팍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둥둥둥. 기력을 다하고 잠든 신의 기운, 내 무탈한 심장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내 반이야. 이제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자경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산송장이던 내가 저승을 뒤로한 이유를. 나는 요수의 근원을 나누어 가져, 내가 그의 근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근원의 의미를 안다. 내가 죽으면 그도 죽었다. 그의 반쪽짜리 근원이 깨지면 나도 깨진다.
결국에 가서는 하나가 된 것이었다. 그는 요수의 근원을 인간에게 버려버린 혼종. 나는 요수의 생을 함께할 혼종. 하여 내가 기탄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 참담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역겨워?”
요수의 눈은 웃는 듯 휘어있지만 그 안에 도사린 상처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내가 죽어갈 때, 그의 하얀 얼굴이. 이 땅 위에 버려져 나를 원망하던 그 눈이. 그 눈을 보며 해로운 후회를 하던 내가. 참담함을 밀어내고 슬픔이 차올랐다. 미처 보내지 못한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양기석은 그 손길을 차갑게 비웃었다.
“이를 어쩌나. 네 연모는 이 정도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을 텐데. 정 역겹다면 먼저 이 땅에서 사라져. 하면 내가 뒤따라…….”
나는 가증스러운 눈물을 삼키려고 애썼다. 하나 비집고 나오는 눈물은 내 의지를 배반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턱에 입술을 문대고, 다시 한번 간청하듯 말했다.
“미안해. 진정 너를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상처로 꽁꽁 언 그의 마음을 녹일 수 있으랴. 미워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인의 죽음을 보여주고, 언젠가는 잊고 살아갈 것이라 말했다니. 냉소로 틀어진 입술에 연신 나를 부딪쳤다. 그가 피해도 상관없었다. 피하면 쫓고, 밀치면 다가가고.
“그만해.”
양기석은 입술 사이로 낮게 뇌까렸다. 하나 나는 내 미안함을, 그를 향한 애정을 표했다. 미안하다. 연모하는 너를 두고 홀가분하게 떠나려던 게 아니었어. 나는 그의 말대로 얼마쯤 우쭐했었던 것 같다. 남겨질 것이 내가 아니라, 양기석이어서. 그가 남겨져서 겪을 괴로움보다 내 삶이 중했기에.
그리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요수의 긴 세월이 알아서 잊게 해주겠지. 그 안일한 회피 속에서 갈리고 찢겨나가, 결국에는 자신을 가둔 요수의 앞이었다. 나는 그 입술이나마 훔칠 수밖에.
“네 불안을 모른 척했어.”
그래야 이 가시밭에서 편하니까. 계속 그를 보면서 서글펐던 이유를 알았다. 내가 그를 받아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알게 모르게 그의 우위에 선 것이었다. 그 가시밭에서 홀로 우는 줄도 모르고. 나름대로 그는 내 밑에서 반항을 해 보았던 것이다. 결국 나를 제 위치까지 끌어내려놓고 나서야 상처를 보이지만.
요수는 자신의 입술을 조금씩 맞대는 나를 참다가 참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내 허리를 그에게로 끌어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축축했던 눈을 감고, 제 혀를 내 입 안에 넣어 훑는다. 가슴이 울린다. 내 심장에 사는 신과 그 심장을 받친 나무가 그려진다.
섞였다. 하나 섞이고 싶지 않았다. 내 팔에 난 잔가지 문양을 보았다. 그의 가슴팍을 다급히 쓸어보니, 확연하게 줄어든 흔적이 보였다. 어찌할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앞으로가 아득한 탓이었다.
“그렇게 싫어?”
요수의 눈물이 찬 목소리가 나를 가리켰다. 그는 울지 않았다. 쉬이 우는 요수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붉어진 눈은, 그가 아까 쓰러진 나를 껴안고 울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게 무어니. 너는 반을 잃어버린 요수고, 나는…… 요수의 생을 사는 사람이고.”
끔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렇게까지 끔찍하기보다 다만 막막함 뿐이었다. 큰일 뒤에 다가올 폭풍은 마치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아주 멀게만 느껴진 탓이었다. 믿기지 않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날 버리고 싶겠지. 네 아비를, 스승을, 모두가 죽은 이 세상에서 나와 붙어살 것이 끔찍하겠지.”
단단히 오해했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마는, 내가 걱정하는 것은 꿈같이 아득한 일이었다. 생에 질리고 질려, 결국 그까지 미워하게 되는 내가.
갑자기 그의 손이 내 두 눈을 덮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구렁 속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몸은 하늘에 뜬 것 같고, 두 다리는 물속을 유영한다. 등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찰나, 새까만 시야에 흰 점 하나가 박혔다. 나는 헤엄치듯 두 팔을 저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발에 땅이 닿았다. 흰 점이 눈앞까지 왔다. 한데 등 뒤에 그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밝아진 땅에서 그를 찾아다녔다. 비몽사몽간에 두리번거렸다. 그때 하얗기만 한 땅에서 이파리가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땅은 푸르게 변해갔다. 울퉁불퉁한 모양은 없었다. 모두가 곧고 동그랬다.
그리고 요수는 그제야 내 앞에 나타났다. 한데 나를 모른 척한다. 나는 그를 지켜보는 것처럼 멀리서 서 있고, 왜인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멀뚱멀뚱하게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걸어온 요수는 작은 꽃을 들고 있었다. 자주색, 하얀색, 열브스름한 붉은색. 색의 조화가 없는 다발이었다. 요수는 그걸 뒷짐 진 손에 들고서, 어느 봉긋한 뫼 앞으로 걷는다. 이름자가 적혀있지 않은, 이 푸르른 땅을 차지한 무덤이었다.
요수는 그 앞에 다발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주저앉아 타령하듯 떠들기 시작한다. 잘 들리지 않는다. 한데도 요수는 즐겁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저건 나야.」
그때 요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저 앞에 앉아 있는 요수는 여전히 혼자 떠들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요수가 보여주는 환몽임을 깨달았다. 그는 나를 재우고, 내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네가 죽고 난 뒤에 나.」
손끝이 떨렸다. 그저 혼자 신났는가 했던 요수의 모습이 달리 보였다. 그의 옆에 아무도 없는 것도.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메마른 듯한 얼굴도. 그의 처량한 미소도.
「온종일 저러고 있을 거야.」
그만해.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가 목울대를 긁었다. 잘게 찢어지고 무너진다. 해맑아 보이는, 내 무덤 앞에서 웃는 저 요수가. 그의 말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실임에도, 나는 한 맺힌 사람처럼 노려보았다.
해가 진다. 한데도 요수는 다른 어디에도 가질 않는다. 내내 한 자리를 지켰다. 밤이 되고, 달이 떠오르자 자세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요수는 내 무덤을 제 목침처럼 베고 누워 잠을 청한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그러나 울고 있었다. 나는 괴로워 더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라. 요수가 보여주는 혼몽은 빠르게 날이 지났다. 금세 아침이 되고, 밤이 되고. 요수는 이것저것 가져와 내 무덤을 장식한다. 그밖에 행위는 모르는 듯했다. 내 무덤 곁에서 그 빛바랜 생을 보내는 듯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내 무덤에게 말을 걸며.
「내가 좋아 보여?」
‘아니.’목이 멘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말을 뱉자마자 뒤에서 손이 뻗쳤다. 내 어깨를 부드러이 낚아챘다.
“자경아.”
그가 내 몸에 닿자마자 눈앞이 달라졌다. 내 무덤, 요수, 그 비루한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그 자리에 야무진 기와집이 생겼다. 그 집 앞에는 색색의 꽃이 심어져 있고, 향긋한 향으로 벌을 꾀었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던 그 집의 대문이 열렸다.
손을 꼭 잡은 요수와 내가 걸어 나왔다. 나는 배가 부른 채였다. 애라도 밴 것처럼. 내 뒤를 한 사내아이가 따라다녔다. 요수는 그 사내아이를 어여쁘게 바라보고, 또 배가 부른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안달복달하며. 두 사내가 나를 부축한다. 나는 유난스럽다는 눈빛이었다. 하나 애정이 흐른다. 요수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품에 실컷 기대어 걷는다.
어디 뒤뜰이라도 가는 모양새였다. 그 화목한 광경에 마음을 주고 만다. 그때 요수가 다가와 나를 안는다.
“저렇게 살고 싶어.”
졌다. 지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능청스러웠다면, 나를 어떻게든 이겨먹으려 했다면 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그는 떨고 있었다. 나를 안은 손이 떨고, 목소리의 끝은 불안에 휘었다. 그는 절박했다. 나를 연모해서. 그것보다 아까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나를 잃고 처참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제가 바라는 앞날은, 내가 져주면 이루어질 것을 아니까. 내가 지기를 빌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
져주지 않고서, 내가 어떻게 설 수 있을까. 나는 끄덕였다. 미지근한 응수였다. 안도의 날숨이 내게 미쳤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데 요수와의 사이에서 아이는 불가능해. 그건 알고 있지?”
눈앞에 있는 그의 꿈을 지적했다. 그건 불가한 일이었다. 그와 그렇게 몸을 섞었음에도 단 한 번도 걱정한 적 없을 만큼. 또 만약이라는 징조도 없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는 종이 달랐다. 어찌어찌 혼잡한 종으로는 엮일 수 있어도. 그 혼잡한 사이에서 또 다른 종이 태어날 거란 기대는, 어쨌든 그의 욕심에 불과한 일이었다.
“우리의 긴 생에서, 무엇이든 장담하지 마.”
그와 나는 어긋난 생을 지나, 서로의 생을 나누었다. 요수의 생도, 사람의 생도 아닌.
그제야 나는 그의 불안을, 내가 없을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요수는 그럴 작정이었다고 했다. 말없이 사라질 계획이었다고. 긴 생을 가지게 되었으니, 어디 한 번 너도 나 없는 세월을 한 몇백 년 견뎌보라고. 그래서 내가 그리움에 목말라 죽어갈 때 즈음 나타나 받아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리하면 서로밖에 없이, 설령 내가 그를 증오하고 있었더라도, 그 외로움에 사무쳐 받아줄 수밖에 없게.
하는 생각마다 간악하다고 꼬집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슬펐으니까. 나는 그의 눈가에 입을 맞대고, 조용히 우리의 현실을 짚었다.
“나는 너처럼 오랜 생을 각오한 적이 없어. 살다가, 네 곁에서 살다가. 서로가 지겨워져 죽이고 싶어지면. 그러면 어찌하게.”
“네 손에 죽는다니. 그것만큼 완벽한 끝이 어디 있을까.”
“내가 널 미워하면? 왜 이리 오랜 세월을 살게 했냐고 물으면.”
“연모한다고 해야지.”
“그래도 화를 내면?”
“자경아.”
요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내 뺨에 간신히 숨을 뱉었다.
“차라리 내 곁에서, 영생을 날 미워해.”
하나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는 듯, 내게 붙은 입술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미워할 수 있을 리가. 결국엔, 그 날에 가서도 나는…….
결국 지금처럼 너를 용서하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