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02
101화. 소울 푸드(2)
***
깊은 밤.
벚꽃이 만개한 국회 뒤편 윤중로는 친구, 연인, 부부와 가족 단위의 상춘객이 넓은 도로에 가득했다.
은다영 무리도 그중 하나였다.
“크, 분위기 죽인다. 그렇죠. 언니?”
“응. 정말 좋다.”
“여기 너무 좋다.”
미숙, 혜자, 은실은 일 년 만에 찾아온 봄꽃에 잔뜩 취해버렸다.
사실 이렇게 꽃구경을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살림에 보태느라 식당 일을 다닌 지 20년.
꽃은 버스 창문 너머로 본 게 전부였다.
다영도 감회가 남달랐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그녀의 인생은 칠흑 같은 어둠, 밑바닥 그 자체였다.
너무 좌절했고, 나쁜 마음도 먹었었다.
절망의 순간 양화대교에서 바라봤던 야경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만약 그곳에서 해준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너무 외로워 안 좋은 선택을 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예쁘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과 달콤한 솜사탕을 먹으며 걷는 꽃길.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은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신나서 수다를 떨던 미숙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다영에게 물었다.
“우리야 쉰내 나는 남편보다 우리끼리 있는 게 좋다지만, 다영이 넌 이런 데 애인이랑 와야 하는 거 아냐?”
“전 이모들이 더 좋아요. 헤헤.”
“그럼 최애 최강준은?”
“최애는 다르죠.”
“아무래도 조만간 우리가 자리를 마련해줘야겠는데?”
“언니. 최강준이 반찬 풀 때 우리가 뒤에서 슬쩍 밀어줄까?”
“굿 아이디어. 내일 실행에 옮기자고.”
“아휴~ 술이 아직 덜 깼나? 어머머, 미안!”
은실이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며 연기를 했다.
내일 아침 반드시 이렇게 하겠다고 예고하는 것처럼.
그러자 혜자와 미숙이 깔깔대고 웃으며, 은실의 연기를 칭찬했다.
“얘, 은실아. 너 연기 좋다?”
“내가 말 안 했수? 나 방송국 구내식당에서 10년 일했어. 반 연기자지.”
“호호호.”
“그만 좀 놀려요. 아~ 괜히 얘기했어.”
이모들의 놀림에 다영이 볼을 붉히며, 삐친 척 토라졌다.
그러자 이모들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귀여워서 그랬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오래 걸으니까 다리 아프다.”
“이만하면 꽃 구경도 다 한 거 아닌가?”
“언니. 우리 배고픈데 저기서 뭐 좀 먹고 가요.”
환상 연기를 펼친 은실이 혜자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테라스가 있는 호프집이었다.
“좋지. 야외 테이블 잡고, 벚꽃 나무 아래서 먹자고!”
혜자가 차해준의 카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사이좋게 걸어간 네 사람은 운 좋게 난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생맥주와 치킨, 골뱅이무침을 시켰다.
벚꽃이 활짝 핀 여의도에서 먹기 딱 좋은 메뉴다.
“크으~!”
“캬아~!!”
“하아, 시원하다. 맛있지 막내야?”
“네, 언니. 완전 맛있어요.”
다영이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팔로 쓱 닦으며 말했다.
탄산 가득한 생맥주를 마시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술김에 다영은 주방 이모 3인방의 막내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호칭도 언니 동생으로 바꿨고, 월 3만 원짜리 여행계도 즉석에서 만들어 일 년에 한 번은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정말 소중한 인연 생긴 셈이다.
“우리 막내 많이 먹어.”
“고맙습니다, 언니.”
다영은 큰언니 혜자가 준 큼지막한 골뱅이를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그리고 맥주도.
시원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알코올 덕분에 촉촉하게 젖어갔다.
“아~ 좋다.”
“그치 막내야. 여기 분위기 좋지?”
“분위기는 좋은데, 음식 맛은 좀 별로다.”
둘째 미숙이 서비스 안주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사실 술집 안주 맛은 그럭저럭이었다.
분위기가 좋아 먹는 거지, 자신들이 몸담은 한식 뷔페 음식에 비하면 맛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 우리가 너무 우리 식당 맛에 길들여져서 그런 거 아냐?”
첫째가 혜자가 의문을 품으며 말했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내심 그녀도 동감하는 부분이다.
“사실 말이야. 나 요즘 집에 가면 내가 한 음식도 맛없어서 잘 안 먹어.”
“나도. 언니.”
“근데, 희한하게 사장님이 싸 준 김치는 가져간 날 바닥 났다니까.”
“우리 바깥양반도 허겁지겁 먹어 치우더라고. 이 맛있는 김치 어디서 났냐고.”
“어떨 때는 식당 반찬을 먹으면 막 힘이 나.”
“또 어떨 때는 피곤함이 싹 가시고?”
“너도?”
“언니도 그래요?”
“응.”
“희한하네.”
“그러게.”
“언니들 그거 아세요? 우리 식당 음식의 비밀.”
막내 다영이 볼이 발개져서 작게 속닥였다.
“비밀?!”
“연습생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인데···.”
“응.”
“사장님이···.”
“사장님이?”
“음식에···.”
“음식에?”
“약을 탔다는 말이 있어요. 마.약! 그래서 맛있는 거라고. 누가 봤대요. 약 타는··· 아, 머리 아퐈아.”
쿵-
잔뜩 혀 꼬인 발음으로 이상한 말만 늘어놓던 다영이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쳤다.
“막둥이 취했다.”
“기집애 어쩐지 신나게 달리더라니. 막내야, 일어나!”
“그냥. 재워. 우리 집 가서 재우지 뭐. 오늘은 신나게 마시자.”
혜자가 잔을 들었다.
“그래요. 언니.”
“지화자!”
“지화자!”
***
“어제는 재밌으셨어요?”
식당에서 꼬박 밤을 새운 해준이 제시간에 출근하는 혜자와 다영을 보며 인사했다.
“너무 즐거웠지. 오랜만에 여자들끼리 뭉쳐서 남편 흉도 좀 보고.”
“근데, 둘이 어떻게 같이 출근해요?”
“얘가 어제 술 마시다 뻗었잖아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재우고, 해장국 먹였죠.”
“죄송해요, 언니.”
“언니?”
“아, 다영이랑 어제부로 언니 동생 먹었어요.”
“정말요?”
엄마와 딸을 해도 될 나이 차에 언니 동생이라니.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회식 쏜 보람이 있네요.”
“참, 여기 카드요.”
“비싸고 좋은 것 맘껏 드시라니까 고작 이거 드셨어요?”
“밖에서 먹으니까 맛없더라. 전부터 느낀 건데, 요즘은 우리 가게 음식 아니면 못 먹겠더라니까. 왜 그렇게 맛이 없는지. 그냥 여기서 해 먹는 게 낫겠더라니까. 얘는 뭐라는지 알아? 글쎄 사장님이 우리 음식에 약을 탄대. 그것도 마약. 누가 봤다나 뭐라나. 7천 원짜리 한식 뷔페 팔아서 뭐가 남는다고. 이 기집애야, 약값이 더 들겠다.”
“헷. 미안해요, 언니.”
“하하하.”
한바탕 웃어넘겼지만, 해준은 괜히 뜨끔했다.
약을 타긴 했다.
마약은 아니고, 마법 가루.
이로운 버프가 붙어야 연습생과 연예인에게도 좋으니까.
‘앞으로는 조심하자.’
누군가에게 제대로 들키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유아진에게도 마약(?) 섞은 음식이 통했으면 좋겠는데···.’
해준이 어제 식당에서 밤을 새운 이유.
민주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지만, 아진에게 줄 음식을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어제 준비한 음식은 마치 기미 상궁이 임금님 수라상 음식을 사전에 검식했던 수준으로 먹었으니, 요리에 진심인 해준의 마음에도 살짝 생채기가 났다.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몸에 좋은 음식도 먹어야 피와 살이 되는 법.
도통 먹질 않으니, 아무리 이로운 버프가 붙은 음식을 대령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게 도시락이다.
입을 꾹 닫고 먹지를 않으니 쫓아다니면서라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도시락.
차해준은 특별히 이 도시락 이름을 황제 도시락으로 지었다.
도시락에 패밀리 레스토랑을 담았다고나 할까?
회, 초밥부터 시작해 불고기, 김밥, 파스타, 스테이크, 피자, 탕수육, 깐쇼새우··· 전 세계 음식이 대화합의 장을 펼쳤다.
덕분에 어젯밤 해준의 요리를 구경하던 민주만 포식했다.
지방 분해 효과가 붙은 음료를 먹이지 않았다면 오늘 3kg은 쪘을지도 모를 만큼 먹어 치웠다.
‘이 중에 뭐 하나 입에 맞는 음식이 있겠지.’
양손에 3단 나무 도시락을 하나씩 든 차해준은 혜자에게 주방을 맡기고, 유아진의 숙소로 향했다.
***
유아진의 방안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햇빛을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벌써 몇 주째 열지 않은 커튼. 세상과 단절한 채 손톱만 물어뜯으며 인터넷 기사의 악플을 읽고 또 읽었다.
띵동-
벨이 울렸다.
김정후 대표를 통해 어젯밤 그 셰프가 도시락을 가져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진은 마치 좀비처럼 느릿하게 일어나 문을 열었다.
“식사 배달 왔습니다.”
현관문 너머에는 차해준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도시락을 흔들어 보였다.
‘이런···.’
안에서 문을 연 유아진의 행색을 본 해준이 안쓰러움에 신음했다.
유아진의 눈은 어제보다 더 퀭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더 초췌해졌다.
“잠시 들어가도 되죠?”
고개를 주억거린 아진은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잠 못 잤어요?”
“네···.”
“날씨도 좋은데 커튼을 열면 어때요? 환기도 좀 시키고.”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뭐,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 거니까. 이건 어디에 놓을까요?”
“저기 식탁에···.”
“네!”
차해준은 활기차게 주방으로 걸어가 도시락을 올려놨다.
그리고는 음식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마치 서울에 자식을 홀로 보낸 어머니가 자취방에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모습과 흡사했다.
“맛있겠죠?”
산해진미의 향기로운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
“배고플 텐데. 드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진은 음식을 준비한 해준의 성의를 생각해 식탁에 앉았다.
“끼니를 자주 거르셨다면서요. 따뜻하게 수프로 속 좀 달래세요.”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게살 수프 접시를 아진 쪽으로 밀었다.
“고맙습니다.”
“뜨거우니까 후후 불어서.”
게살 수프를 한 숟갈 뜬 아진이 갑자기 헛구역질하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우웁!···”
곧, 거실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토악질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거식증인 것 같았다.
마음이 너무 병들어 음식물을 넘기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리자, 유아진이 몸을 추스르고 나왔다.
이제야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는 이유를 알았다.
“괜찮으세요?”
“아뇨···. 죄송해요. 보다시피 제 상태가 이래요. 그래서 도저히 음식물을 못 넘기겠어요.”
“제가 생각을 잘못했네요.”
“네?!···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아진이 차해준을 바라보았다.
이건 미각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몸보다 바사삭 부서져 버린 멘탈을 잡는 게 급선무.
그전에는 어떤 산해진미를 가져다 대령해도 먹지 못할 터.
“음식으로 몸을 챙겨드리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진 씨는 마음을 먼저 챙겨야 할 것 같아요.”
악플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대인 기피증과 거식증까지 생겼다.
띠링-
띠링-
그 순간에도 DM을 통해 악플러들의 인신공격성 쪽지가 날아들었다.
“어떻게요?”
DM 도착 알람 음이 연신 울리는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절 욕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순간에도. 모두가 절 손가락질한다고요.”
“사이버 세상에서 하는 욕이죠.”
“어디든 절 따라다닌다고요. 기사, 너튜브 영상, 방송국 게시판. 다 따라다니면서 욕해요.”
아진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그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다.
해준은 만약 자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처음 자신의 상황도 우울 그 자체였다.
운 좋게 차원의 농장을 얻게 돼 로또 같은 인생을 살게 됐지만, 그전에는 그저 실패한 공시생에 불과했다.
그럴 때 해준은 늘 생각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고.
때로는 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이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휴대전화, 컴퓨터 이런 거 다 꺼버리고, 밖으로 나가보는 건 어때요?”
“네?··· 그게, 무슨.”
“아진 씨가 겪는 문제는 모두 이 작은 모니터 속에서 생기는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원인을 제거해야죠.”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욕을 할 것만 같았다.
-감히 네 깠게 우리 오빠한테 팔짱을 껴?
-히트곡 하나 없는 게 가수라고. 쯧쯧쯧···.
-죽어라!
지금도 글자들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유아진의 마음에 깊고 날카롭게 박혔다.
“절 만나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서 욕할걸요?”
“전혀요. 아마 아진 씨 봐도 신경도 안 쓸걸요?”
“설마요.”
“사람들은 의외로 남한테 관심이 없다니까요. 절 믿어봐요.”
아진은 자신만만하게 웃는 해준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