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04
103화. 소울 푸드(4)
***
설거지를 마친 해준은 앞치마를 풀어 놓고, 홀로 나왔다.
의자매가 되기로 한 혜자, 미숙, 은실 그리고 다영은 오늘도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겠다 하여 일찍 퇴근시켰다.
간판 불을 끄려는 그때.
딸랑-
가게 문이 열렸다.
여행을 떠났던 유아진이었다.
“영업 끝났나요?”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아진의 표정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얼굴의 그늘은 사라지고, 해말갛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직이요. 들어오세요. 여행은 잘하셨어요?”
“덕분에요. 셰프님이 싸준 도시락도 맛있게 먹었고, 오랜만에 맑은 공기 쐬니까 너무 좋았어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누가 제 폰을 강제로 뺏어가서 연락을 못 드렸네요.”
“하하. 그랬나요? 여기요.”
해준은 서랍에 고이 모셔둔 아진의 폰을 꺼내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여기···.”
아진도 해준의 도시락을 돌려줬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정말 잘 먹었습니다. 셰프님 도시락은 제 인생 두 번째로 맛있는 식사였어요.”
아진이 90도로 상체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첫 번째일 줄 알았는데, 은근 서운하네요.”
“첫 번째 음식은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거예요. 제 소울 푸드죠. 그래도 2등이 우리 아빠 된장찌개였는데, 그건 셰프님이 이겼으니까 자부심을 느끼셔도 좋아요.”
아진이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녀의 입에서 농담이 튀어나올 줄이야.
이틀 사이 많이 변한 아진의 모습을 보며 해준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남해요.”
“멀리 다녀오셨네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가 살던 곳이에요. 어렸을 때 자주 갔던 곳이고.”
“참, 식사 전이죠?”
“네. 서울 오자마자 대표님부터 만나고 오는 길이거든요.”
김정후 대표를 만났다는 건 좋은 방향이든 아니든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다.
“그래서 말인데··· 김치찌개 될까요?”
김치찌개는 유아진의 인생 음식이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절대 맛볼 수 없는 할머니의 손맛이 가득 담긴 그녀만의 소울 푸드.
아진의 부탁에 해준의 입술에 호가 그려졌다.
마침 그에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김치찌개가 있었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드릴게요.”
해준은 가마솥에 불을 올렸다.
그 안에는 몇 시간 전부터 푹 끓인 삼겹살 김치찌개가 있었다.
솥이 끓는 동안 해준은 달걀말이를 했다.
달걀에 맛술 조금과 소금, 쪽파, 당근을 잘게 썰어 풀었다.
주물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코팅하듯 얇게 펴 바르고, 달걀 물을 부었다. 이때, 중요한 건 불의 세기. 약불에서 조금씩 익혀가며 돌돌 말아주면 담백하고 폭신폭신한 달걀말이가 완성된다.
주방에서 시작된 군침 도는 향기에 아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해준의 귀에도 들렸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거의 다 됐으니까.”
뜨끈한 쌀밥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치찌개와 달걀말이. 몇 가지 나물에 장조림까지 곁들이니 소박한 밥상이 완성됐다.
상이 차려지자 아진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이내 숟가락을 들어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엄청 맛있어요.”
“여전히 1등은 할머니 김치찌개인가요?”
“음··· 공동 1등으로 하죠.”
“하핫. 영광입니다.”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이 비워진 그릇들.
심리적 문제로 인해 거식증 증세까지 있던 유아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잘 먹었습니다.”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던 아진이 뭔가 결심한 듯 해준에게 털어놨다.
“저 대표님이랑 상의해서 악플러들 고소하기로 했어요.”
“고소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제가 왜 그렇게 죄인처럼 숨어지냈는지. 이제 당당하게 나가려고요. 작곡도 다시 하고, 노래도 부를 거예요. 예전처럼.”
“잘됐네요. 응원할게요.”
“셰프님 덕분이에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
“네. 언제든지요.”
꾸벅 인사한 아진이 당당하게 식당을 걸어 나갔고, 차해준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차원의 농장은 늘 농작물이 자라기 좋은 온화한 날씨를 유지하기 때문에 외부의 날씨 변화에 조금은 둔감했다.
날씨의 변화만큼 해준의 주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가장 슬픈 건 옆집 할아버지 한영수의 죽음.
예정되었던 일이지만, 현실로 맞닥뜨린 충격은 상당했다.
최초 발견자는 차해준.
그날도 어김없이 한영수 노인을 위한 반찬을 만든 해준은 그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지만,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하기 마련. 문을 따고 들어간 차해준은 물망초를 가슴에 꼭 안은 채 편안하게 누워있는 한영수 노인의 주검과 마주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사랑하던 분과 행복하시길···.’
해준은 그의 무덤 앞에서 진심으로 빌었다.
한영수의 죽음은 해준으로서는 너무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의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차원의 농장에서 전설의 약초를 찾아다녔었다. 그러나, 달리우스의 노트에 적힌 단서로는 전설의 약초를 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전설의 약초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크으, 노래 너무 좋다.”
썬플라워 브레이크 타임에 유아진의 신곡을 크게 틀고, 가사를 따라부르던 강훈이 감탄하며 말했다.
“사장님. 이 노래 진짜 끝내주지 않아요?”
“좋더라.”
유아진의 디지털 싱글 ‘난 나야!’.
감성 충만한 가사와 멜로디. 통기타 하나로 읊조리듯 노래한 신곡은 음원이 발매되자마자 스트리밍 사이트 1위로 치고 올라갔다.
“한동안 악플러들한테 시달리더니. 이런 명곡을 갖고 컴백할 줄이야.”
“마음고생이 심했지.”
악플러들을 모조리 찾아서 고소하겠다던 유아진은 자신이 뱉은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받았던 DM과 악플들을 모조리 캡처해 변호사에게 넘겼고, 변호사는 악플러들을 싹 찾아내 재판에 넘겼다.
덤으로 팬들이 제보한 알지 못했던 악플러까지.
그 결과, DM으로 전보다 더 많은 사과 쪽지가 도착했다고 한다.
직장인이라서 혹은 수험 스트레스에, 그냥 잘 나가는 게 배 아파서 그랬다고 구구절절한 개인사를 늘어놓으며 선처를 부탁한 악플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소미를 날렸다.
방송에 나와선 그 어떤 선처나 합의도 없음을 몇 번이나 강조해 말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아진이 한층 더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참, 유아진도 소속사가 JH 아닌가? 사장님도 실물 봤겠네요?”
“뭐. 그냥 인사나 하는 사이지.”
한참을 존경 어린 시선으로 해준을 바라보던 강훈이 자세를 고쳐잡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농담으로 듣지 마시고요. 진지하게 말씀드릴게요. 저 한식 뷔페로 옮겨주시면 안 됩니까?”
“어라? 니 목표는 썬플라워 주방장 아니었어?”
“바꾸려고요. 한식 뷔페 주방장으로.”
“거긴 이미 티오 꽉 찼다. 그리고 니가 있어야 동식 형님이 마음이 안정된대. 그러니까 넌 여기 붙박이다.”
“그래. 짜식아. 넌 내 옆에 있어야지.”
느닷없이 나타난 고동식이 강훈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윽! 아파요.”
“넌 여기서 나랑 뼈를 묻자.”
“이러지 말아요, 형님.”
“잘 부탁한다. 강훈아. 난 한식 뷔페 좀 다녀올게. 재료 좀 가져다 줘야 해서.”
사이좋게(?) 장난치는 동식과 강훈을 두고, 차해준은 한식 뷔페로 향했다.
***
며칠 후.
자신 소유의 픽업트럭에 신선한 해산물과 농작물을 가득 실은 차해준은 야밤 식당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기다리던 스태프들이 함께 재료를 옮겨줬다.
더운 날씨에 혹시라도 재료가 상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우와 덥다.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냐?”
“그러게. 이제 6월인데. 완전 한여름 날씨다.”
때 이른 무더위에 스태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다.
더위로 고생하는 건 출연진들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내부에 설치된 에어컨이 있었지만, 곳곳에 설치한 조명의 열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이고. 덥다.”
고령의 윤여진이 무더위에 힘들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해준이 물었다.
“더우시죠. 선생님.”
“나보다 차 셰프가 더 고생이 많지.”
“저야 늘 불 앞에 있으니까 견딜만해요. 시원한 물 한잔 드릴까요?”
“고마워요.”
여진은 해준이 준 시원한 물을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이렇게 더울 때는 시원하게 열무국수 말아먹으면 맛있는데.”
“전 평양냉면이요. 선생님.”
어디선가 일명 손풍기로 불리는 휴대용 선풍기 들고 나타난 서준이 말했다.
스윗함의 대명사인 이서준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여진에게 손풍기 바람을 쐬어 줬다.
“평양냉면? 그것도 좋지. 내 고향이 평양이잖아.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많이 해주셨는데.”
“오. 진짜요?”
“그럼. 나 어렸을 땐 겨울에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는데. 요즘은 여름에 먹잖아. 얼마나 좋니.”
“윽, 전 평양냉면 싫던데. 걸레 빤 물 같아요.”
마지막으로 혜리가 등장하며 평양냉면 극불호 취향을 밝혔다.
“셰프님은요?”
“저도 좋아하는 쪽이요.”
“진짜 그렇게 맛있어요?”
“그게 원래 못 먹는 사람은 못 먹어. 간도 심심하고. 근데 면을 계속 씹다 보면 고소한 맛이 느껴진다니까.”
윤여진이 그럴 수 있다며 말했다.
네 사람은 오늘 팔 재료를 손질하며 음식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더위에 주제는 단연 더위를 식혀줄 음식.
이야기만으로도 어느 정도 더위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더위는 가셨지만, 어쩌다 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배고파! 그렇죠, 서준 오빠.”
“응. 진짜 시원한 게 땡기기는 한다. 차 셰프. 이럴 때 뭐 좋은 거 없어?”
“나도 좀 출출하네.”
혜리, 서준, 여진이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차해준을 바라보았다.
“동치미 국물에 시원하게 메밀국수 말아드릴까요?”
“오! 동치미 메밀국수?”
“마침 동치미가 잘 익어서 좀 가져왔거든요.”
해준은 얼마 전 문득 떠오른 시원한 동치미 국물 생각에 직접 동치미를 담갔다.
껍질을 제거하지 않은 무를 절여 갓, 쪽파, 청양고추와 함께 넣고, 소금물을 부어주기만 하면 된다.
맛을 풍부하게 하도록 마늘, 생강, 파 뿌리, 다시마, 고추씨를 담은 면 보자기를 옆에 두면 금세 동치미가 완성된다.
해준은 이렇게 만든 동치미를 얼음 동굴에서 숙성시켰다.
“크~ 국물 끝내준다. 완전 사이다야.”
“제대로 담갔어. 역시 차 셰프야.”
“그러게. 그냥 먹어도 엄청 맛있어. 시원하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살얼음 낀 국물만 살짝 먹었을 뿐인데, 가슴까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어제 먹은 고기가 소화되는 기분이랄까.
“빨리 말아줘. 먹고 싶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스태프들 먹을거까지 싹 만들까요? 면이야 뽑으면 되는 거고.”
차해준의 말에 더위에 지쳐가던 스태프들이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표정은 마치 식수가 바닥난 채 며칠을 사막에서 헤매다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 같았다.
“부탁드립니다. 셰프님.”
곱게 빤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7대3 비율로 반죽했다.
메밀국수라는 말에 작가진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면 뽑는 기계까지 공수해왔다.
방송 작가들의 섭외력은 정말 대단했다.
어쨌든 완성한 메밀 반죽을 면 뽑는 기계에 넣었다.
반죽이 기계를 통과하자 실처럼 얇은 수백 가닥의 면처럼 뽑혀 나왔고, 펄펄 끓는 물 속으로 그대로 떨어졌다.
“오오~!”
“신기하다.”
면 뽑는 과정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연신 감탄사를 뽑아냈고, 그 사이 해준은 잘 삶아진 면을 찬물에 헹궜다.
“면 좀 그릇에 담아주세요.”
“알았어.”
곁에 서서 해준의 손끝만 바라보던 서준이 나섰다.
그릇에 면과 갖은양념으로 만든 양념장, 들깻가루와 김 가루를 듬뿍 얹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까지 넣은 메밀국수가 완성됐다.
[동치미 메밀국수] – 섭취 후, 4시간 동안 피부 표면의 온도를 서늘하게 식혀준다.메밀국수 자체로도 더위를 식혀주기 충분한 음식인데, 운 좋게 버프까지 붙었다.
“자, 완성입니다. 한 그릇씩 드세요.”
여기저기서 후르릅- 후르릅-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