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05
104화. 신박한 고민(1)
***
윤여진.
그녀는 최근 주말 드라마 ‘엄마가 너무해!’에 캐스팅됐다.
주말 드라마는 한번 촬영이 시작되면 6개월 이상 꼬박 매달려야 하는 강행군 스케줄. 그렇기에 보통의 경우에는 다른 스케줄은 일절 잡지 않는다.
다른 일정은 모두 정리했지만, 야밤 식당은 어쩐지 애착이 가는 프로그램이라 계속 출연했다.
“선생님. 오늘은 그냥 좀 쉬시죠.”
15년 이상 윤여진을 매니지먼트한 김창동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룸미러를 보며 말했다.
고된 촬영 스케줄로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오늘은 병원 응급실까지 다녀오게 됐다.
의사는 고령의 여진이 타이트한 촬영 스케줄과 더위로 인한 일시적인 체력 저하로 진단했다.
하루 정도 푹 쉬라고 권유했으나 여진은 촬영을 강행했다.
그녀는 그게 프로 연기자의 자세라 생각했다.
쓰러지더라도 촬영장에서 모든 촬영을 마치고 쓰러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녹화에 임했다.
“어떻게 그래. 스태프들이 다 날 기다리는데.”
“그래도 의사가 쉬라고.”
“김 실장. 혹시라도 촬영장에서 나 병원에 다녀온 얘기 하지 마. 괜히 스태프들이 미안해하잖아.”
“링거라도 한 방 맞고 오자니까요.”
“그럼 촬영이 늦어지잖아.”
“선생님 짬이면 그 정도는 다 이해해주죠.”
“나, 일 그렇게 안 해왔어.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고.”
“···네.”
창동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으나 이내 입을 닫았다.
적어도 자신과 일한 15년. 또, 50년 넘는 연기 경력 동안 단 한 차례의 지각이나 펑크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의 완벽주의자였으니 그의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
‘어휴··· 어지럽다.’
피곤함과 더위에 지쳐가던 때, 여진의 앞에 놓인 메밀국수 한 그릇.
“잘 먹을게요. 차 셰프.”
국수 그릇을 받아든 윤여진은 메밀국수를 찬찬히 살폈다.
실타래처럼 예쁘게 담은 메밀면 위로 빨간 양념장과 오이, 김 가루와 들깻가루가 푸짐하고, 먹음직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무너트리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고명을 젓가락으로 살살 흔들어 면을 섞었다.
이대로 먹으면 비빔국수일 테지만, 동치미 국물을 넣어 물과 비빔의 중간 형태가 되었다.
‘국물부터 맛볼까?’
고소한 들기름이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
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사.
맵지 않게 적당히 칼칼한 양념장과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함을 선사했다.
국물만으로도 여진을 괴롭히던 더위가 싹 가시는 느낌.
‘면은 어떨까?’
해준이 면 뽑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여진은 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그 방법이 어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후르릅-
지체 없이 면을 흡입.
‘응?! 면이 툭툭 끊어지며, 밥알처럼 씹혀.’
역시 그녀의 기대처럼 차해준 셰프는 면을 제대로 뽑아냈다.
메밀의 함량이 높은 메밀면은 툭툭 끊어지는 식감이 식어 씹어 삼키기 쉽다.
그러나 그냥 씹어 넘기면 메밀면의 진짜 맛을 느낄 수 없다.
툭툭 끊어진 메밀을 삼키지 않고, 계속 씹다 보면 메밀 특유의 고소한 맛과 향이 입안에 은은하게 맴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양냉면이나, 메밀국수는 천천히 오래 씹어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맛있다.’
여진은 메밀의 풍미를 음미하며 천천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메밀의 찬 성질 때문일까?
한 그릇 만으로도 몸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온종일 자신을 괴롭히던 더위가 싹 가셨고, 덩달아 기운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이제야 힘이 좀 나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 모든 게 차해준의 음식이 특별하기 때문이라는 걸.
여진이 맛에 심취해 메밀국수를 즐기는 동안 스태프들도 저마다의 평가를 내며 국수를 만끽했다.
“맛 죽인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어.”
“국물도 엄청 칼칼하고, 시원해.”
“어우 추워. 난 등골이 오싹한데?!”
“이렇게 더운데 춥··· 어?! 진짜 춥다. 서늘한데. 누가 에어컨이라도 틀었나?”
마치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귀신이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팔뚝의 솜털이 솟아올랐다.
“나 소름 돋았어.”
“에어컨은 아까부터 켜져 있었고.”
“그럼 국수 때문이야?”
“원래 메밀이 찬 성질이 있지 않나?”
“그래도 이렇게 빨리 시원해져?”
“몰라. 인마.”
동치미 메밀국수를 먹는 스태프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이 어느새 사라졌다.
다들 서늘한 기운을 느꼈는지 몇몇 여자 스태프들은 얇은 카디건을 걸치기도 했다.
“와~ 잘 먹었다.”
여진의 매니저도 촬영장 구석에서 메밀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입에 좀 맞으세요?”
빈 그릇을 정리하고 있을 때 차해준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너무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입이 호강하네요. 저도 저지만, 선생님이 기운을 차리셔서 다행이에요.”
“무슨 일 있었나요?”
“사실···.”
매니저에게 윤여진의 사정을 대강 전해 들은 해준은 그녀가 오늘 왜 그토록 기운이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군요.”
“나이가 있으셔서 이제 무리한 스케줄은 힘드실 텐데. 걱정입니다.”
둘인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여진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식사 후, 여진의 안색이 한결 좋아졌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눠요?”
“아닙니다.”
“별 얘기 아니에요.”
“차 셰프. 나 동치미 좀 얻을 수 있을까?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나한테 좀 팔아.”
“동치미요?”
“응. 그거 먹으니까 뭐랄까. 기운이 난다고 해야 하나? 내가 요즘 기력이 좀 달렸거든. 그런데, 메밀국수 먹으니까 살 것 같아.”
“그냥 드릴게요.”
“아냐. 그럼 내가 미안하지.”
“그렇다고 돈을 받는 것도 죄송한데.”
한참 음식값으로 실랑이하던 끝에 해준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동치미값은 지불하세요. 대신 저는 답례로 선생님 촬영장에 커피차 쏠게요.”
“커피차?”
“네. 요즘 연예인들 별스타에 많이 올리던데.”
커피차란 배우들 촬영장에 팬클럽이나 연예인 동료들이 응원차 보내는 푸드 트럭의 일종이다.
해준이 몇 번 나갔던 밥차와는 비슷하지만, 결이 달랐다.
잘나가는 연예인이라면 촬영장에서 커피차 정도는 받아야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법이다.
70대 여진도 함께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연기자의 커피차에서 커피를 마셨던 경험이 있다.
“남사스럽게.”
“뭐 어때요? 재밌잖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커피차 얘기가 마무리되자 장일수 피디가 크게 외쳤다.
“자 식사 마쳤으면 다시 촬영 들어갈게요.”
“넵!”
…출연자들이 모이자 장일수 피디가 중요한 공지 사항을 발표했다.
“오늘은 특별 게스트 있습니다.”
“특별 게스트요?”
“누구? 누가 나오는데요?”
서준과 혜리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높아지자 연예인들의 출연 제안이 제법 생겼다.
목적은 두 가지.
평소 차 셰프의 팬이라 요리를 먹고 싶어 출연하거나 영화, 드라마, 앨범 등의 홍보를 위해서다.
“서준 씨는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나? 누구지?”
“곽두식 배우요.”
“두식이?”
연기파 배우 곽두식.
이서준과 나이는 동갑이지만 걸어온 길은 사뭇 달랐다.
서울 소재의 유명한 예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극판에서 활약하다 우연히 깡패 영화에 캐스팅돼 충무로에 입성한 인물이다.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성격파 연기뿐 아니라 생활 코믹 연기도 잘해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로도 유명했고, 최근엔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할을 맡아 체중을 20kg 가까이 감량해 촬영에 임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번에 영화 개봉한다더니 홍보 때문에 나오는 건가? 나 완전 찐팬인데.”
혜리가 손뼉을 치며 흥분했다.
“여진 쌤도 잘 아시죠?”
“그럼. 나랑 예전에 드라마도 한편 했어.”
“어색하지는 않겠네요. 서준 씨랑은 친구고, 혜리 씨랑 여진 쌤도 잘 아시면.”
“언제 온대?”
“영화 관련 인터뷰 끝내고, 이따 밤에 올 거예요. 그럼 슬슬 영업 시작하시죠.”
공지 사항을 남긴 장일수가 카메라 뒤로 빠졌다.
해가 길어진 요즘, 영업을 시작했음에도 해가 지지 않았다.
혜리가 가게 앞 팻말을 으로 바꿨다.
본격적인 영업 시작됐고, 손님들이 몰려왔다.
처음엔 방송인 줄 모르고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너무 많은 사람이 음식을 먹길 원했다. 고민하던 제작진은 추첨을 통해 손님을 받는 방법으로 방식은 바꿨다.
해준은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평소처럼 그들에게 필요한 요리를 대접했다.
자정이 다가올 무렵.
출연이 예정됐던 곽두식 배우가 등장했다.
“늦었는데, 여기 식사 됩니까?”
특유의 매력적이고,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
이제는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야밤 식당 인사말을 하며 곽두식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영화에서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보니 더 날카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였다.
‘일부러 살을 뺐다더니 실제로 보니까 더 험상궂네.’
“곽 배우! 오랜만이야.”
서준이 제일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어흐~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반갑습니다. 혜리 씨. 역할 때문에요. 빼는 것도 어려웠는데, 다시 복구가 안 되네요.”
“빨리 찌우셔야죠.”
“하하. 그러게요.”
“두식아, 오랜만이다.”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럼. 그리고 여긴 우리 차 셰프. 알지?”
“당연하죠. 완전 팬입니다. 홍보팀에서 나가고 싶은 예능 고르라길래 주저 없이 셰프님이 하는 야밤 식당 골랐어요.”
강렬한 인상과 다르게 푸근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악수까지 청해왔다.
‘종일 인터뷰를 하고 왔으면 목이 좀 아프겠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해준은 손님에게 제공하던 시원한 보리차 대신 특별히 끓인 생강차를 냈다.
보리차는 미각이 예민해져 음식 맛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버프가 붙었고, 꿀에 절인 생강차는 목의 피로도를 50% 감소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덥더라도 따뜻할 때 드세요. 목에 좋습니다.”
“알싸하니 좋은데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잡지, 신문, 방송 등 여러 매체의 인터뷰를 하느라 목이 피로해질 대로 피로해진 두식은 따뜻한 생강차 한잔에 잠겼던 목이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제목이 뭐예요?”
해준은 다른 손님에게 나갈 음식을 요리하며, 두식에게 질문했다.
“살인 고백이요.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할인데, 체중을 빼느라 고생 좀 했죠.”
“20kg 빼셨다면서요.”
“정확히 25kg요. 무작정 굶어서 빼느라 엄청 힘들었죠.”
운동을 좋아해 헬스로 몸을 만들던 그가 운동도 끊고, 극한의 식단으로 다이어트를 했다.
탄수화물은 완전히 끊고, 물과 비타민만 먹고 버틴 날도 있었다.
연기와 배역에 대한 욕심 하나로 3달간의 다이어트를 통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곽두식의 이야기를 듣던 여진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고, 혜리와 서준도 남의 얘기가 아닌 듯 인상을 찡그리고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고생하셨겠다.”
“그걸 어떻게 버텨. 대단하다.”
“그런데 왜 다시 안 찌우세요? 영화 홍보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아뇨. 그건 아니고···.”
해준의 의문에 곽두식이 머뭇거렸다.
그의 표정을 관찰하던 해준은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사실은 살이 안 쪄요.”
“뭐라고요!!??···”
“살이 안 찐다고요. 몸이 망가진 기분이랄까.”
고민을 털어놓은 곽두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