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17
116화. 굿즈 샵(3)
***
깊은 밤.
썬플라워.
스케줄을 마친 민주가 숨을 헐떡이며 가게로 달려 들어왔다.
“헤헤. 늦었죠? 오래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와! X나 예뻐.’
해준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거친 감탄사를 간신히 틀어막은 채 평정심을 유지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 아냐.”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 친구 김민주가 진심 욕 나올 정도로 예뻤으니까.
“화보 촬영이 너무 딜레이돼서.”
화보 촬영이 끝나자마자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고, 달려왔다는 민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그 자체였다.
전생에 나라··· 아니, 우주라도 구한 걸까?
9급을 노리던 노량진 공시생이 아이돌 비주얼 센터와 사귀다니.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은 아닌지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윽! 아프다.’
현실이다.
자신의 성공도 아름다운 여친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애인의 시선이 민망했는지.
“왜요? 저 이상해요?”
민주가 볼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 너무 예뻐. 엄청.”
“히히··· 진짜요?”
“어.”
“근데 다 퇴근한 거예요? 동식 아저씨랑 은정이랑 강훈 오빠랑. 간만에 보고 싶었는데.”
“형님은 딸이랑 놀아줘야 한다고 갔고, 은정이는 강훈이 녀석 소개팅해준다고 갔어.”
“오~ 드디어 소개팅?”
“강훈이가 귀에 딱지가 박히게 졸라서.”
“하하. 오빠라면 완전 가능이죠.”
“크크큭.”
매번 톡이나 전화로만 대화하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았다.
‘예전 생각도 나고.’
민주와는 썬플라워에서 여러 가지 추억이 많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아련한 표정으로 곳곳에 묻어있는 자신의 흔적을 어루만졌다.
“여기 오니까 추억 돋는다. 이 메뉴판도 다 내가 그린 건데. 헤헤···.”
“너 그만두고 신메뉴가 없었으니까 완전 그대로지. 배고프지? 이것 좀 먹어.”
해준이 민주를 위해 준비한 체력 회복 음식을 내밀었다.
한 조각이면 일주일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음식.
평소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민주였지만, 어쩐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왜? 뭐 먹고 왔어?”
“그건 아닌데, 삼겹살에 소주 한잔 먹고 싶어요···.”
“그래? 구워줄까?”
냉장고에는 품질 좋은 삼겹살이 가득했다.
더불어 소주도.
“나가서 먹고 싶어요.”
“응? 내가 해주는 게 맛있잖아.”
“그렇긴 한데···.”
민주가 말을 아꼈으나 눈치 빠른 차해준이 행간의 숨은 의미를 읽어냈다.
‘밖에서 먹고 싶은 거구나. 왁자지껄하게 여럿이 모인 곳에서.’
아이돌 데뷔라는 사건 하나가 김민주라는 인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팀원들 간의 사이는 더없이 좋지만, 민주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인기와 인지도 그리고 돈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평범한 스무 살 여대생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은 잃었다.
차해준도 요즘 반은 연예인의 삶을 사는 까닭에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행동도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물며 민주는 요즘 가요계에서 아주 핫한 아이돌. 그 부담감은 더 클 것이다.
지금 민주가 하고 싶은 건 아주 평범한 데이트다.
“나가서 먹을까?”
“사람들이 알아볼 텐데요?”
“네거리 쪽으로 나가면 시장 있잖아. 거긴 아저씨들이 많이 오는 곳이니까 못 알아볼걸? 그리고, 마스크랑 모자 쓰면 되잖아.”
“진짜요?”
“어. 아이디어 회의는 짧고 굵게 끝내고, 나가서 먹자.”
“오~! 재밌겠다.”
민주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좋아.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자. 컵케이크 어떻게 꾸밀지 생각 좀 해 봤어?”
“당근이죠.”
민주가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종이에는 고민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마도 스케줄 틈틈이 컵케이크 디자인을 연구했을 게 뻔했다.
‘잠잘 시간도 부족했을 텐데.’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해준의 손길에 민주가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케이크에 아이돌 이름만 붙여 파는 건 너무 식상한 거 같아요. 케이크 위를 슈거 크래프트로 장식하는 거 어때요?”
“슈거 크래프트?”
슈거 크래프트.
쉽게 말해 설탕을 재료로 만드는 장식물로 케이크를 꾸밀 때 주로 사용한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위의 산타클로스 인형이 바로 그것.
“버터크림 위에 올리면 고정도 잘되지 않을까요?”
컵케이크 레시피는 간단하다.
컵 틀에 반죽을 부어 구워주기만 하면 된다. 그 위에 간단하게 버터크림 장식을 올리는 게 일반적인데, 민주는 버터크림 위에 슈거 크래프트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아이디어 괜찮은데?”
“우리는 러블리엔젤이니까 천사 모양을 넣는 거예요. 이렇게 케이크 위에 슈거 크래프트로 장식하고, 토퍼로 팀 이름을 새겨 넣으면 예쁠 거 같아요.”
민주가 자신이 디자인한 도안을 보여주며 말했다.
JH 소속의 다른 아이돌 팀도 특색에 맞게 아이디어를 짜왔다. 가장 히트한 앨범 재킷 모양을 본뜨거나 화제가 됐던 장면이 떠오르는 포즈를 캐릭터화한 식이다.
“팀별로 상징성이 있는 케이크를 팔면 팬들도 좋아할 거 같아요. 인증샷 찍어서 간직하기도 의미 있고. 어때요?”
민주가 만점짜리 시험지를 제출하고 채점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어서 칭찬해줘요!’
“대단해. 카페 시그니처 메뉴로 손색없겠어.”
“정말요?”
“응.”
“그럼 회의는 끝난 건가?”
“나가자.”
“넵!”
민주는 입고 온 스키니 청바지와 하얀 셔츠를 벗어버리고, 최대한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트레이닝복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다. 차해준의 것이었다.
거기에 마스크와 야구모자까지 쓰니.
“저 어때요?”
전혀 아이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못 알아볼 거 같은데?”
“나이스~!”
이미 매니저에게는 회의가 길어질 것 같으니 작업이 끝나면 직접 데려다준다고 말해 놓은 상태.
아무도 모르게 서너 시간은 충분히 놀 수 있었다.
‘이것도 필요하겠지?’
해준은 냉장고에서 작은 병을 챙겼다.
최근 연구용으로 만든 음료다.
뜻밖의 엄청난 결과물에 잔뜩 흥분했지만, 효능을 시험할 기회가 있었다.
‘쓰여있는 대로라면 효과가 엄청나겠지?’
아마 시판된다면 노벨상 하나는 우습게 딸만 한 획기적인 음료다.
차해준이 만든 음식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특히나 시드르 꿀물은 모든 애주가가 꿈꿔온 획기적인 숙취 해소 음료.
접대에 찌든 영업직 회사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을 엄청난 버프였다.
“나가자.”
“넵!”
썬플라워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시장 뒷골목으로 걸어갔다.
거리에 사람이 많았지만, 다행히 민주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우리 어디로 가요?”
“사람이 적당히 없는 곳.”
지금 민주에게는 그 어떠한 산해진미보다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실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공간은 피해야겠지?’
의도치 않게 맛집들은 피해 다녔다.
지금이야 얼굴과 몸을 완벽히 가리고 있지만, 음식을 먹으려면 최소한 마스크는 벗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벗는 순간.
‘바로 알아볼 거야.’
재수 없으면 내일 아침 당장 디즈패치 톱 기사를 장식할지도 몰랐다.
[아이돌 김민주, 차해준 셰프와 열애설 – 심야의 삼겹살 데이트?!]이라는 타이틀로 말이다.
“저기 괜찮겠다.”
해준의 선택은 적당히 아저씨들이 있는 허름한 삼겹살 가게였다.
테이블 10개 정도에 내부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시끄럽게 떠드는 50대 아저씨 손님들이 두 테이블 정도 있었다.
평범함을 느끼기 딱 적당한 식당.
더불어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운 곳.
아저씨들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자기들끼리 라떼는 말이야를 연신 뱉어냈고,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시선은 드라마에 고정되어 있었다.
해준이 앞장서 가게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와~ 여기 사람 진짜 없네요.”
“그러게. 편하게 먹을 수 있겠어.”
해준과 민주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장사가 신통치 않다는 건 주인에게는 속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삼겹살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해준이 벽에 붙은 낡은 메뉴판을 훑으며 물었다.
삼겹살 외에도 꼼장어, 닭발, 꼬막, 제육볶음 같은 걸 팔았다.
아무래도 장사가 안되니까 이것저것 메뉴를 막 가져다 붙인 것 같았다.
“소주 마실 거니까 삼겹살이요.”
맥주는 치킨, 소주는 삼겹살, 막걸리는 파전.
절대 불변의 진리다.
“일단 삼겹살 2인분에 소주 1병. 사장님~!”
차해준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TV를 보고 계신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테이블에 오는 대신 몸을 돌려 ‘뭐 줄까?’라고 묻는 듯 눈을 마주쳤다.
“여기 삼겹살 2인분이랑 소주 한 병이요.”
“소주는 냉장고에서 꺼내 먹고, 고기는 금방 가져다줄게. 근데, 석구 이놈의 자식은 또 어디 갔어? 손님 왔는데, 상차림 준비 안 하고. ”
할머니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식당에 오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재밌어?”
“당연하죠. 나 찍는 카메라도 없고. 속이 다 편하네.”
데뷔와 동시에 인기몰이를 하며 핫하게 떠오른 러블리엔젤.
늘 카메라가 따라다니기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밥 먹는 것도 잠시 쉬는 것도 메이크업 받으며 대기하는 것도 모두 그녀에겐 일이었다. 24시간 긴장 유지 상태. 5분 대기조를 쉽지 않고 하는 것과 맞먹는 스트레스였다.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도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오랜만의 데이트도 좋지만, 좋은 사람들이 함께 자리해 왁자지껄 떠들고 마셨으면 하는 것이 민주의 바람이었다.
물론, 그런 바람이 현실이 될 리는 없었다.
‘다들 바쁘니까.’
그때였다.
“저··· 혹시 김민주 아니세요?”
누군가 꽁꽁 위장한 상태의 민주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순간 민주는 몸도 돌리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며.
“아닌데요.”
라고 목소리까지 내리깔고 대답했다.
“맞는 거 같은데. 럽둥이 김민주.”
그러나 여자는 집요했다.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아니면 얼굴 좀 보고 말해봐요. 아니라고.”
무례하게도 여자는 민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민주가 마주 앉은 해준에게 간절한 신호를 보냈지만, 어쩐 일인지 여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빠···.’
집요한 여자는 멈추지 않고, 민주의 어깨 너머로 몸까지 들이밀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구만!!”
모자챙 사이로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는 얼굴이었다.
“너!···”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권은정.
“서프라이즈~!!”
“놀랐잖아.”
“큭. 미안.”
혹여라도 스캔들이 터질까 잔뜩 움츠려있던 민주가 그제야 큰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은정아. 니가 어떻게 왔어?”
“나도 왔다.”
“강훈 오빠. 오빤 소개팅 나간 거 아니었어요?”
“사장님이 은밀히 불렀어. 니가 우리 보고 싶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여기로 달려왔지.”
“응. 이 오빠 30 분만에 까였어. 그리고 나 소개팅해준 애한테 엄청 욕먹었잖아.”
“야, 권은정!”
“풉, 푸하핫.”
민주가 크게 웃었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아주 평범한 일상이었다.
별것 아닌 일이 즐겁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일상.
잠시나마 연예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놀랐잖아요.”
민주가 해준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차해준이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이벤트다.
단둘이 즐기는 데이트도 좋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았고, 그의 생각대로 서프라이즈는 대성공이었다.
“미안. 그래도 재밌었지?”
민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었다.
“네.”
“앉아. 얘들아.”
해준이 고기와 술을 더 시켰다.
예상대로 삼겹살은 상태가 별로였다.
고기 굽기 스페셜리스트인 차해준이 심혈을 기울여 구웠지만, 애초에 신선도와 품질이 최악인 삼겹살의 맛을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조금 그렇네.”
“맛이 별로면 어때? 맛있는 거 먹으려면 썬플라워 마당에서 자리 펴고 구웠지.”
“하긴. 것도 그렇네요.”
맛있는 거라면 평소 질리도록 먹으니 이런 경험도 때론 흥미로웠다.
“마시자.”
“건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고기 맛이 좀 별로라는 사실만 빼면 아주 재밌는 술자리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그만 일어날까?”
“에엥?~ 벌떠여? 시릉데. 민주는 더 마시고 시픈데에.”
민주가 혀 짧은 소리를 했다.
“앗, 민주 취했다.”
“사장님. 얘 이렇게 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닌데. 나 안 취했는뎁. 헤헷.”
간만의 편안한 분위기에서 주량 이상으로 달렸다.
이대로 숙소에 들여보내면 매니저에게 혼날 게 뻔했지만, 차해준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시드르 꿀물.
‘준비하길 잘했다.’
“괜찮으니까 너희 먼저 들어가. 난 택시 타고 숙소까지 바래다주고 갈게.”
음식값을 계산하려는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이런 서프라이즈가 하나 더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