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18
117화. 굿즈 샵(4)
***
“야, 저기 갈까?”
“어디? 할매 삼겹살? 거기 열라 맛없어.”
“응? 옛날에 맛있게 먹은 거 같은데.”
“한때는 이 골목에서 제일 맛집이었지. 근데 요즘은 완전 맛탱이 갔어.”
“왜?”
“왜겠냐? 돈 좀 벌었다고 초심 잃은 거지. 고기 맛이 영 별로야.”
지나가는 행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말에 이석구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내 상황은 이렇다. 넌 잘 지내지? 요즘 TV에도 나오더라. 깜짝 놀랐어. 식당도 한다면서.”
전역하고 몇 년 만에 만난 이석구는 차해준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요리는 관심도 없던 녀석이 몇 년 사이에 유명한 맛집 사장이 됐냐며 궁금해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차해준은 그저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참, 저희 가게 이 근처예요. 가까우니까 언제 한번 들르세요.”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장사가 워낙 안돼서 가게 유지라도 하려면 틈틈이 대리운전 알바라도 뛰어야 하니까. 사람들 반응 봤잖아.”
“그럼 지금도?”
“어. 대리 한탕 뛰고, 문 닫으려고 온 거야.”
“그러시군요.”
어쩐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군대 선임 이석구는 차해준에게 유일하게 잘해준 살가운 고참이었다.
해준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그는 일부러 해준과 휴가를 맞춰서 술도 사주고, 내무반에서도 최대한 그를 배려해줬었다.
전역 후 노량진에 들어가면서부터 연락이 뜸해진 사이.
‘그때는 손님들로 꽉 차서 몰랐는데, 여기가 거기라니.’
그러고 보니 가게가 낯설지 않았다.
휴가 때 가족이 하는 식당이라며 왔었던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활발한 곳.
텅 빈 가게를 보고 있자니 격세지감이었다.
“제 기억에 삼겹살 맛집이었던 거 같은데···.”
해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군인 신분이었더라도 그때 먹었던 삼겹살과 지금 먹은 것은 도저히 같은 식당에서 먹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때는 우리 가게가 잘 나갈 때였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이석구가 아련한 표정이 되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할매 삼겹살은 품질 좋은 삼겹살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어 누구나 찾는 지역 맛집이었다.
골목 후미진 곳에 있었지만 찾는 사람이 워낙 많아 주변 상가까지 임대해 규모를 확장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석구의 아버지가 직접 운영하던 돼지 농장을 사기로 날려 먹고, 화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몸져누워 돌아가셨다.
더 이상 값싸고 품질 좋은 돼지를 파는 건 불가능해진 일.
가게 손님이 떨어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고, 매장 규모는 쪼그라들어 지금 운영하는 점포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마저도 장사가 안돼 오늘내일하는 상황이지만.
“힘드셨겠어요.”
“뭐. 그럭저럭. 어? 콜이네. 해준아, 나 간다. 다음에 보자.”
“네. 형님.”
석구가 대리 콜을 받으며 황급히 자리를 떴고, 어색한 공기 속에 둘은 짧은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민주 숙소로 향햐는 택시 안.
시드르 꿀물을 먹고 곤히 잠든 민주 옆에서 차해준은 고민에 잠겼다.
‘나한테 잘해줬던 선임인데, 내가 뭐 도와줄 게 없을까···.’
가장 직접적이고, 간편한 방법은 금전적 도움이다.
투잡을 뛸 정도로 장사가 어려우니 금전적 도움이 가장 절실할 터.
빌려주는 형식을 취해 몇천만 원쯤 지원해준다면 현재 이석구의 처지에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런저런 사업을 하며 모아 놓은 돈도 꽤 되니까.’
돌려받지 못해도 현재 차해준의 재정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애초에 돌려받을 생각도 없는 돈이고.
그만큼 이석구는 차해준이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 때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돈을 빌려준다면 자존심 상해하겠지?’
차해준이 아는 이석구는 그런 사람이다.
어떻게든 가게를 꾸려나가겠다고 대리 기사 알바까지 뛰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간접적이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뭐가 있을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지 않으며, 이석구에게 도움을 줄 좋은 방법.
“새로 오픈하는 굿즈 샵 직원으로 들일까? 어차피 카페 쪽 운영은 내가 전담하기로 했고, 음료 만들 직원도 필요하니까.”
해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굿즈 샵 음료 담당은 꼭 바리스타가 아니어도 되는 일이다.
음료 레시피는 어차피 해준의 머릿속에 있고, 이석구 정도라면 몇 번 가르쳐주는 것으로 금세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이석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
동생으로 생각하는 군대 후임의 영업장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것 또한 쉽게 할 선택은 아니었다.
“흠···.”
차해준의 고민이 깊어졌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석구 형님한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
차원의 농장.
“꿀물 효과 죽이네.”
오랜만에 흥이 올라 민주보다 더 신나게 달린 건 차해준 본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쌩쌩하다는 건.
‘민주도 술이 다 깼겠어.’
술 냄새 따위는 1도 나지 않을 테니 매니저 임나영에게 몰래 술을 마신 걸 들킬 염려는 없다.
현재 상황에서 김민주는 JH 굿즈 샵의 성공적인 오픈을 위해 스케줄이 끝나고도 자진해서 회의를 하고 온 헌신적인 멤버니까.
다만 내일 아침 얼굴이 땡땡 부을 수도 있다.
시드르 꿀물은 숙취만 해소해줄 뿐, 칼로리를 소모하게 해주지는 않으니까.
‘큭. 내일 아침에 나한테 엄청 화내겠네.’
화내는 민주도 꽤 귀엽다.
조금 놀려주다가 붓기 해소에 탁월한 단호박 죽을 보내주면 해결될 일.
“연애는 이쯤하고, 슬슬 본업으로 돌아가 볼까?”
해준이 팔을 걷어붙였다.
이제부터는 민주의 나이스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 줄 시간이다.
해준이 농장을 가로질러 제빵소로 향하자, 양지바른 곳에서 식빵을 굽던 뭉치가 해준을 발견하고는 느릿하게 걸어왔다.
“냐아앙~.”
“뭐? 놀아달라고? 지금은 그럴 시간 없어. 미안.”
“냥냥!”
“응?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이제부터 슈거 크래프트 연습해야 하거든.”
슈거 크래프트.
설탕 공예는 말 그대로 손의 감각으로 만드는 예술품이다.
레시피만 안다고 만들 수 있는 요리와는 숙련도 자체가 다르다.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없을 터.
이번만은 차해준도 남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사정.
뭉치는 놀고 싶었다.
요즘은 동굴 탐험도 자주 가지 않고, 몸이 근질근질했으니까.
“뭐? 탐험? 나중에. 아직 재료가 많거든.”
“냐아앙!”
“그런 거 하지 말고 놀아달라니. 진짜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 가서 굽던 식빵이나 마저 구워.”
몇 번을 조르다 포기한 뭉치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식빵을 구웠다.
미안하다. 뭉치야.
지금은 연습을 해야 해서.
‘실력 좋은 설탕 공예가가 짠~ 하고 나타나서 뭐든 의뢰만 하면 만들어주겠다고 할 리는 없으니까.’
“연습만이 살길이다. 아자, 아자!”
그때였다.
“짠~! 어때? 차해준. 기가 막히지?”
클로에가 먹음직스러운 케이크와 디저트를 들고 나타났다.
고소한 향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치즈, 에그 타르트. 크로칸슈, 마들렌, 형형색색의 마들렌까지.
그중 압권은 케이크였다.
하얀 생크림에 망고, 포도, 딸기 등 생과일을 듬뿍 올리고, 주변을 꽃으로 장식한 생크림 과일 케이크와 당근 케이크.
“니가 부탁했던 것들이야. 이 정도면 되겠어?”
굿즈 샵에서 팔 디저트들이었다.
평범한 수준의 디저트를 요구했더니, 먹기도 아까운 것들을 가져왔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먹음직스럽다.
‘진열해 놓으면 바로 매진되겠다.’
자세히 살펴보니 더 아름다웠다.
싱그러운 과일 옆에 장식된 꽃과 당근 케이크 위에 놓인 앙증맞은 당근 모양의 장···식?!
‘장식이잖아!!??’
차해준의 시선이 케이크 위에 집중됐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건 분명 슈거 크래프트였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제작된.
‘전문가··· 아니, 장인의 솜씨다!’
놀란 해준이 호흡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봤다.
먼저 생과일 케이크.
눈처럼 하얀 케이크 가운데 노란 망고와 청포도, 키위와 딸기, 블루베리가 소담스럽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주변으로 마치 작은 화단처럼 과일을 둘러싼 꽃봉오리들. 꽃잎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며, 색깔도 정교하게 재현됐다. 마치 케이크 하나가 설원 위의 신비한 화원 같달까?
당근 케이크는 또 어떠한가.
갈색 시폰 케이크와 크림을 3단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새끼손톱 크기의 작고 앙증맞은 당근을 일렬로 장식해 마치 제주도의 당근밭을 연상케 했다.
“이거 다 클로에, 네 솜씨야?”
“어때? 죽이지?”
“설마 설탕으로 만든 거야?”
“오~ 어떻게 알았어? 신기하지? 예쁘지? 나 완전 금손인가 봐.”
자신의 손을 펼쳐보며 말했다.
“딱 생각만 했는데 마법처럼 샤샤샷 만들어지는 거 있지! 혹시 나도 해준 너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걸까? 히힛.”
슈거 크래프트는 생각만 한다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양을 정교하게 빚어내는 것도 고난도의 기술이지만, 설탕 공예를 하기 위해선 일단 ‘폰던트’라고 부르는 설탕 반죽이 필요하다.
슈거 파우더를 기본으로 하는 반죽에 색소를 넣어 색을 만드는 과정은 경험 없이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연습을 하려는 것이었고.
그런데, 그 어려운 작업을 레시피 따위는 1도 모르는 클로에가 몸이 저절로 움직여 만들었단다. 그것도 만들기 까다로운 섬세한 디자인의 꽃을.
‘나타났네. 구세주.’
솜씨가 일천한 차해준은 뒤로 빠져서 뭉치와 놀아주면 될 것 같은 환상적인 솜씨다.
애초 평범한 구움 과자와 케이크를 부탁하려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내가 나서지 말고, 다 맡기자. 전문가한테.’
베이킹과 관련된 부분만큼은 클로에가 자신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했다.
남은 건 클로에를 잘 구워삶아 부탁을 하면 되는···.
“그래서 말인데···.”
클로에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응? 뭔데?”
“만들다 보니까 너무 재밌어. 그래서 말인데 해준아. 나 이것들 좀 마구마구 만들어봐도 될까? 혹시 알아?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될지.”
차원의 농장에서 재배되는 모든 작물의 권한 차해준이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클로에는 고용인이고, 해준은 고용주인 셈.
제빵에 강한 흥미를 느낀 클로에는 원 없이 만들고 또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차해준의 허락이 필요했다.
‘당연히 되지. 왜 안 되겠어. 오히려 내 쪽에서 부탁하려고 했는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려운 미션이 아주 손쉽게 해결됐다.
‘이렇게 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김 대표에게 디저트를 선보일 수 있겠어.’
***
“벌써 준비가 다 됐다고요? 차 셰프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차해준의 연락을 받은 김정후 대표가 놀라 되물었다.
-일단 시식회를 열어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직원들 평가도 좀 들어보고, 반응도 좀 보고.
“저희야 좋죠.”
-그럼 준비해서 바로 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서류를 읽던 김정후가 서둘러 5층으로 올라갔다.
JH 건물 5층은 한창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내부 마감은 끝났고, 가구 세팅과 배치 그리고 차해준의 공간인 주방이 남은 상태다.
‘이 정도면 차 셰프도 흡족해하겠지?’
화사하고, 모던한 느낌의 내부 인테리어.
입구에는 JH를 대표하는 핑키데이와 러블리엔젤 그리고 보이 그룹 세븐키즈의 캐리커처가 투명 유리에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첫 번째 셀카 포인트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카페 내부가 나온다.
한쪽에는 예정대로 아티스트들의 의상, 소품, 앨범과 애장품들이 진열되어있고, 특별 제작된 굿즈를 판매하는 공간도 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곳.
민주가 디자인한 컵케이크와 다른 디저트들을 진열할 냉장 쇼케이스.
‘크~ 완벽해.’
소품과 테이블, 의자 하나까지 모두 김정후 대표가 직접 관여해 컨펌했다.
굿즈 샵은 성공한 연예 기획사의 상징이었으니까.
김정후는 자신의 성과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차해준 셰프가 양손 두둑하게 등장했고.
‘나이스 타이밍~.’
김정후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