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37
136화. 복면셰프(1)
***
아쉽게도 클로에는 가족의 이름이나 고향 등 기억을 되찾을만한 결정적 단서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래도 언니가 있다는 것과 아버지 직업이 파티시에였다는 건 알아냈네.’
클로에의 수준 높은 제빵 솜씨와 과자, 케이크를 굽는 실력의 근원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농장 관리를 끝내고, 현실로 돌아왔다.
브레이크 타임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시점.
“너희는 얼굴이 왜 그래?”
첫날부터 반듯한 단발머리가 인상적이었던 은정의 머리카락이 미친X처럼 엉클어졌고, 강훈은 입술이 부르텄다. 마치 몸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싸웠냐?”
“싸우긴요.” “아, 아니에요.”
“근데 왜 둘이 쳐다도 안 봐?”
“자식들. 회식 날 그 일 때문에 싸웠구만.”
동식도 나섰다.
“화해해.”
썬플라워 핵심 멤버인 강훈과 은정의 사이가 틀어져 잠수라도 탄다면,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할 수 없다.
“술 먹고 재미로 한 말일 텐데. 은정이 네가 이해해주라.”
“우리 오늘부터 1일 하기로 했어요?”
동식의 화해 권유에 은정이 말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선전포고 한 거야? 전쟁 1일 차. 뭐, 그런 거?”
“그게 아니라 우리 사귀기로 했다고요!”
***
“대박 사건!”
민주가 전화를 받자마자 해준이 오늘 있었던 썰을 풀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남의 연애사가 가장 재미있는 이슈 아니겠는가.
-진짜요? 진짜 둘이 사귀어요?
“응. 대박이지?”
-2호 커플 탄생이라니. 완전 사랑이 꽃피는 썬플라워네.
맨날 투닥거리며 싸우더니 결말은 커플이었다.
‘만드라고라 술이 제 몫을 한 건가?’
기왕 사귀기로 한 거 깨지지 말고, 잘 사귀면 좋겠다··· 는 젠장. 내 코가 석 자인데.
해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3D 실물 민주를 만난 게 언제던가.
처음에는 열애설이 날까 조심했는데,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근데 우린 언제 만나요? 오빠 보고 싶다.
민주도 같은 심정인 것 같다.
연일 이어지는 지방 스케줄에 서울에 올라와도 숙소에서 잠깐 눈 붙이고 나가는 게 전부였다.
데뷔와 동시에 1티어 걸그룹이 되어버린 운명의 데스티니. 물이 들어왔으니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한다.
스케줄 사이에 후속곡 노래 연습과 녹음, 안무 연습까지 해야 하니 럽둥이들 모두가 영혼까지 갈아 넣어가며 버티는 중이다.
‘기특한 녀석들.’
최대한 요리로 녀석들의 체력과 정신 문제를 서포트해주고 있지만, 약만 빤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선 민주가 너무 보고 싶다.
“짬이 안 나잖아. 넌 숙소 들어가면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이제 와도 돼요.
“응? 어떻게?”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건가?’
-다들 아니까 그냥 오래요. 양손 무겁게 오면 절대적으로 안 걸리게 해준다고.
비주얼 센터 포지션인 민주는 가장 늦게 팀으로 합류했다.
그런 경우에는 입김 센 멤버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데뷔 직전 캐스팅된 멤버를 따돌리는 경우가 흔한데, 우리 럽둥이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데이트 할 수 있게 커버를 쳐주겠다니.’
감사. 압도적 감사.
“말 나온 김에 내일 당장 갈까?”
-스케줄 있어요. 서아랑 복면셰프 패널로 나가기로 했어요.
“응? 그런 거 막 발설해도 되는 거야? 가면 벗기 전까지 비밀유지하는 거 아닌가?”
복면셰프.
가면 안에 나이와 신분을 숨긴 요리사들이 순수하게 요리실력으로 대결하는 요리 버라이어티다.
해준도 여러 차례 섭외를 받았는데, 정중하게 거절한 상태.
-그건 요리사고요.
“아!···”
-전 패널로 출연해서 복면셰프 요리 시식하고, 판정하는 판정단 역할이에요.
“재밌겠다. 따라갈까?”
-안 바빠요?
“한 번쯤은 땡땡이쳐도 되지 않을까?”
-하긴. 오빠는 성실 그 자체니까.
내일은 자체적으로 감기에 걸리기로 했다.
그냥 그런 거다.
콜록콜록.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살인적인 스케줄에 찌든 럽둥이들 체력 보충을 핑계로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숙소로 향했다.
주방을 빌려 5성급 호텔 조식 뷔페보다 뻑적지근하게 밥상을 차렸다.
퉁퉁 부은 눈과 부스스한 머리, 눈곱은 덤으로 달고 등장한 럽둥이들은 뜻밖의 진수성찬에 입이 떡 벌어졌다.
민주에게도 한 끼 든든하게 먹이고, 옥상에서 몰래 데이트. 듣자 하니 럽둥이들 사이에서 데이트 핫플이라고 한다.
‘응?! 누가 또 연애하냐!’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났다더니,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파파라치와 매니저의 감시를 피해 연애를 한다니.
대단하다. 존경한다.
아침 식사 후.
해준은 서아, 민주와 함께 밴을 타고, MBS 방송국까지 동행했다.
“와, 여긴 이렇게 생겼구나.”
상암 DMC 센터의 중심에 있는 MBS.
해준은 첫 방문이다.
휘황찬란 삐까뻔쩍. 수학여행 코스 중 방송국 견학 온 촌놈마냥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밤 식당에 출연 중임에도 방송국에는 갈 일이 없는 터라 해준은 모든 게 그저 신기했다.
“오, 개인 대기실이 따로 있네?”
[복면셰프]출연자 대기실
러블리엔젤 민주, 서아 님
“당근이죠.”
“들어오세요.”
넓은 소파와 개인 화장대 심지어 화장실까지 딸려있었다.
1티어 걸그룹의 대기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호텔이 따로 없네.’
잠시 기다리니 조연출이 러블리엔젤의 분량이 체크된 대본을 가져왔다.
대본이라고 해도 특별할 게 없었다.
복면셰프 프로그램 특성상 비밀 유지를 해야 하는 사항이 많았다.
그렇기에 MC만 전체 대본을 받고, 패널은 자신의 분량이 체크된 쪽대본을 받는다.
대본을 읽던 민주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어쩌지?··· 나 개인기 없는데.”
자신의 순서에 적혀있는 개인기에 난감해했다.
안무와 노래는 노력으로 커버했으나, 개인기는 또 다른 영역이다.
“내가 하나 만들어줄까?”
서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뭐? 있어?”
“있지. 있어.”
예능캐 서아는 방송에서 독보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무대에서는 청순 러블리엔젤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예능에서는 4차원 캐릭터. 속칭 예쁜 똘아이, 예똘로 통했다.
“내가 요즘 연구 중인 게 있는데, 쉬워. 함 봐봐.”
자세를 고쳐잡은 서아가 호흡을 고르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의 시선 집중.
“까아아아아아ㅏㅏㅏㅏ.”
앙증맞은 입술에서 그로크테스크하고 괴랄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 정작 개인기(?)를 선보인 서아만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게 뭐야?”
“지하주차장 바퀴 소리야. 어때? 재밌지? 신선하지?”
“풉!”
“오?!~”
웃기다. 그럴듯하다. 괜찮은데, 쫌 이상하다···.
스태프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해봐 언니. 까아아아아ㅏㅏㅏㅏ.”
“끄아아아아아ㅏㅏ?”
“아니. 그게 아니고, 목소리를 좀 더 째지게. 코팅 면과 바퀴가 만나 발생하는 짜증 나면서도 중독적인 그 오묘한 포인트를 살려야지.”
마치 신곡 녹음하듯 디테일한 프로듀싱을 해주며 서아가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은 노련한 조련사의 그것.
민주도 시키는 대로 열심이다.
그러나 재능이라는 벽에 부딪힌 걸까?
“끄아아아··· 하아, 이거 어려워.”
결국, GG를 선언했지만, 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개인기를 들이밀었다.
“흠, 그럼 다른 거 해보자.”
“어떤 거?”
“유리창 닦는 소리 성대모사.”
“오, 그건 모임?”
흥미진진해진 해준이 물었고,
“봐요.”
숙련된 조교의 시범이 이어졌다.
서아는 허공에 입김을 부는 시늉을 하고, 팔을 와이퍼 흔들듯 흔들며.
“아↘아↗아↘아↗아↘”
“풉!”
“큭!”
“아이고 배야.”
“끽끽끽.”
빵 터졌다.
누군가는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괴기한 웃음소리를 내었고,
“해봐요, 언니.”
“아↘아↗아↘아↗아↘”
민주도 아까보다 제법 퀄리티 있게 모사했다.
“됐네. 방송 준비 끝. 이제 좀 쉬어야겠다. 하얗게 불태웠어.”
서아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민주가 은근슬쩍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이나 쐴까. 심심하다.”
매니저가 따라붙으려 하자, 눈치 빠른 서아가 사전에 차단했다.
“나영 언니. 나 어깨 좀 빌려줘요. 한숨 때리게.”
“소파에 기대고 자.”
“언니 어깨만큼 포근하질 않아. 빨리요.”
강제로 매니저를 끌어안으며, 민주 혼자 보내긴 그러니 차 셰프님을 붙여서 보내자고 제안했다.
‘땡큐, 서아.’
‘올 때 매로나.’
‘콜!~’
눈빛 교환을 마친 서아와 민주.
민주는 방송국 안에서도 남돌과 여돌의 화합의 장으로 유명한 3층 복도 끝 계단으로 해준을 데려갔다.
“와~ 이런 곳이 있었네?”
“저도 소문만 듣고, 오는 건 처음이에요.”
방송국에서 가장 으슥한 곳.
뭔가 은밀한 행동을 하기에 딱 적당한 장소 같았다.
해준과 민주는 3층과 4층 사이 음습한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지난 몇 달간 못한 데이트를 오늘 한방에 몰아서 할 생각이다.
“아, 좋다.”
“둘이 같이 있는 게 얼마 만이냐.”
“그러니까요. 연예인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너무 힘들어요.”
“많이 힘들어?”
“응. 어쩔 땐 내가 뭐하나 싶다니까요.”
새벽에 일어나 샵에서 헤어, 메이크업하고 스케줄하러 간다. 밴을 타고 이동하며 쪽잠과 도시락을 먹고, 차에서 내리면 기계적으로 스케줄, 스케줄, 스케줄. 숙소는 잠을 자는 곳이 아니라 씻는 곳이 되어버렸다.
“저번에는 숨이 턱 막히더라니까요.”
“그거 공황 아냐?”
“그런듯요.”
‘위험한데.’
정신력 안정에 좋은 쌉싸름한 레드 와인이라도 한 병 줘야겠다.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내가 뭐 하는가 싶어 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응, 그런데?”
“회사에서 정산 문자가 온 거예요.”
“정산?”
“네. 저번 달 수익에 찍힌 동그라미 숫자 보고,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거 있죠.”
77ㅓ억~.
“금융 치료 받았네.”
“헤헷. 네. 아~ 그래도 오빠 어깨에 기대고 있으니까 힐링 된다.”
“금융 치료 덕분은 아니고?”
“에이, 그건 그거고요.”
민주가 은근히 어깨를 기대어왔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샴푸향.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졌다.
‘키스 타이밍이다!’
해준의 몸이 기울었다.
막 비비드한 핑크 틴트를 바른 촉촉한 입술에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쾅-
“!!??”
“!!??···”
누군가 비상구를 세게 열어젖히며 고함을 질렀다.
“갑자기 전화해서 못하시겠다니요. 방송이 장난이에요? 오늘 녹화인데. 패널들도 벌써 다 와 있다고요.”
컨닝을 하다 들킨 학생처럼 둘은 목을 말아 넣고, 눈치를 살폈다.
(복면셰프 작가님이다.)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민주가 입을 뻐끔거렸다.
“애초에 한다고 하지를 말던가요. 녹화 한 시간 남겨두고 이게 무슨 똥매너예요. 이러시면 곤란하죠. 뭐요? 이 양반이 진짜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섭외 빵꾸 났나 봐요.)
(그러게.)
참다 참다 폭발한 작가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이 마구 튀어나왔다.
복면셰프가 아니라 대딩래퍼 작가가 더 어울릴 것 같은, 라임과 비트가 훌륭한 욕 한 바가지.
마무리는 저주였다.
“요왕도 아니고, 고작 도전자 주제에. 니가 그러고도 잘되나 보자. 내가 너 망하는 거 꼭 지켜볼 거야.”
전화를 끊어버린 작가는 이내 머리를 움켜쥐었다.
누군가 미친X에 관해 물어본다면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르치고 싶은 심정.
“하아, 미치겠다. 당장 빵꾸 난 요리사를 어디서 메꾸지?”
복면셰프는 가면을 쓰고,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철저하게 요리실력으로 자웅을 겨루는 프로그램.
요리왕에 오르면 매주 방어전을 통해 타이틀을 지켜야 하며, 탈락하면 정체를 밝히는 포맷이다.
독특한 점은 요리사가 재료부터 직접 공수해 스튜디오에서 요리 대결에 들어가며, 간혹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육수나 소스는 미리 VCR을 촬영하며 조리 과정을 공개한다.
준비에 최소 일주일이 걸리니, 지금 당장 요리사를 섭외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
‘으~ 작가님 불쌍하다.’
방송국이란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전쟁터 같은 곳.
어쩐지 녹화 직전 출연 불참 통보라는 핵폭탄을 맞은 김해나 작가가 어쩐지 불쌍해졌다.
‘이럴 때 하늘에서 요리사 뚝 떨어진다며···응?!’
민주가 옆에 앉은 차해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무려 미슐랭 가이드 스타까지 받은 초특급 요리사가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해준 실력이면 몇 주는 요리왕에 등극할 수 있고, 4회차 출연이 예정된 스케줄이니.
‘적어도 4주는 만날 수 있잖아. 헤헷···.’
민주는 해준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