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142
141화. 연우의 첫사랑(2)
***
깡-
알루미늄 배트에 맞은 공이 시원하게 날아가 외야수의 머리를 넘어갔다. 9회 말 2아웃 이후에 나온 만루홈런이었고, 홈런을 친 건 4번 타자 오탄이었다.
삐익- 하는 호각 소리와 함께 그대로 종료된 연습 경기.
상호 간 인사를 나눈 오탄이 투구하느라 무리한 어깨에 아이싱을 했다.
“야. 가봐.”
태린이 옆구리를 쿡 찔렸다.
“지금이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맞아요. 언니. 연우도 체면이 있지 야구부원 수십 명이 보는 앞에서 까이면 앞으로 사람 구실 못하죠. 내상 입고 은퇴할지도.”
“언니.”
위로인지 멕이는 건지 모를 서아의 말에 연우가 이를 갈았다.
“엇, 쏘리.”
“암튼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좀만 더 지켜보고요.”
럽둥이와 해준은 야구장 스탠드 구석에서 오탄이 잘 보이는 쪽에 몸을 숨기고 대기했다.
그때!
돌핀 팬츠 스타일의 짧은 체육복을 입은 여자 매니저가 물과 수건을 들고 오탄에게 접근하는 게 포착됐다.
“흐익. 저, 저것이!”
연우의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져나왔다.
매니저는 쪼꼬미 연우와 전혀 다른 타입의 여고생.
외모나 비율은 당연히 아이돌 연우에 한참 못 미쳤지만, 적어도 미드만큼은 팀의 리더를 맡아도 될 만큼 묵직해 보였다.
“음··· 저거였나?”
“뭘 먹고 저렇게 컸어?”
“젖네. 젖어.”
결단코 키 얘기는 아니었다.
언니들의 반응에 연우가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고.
“막내가 까인 이유를 알겠다. 이 쪼꼬만 주먹이 연우라면 저 매니저는 수ㅂ··· 어휴.”
마침내 서아가 상대적 빈곤(?)함에 대한 주제로 막내 등에 비수를 꽂았다.
쿨럭-
도대체 누구 편이냐!
···라는 눈빛으로 서아를 노려봤다.
이쪽에선 매니저의 미드 사이즈와 오탄의 성적 취향에 대해 뜨거운 논의가 한창일 때, 저쪽에선 매니저가 노골적으로 오탄에게 들이댔다.
“어쭈, 저게.”
조금 전까지 소심하다며 막내를 놀리던 서아가 태세 전환하며 근처의 작은 짱돌을 움켜쥐었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바람을 느끼며 에임을 매니저에게 조준.
“서아야. 너 그거 던지면 내일 실검 1위다.”
“어휴, 언니. 저 요망한 매니저가 탄이한테 하는 짓 좀 보세요.”
“꼬리만 안 달렸지 완전 여우네.”
“백 년 묵은 불여시.”
“어머머, 저거 눈웃음치는 거 봐.”
럽둥이들은 마치 남주에게 꼬리치는 성격 고약한 서브녀를 보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당연히 가장 열폭하는 건 막내 연우.
다행(?)히도 오탄의 반응은 무덤덤 그 자체였다.
마치 부처님 아랫도리처럼 어떤 도발에도 무념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
“넘어가지 마! 젭알~!!”
손을 모아 기도했다.
사이다나 김치 한 조각 없이 고구마를 마구 먹은듯한 답답함.
오탄의 반응이 없자, 몇 번 더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하던 수박 매니저가 체념하고 돌아섰다.
평온-
그제야 연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이 오이. 오탄군, 믿고 있었다고.”
“응응. 짜식, 대단하네.”
“근데 언제까지 숨어서 훔쳐보기만 할 거야? 이러려고 온 학교가 아닐 텐데?”
“그럼 어떻··· 응?”
땀을 닦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오탄의 동선을 확인한 서아가 타이밍 좋게 연우를 밀어버렸다.
“타, 탄이 선배.”
“연우아.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하하. 학생이 학교에 오는 건 당연하죠.”
“오늘 학교 오는 날 아니잖아.”
“어? 그런 거까지 아세요?”
“당연하지.”
‘왜?··· 왜 때문에 나 등교하는 날을 아는 거지? 설마 탄이 오빠도 날 좋아하나?’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너 등교하면 학교 주변 500m가 북적거리잖아.”
연우는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 온다.
매니저 실장 차를 타고 은밀하게 등교했지만, 럽둥이의 개인 스케줄을 꿰고 있는 사생팬과 찍덕들은 등교 시간에 칼같이 맞춰 대기했다.
심지어 이슈가 있는 날은 기자와 인근 학교 학생까지 몰려 그야말로 비리 정치인 검찰에 출두하는 장면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
“어떻게 몰라.”
“아··· 그, 그렇구나.”
괜히 좋다 말았다.
“학교에는 어쩐 일이야?”
“누구 좀 만나러요.”
“누구?”
럽둥이들은 오탄을 등지고 숨었다.
오탄과 연우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으니, 당연히 연우와 럽둥이들은 시선을 주고받는 게 가능한 포지션. 서아가 어서 빨리 고백을 하라는 입 모양으로 연우를 압박했다.
잠시 망설이던 연우는 뭔가 결심한 듯 조그만 주먹을 불끈 쥐더니.
“오.빠.요?”
“나, 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둘은 이미 한번 고백을 주고받고 차인 사이다.
마치 25인 공대가 막보 앞에서 공략을 시작하기 1초 전의 비장한 표정을 짓는 연우를 보며 고백 타임임을 직감했다.
“저 오빠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요. 네?!”
‘왔다···.’
오탄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
“했다. 했어.”
“우리 막내 했네.”
“두구두구··· 과연 결과는?”
“끄윽!”
손에 땀이 맺혔다.
무려 대세 걸그룹 쪼꼬메보의 고백이다.
비록 미드의 빈곤함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유했지만, 톱티어 걸그룹의 구애.
한번은 깠지만, 두 번은 까기 힘들 것이다.
만약 두 번 깐다면 그건 남자로서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거나, 금단의 영역인 BL에 슬쩍 발을 담그기 직전의 상태.
“미··· 미안.”
뜻밖의 대답과 함께 오탄이 고개를 숙였다.
(헐!)
(미친.)
(쟤 레알 남자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님?)
(불쌍한 우리 막내. 짝남을 남자에게 빼앗기다니. 근데 살짝 호기심 생긴다. 탈의실에서 땀에 흠뻑 젖은 운동복을 벗고, 그. 남. 자와 함께 비누를 들고 샤워실에···.)
(쉿!)
해준은 귀와 뇌가 더럽혀지기 전에 태린의 망상을 끊어냈다.
다행히도 눈앞에 청춘 로맨스는 아직 ing중.
태린도 연우와 오탄의 입에 집중했다.
“왜요?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설마, 오빠 취향이 가슴 큰 여자예요? 그럼 제가 수술··· 아니, 오늘부터 우유 1리터씩 마실게요. 그러니까. 저랑 사귀.”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오탄이 두 손을 동원해 강한 부정을 했다.
“그럼요?”
(나 실은 포수 형을 좋아해. 듬직하고 남자다운 어깨에 반했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오탄의 입술에 태린이 셀프로 오디오를 입혔고.
(쫌!)
BL 드립에 모두가 눈을 흘겼다.
그때. 망설이던 오탄의 손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왜 손이 호주머니로 가?)
(뭐 꺼내는데?)
(뭐? 남친 사진?!)
(-_-)_-)_-)+
머쓱타드-
호기심에 럽둥이들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었다. 결국,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렸고.
우당탕-
“흐미!”
“깜짝이야.”
목을 쭉 빼고 고딩들의 말랑말랑 학교 청춘 멜로를 즐기던 럽둥이와 해준이 큰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아야야. 아프당.”
“누가 밀었어?”
“나 아니에요.”
골키퍼 선방 이후 골문 앞처럼 우당탕한 상황에서 오탄이 용케도 럽둥이를 알아봤다.
“누구?··· 헙! 러, 러블리엔젤?”
“하.하.하. 우,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화 마저 나눠요.”
별일 아니라는 듯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나무 뒤로 향해봤지만, 이미 꿀쨈 학원 청춘 로맨스는 60초 광고로 흐름이 끊긴 상황.
“기왕 이렇게 된 거 저쪽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죠!”
학교 뒤 으슥한 곳.
누군가 봤다면 천사처럼 예쁜 다섯 명의 일진녀가 190의 건장한 남자를 상대로 삥을 뜯는다고 증언했을 것이다.
해준은 일부러 뒤로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우리 연우가 왜 싫다는 거예요?”
노빠구 상여자 서아가 물었다.
“시, 싫은 건 아닌데요.”
“그럼 사귀면 되잖아.”
“그건 좀···.”
“왜? 집에서 정해놓은 정혼자라도 있어요?”
“아뇨.”
“남자 좋아해요?”
“네?! 나, 남자요? 아니요!”
“언닛!”
“아님 말고.”
“그럼 아무 문제 없잖아.”
“사겨라!”
짝-
“사겨라!”
짝-
한마음 한뜻으로 오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렸다.
마음이 없다가도 주변에서 ‘쟤 괜찮아 사귀어봐.’라고 푸시하면 호감이 생기기 마련.
그런데, 럽둥이가 우르르 둘러싸고 사귀라고 한다면?!
그것도 쪼꼬메보 연우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럼에도 녀석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미동이 없었다.
“짜식, 은근 고집 있네. 여자가 이 정도로 얘기했으면 못이기는 척 사귀어주고 하는 거지.”
“연우가 싫은 건 아닌데, 아직 때가 안됐습니다.”
“때가 안됐다니.”
“저··· 그게.”
망설이던 오탄이 아까 못 꺼낸 뭔가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코팅까지 한 손바닥 크기의 종이.
“으잉? 그게 뭐야?”
“뭔데?”
“말하기 좀 쑥스러운데··· 인생 계획표예요.”
“인생 계획표?”
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표를 받아든 태린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읽고 서아에게 넘겼다. 서아는 ‘이 새끼 뭐지?’ 하는 눈으로 오탄을 쳐다보며 민주에게. 민주는 귀엽다고 피식 웃으며 하린에게. 하린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당사자인 연우에게 넘겼다.
“!!!”
무려 14세에서 50세까지의 야구 인생 계획이 담긴 계획표.
14세 MLB 대비 영어 회화 공부 시작
17세 고교야구 주말리그 우승
20세 KBO 신인 드래프트 1순위 지명
21세 KBO 신인왕, 다승왕, 최우수 선수상 동시 석권
25세 MLB 진출
27세 올림픽 금메달 & 군 면제
28세 월드 시리즈 우승
32세 한국인 최다승, 최다 홈런 기록 작성
34세 국내 복귀, 결혼
35세 국내 리그 뛰면서 후배들에게 메이저 리그 시스템 전수
···
‘강적이다.’
어깨 너머로 계획표를 확인한 차해준도 혀를 내둘렀다.
녀석은 48세에 지도자가 되어 만년 꼴찌팀을 한국 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을 계획까지 모두 세워놓았다. 심지어 올림픽 메달과 군 면제도 깨알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치밀하네.’
“고교야구 주말리그 우승은 했고?”
“네. 작년에. 이것저것 개인상도 받고요.”
“대단하다.”
“그냥 계획표대로 열심히 하는 거죠. 뭐···.”
녀석은 마치 수능 만점으로 뉴스 인터뷰에 나오는 수험생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현재도 4번 타자에 1선발 투수.
고교 주말리그도 씹어먹는 수준이니 이대로라면 신인 드래프트 1순위도 무모한 계획은 아니다.
어쩌면 진짜로 투 머치 토커 찬호팍을 이을 위대한 선수가 될지도.
“이거 때문에 나··· 까인 거예요?”
연우가 울먹였다.
연애는 34세에 국내로 복귀해서 한다는 계획이 변함없는 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연우는 묵직한 매니저나 BL이 아닌 야구에 진 것이다.
고작 야구에.
“니, 니가 싫은 건 아냐.”
서둘러 연우를 위로하는 오탄.
“그럼 사귀면 되잖아요. 결혼이 34세지 연애가 34세는 아니잖아요.”
“···.”
연우의 날카로운 지적에 오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애초 의도는 결혼=연애였으나 어쩐지 반박 불가의 논리였다.
“오! 우리 막내 예리한데?”
“맞아. 그냥 순수하게 만나자는 건데. 누가 결혼하쟀나? 결혼은 34에 하든 43에 하든 그건 상관없고. 연애해.”
“막둥이가 싫지도 않다면서!”
럽둥이 언니들이 든든한 아군이 되어 지원사격을 해줬다.
궁지에 몰린 오탄.
사실 오탄도 연우가 싫은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작고 귀여운 외모에 가끔은 꿈에도 나오곤 했다. 다만, 지금은 야구가 우선이며 메이저 리그를 목표로 열심히 훈련하며 연애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만약 34살에 결혼할 땐 연우같이 예쁜 애가 신부라면 좋을 텐데···.’
넋을 잃고 아들, 딸 하나씩 낳고 알콩달콩 사는 장면까지 상상하던 오탄. 그의 입 끝엔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
“어어?! 조, 조심해요.”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경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
상상에 푹 빠진 오탄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화분이다.’
청소하던 학생이 창가에 있던 화분을 떨어트렸고, 곧장 럽둥이들이 서 있던 곳으로 유성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위험해!”
해준은 본능적으로 민주를 끌어안았다.
쏠로 럽둥이들은 알아서 몸을 피했고, 연우도 피하려는 찰나.
멍 때리고 있던 오탄을 발견했다.
“오빠 위험해요.”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적절하지 못한 비유지만, 연우는 야구공에 맞을뻔한 자신을 구해준 오탄을 위해 몸을 날렸다.
쪼꼬미의 뒤로 영화 보디가드 케빈 코스트너의 잔상이 보일 정도의 슬로 모션.
!!??
철푸덕-
쾅-
연우가 날렵하게 날아올라 오탄과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다친 사람은 없었고. 바닥에는 연우와 오탄이 서로 부둥켜안고 민망한 포즈로 누워있었다.
‘이게 바로 위기 뒤의 찬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