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22
21화. 제임스의 부탁(3)
***
제임스가 만든 와이너리는 훌륭했다.
포도를 착즙할 수 있는 커다란 착즙기와 생산한 와인을 담을 거대한 오크통.
착즙기는 와인을 만들 때뿐 아니라 포도씨와 올리브에서 식용유를 짜낼 수도 있어 다방면으로 유용한 기계 장치였다. 원시적이긴 해도 솜씨 좋은 제임스가 만들어 탁월한 성능을 냈다.
해준은 제임스와 약속한 와인 제조 공정에 바로 들어갔다.
포도를 넣고, 착즙기를 돌려 원액을 추출했다.
‘껍질과 씨는 나중에 식용유를 만들어야 하니까 따로 잘 빼놓고.’
만약 착즙기가 없었다면 일일이 씨와 과육, 껍질을 분리해야 하는 노가다를 해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얻은 원액을 발효, 숙성시켜 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버리고, 위쪽의 맑은 액만 따로 오크통에 담아 손쉽게 와인을 완성했다.
이제 남은 건 숙성되기만을 기다리는 것뿐. 적게는 수개월에서 수년 이상 숙성을 시켜야 하겠지만, 아마도 여기선 며칠이면 최상급 와인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차원의 농장은 그런 곳이다.
“킁킁~? 향이 죽이는군. 제대로 숙성되면 아주 맛있겠어.”
옆으로 뉘어놓은 오크통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던 제임스가 말했다.
어서 빨리 와인이 숙성되길 바라는 눈치. 그러나 그건 해준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일을 끝냈으니 거하게 마시러 가볼까. 이봐, 해준. 그럼 난 돌아갈 테니, 와인 숙성이 다 되면 그때 부르러 오라고.”
“잠깐, 제임스 아저씨. 또 의뢰할 게 있는데···.”
썬플라워 마당에 놓은 대기 손님용 의자와 테이블을 의뢰할 참이었다.
“나중에 하자고. 나중에. 지금은 술이 너무 먹고 싶어 못 견디겠으니까 말이야. 으하하!”
그러나 이미 술에 정신이 팔려버린 제임스는 내일 공방으로 찾아오라며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하는 수 없지. 하루 더 기다리는 수밖에.’
어차피 하루라고 해도 현실의 시간으로는 6시간 남짓.
제임스의 실력이라면 내일 가게 오픈 전까지는 충분히 만들 수 있기에 해준은 남은 농장 일을 처리하며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클로에. 나 대신 작물 좀 수확해줘. 난 여기서 식용유를 만들어야 하거든.”
“마침 오늘 아침에 식용유가 딱 떨어졌는데. 잘됐다. 밭은 걱정하지 말고, 식용유 만들어.”
“고마워. 수확할 수 있는 것만 수확하고, 빈 땅에 전부 밀을 심어줘.”
아무래도 매일 아침 샌드위치를 팔다 보니 밀가루가 꽤 많이 필요해졌다.
“응.”
“부탁해.”
클로에가 밭일을 하는 사이 해준은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씨와 올리브를 각각 압착해 당분간 쓸 식용유를 1병씩 얻었다.
꽤 많은 양을 압착했으나 막상 얻은 기름은 적었다.
‘기름으로 짜니까 생각보다 양이 적네.’
압착하고 남은 건 퇴비에 함께 섞었다.
여기에도 영양분이 많으니 더 질 좋은 비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사과 식초가 잘 발효됐을까?”
저번에 만든 식초 상태를 확인했다.
밀봉한 투병한 유리병 안으로 보이는 반투명한 노란색 액체.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뚜껑을 개봉했다.
아주 강렬한 시큼한 향기가 후각을 강타했다.
숟가락에 조금 덜어 맛을 보니 조금 전보다 더 강렬한 시큼함이 입과 비강을 통해 뇌에 짜릿한 충격을 줬다.
“크으, 시다. 셔.”
식초가 만들어졌으니 치즈를 만드는 것도 가능해졌다.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일이 진행됐다.
***
다음날.
“마지막에 레몬즙이랑 식초를 넣는다고?”
“응. 바닥이 타지 않게 이렇게 휘휘 저어주다가 하얀색 덩어리가 뜨면 이 천에 대고 걸러주면 돼.”
치즈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며 설명하자 클로에의 눈이 반짝였다.
우유가 몽글몽글 덩어리지는 걸 확인한 해준이 클로에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그녀는 해준이 시킨대로 천에 우유를 부어주고, 물기를 꼭 짰다. 투명한 물이 아래로 빠지고 남은 덩어리. 치즈였다.
“오, 신기하다.”
“할 수 있겠지?”
“응. 쉬운데?”
“가축 관리랑 버터, 치즈 만드는 걸 앞으로 계속 부탁해도 될까?”
“맡겨만 줘.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는 쉽지.”
“고마워.”
클로에가 있어 농장을 돌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베이커리 밖으로 나온 해준은 밭으로 향했다.
밭에는 그가 심어 놓은 작물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고, 포테가 그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다.
해준은 피식 웃으며 작물의 생장 상태를 확인했다.
밀, 양배추, 오이 등등 땀 흘려 심은 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어!? 여긴 왜 이렇지?’
해준의 시선이 밭 구석에 닿았다.
그쪽에 심은 밀만 유독 싹을 제대로 틔우지 못했다.
‘기분 탓인가? 분명 같이 심었는데···.’
그림자가 지는 것도 아니고, 물과 비료도 충분히 줬다. 그런데 유독 마지막에 심은 밭의 싹만 자라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해준이 물과 비료를 듬뿍 줬다.
땅을 툭툭 두드리며 잘 자라라는 말과 함께.
[해준 님! 오셨군요.]신나게 밭 위를 날아다니던 포테가 해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 하고 있었어?”
[움트는 대지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었죠. 막, 힘이 샘솟고 있습니다.]녀석은 몸통에서 자라난 줄기를 자랑하듯 보여줬다.
과연 녀석은 처음보다 윤기가 흐르고, 풍성한 잎을 가졌다. 그리고 포테가 힘을 되찾을수록 농작물의 수확량도 조금씩 많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해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참, 밭을 더 늘리려는데 어때? 더 많이 심으면 네 힘도 더 빨리 회복할 거 아냐?”
[흠, 그렇긴 합니다만, 이 이상 밭을 늘릴 수는 없어요. 지금이 최대치입니다.]“그게 무슨 말이야?”
뜻밖의 말에 해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든지 많이 심고, 많이 생산하면 좋은 거 아닌가? 처음에 그랬잖아. 농사를 지어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라고.”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온전한 힘을 회복하지 못했어요.]포테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해준의 레벨이 부족해 이 이상 밭을 늘리면 성장 속도 버프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마치 게임 상태창처럼 구현한 차해준의 정보엔 그런 것들이 담겨있었다.
레벨이 오르고 체력이 높아져야 많은 작물을 동시에 빠르게 키울 수 있으며, 기술 수치가 높아져야 양질의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저길 보세요. 제대로 자라질 못하잖아요.]포테가 유독 키 작은 밀을 보며 말했다.
“아, 그래서? 자라지 않은 건가.”
[맞습니다.]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원하는 대로 키워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마을이 열리고 작물의 숫자와 양을 급격하게 늘리다 보니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계획적으로 부지런히 심어서 생명력을 키워야 한다는 거구나.”
[넵~! 바로 그겁니다.]이제야 게임처럼 상태창으로 정보를 표시한 이유를 깨달았다.
“흠, 그럼 당장은 할 일이 없네.”
[그럼 이 기회에 농장을 재정비하는 건 어떠십니까?]“재정비라니?”
[농장이 너무 복잡해졌어요. 관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해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농작물을 생산하고, 건물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려 마구잡이로 지어놨더니 농장은 마치 난개발된 구도심처럼 정신이 없었다.
‘흠··· 그러고 보니.’
닭과 염소의 개체 수가 늘어나 더 큰 우리가 필요했고, 최근 심어 놓은 나무도 열매를 맺으면서 그 아래 자라는 식물들의 광합성을 방해했다.
확실히 농장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심이 선 해준은 팔을 걷어붙였다.
울타리 밖 공터의 자갈을 고르고 땅을 다진 후, 새롭게 울타리를 건설했다.
한쪽엔 암탉이 지내며 모이를 쪼아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 옆으로 염소들이 풀을 뜯을 수 있는 목장을 만들었다. 둘 다 방목에 가까운 형태로 넓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목장 옆으로 레몬, 올리브, 포도나무를 줄지어 옮겨 심었다.
“음,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보기 좋네.”
잘 정돈된 모습. 몇 시간 동안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다.
[근데, 어딘지 좀 휑하지 않나요?]“흠··· 그런가?”
[꽃도 좀 심고, 주변을 꾸미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꽃? 주변을 꾸민다고?”
[창고 주변에 꽃 좀 심고, 이쪽에 연못도 작게 파고, 일하는 틈틈이 쉴 수 있게 야외용 의자를 두면 딱 일 것 같습니다.]“너 행보관이냐?”
해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해, 행보관이라뇨?]“이건 마치 사단장님 방문에 맞춰 환경미화 시키는 행보관님 스멜인데.”
포테가 땀을 삐질 흘렸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의견이네.”
클로에를 위해 밤에 어둡지 않게 가로등을 설치해둔다거나, 돌길을 깔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기왕이면 나무 장식이랑 표지판 같은 것도 하고. 분수대, 시계탑 같은 걸··· 아예 이 기회에 농장을 마을처럼 꾸며?!···
‘하. 그건 너무 나간 건가?’
어찌 됐든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 살기 좋게 꾸미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준도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좋아. 결정했어. 농장을 좀 꾸미자.”
어차피 제임스의 목공소도 들러야 했기에 해준은 클로에와 함께 마을로 향했다.
수레 가득 감자를 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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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잡화점에 들러 감자를 팔았다.
현재 농장에서 생산하는 작물 중 가장 쓰임새가 적은 작물이 감자였다.
“너무 많아. 품질은 좋지만, 이렇게나 많은 양은 나도 취급하기 곤란하다고.”
잡화점 주인아저씨는 가져간 감자의 반만 구매했다.
반만 팔았는데도 30실버와 빨갛고, 노란 꽃을 제법 살 수 있었다.
기왕 가지고 나온 것이니, 남은 건 뇌물(?) 겸 제임스 아저씨에게 주기로 했다.
“좋아할까?”
“통감자 버터구이랑 웨지 감자가 술안주로 딱 이잖아.”
“큭, 그럼 엄청 좋아하겠네. 어? 저긴 가봐.”
클로에가 길 끝을 손으로 가리켰다.
회관 옆 작은 목조 건물. 간판에 톱과 나무가 그려진 걸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밖에서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문을 밀어보니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낮인데도 공방 안은 제법 어두웠다.
“제임스 아저씨, 계세요?”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입구에서 머뭇거리던 해준은 공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작업대. 쓰러져있는 의자 그리고···.
“아저씨!”
공방 구석에 쓰러져있던 제임스를 발견했다.
“으으으···.”
“혹시 나처럼 배고파서 쓰러진 거 아냐?”
제임스를 부축해 일으킨 해준 뒤에서 클로에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어쩐지 그녀의 말처럼 제임스는 퀭한 얼굴에 입술도 바싹 말라 있었고, 특유의 생기 넘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으으으··· 죽겠다.”
“왜 그러세요?”
“으으··· 몰라. 평소처럼 일을 끝내고 술을 마셨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려.”
얘기인즉슨, 제임스 아저씨는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한 결과 술병에 난 것이다.
공방은 어지럽혀진 건 평소 더럽게 썼을 뿐이고, 술에 취해 해롱거리다 그냥 쓰러졌다고 했다.
“풉!”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
“술을 얼마나 드셨길래 술병이 나셨어요?”
“별로. 평소처럼 맥주 20잔? 으으··· 속 쓰리다.”
“헐!”
바닥에 뒹구는 잔은 500cc 크기의 컵이다.
즉, 밤사이 10,000cc 맥주를 마신 셈이다.
‘엄청난 주량이다!’
놀란 해준에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제임스가 물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냐?”
“실은 아저씨께 의뢰할 일이 있어서요.”
현실 세계에서 쓸 테이블과 의자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현실 세계로 옮겨간다는 이야기는 빼고.
“무리야. 무리. 당분간 작업은 불가다. 혹시 모르지. 숙취가 해소된다면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안 돼.”
숙취 때문에 일을 못 하겠다니.
당장에라도 속을 풀어주고 작업대에 앉히고 싶었으나 북엇국, 콩나물국, 해장국 같은 숙취 해소 3대장 음식을 구할 수도 없는 터라 난감했다.
“널 보니까 생각나는 음식이 있어.”
“그게 뭔데요?”
“감자 수프. 찰스 그 친구가 해주는 감자 수프가 숙취 해소에 일품이었거든.”
“감자 수프? 그거면 되겠어요?”
“만들 수 있냐?”
“당연하죠.”
“으읏··· 부탁하마. 해장을 할 수 있게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