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31
30화. 돼지의 맛(1)
***
해준의 농장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완벽히 무시한 무시무시한 성장력.
주변을 거쳐 커다란 결계라도 있는 것처럼. 뭐든 땅에 심기만 하면 하루 이틀 만에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고, 그 땅에서 키우는 가축도 어마무시한 속도로 자라난다.
하스 씨도 처음엔 농장의 가공할 생산력에 경악했었다.
자세히 물어오지는 않았지만, 해준을 정령을 부리는 마법사쯤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해준은 이곳에서의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고, 하스와 미아는 흔쾌히 그렇겠다고 했다.
어쨌든 해준이 돌보는 차원의 농장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신비로운 능력이다.
그 덕분에 무한맵 미네랄처럼 작물이 계속 생산된다. 암탉이 몇 시간마다 달걀을 생산해내고, 염소도 산양유를 부족함 없이 공급해줬다.
이 엄청난 생명력이 독으로 작용할 줄이야.
“이런.”
해준은 서쪽 초목지를 누비는 검은 포식자들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어느새 60마리까지 늘어난 흑돼지 무리. 이젠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꿀꿀-
꿀꿀꿀-
꿀꿀꿀꿀-
녀석들은 아름드리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도, 배고프다고 울어댔다.
뭐라도 가져다주지 않으면 다시 밭을 침범해 손님용 농작물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해준은 당장 쓸모가 없는 올리브 나무를 서쪽 초목지로 대거 옮겨 심었다.
크헝- 크헝-
쩝쩝쩝-
올리브가 입에 맞는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아무래도 제임스 아저씨 말대로 해야겠어.’
어쩌면 오늘이 녀석들의 제삿날이 될지도 몰랐다.
***
마을의 중앙 광장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조금 걷다 보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 게리가 운영하는 푸줏간이 있다.
그 옆에 바로 붙어 있는 게 동생 네리의 가게. 입구부터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돼지 뒷다리를 보면 정육점이라 착각할만하지만, 실은 이곳은 하몽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다.
하몽(Jamón).
돼지 뒷다리의 넓적한 부분을 소금에 절여 서늘한 곳에서 오랜 기간 숙성시켜 얻을 수 있는 최고급 햄.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이지만, 실상 하몽을 만들기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일단 최상급 돼지 뒷다리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상품의 다리라도 어떻게 작업하느냐에 따라 상품성이 천차만별이다. 최상급 하몽을 얻기 위해선 잘 손질된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섭씨 0~4도의 서늘한 곳에서 염지를 해야 한다. 한 달 정도의 염지를 거친 뒷다리는 다시 깨끗이 세척해 바람이 잘 통하는 서늘하고 그늘진 천장에 매달아 약 2년을 정성껏 관리해야 비로소 하몽이라 불리는 최고급 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숙성 과정에서 자칫 실수라도 생기는 날에는 몇 달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에 무엇보다 까다로운 관리가 중요했다.
그리고, 게리의 동생 네리는 이 지난한 과정을 묵묵히 수행해 늘 최상급 하몽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이게 무슨 일이야!?”
하몽 숙성창고에 들어선 네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천장에 매달린 하몽 덩어리들이 죄다 상온에 노출돼 지방은 흐물흐물 흘러내리고, 먹을 수 있는 하얀 곰팡이 대신 푸른 곰팡이가 피어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히 온도를 차단해 서늘하게 유지했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일주일 후면 물건을 계약한 교역 상인이 방문한다는 것.
그때 넘겨야 할 최상급 하몽이 이 지경이라니!
털썩-
너무도 허망해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쩌지··· 형한테 부탁해볼까? 돼지 뒷다리 좀 구해달라고? 미친놈. 되겠어?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뒷다리를 다시 구한다 해도 일주일이면 염장도 끝나지 않았을 시점이다.
하몽이 아닌 생고기 상태의 뒷다리를 어떻게 교역상에게 넘기겠는가.
위약금을 물어줘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동안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돼지를 도축해달라고?”
마을로 내려온 해준은 곧장 게리 씨의 푸줏간으로 가 도축을 의뢰했다.
대가로 돈이든 돼지고기든 원하는 대로 주면 되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네.”
“몇 마리나?”
“그게 좀 많아서요. 일단 한 20마리쯤.”
“뭐? 그렇게나 많이? 어디서 축사라고 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니고, 마을 북쪽 농장에서 방목으로 키우고 있어요.”
“방목?”
방목이라는 말에 게리의 눈이 반짝였다.
“어려운가요?”
“어렵긴. 전혀. 그런데 그렇게 많이 잡아서 고기는 어디에 쓰려고?”
“아···.”
게리의 질문에 해준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개체 수가 너무 늘어나 골칫덩이인 돼지를 도축하는 것이지만, 고기를 어디에 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삼겹살, 목살은 가지고 나가서 꼭 구워 먹어야겠다. 꿀꺽···.’
삼겹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역시 삼겹살에 소주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다.
“뭐, 그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암튼 도축 대가를 지불하는 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마리당 50실버의 비용을 내는 것. 도축부터 정육 발골까지 깔끔하게 해주니 비싼 금액은 아니다.”
“흐헙!”
50실버라니.
20마리를 도축하려면 무려 10골드나 내야 한다.
그간 잡화점과 거래를 트고, 모아온 돈이 12골드.
‘골치가 아프네. 돼지 녀석들 완전 돈 먹는 괴물이구나.’
잠시 후회가 됐다.
포획했을 때 도축했더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터.
이미 서쪽 초목지에 60마리의 돼지가 있으니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비싸냐?”
“네··· 두 번째 지불 방법을 듣고 싶네요.”
“도축해주는 대가로 내가 필요한 부위를 넘겨주는 거지.”
두 번째 제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어떤 부위가 필요하신데요?”
삼겹살.
삼겹살만 아니면 된다.
뭘 특별히 만들겠다는 건 아니다.
그냥 클로에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맛을 보여주고 싶고, 현실로 가져가 썬플라워 직원들에게도 먹이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이다.
“여기.”
게리가 자신의 허벅지 뒤쪽을 팡팡 내리쳤다.
그리고는 가게 옆 하몽 가게를 손으로 가리켰다.
“내 동생이 하몽을 만들거든. 물론 그 녀석에게 하몽을 넘기려면 몇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하지만.”
“조건이라뇨?”
“네리 그 녀석. 뒷다리를 고르는 눈이 아주 까다롭거든. 암튼 네가 가져오는 돼지 품질이 좋아서 네리가 수락만 한다면 뒷다리를 갖는 조건으로 잡아줄 수 있지.”
“그건 자신 있습니다.”
어떤 돼지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원의 농장에서 키운 돼지인 만큼 품질이나 맛은 좋지 않을까 추측했다.
늘 그랬듯 말이다.
“마침 저기 오는군.”
게리의 손가락 끝엔 푸줏간 주인 게리와 비슷한 생김의 남자가 걸어왔다.
퉁퉁한 뱃살에 맨들맨들한 대머리의 사내.
그런데 어쩐지 남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왔냐. 네리.”
“어. 형.”
“마침 잘 왔다. 고객이 와서 네 이야기 중이었는데. 돼지를 도축하고 싶··· 너 근데 왜 이렇게 죽을상이냐?”
평소답지 않은 네리의 표정에 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 큰일 났어.”
“큰일이라니?”
.
.
.
“이런··· 사태가 그렇다면 정말 큰 일인데.”
하몽 사건을 전해 들은 게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엿듣기로 하몽의 온도조절 실패로 모두 못쓰게 망가졌다는 것 같았다.
‘온도조절이 중요한 음식이었구나?’
하몽이라하면 스페인 여행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있다.
실제로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만드는 과정은 언뜻 생각이 났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양의 돼지 뒷다리를 흰 소금에 절이는 광경이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려고?”
“몰라. 난 완전 망했어. 위약금을 몇 배로 물어줘야 할지도 몰라.”
혹시 자신이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명성이 오르고, 명성을 올리는 건 본인에게 큰 도움이 되니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있는 거라도 넘겨주면?”
“반도 안 돼.”
“작년에 만들어 놓은 건?”
“숙성이 덜 됐어.”
“흠···.”
게리가 난감하다는 듯 턱수염을 비비 꼬았고, 네리는 좌절했다.
연신 내쉬는 한숨에서 그의 고민이 전해졌다.
“계약을 지키지 못했으니 위약금을 물어주는 수밖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있는 만큼 넘겨주고, 나머지는 잘 사정해보자.”
게리가 동생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건 그렇고. 둘이 인사나 해. 여기는 손님. 그리고 이쪽은 아까 말한 내 동생.”
“처음 뵙겠습니다.”
해준은 네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에서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돼지를 도축하고 싶다더군. 대가는 뒷다리로 지불하고. 그래서 니가 흡족할 만한 물건인지 판단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몇 마리나?”
“스무 마리.”
“상태만 좋다면.”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지금 네리는 못 먹게 되어 버린 하몽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그런데 그 하몽이라는 거 제가 팔 뒷다리로 만들면 안 되는 건가요?”
“안되긴. 당연히 되지.”
‘그런데 왜 걱정이지?’
해준의 궁금증을 이해한 게리가 먼저 대답해줬다.
“그게, 하몽을 숙성시키는데, 시간이 꽤 걸리거든.”
“얼마 나요?”
“한 2년?”
“2··· 2년이요?”
그제야 걱정의 이유를 깨달았다.
뒷다리가 있어도 숙성 기간까지 고려하면 2년 후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당장 2주 후에 교역상이 방문한다고 했는데, 그때까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TV에선 금방이던데, 숙성이 오래 걸리는구나.’
거기까진 미처 몰랐다.
“그렇군요.”
“휴··· 어쩔 수 없지. 손실을 감수하는 수밖에.”
“그래. 잘 될 거야.”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돼지에 대한 건은 잘 해결됐다.
언제든 돼지를 가져오기만 하면 정육까지 말끔히 끝낸 고기를 내어주겠다고 했다.
푸줏간을 나와 돌아는 길에도 해준은 괜히 네리가 마음에 걸렸다.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
농장에 다다랐을 무렵.
해준은 절벽 아래 동굴에서 뭔가를 들고나오는 클로에와 마주쳤다.
“푸줏간에 다녀오는 거야? 어떻게 됐어?”
“아무 때고, 가져오래. 다리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잡아준대.”
“잘됐다.”
“근데, 그건 뭐야?”
해준이 접시 위의 하얗고, 노란 덩어리들을 보며 물었다.
“치즈.”
“치즈? 그런데 왜 그렇게 딱딱해졌어?”
“나도 잘 모르겠어. 저번에 만들고 남은 치즈를 동굴에 넣어 놨더니 3일 만에 이렇게 됐네.”
클로에가 만드는 치즈는 연질의 짙은 풍미가 특징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있는 이건.
‘굳었어. 아니, 숙성된 건가?’
향이 더 짙어지고, 딱딱해졌다.
치즈가 말랑말랑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숙성 과정에서 딱딱하게 굳어 강판에 갈아 음식 위에 눈꽃처럼 뿌려 먹는 치즈도 많았다.
어쨌든 치즈는 발효 음식이니까 이것도 더 숙성되는 과정에서 단단하게 굳은 것 같았다.
‘아!··· 그런가?’
불현듯 떠오른 기막힌 아이디어.
“클로에. 그것 좀 줄래?”
“응, 가져가.”
해준은 급한 대로 굳었는지 숙성됐는지 모를 치즈를 들고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노트엔 신선한 치즈나 버터를 만드는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하몽이나 숙성 치즈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자료조사.
서점으로 달려간 해준은 발효와 하몽에 대한 책을 몇 권 사서 썬플라워로 돌아왔다.
‘어쩌면··· 일이 손쉽게 풀리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