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60
59화. 야밤 식당(3)
***
<방울토마토 – B급>
<레몬 – B급>
<마늘 – B급>
<사과 – B급>
<루꼴라 – B급>
<파프리카 – B급>
<달걀 – B급>
<산양유 – B급>
···
차해준은 지금까지 재배에 성공한 B급 작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에 좋은 거지?’
막상 재배에 성공은 했지만, 먹어도 어디에 좋은지 알 수는 없었다.
B급 식재료 중 효능을 몸소 체험한 건 전복이 유일했으니까.
“그냥 맛만 더 좋은 걸까?··· 분명 숨겨진 효과가 있을 거 같은데.”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주방 직원들보다 더 일찍 출근한 민주가 해준에게 다가와 물었다.
“민주야. 몇 시인데 벌써 출근했어?”
“일찍 나와서 모닝커피 한잔하려고요. 오빠도 마실래요?”
“좋지. 난 따아.”
“잠깐만 기다려요.”
민주가 커피를 추출하는 사이, 해준은 조리대 위에 깔아둔 B급 식재료를 따로 모아 잘 보관했다.
이것저것 실험할 게 많았다.
“여기요.”
“고마워. 근데 요즘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해?”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요. 제가 원래 부지런한 타입이잖아요.”
해준과 둘이 잠시라도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찍 나온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할 수 없다.
요즘은 직원도 많아졌고, 가게도 워낙 바빠 제대로 얼굴을 볼 시간도 없다. 기껏 브레이크 타임에 밥 먹을 때 보는 게 전부.
‘근데 해준 오빠는 요즘 더 멋있어졌다.’
처음과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벽화를 그리겠다며 찾아왔을 땐 그냥 선한 인상의 동네 오빠 같은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남자답고 훈훈해졌다고 해야 할까. 덩치도 커지고, 키도 커진 것 같다. 그 밖에도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변화가 많았다.
그리고 민주의 마음도.
‘잘생겼어.’
민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해준을 몰래 훔쳐봤다.
나름대로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데, 해준이 그 신호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 같다.
그렇게 무던한 것도 해준의 매력 중 하나. 민주는 괜히 커피잔을 입에 대고 배시시 웃었다.
“뭘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요. 그냥. 근데, 오빠. 요즘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어요?”
“피부가?”
“네. 혹시 저 몰래 피부 관리받아요?”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민주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피부를 손끝으로 만졌다.
“그런가?”
“네. 피부도 뽀얘진 거 같고, 맨질맨질한데요.”
민주가 똘망똘망한 눈을 해준의 얼굴 앞에 확 들이밀며 말했다.
‘윽, 너무 가까워.’
창피해진 해준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덩달아 민주도 볼이 빨개져 쓸데없이 커피 머신을 만지작거렸다.
주방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크흠.”
“······.”
뻘쭘해져서 괜히 뺨을 긁적였다.
매끈하고 부들부들한 감촉. 그러고 보니 피부가 조금 좋아진 것 같다.
최근 간간이 수확하는 B급 식재료 몇 가지를 놓고, 자신의 몸을 모르모트 삼아 실험에 돌입했다.
전복은 이미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능을 보였지만, 방울토마토와 사과, 몇 가지 샐러드 채소류는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몸으로 체험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 B급 레몬 몇 개를 섭취했는데, 민주에게서 피부가 좋아졌다는 이야길 들었으니.
‘B급 레몬은 피부를 좋아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걸까?’
그동안 차원의 농장을 오가며 밭을 일구느라 피부가 검게 그을리고, 까칠해져 있었었다.
갑자기 피부가 좋아졌다면 분명 그건 레몬의 효과.
‘좋은 효과를 가졌네.’
B급 레몬을 다량 수확할 수 있다면 피부 트러블로 고민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비밀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겠지만.
어쨌든 해준은 B급 레몬을 수확하는 대로 따로 모아두기로 했다.
청을 담가 직원과 단골손님들에게 나눠주면 호응이 좋을 것 같았다.
“일하는 건 어때?”
“재미있어요. 이쪽 일이 체질에 맞나봐요. 헤헤. 근데, 오빠는 왜 TV 출연 거절하신 거예요?”
TV 고정 출연은 어설프게 너튜브에 한번 나가는 것과는 결이 다른 파급력을 지녔다.
더군다나 장일수 피디는 웰메이드 예능을 만들기로 유명한 피디. 만드는 프로그램마다 시청률이 높아 방송인은 물론이며, 일반인도 어떻게든 출연하고 싶어 한다.
넝쿨째 굴러온 행운을 걷어차 버렸으니 민주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잖아. 그거 촬영하면 더 시끄러워질 텐데. 주변에 민폐야. 장사도 지금이 딱 좋아.”
이곳 썬플라워에서는 어떤 촬영도 응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차원의 농장이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몰랐으니.
‘만약 여기가 아니라면 생각해보겠지만.’
“아깝다.”
“왜?”
“그냥··· 했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오빠 요리할 때 은근 멋있거든요.’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다.
해준이 요리에 집중할 땐 은근 섹시한데, 최근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져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방송에 출연하면 그 모습을 두고두고 볼 수 있으니까.
민주는 은근 해준의 방송 출연을 원했다.
“슬슬 준비할 시간이네. 이제 이, 일할까?”
“네.”
민주의 뺨이 또 발그레 달아올랐다.
***
그날 저녁.
장사를 마친 해준은 서둘러 차원의 농장으로 들어갔다.
농장 시간으로 36시간 전에 심어 둔 콩과 고추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시간이 좀 걸리네.’
씨에서 새싹이 발아했을 때, 낙엽을 긁어 만든 거름을 줬다.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에는 달걀 껍데기와 식초를 섞어 만든 천연 칼슘제까지 뿌려주며 관리했다. 현실 세계라면 비싼 비료를 뿌리겠지만, 여기서는 불가능하므로 뭐든 직접 만들어 써야만 했다.
애지중지 키운 콩과 고추, 이 녀석들이 장을 담그기 위한 과정 중 첫 번째였다.
“해준, 그게 다 뭐야?”
창고에서 닭과 염소 모이로 줄 밀과 양배추를 꺼내 가던 클로에가 밭에 심어둔 콩과 고추를 보며 물었다.
“멀비어 선장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씨앗이야. 고추랑 콩.”
“콩? 콩은 마을 잡화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잖아.”
“이건 좀 특별한 품종이야.”
이곳 마을 주민도 콩을 먹지만, 두부나 메주를 만들 때 쓰는 백태가 아닌 풋콩이나 완두콩 따위를 식사와 함께 먹는다.
해준이 멀비어 선장에게 전서구까지 띄우며 어렵게 구한 건 백태와 고추. 이번에는 선물이 아닌 정식 의뢰였으니 품종당 10골드씩 20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하고 구한 귀한 녀석들이다.
클로에는 신기한 듯 열매를 맺고 있는 고추를 쳐다보았다.
“이건 이름이 뭐라고?”
“고추.”
“고추? 채소야?”
“응.”
“그냥 먹어도 돼?”
“생으로 먹어도 되지. 근데, 나라면 안 먹을 거···.”
삼겹살과 함께 쌈장에 푹 찍어 쌈 재료로 먹으면 매콤하니 맛이 좋지만, 아무것도 없이 생으로 먹는다면 고추만 한 벌칙이 또 없을 거다.
너무 매워서 그냥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던 중 느닷없는 클로에의 돌출행동.
와삭-
개중에서 작고 단단한, 그래서 엄청 매워 보이는 녀석을 골라 입에 넣었다.
클로에 딴에는 수확 전 작은 열매를 먹어보겠다는 의미였겠지만, 하필이면 고추를 먹는 한국 사람의 눈에 가장 매워 보이는 고추를 골라 먹다니!
‘왜 셀프로 벌칙을 수행하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해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
“맛있는··· !!??··· 쓰읍, 하악! 매, 매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강력한 매운맛에 클로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부채를 부쳤다.
씹던 고추를 뱉어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캡사이신 성분이 혀를 마비시키고, 강력한 통증을 선물했으니까.
“물. 물. 물!”
“물 말고, 산양유를 마셔. 그게 더 효과가 좋아.”
해준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산양유? 윽, 나 먼저 간다.”
허둥지둥 얼음동굴로 뛰어가는 클로에,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애처로웠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마침내 콩과 고추가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자랐다.
대략 40시간쯤 걸린 듯했다.
해준은 부지런히 콩과 고추를 수확했다.
빈 땅에 거름을 새로 뿌려주고, 멀비어 선장에게 선물로 받았던 커민, 정향, 계피, 고수 같은 향신료도 모조리 하나씩 심었다.
당장에 썬플라워에서 쓰지 않아 창고에 모셔뒀지만, B급 식재료 키우기에 도전 중이기에 이것저것 다 심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저 향신료의 조합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새로운 작물을 심은 후 본격적인 장 만들기에 착수했다.
우선 콩을 모아 물에 담갔다. 몇 시간 물에 불려 삶아야 메주를 만들 수 있으니 미리 준비했다.
다음으로 수확한 홍고추를 그늘과 볕에서 번갈아 말려 태양초 만들기에 도전했다.
갓 수확한 홍고추를 조금 맛보니 입술에 얼얼한 기운이 돌면서도 입안에는 은은한 단맛이 풍겼다. 잘 말려서 빻으면 좋은 품질의 고춧가루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콩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콩을 삶기 위해 농장 식구들과 가끔 삼겹살을 구워 먹는 화덕에 커다란 무쇠솥을 올렸다.
그 안에 깨끗하게 씻어 불린 콩을 옮겨 담고, 푹 삶았다.
약 2시간 정도 삶아주니 으깨질 정도로 삶아졌다.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온 뭉치에게 한 줌 주니 아주 잘 먹었다.
“커피콩도 잘 먹더니, 이 콩도 잘 먹네. 이건 소화 잘 될 거다.”
“야아옹~.”
커다란 대야에 물기 뺀 콩을 담고, 으깨 벽돌 정도 크기로 성형했다.
그럴듯한 메주가 완성됐다. 볏짚 대신 밀짚으로 메주를 엮어 창고 처마 밑에 매달았다.
“으읏··· 허리 아파.”
이제 겨우 메주 만드는 과정에 도달했으나, 노가다에 버금가는 노동 강도에 절로 신음이 흘렀다.
차원의 농장에서는 피로감이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통증까지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20개의 메줏덩어리를 보니 뿌듯했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터.
“잘 떠져라. 메주야.”
.
.
.
해준은 썬플라워와 농장을 오가며 며칠 동안 장 담그기에 매달렸다.
홍고추는 바짝 말려 태양초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가루를 내서 고춧가루를 만들었다.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고춧가루와 밀가루, 메줏가루와 소금, 설탕, 쌀을 고아 만든 물엿과 엿기름을 넣고 섞어주기만 하면 된다.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재료만 있으면 금방이구나.’
된장도 마찬가지다.
메주까지의 과정이 어려울 뿐, 담그는 과정은 쉬웠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항아리 뚜껑을 여닫으며 관리해주는 과정이 까다로웠다.
현실에서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여긴 차원의 농장이고 해준에게는 대지의 축복과 뭐든지 숙성이 가능한 동굴이 있었다.
***
해준이 장 담그기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SBC 9층 예능국 회의실은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 회의가 한창이었다.
피디인 장일수와 메인 작가 신미영 그리고 서브 작가가 된 오지은과 새로운 막내 김슬기. 다섯 명이 회의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피디님. 이제 셰프 빨리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메인 작가가 장일수를 은근히 압박했다.
편성 관계상 최소 3주 후에는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셰프와 촬영할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똥줄이 탄 것이다.
차해준 셰프에 꽂힌 장일수 피디가 그간 몇 번이나 썬플라워를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하는 통에 셰프 자리가 아직 공석이었다. 그러나 이제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다.
“식당 개조도 해야 하니까 이제 스케줄 빠듯해요. 이런 셰프들은 어때요?”
신 작가는 따로 알아본 셰프 리스트를 장일수에게 들이밀었다.
나름 참신한 얼굴로 추린 목록. 그러나 그걸 읽는 장일수는 심드렁했다.
“네. 알겠어요. 참고할게요.”
“피디니임~.”
“알았다니까요.”
“차해준 셰프는 텄어요. TV 출연 꺼린다면서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지은의 말에 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느낌이 뭐랄까. 딱히 TV 출연이 싫다기보다는···.”
“싫다기보단?”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게 부담스러운 것 같았어요.”
“왜?”
“거기가 주택가니까.”
“그럼 완전 나가리네. 우리 콘셉트가 야밤에도 특별한 손님을 위해 계속되는 야밤 식당인데.”
가만히 앉아 설왕설래 회의 내용을 듣던 막내 슬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차해준 셰프를 출연시키고 싶으면 연남동 조용한 골목에 몇 달만 임시로 빌려 가게를 세팅하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생각을 말했다.
“저··· 그냥 매장이 노출되는 게 싫으면 음, 따로 가게 세팅해서 촬영하면 안 돼요?”
장일수와 나머지 스태프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왜 그토록 간단한 생각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