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63
62화. 야밤 식당(6)
***
야밤 식당 첫 미팅 날.
해준은 지하철을 타고, 삼청동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식당은 주택으로 쓰던 한옥을 개조해 만들어서 꽤 분위기가 좋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제작진이 해준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해준 씨.”
“오셨어요?”
“오디오 감독님. 차해준 셰프님 마이크부터 채워주세요.”
장일수 피디 뒤로 보이는 10여 대의 카메라가 해준의 등장부터 자연스레 촬영했다.
마이크를 찬 해준이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있으니 곧, 윤여진과 이서준이 순서대로 도착했다. 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올해로 71세가 된 여진은 나이보다도 훨씬 젊어 보였다.
‘역시 연예인은 다르구나.’
“오랜만이에요. 우린 저번에 봤죠?”
여진과 인사를 나눈 후, 일전에 식당 손님으로 안면을 튼 서준이 먼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인상과 웃을 때마다 보이는 깊게 팬 보조개가 인상적이다. 첫 만남엔 멀리서 가볍게 눈인사만 했던 탓에 가까이 실물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죠. 요 며칠은 좀 그랬지만.”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셰프님은요?”
“저야 늘 똑같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방에 있었습니다.”
차원의 농장에서 농사도 짓고, 낚시도 하며 때론 뭉치와 함께 바닷가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신기한 경험을 썰로 풀면 3박 4일은 족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해 조금은 아쉽다.
“어머. 둘은 아는 사이야?”
여진이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조금요. 우연히 식당에 밥 먹으러 갔었어요.”
“그것도 인연이다. 우리 셰프님 유명하신가 보네요.”
“엄청 맛있어요.”
“그래? 뭘 파는데요?”
“경양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돈가스 같은 걸 파는.”
“돈가스? 어머, 맛있겠다. 우리 젊었을 때는 그런데 자주 갔었는데.”
“나중에 한 번 들르세요. 맛있게 튀겨드릴게요.”
“그럴 거 있나? 촬영하면 자주 볼 텐데. 그때 해줘요.”
“그래도 되겠네요. 하하.”
“호호.”
첫 만남에 분위기가 괜찮다.
카메라 뒤에서 출연자들을 본 장일수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좀 친밀해지면, 케미가 좋겠어.’
끼이익-
그때, 대문이 열리며 마지막으로 등장한 김혜리.
선배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모습에 당황하며 허둥지둥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샵에 들렀다가 오느라.”
데뷔 10년 차.
음방 녹화장에서는 후배들의 인사를 받는 까마득한 선배지만, 여기선 제일 짬이 안 된다.
“아니야. 우리도 금방 왔어.”
“그래, 얘. 우리가 일찍 온 거지. 딱 제시간이야.”
“제가 막낸데 그래도 가장 먼저 와야죠. 다음부턴 일빠로 오겠습니닷!”
“막내? 막내는 너 아닌데?”
“저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여기 셰프님.”
이서준이 해준을 소개해줬다.
“오~ 훈훈한 스멜. 안녕하세요, 핑키데이 혜리예요. 아시죠? 차트 역주행.”
“처음 뵙겠습니다. 차해준입니다.”
“우리 셰프님 짱 잘생겼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다섯입니다.”
“근데 진짜 셰프님 맞아요? 주방에서 썩기엔 너무 페이스가 너무 아까운데. 하긴 그러니까 방송에 섭외돼서 출연하는 건가?”
“자자, 인사는 그쯤 하시고, 자리에 앉으시죠.”
소란스러운 자리를 장일수가 나서서 정리했다.
네 명이 테이블에 앉자 소갈비 찜과 겉절이, 잡채 등 정갈한 한정식이 세팅됐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장일수가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냈다.
“촬영 장소부터 이야기할게요. 가게는 연남동에 작은 구옥을 빌렸어요. 거기를 예쁘게 리모델링해서 촬영을 할 생각입니다.”
야밤 식당 촬영은 2주에 한 번. 해준의 사정을 고려해 매주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진행하기로 했고, 하룻밤 동안 촬영한 내용을 편집해 60분 편성 2회분 방송을 만든다고 했다.
“재료도 우리가 다 준비할 거니까 차해준 셰프님은 따로 준비할 게 없습니다. 편하게 오셔서 요리에 집중해주시면 돼요.”
“방송 분량은 여기 윤여진 배우님이랑 이서준 배우, 혜리 씨가 잘 리드할 거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장일수의 설명이 끝나자 신미영 작가가 말을 덧붙였다.
방송 초짜인 해준의 걱정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재료는 제가 준비할게요.”
“번거로우시잖아요.”
“아뇨. 제가 만드는 음식 재료는 항상 직접 하는 편이라 그게 더 좋습니다. 가게에서 연남동으로 재료 운반만 도와주세요. 제가 차가 없어서.”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미리 손질하시는 건 안 돼요. 준비하는 과정도 몽땅 촬영해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막내 작가가 신 작가와 해준의 대화 내용을 빠르게 타이핑했다.
“그래도 양념이랑 장류 정도는 저희가 준비해야겠죠?”
“그것도 제가 직접 준비할게요.”
된장, 간장, 고추장을 시작으로 한식에 들어가는 양념 모두 만들 수 있다.
어설프게 시판용 양념을 쓰면 맛이 확 떨어지니, 번거롭더라도 해준이 촬영에 쓸 양념, 재료를 모두 준비하는 것이 맛의 퀄리티 유지에 좋다.
“양념까지요? 프로그램 촬영하다 보면 한식 메뉴가 더 많이 나올 텐데.”
“어쩌다 보니 한식에 들어가는 장도 담그게 돼서요.”
“경양식당 한다고 안 했어요?”
윤여진이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장을 담가요? 그거 굉장히 어려운 건데.”
“관심이 있어서 여기저기 레시피를 찾아서 해본 거예요.”
“대단하다. 우리 피디님이 유능한 셰프를 섭외했네.”
“그럼요. 안 하시겠다는 걸 몇 번을 찾아가서 겨우 설득한 겁니다. 어휴~ 그때만 생각하면.”
장일수가 서운함과 장난이 섞인 투로 말했다.
어쨌든 프로그램에서 만드는 모든 음식의 재료는 해준이 준비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우리도 역할을 나눠야 하는 거 아냐?”
이서준이 장일수 피디를 슬쩍 보며 물었다.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이 앞장서 역할을 분담했다.
“윤 선생님은 셰프님을 도와서 함께 주방을 맡아주시는 게 어때요? 가장 밝은 혜리가 손님 받고.”
“그럼 오빠는 뭐 하게요?”
“나? 난 설거지랑 잡일 담당. 바쁠 때는 서빙도 도와주고.”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사실 제작진도 미리 염두에 두고 있던 역할 분담이다.
요리는 해준이 잘하더라도 프로그램 특성상 인생 상담도 해줘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건 가장 연장자인 윤여진이 담당해야 할 부분. 밝은 에너지를 가진 혜리가 손님을 응대하고, 서진은 여기저기 부족한 곳을 땜빵해주는 체제가 가장 안정적이다.
“촬영 끊을게요.”
결과에 만족한 장일수 피디가 크게 외쳤다.
이제 장소를 옮겨 두 번째 촬영을 할 차례.
“잠깐 쉬셨다가 연남동으로 모여주세요. 인테리어 끝났으니까 본 촬영 전에 좀 둘러보시죠. 막내야. 매니저한테 촬영장 주소 좀 쏴줘.”
“네, 피디님.”
“해준 씨는 차 없으시죠? 저희랑 함께 가요.”
“그렇게 하시···.”
“잠깐. 그러지 말고, 내 차로 가요.”
이서준이 끼어들었다.
***
오전에도 오줌발이 시원치 않았던 이서준.
찝찝한 기분을 감추고 촬영 내내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은 영 불편했다.
‘오늘은 꼭 물어봐야지.’
될 수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곳에서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촬영장은 수십 명의 스태프가 함께했고,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으며, 심지어 몸에 차고 있는 핀 마이크 덕분에 조용한 숨소리마저도 믹서를 들고 있는 오디오 감독의 귀에 고스란히 흘러 들어간다.
눈치를 보던 그에게 찾아온 절호의 찬스.
“저희랑 함께 가요.”
“그렇게 하시ㅈ···.”
“잠깐.”
이동 중이라면 마이크도 카메라도 스태프도 없다.
함께 차에 타기만 한다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은근슬쩍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터.
매니저 경식이야 입이 무거운 녀석이니 알아도 이야기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친구 이야기라고 대충 둘러대고 물어보자.’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운 서준이 친한 척 차해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내 차로 가요. 스태프들 차는 좁고, 불편하잖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우리끼리도 좀 친해져야 하고, 그쵸 감독님?”
“당연하죠. 연남동에서 뵐게요.”
이서준은 해준을 떠밀다시피 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꽉 막히는 시내를 뚫고, 내부순환로에 막 차를 올렸을 즈음. 서준은 차해준의 썬플라워 음식 맛을 칭찬하며 친근하게 다가갔다.
“···내 친구 중에서도 그 가게 단골이 은근히 있더라고.”
워낙 많은 손님이 오가는 곳이 썬플라워다.
그러니 일일이 단골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
“나도 그날 음식 먹고 완전 차 셰프 팬 됐잖아.”
“감사합니다.”
“암튼 그 친구 얘긴데···.”
서준이 목소리를 낮춰 본론을 꺼냈다.
룸미러로 힐끗 뒤를 확인한 경식이 운전석 오디오 볼륨을 올렸다. 사담을 엿듣지 않겠다는 무언의 행동. 경식의 이런 센스가 오랜 시간 서준의 매니저로 일하게 된 이유다.
“걔가 평소에 오줌 줄기가 약하거든. 알지? 중년 남성의 전립선 문제.”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과거에 인기 있던 트로트 가수가 선전하는 전립선 약 광고를 흔하게 볼 수 있기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하나··· 고민하던 중에 차 셰프 가게에서 토마토 파스타를 먹었는데, 그 이후에 오줌이 콸콸콸- 알지? 콸콸콸. 막 폭포처럼 시원하게! 그렇게 봤다는 거야. 그래서 토마토 때문인가 싶어 대놓고 먹었는데, 그 이후에 또 쪼르르. 그래서 걔가 고민이 크대. 내가 오늘 차 셰프를 만나러 간다니까 자긴 창피하다고 대신 물어봐 달라더군. 혹시 파스타 재료 중에 전립선에 좋은 뭔가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냐고.”
얘기를 듣던 해준은 무릎을 탁 쳤다.
“아!···”
“아? 왜?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
B급 토마토의 효능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전복이 피로 해소, 레몬은 피부 미용에 효과가 있다면, 토마토는 중년 남자의 전립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신체 건강한 스물다섯의 차해준이 섭취를 했으니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느끼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그랬구나.’
“말 좀 해봐.”
서준이 재촉하며 물었다.
유난히 눈을 반짝이는 서준을 보며 차해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서준 배우는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몇 주 동안 알고 싶었던 비밀을 알아낸 자신보다 더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설마. 친구가 아니라 이서준 배우에게 문제가 있는 거였나?’
100%다.
해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B급 토마토로 파스타를 만들어 판 건 이서준이 온 그날밖에 없었다.
“빨리.”
“음··· 일단 별다른 재료가 들어간 건 없어요.”
“아아, 그래?”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분위기가 급격히 차분해졌다.
“토마토 말고는.”
“!?···”
토마토가 남자 전립선에 좋은 음식이라는 건 아시죠?”
“그럼. 내가 얼마나 조사를 얼마나··· 아, 음··· 친구가. 암튼 그래서 토마토도 시켜 먹어봤다니까. 그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어.”
이야기의 시점이 자꾸만 뒤섞인다.
‘역시 사연의 주인공이 이서준 배우 본인이었네.’
해준도 토마토의 효과에 대해 공부하다가 우연히 전립선에 관한 글을 읽었다.
현실 세계에서 재배한 토마토도 1년 이상 장복하면 전립선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제 토마토는 라이코펜 성분이 다른 품종보다 월등히 들어 있어요. 그래서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대충 현실의 과학과 접목해 이해를 시켰다.
차원의 농장에서 B급 작물을 키워냈고, 그 식재료를 섭취해 나타난 효과라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했으니까.
“그것 좀 나한테 팔아줘.”
“근데, 그게 아주 귀한 거라서 구하기 쉽지 않아요. 연구용으로 소량 재배된 건데, 언제 또 구할 수 있을지 몰라요.”
“···.”
금세 시무룩해졌다.
“요즘 힘드세요?”
“죽겠어. 화장실 갈 때마다 곤욕이라니까.”
친구 이야기는 어느새 쏙 들어갔다.
“차 셰프한테 가능성을 두고 있었는데··· 꽝이네.”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서준의 절박한 얼굴을 보니 그냥 넘어가기 안쓰러웠다.
“배우님. 주소 하나 적어주세요.”
“주소? 무슨 주소?”
“배우님 집 주소요. 토마토 얻게 되면 배우님께 보내드릴게요.”
“지, 진짜?! 혹시라도 구하게 되면 꼭 좀 부탁해. 돈이라면 얼마든지 낼 테니까.”
해준의 손을 움켜쥐는 이서준의 행동에서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돈은 됐어요.”
“고마워. 진짜···. 크흡. 그리고, 배우님이 뭐야. 이제부터 형이라고 불러. 이제부터 넌 내 동생이다.”
차해준은 토마토 하나로 이서준과 의형제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