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78
77화. 옆집 할아버지(1)
***
‘괜찮은데?’
강호철은 상황실 구석에 앉은 민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유심히 뜯어봤다.
어딘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6시간 전.
회사 대표와 실장급 이상 매니저들이 모여 열띤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안건은 3개월 후에 런칭할 신인 걸그룹 멤버 구성.
10여 장의 사진을 테이블 위에 펼쳐둔 JH 미디어의 김정후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이번 걸그룹 컨셉이 엔젤인데, 비주얼 센터가 너무 약한 거 아냐?”
핑키데이가 역주행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며, 기사회생한 JH.
이 기회에 후속 걸그룹을 데뷔시켜 회사 규모를 메이저 3사를 위협할 정도까지 키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지만, 멤버 구성에 애를 먹고 있었다.
“왜요. 서아 괜찮잖아요.”
“부족해. 예능감도 있고, 나름대로 매력은 있는데, 비주얼 센터 감은 아냐.”
“저희 연습생 풀에서는 걔들이 제일 난데.”
“맞습니다. 이미 녹음도 거의 끝난 상태인데, 멤버를 교체할 수는 없어요.”
“교체 말고 추가는 어때? 러블리엔젤이라는 이름에 맞게 천사 같은 외모로 중심을 딱 잡아줄 비주얼 센터가 필요해. 한 명 더 합류시켜서 5인조로 데뷔시키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세팅이 끝난 상태에서 멤버를 추가하려면 노래 파트며 안무 동선까지 수정해야 할 게 너무 많아진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새로 캐스팅하자는 말씀이세요?”
“비주얼 센터를 석 달 만에 어디서 찾아내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강호철이 투덜거렸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김 대표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예중, 예고 싹 훑어봐. 어디서 한 명은 튀어나오겠지.”
***
‘진짜 튀어나왔네.’
생각도 못 한 곳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
캐스팅을 위해 온종일 예중, 예고, 아카데미를 쑤시고 다녔다.
머리도 식힐 겸 부상에서 회복한 혜리를 위로차 방문한 촬영 현장에서 보석을 발견할 줄이야.
청순한 외모다.
살짝 보이는 인디언 보조개가 인상적이며, 웃을 때마다 주변을 밝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봐야 알겠지만, 화면도 잘 받을 것 같다.
‘근데 누구지? 스타일리스트? 아니면 스태프? 설마, 이서준 배우 소속사 신인은 아니겠지? 그럼 곤란한데.’
때마침 촬영이 중단됐다.
호철은 여자가 나가자 다급하게 따라 나가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왜··· 왜 그러시죠?”
해준을 보러 가려는 데 낯선 남자가 민주를 붙잡았다.
“다른 게 아니고. 저 김혜리 씨 소속사 매니저 강호철이라고 합니다.”
호철은 최대한 선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키 189에 몸무게 120의 거구였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늘 경계를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누구 따라오셨어요?”
“차해준 셰프님이요··· 썬플라워 직원이에요.”
“그렇구나~. 나이가? 혹시 미성년자는 아니죠?”
“스무 살이에요.”
“대학생?”
“네. 홍화 대학교 다녀요.”
“그래요? 전공은?”
“미술이요.”
“홍대 미대? 와~ 딱 좋다. 혹시 연예인 관심 있으세요?”
간단한 신상 조사를 끝낸 호철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본론부터 훅 꺼내야 사람을 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네?”
“연예인이요. 가수. 걸그룹 같은 거.”
“아!···”
그동안 기획사 캐스팅 매니저의 명함을 받지 않아봤다면 거짓말이다.
카페 알바를 할 때도, 효정과 미술용품을 사러 홍대에 갔을 때도 연습생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당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시 비용이며,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민주에게 연예인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타고 난 몸치라고 해야 할까? 유연성도 부족해 춤도 잘 못 추고, 노래 실력도 별로다.
“너무 예쁘셔서요. 저희가 마침 걸그룹을 준비 중인데, 비주얼 센터가 필요해서요. 그쪽이 딱 이미지에 맞을 것 같은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거절을 해왔다.
“좋은 기회인데, 심사숙고하시지 듣자마자 까는 게 어디 있어요?”
호철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저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춰요.”
“일단 오디션은 보겠지만, 비주얼 센터는 그런 거 중요하지 않아요. 노래는 튠으로 만지면 되고, 안무도 동작만 맞추면 돼요. 아, 그렇다고 우리가 보컬이나 안무 트레이닝을 안 해준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전···.”
정중히 거절하려다 문득, 효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 사장님 이러다 엄청 유명해져서 막 여자 연예인이랑 사귀는 거 아냐?
그러면서 누가 낚아채 가기 전에 빨리 도장부터 찍으라고 했다.
물론, 도장을 찍고 커플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오늘 촬영장 구경을 와서 보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메이크업, 헤어 담당 스태프나 의상 코디네이터, 작가··· 여자가 많아도 너무 많다.
‘다 예쁘고, 화려해.’
직업이 직업인만큼 다들 화려하게 꾸몄다.
‘살짝 불안한데···.’
이서준도 말했듯 이제 차해준은 유명인이다.
첫방에 호감도도 부쩍 올라갔고, 민주가 꾸준히 별스타를 관리해주는 덕에 훈남이라는 호의적인 댓글과 좋아요도 제법 눌리는 편.
‘나도 뭐라도 해야 하는 걸까?’
“여, 여기로 연락하면 되는 건가요?”
“네. 연락 기다릴게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호철이 짧은 대화를 끝내고, 혜리에게 달려갔다.
그의 관심은 어쨌든 혹시나 부상을 숨기고 촬영에 임할지도 모르는 혜리니까.
“민주야.”
“오빠.”
“혜리 누나 매니저랑 무슨 얘기 한 거야?”
“그냥 아무 얘기도 아니에요.”
민주는 아이돌 캐스팅 제안을 숨겼다.
‘해준 오빠한테 당분간은 비밀로 해야지. 혹시라도 떨어질지 모르잖아.’
결과가 확실해질 때까지 비밀이다.
“안 심심해?”
“아뇨. 촬영 구경하는 거 재미있어요. 헤헤···.”
“정말 밤새 볼 거야?”
“저 있는 거 싫어요?”
“걱정돼서 그렇지. 너 피곤할까 봐.”
“칫. 지금 내 걱정 하는 거예요?”
민주가 배시시 웃었다.
정작 밤샘 촬영은 해준이 하는데, 자기 걱정만 하니까.
마음 같아선 꽉 안아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꾹 참았다.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지하철 끊기기 전에 갈게요.”
주방과 홀로 나뉘어 잘 보지 못했던 해준의 요리하는 모습을 눈에 원 없이 담은 민주는 막차가 끊기기 전 집으로 돌아갔다.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동이 틀 무렵 야밤 식당 촬영이 끝났다.
오늘도 여러 사연을 가진 손님들이 가게를 찾았고, 해준은 그들에게 맞춤 요리를 해줬다.
장일수 피디는 오늘도 만족해하며 촬영을 종료했다.
트럭을 타고, 썬플라워로 돌아오는 길. 해준이 마당에서 꽃을 가꾸는 옆집 할아버지를 만나 꾸벅 인사했지만, 이번에도 못마땅한 듯 헛기침만 해댔다.
‘동구 말처럼 무섭네.’
“식사는 하셨어요?”
“시간이 몇 신데? 당연하지.”
“아··· 그러시구나. 뭐 키우시는 거예요?”
“꽃.”
“무슨 꽃인지 여쭤봐도···.”
“귀찮게 거기 서서 계속 물을 텐가?”
숨 막히는 날 선 대화에 머쓱해진 해준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히 요기한 해준은 바로 농장으로 향했다.
“잘 익었네.”
내일 쓸 식재료를 수확하고, 숙성 창고로 향했다.
얼마 전 담근 전복장과 새우장이 맛있게 익었다.
밥반찬으로 먹으면 좋을 거 같다.
‘사람들한테도 좀 나눠주고. 할아버지한테도 줄까?···’
“괜히 또 한 소리 듣는 거 아냐?”
차해준은 옆집 할아버지를 야밤 식당에 찾아온 괴짜 손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괴팍한 성격이라도 맛있는 음식 앞에선 온순해지기 마련이니까.
“아!··· 아닌가?”
예전에 흑돼지를 도축하고, 동네 주민들에게 삼겹살을 돌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툴툴거리며 고기를 받지 않았다.
‘조리 안 된 음식이라 그럴지도 몰라.’
몇 달 지켜보니 할아버지는 왕래하는 친척도 가족도 없었다.
인근 주민의 말로는 몇 년 동안 명절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외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어쩌면 끼니때마다 찬물에 밥 말아 김치에 대충 때울지도 모른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니, 저녁을 준비해서 대접한다는 핑계로 불러서 친분을 좀 쌓아야겠어.’
“좋아. 오늘 저녁은 한식이다.”
저녁에 먹을 신선하고, 품질 좋은 식재료를 챙겨 썬플라워로 돌아왔다.
메뉴는 흰쌀밥에 된장국, 달걀말이, 소불고기와 오이 김치. 그리고 동굴에서 맛있게 숙성시킨 전복장과 새우장이 반찬이다.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으로 식단을 구성했다.
아이와 할아버지가 먹을 음식이니까.
해준이 팔을 걷어붙였다.
‘푸짐하게 차리자. 겸사겸사 소혜랑 동구도 초대하고.’
분위기가 딱딱해지지 않도록 소혜 남매도 초대할 심산이다.
요리를 끝낸 해준은 밥에 뜸을 들이는 사이.
아이들과 함께 옆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듯 마당에 나와 햇볕을 쬐다 쭈그려 앉아 꽃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았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무서워요, 삼촌.”
“저희 맞으면 어떡해요.”
“괜찮아. 설마 너희를 때리기야 하겠냐?”
아이들에겐 그저 골목에서 떠들지 않으면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왠지 자기가 가면 들고 있는 모종삽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실제로 완력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그렇다.
“크흠··· 하, 할아버지.”
“왜 또?”
해준의 말에 몸도 돌리지 않고,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시, 식사하셨어요?”
“야 이놈아. 니는 내가 밥 먹은 게 그렇게 궁금하냐? 왜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물어?”
“그야,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으니까요. 아까는 아침. 그리고 지금은 저녁. 할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제가 요리사인데, 마침 레시피를 연구하다가 음식을 많이 해버려서 이웃끼리 나눠 먹으면 어떨까 하고, 여쭤보···.”
“일없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거절.
여기서 물러설 거라면 애초 아이들까지 참전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성의를 봐서 함께 드시죠.”
“싫다니까.”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신호를 주자, 남매가 영수에게 달려들어 팔을 잡아당겼다.
“저희랑 함께 가서 식사해요.”
“할아버지~!”
손자뻘 되는 아이들이 매달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왔다.
썬플라워의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앉게 된 네 사람.
1차 작전은 성공이다.
이제 정성으로 차린 음식을 함께 나눠 먹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얼어붙은 관계가 조금은 말랑말랑해질 것이다.
“제가 진작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는 건데. 좀 늦었네요.”
“······.”
해준이 음식을 내오며 부드럽게 말했음에도, 영수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커다란 감탄사를 내뱉는 바람에 식탁에 생기가 돌았다.
“맛있겠다.”
“해준 삼촌, 잘 먹겠습니다.”
“응. 많이 먹어. 할아버지도 좀 드세요.”
영수는 이번에도 말없이 숟가락만 집어 들었다.
심심하게 간을 한 된장국을 한술 뜨고, 밥과 반찬을 조금씩 집어 먹었다. 얼굴에 밥풀까지 묻혀가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동구와는 대조적인 식사 패턴이다.
어찌나 잘 먹는지 소혜가 자신의 몫을 덜어 동구의 접시에 놔줬다.
“동구야, 주방에 잔뜩 해놨으니까 천천히 먹어. 체할라.”
“그래. 욕심부리지 마.”
“하지만, 삼촌 음식이 너무 맛있는걸?”
“그렇게 맛있어?”
“네!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동구한테 칭찬 들었으니까 내일 또 맛있는 거 해줘야겠다.”
“아싸!”
동구가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게 다리 춤에 막춤까지 췄다.
느닷없는 댄스 개인기에 모두가 빵 터졌고, 한영수도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풉!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먹으니 맛있네요.”
“크흠··· 글쎄. 난 혼자 먹는 게 편해서.”
“매일 혼자 식사하세요?”
“그럼 누구랑 먹어?”
“혼자 드시면 맛없잖아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억지로 허기만 채우는 기분이랄까?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하면서 반찬도 하나씩 뺏어 먹는 게 맛이죠.”
“맛이 있으나 없으나 요즘은 소화도 잘 안 돼서 많이 먹지도 않아.”
“왜요?”
“늙었으니까 그런 거지 뭐.”
시종일관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해준은 식사 내내 끈질기게 영수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재미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마치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하는 그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을 대하는 한영수의 얼굴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비록 해준에게는 데면데면했지만.
‘그래도. 몇 번 더 식사 자리를 만들면 친분을 쌓을 수는 있겠어.’
물론 그때마다 소혜, 동구도 함께 있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