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79
78화. 옆집 할아버지(2)
***
“이만 가네.”
한영수는 무뚝뚝한 한마디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평소보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과 말투였다.
아마 속으로는 ‘한 끼 잘 먹었네. 고마워.’라고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반찬 좀 챙겨드리고 싶었는데, 휑 가버리시네.’
어쩌면 혼자서 고독하게 오래 살아 그럴 것이다.
고시원에서 혼자 삼시 세끼를 챙겨 먹으며 공시 공부에만 열중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해준도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하는 것보다는 혼밥이 편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는 늘 불편했고, ‘잘 먹었다’, ‘고맙다’ 같은 표현에 서툴렀다.
‘내일 따로 챙겨다 드려야겠다.’
소혜와 동구에게는 아침으로 먹을 산양유와 아이들 성장에 좋은 마법 요리 몇 가지를 싸서 들려 보냈다.
요즘 아이들이 부쩍 크는 모습을 보는 게 해준의 소소한 낙이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날.
밀려드는 오전 손님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휴, 힘들다.”
“고생 많았어요. 오빠. 시원하게 이거 좀 드세요.”
민주가 갓 만든 에이드를 들고, 마당까지 따라 나왔다.
“고마워.”
“뭐야! 치사하게 사장님만 타주는 거냐? 아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애를 하시는구만. 으, 춥다. 누군 따뜻한 봄인데, 나만 겨울이야. 찬 바람이 아주 쌩쌩 불어!”
뒤따라 나오던 강훈이 달달한 광경을 목격하고 투덜거렸다.
“여, 연애?”
“연애라뇨. 우리 그런 거 아니에요.”
키스 광경을 목격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민주와 해준은 강한 부정을 했다.
콧방귀도 끼지 않는 강훈과 나중에 나와 대화에 끼어든 은정.
“웃기시네. 이미 둘이 사귀는 거 다 알거든요?”
“은정이 니가 어떻게? 민주야, 니가 말했어?”
“아, 아뇨.”
“어떻게 몰라요? 잔디밭에 누워서 막 쪽쪽 거리는데. 어휴, 남사스러워.”
은정 혼자 허공에 포옹을 하며 그날의 민망한 목격담을 재연했고, 민주와 해준은 얼굴이 벌게졌다.
‘다 봤구나.’
“아주 영화를 찍으셨어요.”
“사장님. 어떻게 공공장소에서 그런 망측한 행위를 하십니까!”
“미, 미안.”
어쩌다 보니 졸지에 사과까지 하게 됐다.
그래도 기왕 걸렸으니, 속이면서 몰래 연애할 필요는 없어진 셈. 어쩌면 잘된 일이다.
“밥이나 먹자.”
“맛있는 거 해주세요.”
“뭐 먹고 싶은데?”
“춥고 외로우니까 소고기?”
“좋아. 스테이크 구워줄게.”
“아싸!”
마침 저녁 한정 메뉴로 고민 중인 등심 스테이크 재료가 남아있다.
동굴에서 며칠 숙성시킨 품질 좋은 소고기지만, 치사하게 자기들만 연애한다고 투덜대는 강훈의 입을 막기 위해 고급 스테이크를 굽기로 했다.
“들어가자.”
“아, 오빠. 전 좀 나갔다 올게요.”
아이돌 제안을 받은 민주는 주말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캐스팅에 응했다.
전화를 받은 호철은 카메라 테스트 겸 오디션을 보자고 했고, 오늘 오후에 민주가 기획사로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어디 가는데?”
“잠깐 누구 좀 만나러요. 저녁 오픈 전에는 들어올게요.”
“알았어. 다녀와.”
***
JH 미디어 사무실은 망원동에 위치했다.
얼마 전까지는 인근 건물의 한 층을 임대해 썼지만, 혜리가 빵 뜨면서 5층짜리 작은 빌딩을 구매해 이사 오게 되었다.
민주가 입구에서 방문 목적을 밝히자, 안내직원이 그녀를 지하 1층으로 데려갔다.
‘와~ 멋지다.’
복도에 걸린 소속 연예인들 사진을 본 민주가 작게 감탄했다.
어쩌면 자기 사진도 저기 걸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됐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된 곳은 안무연습실.
홀 중앙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관계자들 대여섯 명이 민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철을 발견한 민주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잘 왔어요. 일단 거기 카메라 앞에 서보시겠어요?”
민주는 X자 표시가 된 곳으로 가서 섰다.
화면 가득 잡히는 민주의 바스트 샷.
모니터에 크게 자신의 얼굴이 나오자 민주가 부끄러운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
몇몇 관계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때요? 장난 아니죠.”
“괜찮은데?”
“컨셉이랑 딱 맞아요. 비주얼 센터로 손색도 없고.”
“어디서 찾았어?”
“운 좋았죠. 혜리 촬영장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야밤 식당 차해준 셰프 식당 직원이래요.”
“이름이?”
호철의 설명을 듣던 김정후 대표가 민주에게 물었다.
“김민주라고 합니다.”
“할 생각은 있는 거죠?”
“네.”
“그럼 더 볼 필요 없겠네. 나머지 애들 오디션 캔슬해.”
“노래나 춤 같은 건 안 보여드려도 되나요?”
너무 쉽게 결정이 나버려 어안이 벙벙한 민주가 되물었다.
“못한다며. 얘기 들었어요. 일단 데뷔부터 하고, 기초 실력은 나중에 천천히 쌓는 거로 해요.”
보통 노래 한 곡이 3분 내외다.
러블리엔젤 멤버가 5명이니 한 명에 약 30초 정도의 파트만 소화하면 된다.
메인보컬 포지션이 아니면, 코러스와 튠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니 비주얼 센터는 폭발적인 가창력은 필요 없다.
보는 것만으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천사 같은 외모만 있으면 될 뿐.
민주는 비주얼 센터로서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김 피디. 급한 대로 노래는 싱글에 들어갈 파트만 집중적으로 연습시켜. 안무도 마찬가지. 오케이?”
“네, 대표님.”
“알겠습니다.”
김정후 대표가 실무진과 민주를 번갈아 보며 지시했다.
이내 시선을 옆으로 돌려 모니터 속 민주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김 대표.
“카메라에는 좀 통통하게 나오지?”
보통보다 마른 체형인데도, 카메라에는 이상하게 부하게 잡혔다.
“네. 조금요. 빡세게 3개월 다이어트 시켜야죠.”
“청순한 스타일이니까 웨이트는 시키지 말고, 필라테스 같은 운동 위주로. 몸매만 매끈하게 알았지? 데뷔까지 3개월이야. 잘 준비시켜.”
…“뭐? 연습생?”
뜻밖의 말에 해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안될 수도 있다고 맘 편히 오라고 했는데, 덜커덕 합격해버렸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 여기 일하는 거 정리하고, 연습생 신분으로 3개월 트레이닝 후 데뷔.”
“진도 빠르네.”
“후임 구하는 게 큰일이에요. 알바 사이트에 바로 구인 글 올릴게요.”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
민주의 빈자리가 크겠지만, 커버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워낙 초반에 시스템을 잘 잡아놨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가 좋은 기회를 잡아 아이돌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직원 충원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계약서는?”
“소은 언니 통해서 김 변호사님 상담받았는데, 평범한 수준의 계약이래요.”
“단골이 좋네.”
“휴···.”
민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개월 후 데뷔하는 걸그룹 멤버로 뽑힌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걱정돼?”
“조금요.”
“잘할 수 있을 거야. 넌 뭐든 잘하잖아.”
“고마워요.”
해준은 걱정하는 민주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어줬다.
***
늦은 저녁.
썬플라워 주방에서는 구수한 향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흑소의 꼬리와 도가니를 넣고 정성으로 푹 끓인 곰탕이다.
조리 시간만 무려 30시간.
대략 6시간 정도 핏물을 빼 잡내를 제거하고, 기름을 제거해가며 24시간 동안 푹 고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 필요해 차원의 농장에서 끓여 가져왔다.
‘이럴 땐 농장이 있는 게 편리하다니까.’
현실보다 4배의 시간을 더 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익이다.
해준은 직접 만든 밑반찬과 곰탕을 들고, 옆집으로 향했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자, 이내 익숙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슈?
“할아버지. 썬플라워 차해준입니다. 반찬 몇 가지 싸 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TV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집안은 적막 그 자체였다.
해준은 주방 식탁 위에 바리바리 싸 온 반찬을 내려놓으며 친근하게 물었다.
“심심하지 않으세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싸 왔어?”
“끼니 거르지 마시라고요. 냉장고에 넣어두겠습니다.”
해준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허! 텅 비었네.’
김치와 고추장, 된장 정도의 양념만 간신히 들어있었다.
도대체 뭘 해 먹는지 모를 냉장고였다.
“아무것도 없네요.”
“혼자 사는데 먹을 게 많이 필요한가.”
“과일도 좀 드시고, 채소랑 고기도 많이 드셔야죠. 균형 잡힌 식단이 중요하다고요.”
“됐어. 어차피 많이 먹지도 않아.”
이것저것 많이 싸 오길 잘했다.
해준은 냉장고에 차곡차곡 밑반찬과 음식을 넣어두었다.
“찬물에 밥 말아 드시지 말고, 곰탕 뜨끈하게 데워서 반찬이랑 함께 드세요.”
냉장고 정리를 끝낸 해준이 주방에서 나왔다.
“전 이만 가볼게요.”
“크흠··· 저, 저녁 같이 먹겠나?”
한영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해준이 기다리던 말이다.
“네. 좋죠.”
해준은 영수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이어진 침묵의 식사.
서로 간에 대화는 없었지만, 한영수가 자신에게 마음을 조금은 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차려진 풍성한 식탁.
자신이 좋아하는 장조림이며 버섯볶음, 오이무침, 산나물이 그득하게 차려졌다.
어제도 느꼈지만, 이 청년 요리 솜씨가 제법이다.
죽은 아내가 살아온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 한영수는 식탁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예전엔 이렇게 잘 차려놓고 먹었지.’
아내가 살아있을 땐 계절마다 늘 제철 음식을 해 먹었다.
봄에는 냉이된장국도 끓여 먹고, 여름엔 열무김치로 시원하게 국수도 말아 먹었다. 가을에는 꽃게로 담근 간장게장, 겨울에는 과메기와 알을 가득 밴 도루묵구이도 먹었다.
‘오늘따라 더 보고 싶네.’
잊고 지낸 옛 기억이 떠올랐다.
***
“할아버지가 안 보이네?”
해준은 마당으로 나와 한영수를 찾았다.
그는 매일 아침이면 마당도 쓸고, 손님들이나 주변을 지나는 꼬마들에게 시끄럽다며 호통도 쳤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오셨었는데.’
어찌나 고요한지 허전함마저 느껴질 정도.
어제 식사로 조금은 친밀해졌으니,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눌 생각이었다.
“그러게요. 안 계시네요.”
뒤따라 나온 강훈도 담 너머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어쩐지 영수의 부재가 꺼림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혹시 몰라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할아버지. 안 계세요?”
쾅쾅쾅-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는 할아버지였기에 의아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한영수 노인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할아버지.”
크게 외쳐도 대답이 없자, 해준은 과감하게 담을 뛰어넘었다.
창문으로 다가가 안을 살펴보던 해준은 주방 쪽 바닥에 쓰러진 영수를 발견했다.
“하, 할아버지! 강훈아. 119불러. 빨리.”
해준이 강훈을 보며 다급히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