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8
7화. 버려진 농장(5) – 수정
***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빠른데. 밀이 벌써 다 자라다니.”
농작물의 생육 속도도 현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밀이라고 하면 보통 가을에 심어 이듬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작물인데, 이곳에선 단 하루 그러니까 현실의 시간으로 6시간 만에 다 자라났다.
그렇다는 건 다른 작물도 마찬가지.
뭐든 심고 키우기만 한다면 금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다.
“그나저나 아름답네.”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황금빛 물결을 만들어내는 밀밭.
여덟 평 남짓한 규모라 크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자라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내는 밀을 보자 가슴 한쪽에서 묘한 성취감과 함께 뿌듯함이 밀려왔다.
[돌아오셨군요. 해준 님이 안 계신 사이 밀이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자라났습니다. 다 자란 밀을 수확해주세요. 시기를 놓치면 작물이 썩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포테가 쏜살같이 날아와 해준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냐?”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대지니까요.]“그런데, 썩는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다 자란 밀은 비를 맞으면 큰일이 납니다. 밀알이 수분을 흡수하면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자칫 병에 걸려 썩어버릴 수도 있습니다.]“그렇구나. 그런데 여기 비도 내려?”
[당연하죠. 해가 뜨고 지며, 바람도 불고, 비도 내립니다. 그래야 농작물이 쑥쑥 자라는 법이거든요.]“아!··· 비. 다 자란 밀은 수분에 약하구나.”
[넵, 그러니까 서둘러 수확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절대로 안 됩니다.]처음 농장에 와서 했던 일이 썩어버린 농작물을 걷어내는 일이었다.
누군가 돌봐주지 않는 순간에도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렸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해준은 창고에서 낫을 가져와 허리까지 자란 밀을 벴다. 다행히 밀밭 면적이 넓지 않아 금방 끝낼 수 있었다.
“휴, 끝났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차곡차곡 쌓아둔 밀을 보며 해준이 중얼거렸다.
보통 수확이 끝난 밀은 탈곡 과정을 거쳐 밀알만 따로 분류해낸다.
그 밀을 가루로 빻아 면을 뽑거나, 빵을 만들어 섭취하는 게 일반적인 방법. 그러나 아쉽게도 이 농장에는 탈곡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밀알을 분류해낼 수도 없고, 밀가루로 만들 수도 없었다. 만약, 현실 세계로 운반이 가능했다면 방앗간에 맡겨 밀가루를 만들어 팔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해준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아! 그걸 포테한테 물어보자.’
해준은 신난 듯 자신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수호 정령 포테를 불렀다.
“이봐, 포테.”
[넵, 해준 님.]“여기서 키운 작물을 내가 사는 곳으로 가져갈 수 있어?”
[네, 가능합니다.]“진짜? 방법을 알아?”
[당연하죠. 제가 만든 마법의 운반 도구를 사용하면 여기서 생산한 물품들을 해준 님이 사는 세계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메시지 창이 쓰여 있던 정상적인 방법이라는 게 포테가 마법으로 만든 운반 도구였다니!
어쩐지 일이 쉽게 풀렸다.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아··· 그게···.]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포테가 눈을 좌우로 굴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들어드릴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은 안됩니다.]“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제 힘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거든요. 하하···.]“그래?”
[죄송합니다.]“어쩔 수 없지.”
잠시 고민하던 해준은 창고 옆에 공간을 마련해 밀을 잘 쌓아두었다.
그리고는 자루에 남은 밀알을 탈탈 털어 밭에 다시 심었다.
농장을 되살리기 위해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어? 레벨이 올랐어.”
일련의 과정을 마치자,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올랐다.
*
[차해준] Lv.2나이 : 25세
칭호 : 차원을 넘어온
직업 : 초보 농사꾼
경험치 : 1(5%)
체력 : 9/15
기술 : 6
명성 : 0
*
레벨이 올랐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체력도 소모된 그대로였고, 명성이나 칭호도 처음 그대로였다. 다만 레벨이 상승한 것과 별개로 밀을 수확하고 새로운 밀을 심자 안개가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해준 님! 턱 밑까지 차올랐던 안개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그래? 다행이다.”
안개가 1미터쯤 뒤로 후퇴한 덕분에 농장의 규모가 조금 더 커졌다. 안개가 물러난 자리엔 이름 모를 나무와 덤불, 돌덩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금 넓어졌을 뿐인데, 풍경이 조금 전과 사뭇 달라졌다.
‘저기도 좀 치워야겠는데.’
이제 이런 환경에 익숙해졌는지 안개가 걷히고 생겨난 공간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돌덩이를 치우고, 덤불도 걷어냈다. 자세히 보니 울타리도 낡아 손을 봐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주변을 살피던 해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창고에서 톱을 꺼내왔다.
[뭘 하시게요?]“울타리가 낡았잖아. 수리해야지.”
[재료가 없는데 어떻게요?]“재료?”
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널렸는데, 무슨 걱정이야.”
해준은 울타리 밖 나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자 허벅지 굵기만 한 나무 밑동을 톱으로 잘랐다.
슥삭슥삭-
몇 번 톱질을 해대자 생각보다 수월하게 나무 한 그루가 잘려 나갔다. 잔가지와 나뭇가지를 쳐내고, 통나무를 반으로 반듯하게 잘랐다.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 나무가 떨어져 나간 곳에 나무판자를 덧대고 망치질을 했다.
쾅쾅쾅-
그렇게 울타리 주변을 돌며 구멍 난 곳을 모두 메웠다.
[오~ 대단해요. 구멍 난 울타리가 감쪽같이 수리됐습니다.]‘대한민국 예비역 병장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다른 건 몰라도 작업 능력 하나는 탁월하니까.’
포테의 칭찬에 해준의 어깨가 괜히 으쓱 올라갔다.
전역 후 3년을 고시원 골방에 처박혀 공부만 했다. 그만큼 사람과 대화할 일은 적었고, 비록 포테가 정령일지라도 오랜만에 누군가와 웃고 떠드는 게 좋았다.
[이제 야생동물이 내려와 농장을 파헤치는 일은 없겠네요.]“여기 야생동물 같은 것도 있어?”
[그럼요. 자연에는 원래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법입니다.]“뭐가 있는데?”
[닭, 돼지, 토끼, 소··· 없는 게 없죠.]“그게 야생동물이야? 그냥 가축들 같은데?”
[동물들도 본래는 가축이 아니라 야생동물이었죠. 다만, 사람에게 길들여져 가축이 된 거고.]“그렇긴 하지.”
[참, 늑대나 호랑이 같은 무서운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세요.]‘늑대나 호랑이라···.’
닭, 돼지 같은 것들이야 발견하면 우리에 가두고 키워도 좋겠지만, 다른 짐승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포테의 경고를 들은 해준은 심혈을 기울여 울타리를 단단히 고쳤다. 일련의 과정을 마치자 체력이 3 소모했고, 기술 능력치가 4 상승했다.
해준의 손길이 닿은 농장이 제법 그럴듯하게 변모했다.
‘처음엔 다 쓰러져가던 폐허였는데···.’
힘든 만큼 성취감도 컸다.
일을 끝낸 해준은 포테와 작별을 하고 가게로 돌아왔다.
이미 현실 세계는 새벽녘. 해준은 종일 흘린 땀을 샤워로 말끔히 씻어내고, 개운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해준은 침대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고된 노동을 했음에도 어쩐지 몸이 가뿐했다. 만약 현실에서 공사장 노가다를 그렇게 뛰었다면 다음날에는 삭신이 쑤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꼬르륵-
허기진 배에서 음식을 넣어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몸을 많이 써서 그런지 요즘은 끼니때만 되면 배가 고팠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준은 흰 면티에 회색 추리닝 바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막 요깃거리를 사서 돌아오던 그때,
“오빠!”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설마 자신을 부르겠냐 싶었던 해준은 무시하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빠, 해준 오빠!”
헐레벌떡 뛰어와 해준의 등을 친 건 다름 아닌 민주였다.
“어?”
“저기서부터 불렀는데 왜 모른척해요.”
“미안, 이 동네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날 부르는 줄 몰랐지.”
“뛰어오느라 죽는 죽 알았네. 휴우···.”
“어디 가는 길이야?”
“학교요.”
무릎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고르던 민주는 해준이 들고 있던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비닐봉지 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건 뭐예요?”
“아침.”
“아침이 달랑 컵라면이랑 삼각 김밥이에요? 김치도 없이?”
“이거면 됐어. 어차피 배만 채우면 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김치라도 사서 드시지. 그렇게 부실하게 드시면 안 돼요. 뭐니 뭐니 해도 한국 사람은 밥심이잖아요. 밥을 먹어야 힘을 내죠.”
“그러는 넌?”
해준이 민주의 손가락에 걸린 봉지를 보며 말했다.
민주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샌드위치가 그녀의 아침이었다.
“그것도 패스트 푸드잖아.”
“이건 다르죠. 이건 통밀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라고요. 탄수화물이랑 단백질, 채소까지 골고루 들어가서 균형 잡힌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고요. 그러니까 이건 패스트 푸드가 아니라 일종의 건강식인 셈이죠. 헤헤.”
쓸데없이 디테일한 설명.
“누가 들으면 회사 홍보팀인 줄 알겠다.”
“풉, 그렇게 들렸어요?”
“어.”
“암튼 잘 먹어야 건강하다 뭐, 그런 거죠. 그러니까 그거 말고 이거 드세요.”
민주가 봉지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해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준 건 삼각형 모양의 식빵 사이에 삶은 달걀이 듬뿍 들어간 달걀 샌드위치였다.
“니가 먹을 거 아니었어?”
“그렇기는 한데··· 뭐, 일종의 답례라고 생각해요.”
“답례? 아, 벽화를 그리게 해줬다고?”
“네. 헤헤.”
“고마워. 잘 먹을게. 근데 벽화는 언제 그리는 거야?”
“조만 간에요. 뭐 그릴지 구상하고 있거든요. 그럼 전 수업 시간이 늦어서. 다음에 봐요. 오빠!”
손을 흔들며 인사한 민주는 나타났을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한 손에는 달걀 샌드위치를 다른 한 손에는 컵라면과 삼각 김밥이 든 봉투를 들고 좌우를 살피던 해준은 왔던 길을 거슬러 편의점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구매한 인스턴트 식품을 우유로 바꿔 가게로 돌아왔다.
평소라면 대충 입에 쑤셔 넣었을 해준이지만, 어쩐지 오늘 식사는 그렇게 대충 끝내고 싶지 않았다.
진열장에서 투명 유리잔과 디저트 접시 하나를 꺼내 가게의 햇살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은 법. 해준은 투명한 유리컵에 흰 우유를 가득 따르고, 진열장의 접시 하나를 꺼내 샌드위치를 담았다. 어쩐지 별스타에 찍어 올리기 좋은 비주얼이 손쉽게 완성됐다.
“맛있게 생겼네.”
민주가 준 달걀 샌드위치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모양이었다. 폭신한 식빵에 삶은 달걀과 오이, 당근을 마요네즈에 버무려 속을 채워 넣은 형태.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노트에도 달걀 샌드위치 레시피가 적혀있었다. 문제라면 통밀로 식빵을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한다는 점. 복잡한 레시피에 대충 읽다 다음 페이지로 넘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샌드위치. 사 먹으면 간단하지만, 처음부터 만들기는 꽤 까다로운 음식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정성도 많이 들어가고.
“일단 먹자. 배고프다.”
손바닥을 슥슥 비빈 해준은 우유부터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약간의 고소함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삼각형 모양의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들어 한쪽 모서리를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폭신한 빵, 그리고 삶은 달걀의 보드라움과 채소의 아삭함이 섞인, 나쁘지 않은 샌드위치였다.
우유와 샌드위치를 번갈아 먹다 보니 금세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족감.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친 해준은 만드는 방법이 어렵지 않다면, 나중에 한번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